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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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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유네스코국제자원활동<br />

Essay<br />

1


일러두기<br />

이 에세이 모음집은 2010<br />

년도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국제자원활동(International<br />

Voluntary Services) 참가자 에세이를 정리한 것입니다. 2010 년도 국제자원활동에 성실히<br />

임한 자원활동자 여러분께는 지난 기억을 회상하면서 앞으로의 활동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br />

것을 기대하고, 향후 국제자원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청년들에게는 이전 참가자들의<br />

후기를 통한 간접경험이 참가 준비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br />

에세이 모음집을 통해 올 한해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br />

국제자원활동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br />

2010 년도 국제자원활동 에세이 모음집은 각 국가별로 참가자들의 에세이들이 정리되어<br />

있습니다. 다만 모든 에세이를 정리한 것은 아니며 기본적으로 선발된 에세이만이 정리되어<br />

있습니다. 기타 보고서들은 국제자원활동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br />

이 에세이 모음집이 현재 한국 청년들의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국제자원활동의 한<br />

부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로 기능하기를 바라며, 자료에 대한 문의나 도움말을<br />

주실 분은 아래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청년팀으로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번<br />

에세이 모음집의 내용이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님을<br />

밝혀둡니다.<br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청년팀<br />

서울 중구 명동 2 기 50-14 유네스코회관 (우) 100-810<br />

Tel: 02) 755. 9068<br />

Fax: 02) 755. 9069<br />

개별파견: http://youth.unesco.or.kr/volunteer<br />

단체파견: http://youth.unesco.or.kr/group<br />

Email: workcamp@uneso.or.kr<br />

2


목 차<br />

[개별파견 국가별 에세이]<br />

1. 그리스<br />

○ 강 종 완 _우물안의 개구리 … 5<br />

○ 정 영 인 하 _그리스 … 7<br />

2. 네팔<br />

○ 심 진 솔 _나와 ‘다른 것’들에 대하여 … 12<br />

3. 독 일<br />

○ 강 정 헌 _생각과 경험과의 차이 … 14<br />

○ 김 수 정 _꿈같은 현실에서 돌아오다 … 18<br />

4. 라오스<br />

○ 신 지 혜 _싸바이디! (안녕하세요) … 25<br />

5. 멕시코<br />

○ 박 세 미 _잊을 수 없는 콜로라의 석양처럼 선명했던 내 멕시코의 나날들 … 29<br />

6. 몽 골<br />

○ 남 원 식 _대자연과 함께했던 찰나의 시간 … 32<br />

7. 미국<br />

○ 노 지 현 _글로벌 마인드를 쌓을 수 있었던 나의 워크캠프 … 36<br />

8. 스페인<br />

○ 강 민 정 _다시 떠난 워크캠프 … 40<br />

○ 김 미 희 _스페인이 아닌 바스크, 그곳은 바로 바스크다. … 44<br />

9. 에스토니아<br />

○ 김 준 영 _열정으로 시작하여, 행복의 향기로 남은 짧고도 긴 여행 … 48<br />

○ 최 진 _나와 180 도 다른 삶을 흡수하다. … 53<br />

10. 영 국<br />

○ 김 민 정 _봄날, 따뜻했던. … 55<br />

11. 이탈리아<br />

○ 박 가 현 _PART, 그리고 끝나지 않을 part. … 57<br />

○ 임 세 정 _스물 두 살, 나폴리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 61<br />

3


12. 인 도<br />

○ 고 영 민 _새로운 세상 인도 … 64<br />

13. 인도네시아<br />

○ 최 시 영 _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끝난 나라 - 인도네시아 … 67<br />

14. 일 본<br />

○ 김 광 중 _그들의 일상을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던 2 주! … 69<br />

○ 안 지 현 _13 일간의 세계일주 … 72<br />

15. 중 국<br />

○ 김 영 수 _지구 어딘가에는... … 74<br />

16. 탄자니아<br />

○ 김 민 정 _검은 땅이 준 선물. … 78<br />

17. 태 국<br />

○ 김 기 연 _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 … 80<br />

○ 박 진 솔 _Music is the language of us all. … 83<br />

18. 터 키<br />

○ 김 은 지 _상상 그 이상의 나라, 터키 … 87<br />

○ 이 애 란 _가장 값진 경험 … 90<br />

29. 폴란드<br />

○ 김 슬 아 _한국은 작지만, 한국인은 강하다. … 93<br />

○ 박 신 응 _소통하는 법을 알려준 워크캠프 … 97<br />

20. 프랑스<br />

○ 김 석 진 _나에겐 잊지 못할 소중했던 21 일간의 추억 … 100<br />

○ 원 영 경 _21 일간의 특별한 Life … 104<br />

[단체파견 국가별 에세이]<br />

1. 네팔<br />

○ 백준안 _네팔이 나에게 … 108<br />

○ 이지혜 _잘 다녀왔습니다 … 110<br />

4


2. 라오스<br />

○ 권다운 _Thank you for being nice to me, Laos … 112<br />

○ 김지훈 _24 살의 라오스, 그리고 폽칸마이 … 117<br />

3. 방글라데시<br />

○ 김철주 _“아쌀라 말라이꿈, 방글라데시” … 123<br />

○ 김단비 _콜라 한 모금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나라 … 126<br />

4. 인도<br />

○ 권순범 _내 머릿속의 또 하나의 추억 … 129<br />

○ 조성협 _인도의 중심에서 봉사를 외치다 … 131<br />

5. 인도네시아<br />

○ 이동건 _DJ 워크캠프, 1+1=3 … 133<br />

○ 강경범 _순수의 나라 인도네시아 … 137<br />

○ 정선우 _마음으로 느낀 인도네시아 … 140<br />

6. 일본<br />

○ 김효진 _이치노세키, 게센누마 캠프 … 143<br />

○ 백지혜 _꿈 같았던 워크캠프! … 146<br />

7. 필리핀<br />

○ 정혜미 _그리운 올랑고섬 … 150<br />

○ 홍진우 _국제자원활동을 다녀와서 … 153<br />

8. 독일<br />

○ 안지은 _언어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 우리는 친구! … 156<br />

○ 박재일 _국제자원활동을 다녀와서 (로라캐슬) … 159<br />

○ 정연주 _꿈만 같았던 2 주간의 모든 것 … 162<br />

9. 아르메니아<br />

○ 예병동 _아르메니아, 우리들의 뜨거운 여름… 164<br />

○ 박일찬 _이것저것 생각나고 기억에 남는 것들 … 166<br />

9. 터키<br />

○ 최선규 _'촉 귀젤!'의 마력으로 세계를 품다 … 168<br />

○ 이주미 _세상을 만나고 나를 만나다 … 170<br />

10. 프랑스<br />

○ 민성복 _우리가 남이가! … 172<br />

5


GREECE<br />

강종완 (홍익대 상경학부 3 년)<br />

ELIX12 KEDROS EPIRUS 7 월 22 일-8 월 6 일<br />

_우물안의 개구리<br />

우리나라보다 모든 면에서 약한 그리스이지만, 그들에게도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br />

우리나라에서만 생활을 해본 나로서는 이런 방문은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하나부터<br />

열까지 그들의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은 나에게 우리나라가 정말<br />

작은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 세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br />

스승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나라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나라<br />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보다 남을 배려하고, 용서를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br />

판단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양인들보다 더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그리고 우리나라<br />

사람들이 얼마나 각박하게 살아가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서양인들은 사람을 판단할 때 그<br />

사람의 외모나 배경을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을 파악하는<br />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장애인은 하나의 인간으로 보이지, 특별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br />

그래서 장애인들이 정말 자유스럽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모습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br />

그리고 이러한 시각을 가지지 못한 우리나라이기에 장애인 협회가 큰 목소리를 낼 수<br />

있는게 아닌가라는 역발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인생 목표가 굉장히<br />

소박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욕심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나라<br />

사람들은 최고가 되려는 생각과 남들보다 뒤쳐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br />

6


이러한 모습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이기에<br />

이렇게 짧은 기간에 경제 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br />

집단,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인간은 그들이 자라온<br />

환경과 문화가 있기 때문에 그들을 억지로 변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br />

든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을 변화하기 보다는 이해를 하고 배려를 해주는 모습이<br />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다. 워크 캠프 참가자들과 지내면서 그들은 나의 배려해주는 모습에<br />

반해서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나를 많이 도와주고, 아껴주었다.<br />

어떻게 보면 나의 배려가 남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한<br />

배려의 원천은 그들을 내 생각에 맞추어 불만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이<br />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집단의<br />

리더와 일원들이 어떻게 해야 최대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있었다.<br />

리더는 자신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누군가를 편애하고, 누군가를 배척하는 것은 정말 안<br />

되는 일이다. 일원들이 누군가와 친해지지 어려운 상황이면 그 일원에게 먼저 다가가는<br />

태도를 가져야 하며, 개개인에 대한 씀씀이가 남달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공평하게<br />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br />

싫어하는 사람은 다 그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리더는 그<br />

일원을 더욱 감싸줘야하며, 그 일원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br />

일원들은 불만이 있다면 그를 자극하면서 성토하기 보다는 그와 진실된 마음으로 대하는<br />

것이 중요하다. 특히 자신이 이겨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불만 사항이 어느 정도<br />

수용되는 선에서 끝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예상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br />

집단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생각을 다 맞춘다는 것은 이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배려라는<br />

존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남을 위해 희생한다고 그를<br />

배려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그가 진정 원하는<br />

것을 알고 그 원하는 것을 위해 같이 노력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이번 시간에 배울 수<br />

있었다. 그 동안 흘러간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남을 배려하기 보다는 내 기준에서 그들을<br />

이해하는 것이 다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시간을 통해 우리 인간들은 제 각각 생각에<br />

대한 고집이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남을 이해하기 보다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br />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들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것을 얻으려면 남을 진정<br />

배려해줘야 된다는 것을 깨달은 나로서는 이제 나만의 배려를 버리고, 남을 위한 배려를<br />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br />

이러한 깨달음을 줄 시간을 제공해주신 유네스코에 감사합니다.<br />

7


GREECE<br />

정영인하 (홍익대 바이오화학공학과 4 년)<br />

ELIX06 NEA MAKRI-1 6 월 30 일-7 월 15 일<br />

_그리스<br />

<br />

이번 UNESCO 봉사활동 외에도 해외자원봉사 프로그램에 지원했는데 번번이 탈락하여<br />

상심하고 있다가 4 학년인 제게 이번 기회는 대학생으로서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에<br />

너무나 절실했습니다. 사실 제가 붙을 것이라고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리스에 관련된 책을<br />

8 권정도 보면서 정보를 모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세계를 간다 48」, 「이지지중해」에서<br />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2008 년도 책이 가장 최신이라 책에 수록된 숙소만 믿고 갔는데<br />

섬에서는 모두 문을 닫아 한군데밖에 유스호스텔이 없었고 성수기라 미리 예약한<br />

사람들보다 5 유로씩 추가된 28 유로을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캠프 ELIX06 은 6/30-<br />

7/15 까지였기 때문에 종강 후 거의 바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이번 여행은 욕심<br />

부리지 않고 그리스만 맘껏 즐기고 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유네스코 측에서는 한국인이<br />

저밖에 없다고 했지만, 리더가 보낸 메일 속 제 메일주소를 보고 한국인캠퍼가 저에게 먼저<br />

메일을 보내서 혹시 한국인이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국제워크캠프에서 지원한 친구였고<br />

그곳에서도 한국인이 혼자라고 했다면서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아마 조직이 달라서 몰랐던<br />

거 같았습니다. 캠프에 가서 한국 음식을 해주고 싶어서 그 친구와 고추장, 갈비양념을<br />

나눠 가져가기로 했지만 나중에 보니 캠프식당에서 저희 말고도 400<br />

명 가까이 되는<br />

아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서 주는 시스템이라 가져간 것이 소용없었습니다. 그리고 캠퍼가<br />

8


몇 명인지 몰라서 15 명으로 어림잡아 조그만 선물을 샀는데 캠프리더의 메일을 받은 후<br />

인원을 알고 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br />

<br />

캠프시작일 일주일 전인 6/23 13:50 에 인천을 출발해 로마에 경유한 후 아테네로 도착하니<br />

현지날짜로 6/24 11:35<br />

이었습니다. 한국시간은 그리스시간보다 +6 시간이었기 때문에<br />

2~3 시에 전화하기 좋았습니다. 이날부터 6/29 까지 아테네를 여행하고 6/30 일 한국인<br />

캠퍼와 Victoria 빅토리아역에서 만나 시외버스를 타는 곳으로 10 분정도 걸어갔습니다.<br />

시외버스가 정차해있는 곳이긴 하지만 정확한 시간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도 그냥<br />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종점이기 때문에 자리에 앉을 수 있지만 계속 가다보면<br />

사람들이 엄청 타서 꽉 차게 됩니다. 미리 운전기사님께 Nea Makri 니아마크리역에서<br />

내려야 한다고 알려달라고 했는데 역이 아니지만 좀 더 가깝다면서 내려주셨는데 그곳은<br />

시골 같은 분위기에 가게도 뜨문뜨문 있었습니다. 버스검표원이 가리킨 방향대로 가다가<br />

어느 가게에 물어보니 친절하게 직접 차로 데려다 준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무거운 짐과<br />

함께 쉽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머무른 캠프는 아테네에 거주하는 아이들을 위한<br />

국립 수련원 같은 곳이었고 수영장, 식당, 운동장과 남녀 숙소가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br />

첫날은 다 같이 모여 게임을 하면서 친해졌습니다.<br />

<br />

저희 캠퍼는 8 명이었고 그리스출신 1 명, 네덜란드출신 1 명, 러시아출신 1 명, 미국출신<br />

1 명, 에스토니아출신 1 명, 중국출신 1 명, 한국출신 2 명에다가 캠프리더 그리스출신<br />

1 명까지 총 9 명이었습니다. 나이대가 18 살 2 명, 19 살 1 명, 22 살 1 명, 23 살 2 명,<br />

27 살 2 명으로 구성되었고 남자는 3 명 여자는 리더포함 6 명이었습니다.<br />

<br />

저희가 할 일은 Fire Tower 에서 산불을 감시하는 것과 Beach Cleaning 을 하는 것입니다.<br />

Fire Tower 가는 것이 오전에 잡혀있으면 오후 4~5 시쯤에 2~3 시간동안 Beach<br />

Cleaning 을 하고, 오후에 잡혀있으면 오전 9~10 시쯤에 2~3 시간동안 Beach Cleaning 을<br />

하는 것입니다. Fire Tower 는 8 시부터 3 시간씩 나눠서 두 사람이 짝을 지어 갔습니다.<br />

8~11 시팀, 11~14 시팀, 14~17 시팀, 17~20 시 팀으로 나눴고 저는 개인적으로 아침에 일찍<br />

일어나지 않아도 되서 11~14 시 팀이 좋았습니다. 정해진 시각 10 분 전까지 입구에<br />

서있어야 하기 때문에 15 분 전에 방에서 나갔습니다. 입구에서 정각이 되면 저희 일을<br />

도와주시는 분들이 차로 저희를 Fire Tower 까지 태워주셨고 일이 끝날 즈음 다음 팀을<br />

데려와서 다시 캠프로 태워주십니다. Fire Tower 에서 저희는 두 구역으로 나누어 보기위해<br />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앉았습니다. 한명씩 돌아가면서 파트너가 되어 좋았습니다. 그래서<br />

9


이것저것 좋아하는 음악장르, 취미, 학교생활, 캠프이야기 등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br />

특히 음악에 대한 이야기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해서<br />

겉옷을 들고 갔습니다. 오전에는 햇빛이 강하기 때문에 모자를 꼭 가져가는 것이 좋습니다.<br />

Fire Tower 에서는 화장실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미리 캠프에서 준비를 하고 가야할 것<br />

같습니다. 캠프 입구나 여자숙소 근처에 식수대가 있는데 일 나가기 전에 물병에 물을<br />

담아가기 위해 물병이 필요했습니다.<br />

<br />

Beach Cleaning 은 가까운 해변에 가서 쓰레기를 줍고 쓰레기통의 봉투를 새로운 봉투로<br />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가까운 해변은 5 분정도 거리라서 쉽게 갈 수 있지만 어느 정도<br />

해변이 깨끗해지면 자전거를 이용해서 더 멀리 있는 해변으로 갑니다. 한국 사람들은<br />

자전거를 가끔 느린 속도로 타는데 그 사람들은 거의 경주를 하듯 엄청난 속도로<br />

달렸습니다. 저는 자전거의 기어도 익숙지 않은 상태로 발로 힘겹게 따라가며 뒤쳐졌고<br />

다른 한국인캠퍼 또한 그 날 뻗었습니다. 햇볕아래 일하기 때문에 챙이 있는 모자를 꼭<br />

챙겨가야 합니다.<br />

<br />

오전 일을 마무리 한 후 식사를 하고 나면 같이 Beach 에 가서 선탠을 하고 물놀이를<br />

했습니다. 한두 시간씩 놀고 돌아왔는데 에스토니아 친구 얼굴에 햇볕이 너무 쫴서 빨갛게<br />

달아오르고 따갑다고 했고 다른 한국인 캠퍼가 가지고 있던 알로에 크림을 바르니 조금<br />

가라앉았습니다. 그리스 해변에 가려면 이것을 챙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전 캠퍼들의<br />

에세이를 보고 비치타월을 준비했는데 뜨거운 모래 위에서 선탠을 하려면 꼭 필요한 것<br />

같습니다. 캠프를 위해 저는 비키니와 치마도 함께 구매했지만 다들 비키니만 입어서 저도<br />

치마는 입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아침 일찍 혹은 저녁에도 해변에서 수영하는<br />

것을 즐기는 듯 했습니다.<br />

<br />

저녁이면 아이들을 위해 연극이나 영화 상영을 했는데 금요일 저녁에는 운동장에서 다 같이<br />

춤추며 즐기는 파티가 열렸습니다. 초등학생인데도 불구하고 다들 유연하게 춤을 즐겼고<br />

정말 인상 깊은 장면이었습니다. 일을 마치면 다같이 10 분정도 걸어서 Lacosta 라는<br />

Bar 에 가기도 하고 소방관 아저씨의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서 가기도 했습니다. 그리스<br />

전통연극을 보러 가기도 했는데 저녁이면 바람이 쌀쌀하니 꼭 겉옷을 챙겨 가는 것이<br />

좋습니다.<br />

10


매주 화요일이면 일을 하지 않고 놀러 가는데 하루는 아테네 Acropolis 아크로폴리스<br />

박물관에 갔고 하루는 페리를 타고 Andros 안드로스 섬에 갔습니다. Acropolis<br />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간 날은 캠프 앞에서 버스를 타고 Ethniki Amyna 역에서 내려<br />

지하철을 탔습니다. Monastiraki 모나스티라키역에 내렸는데 이곳은 기념품을 사기 딱<br />

좋은 곳으로 이곳을 지나간다면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에서는<br />

올리브비누가 유명하다고 해서 많이 돌아다니다가 한 개에 0.5 유로씩 파는 가게에서 여러<br />

개를 샀습니다. Acropolis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이미 가봤던 곳이라 천천히<br />

돌아보았습니다. 이곳은 사진촬영이 금지된 곳이라서 아쉬웠습니다. 조각상이 덜 있긴<br />

하지만 차라리 사진촬영이 가능한 국립고고학박물관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곳은 신들의<br />

조각상도 있고 유물도 있습니다. 그리고 Andros 안드로스 섬에 가기 위해 Rafina 라피나<br />

항구로 가야했는데 버스 편이 없어서 택시를 타고 콜비랑 택시비까지 해서 21 유로를<br />

지불했습니다. 아침 일찍 페리를 2 시간정도 타고 도착한 섬에서 버스를 2 시간정도 타고<br />

어느 마을에 도착하니 산토리니를 닮은 예쁜 거리가 있어 구경하고 다시 버스로 Beach 에<br />

가서 물놀이와 선탠을 하고 잠도 잤습니다. 막차가 8:30 정도에 있어서 미리 잘 알아놔야<br />

했습니다. 그리스 전통음식으로 Souvlaki 수블라키가 있어서 그것만 주문했는데 나중에는<br />

질릴 정도였습니다. Souvlaki 수블라키는 피타빵 안에 고기, 토마토, 야채, 감자튀김 등이<br />

들어가는 것입니다.<br />

<br />

캠프 안에는 공중전화박스가 여러 개 있는데 캠프가 시작하기 전 아테네 길거리 매점에서<br />

FOREVER WORLD 카드를 구매했습니다. 다른 전화카드는 5 유로 같은 가격으로 30 분밖에<br />

통화할 수 없었는데 FOREVER WORLD 카드는 2 시간정도 통화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br />

카드 뒤에 적힌 대로 다이얼을 누르면 되는데 마지막에 전화번호를 누르라고 할 때<br />

00(국제)82(한국코드)10(핸드폰일 경우)-1234-5678 이렇게 해야 합니다. 카드 뒤에는<br />

한국코드 같은 것이 적혀있지 않아서 당황했었습니다. 저는 빨래비누를 가져가서 직접<br />

빨래를 했는데 유용하게 이용했으며 숙소에는 세탁기가 없었습니다. 캠프 바로 앞에는<br />

매점이 있었는데 조그만 규모라서 꼭 필요한 것들은 미리 사가는 것이 좋습니다. 숙소<br />

내에는 저희 캠퍼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돌보는 리더들 8 명 정도와 공동생활을 했고 다행히<br />

각자 침대가 있어서 바닥에 캐리어랑 짐을 두면 되는데 큰 개미들이 창문과 바닥에 많이<br />

있어서 신경을 좀 써야했습니다. 방에서 쭉 들어가면 화장실이 있는데 칸막이로 4 곳으로<br />

나뉘어 있는데 2 곳은 좌변기가 있고 2 곳은 샤워실입니다. 세면대는 4 개가 있었고 저희가<br />

일어나는 시간보다 더 일찍 어린이들을 돌보는 리더들이 준비하고 나가기 때문에 별로<br />

11


불편하진 않았습니다. 거기에서는 각자 자신의 용품이 있어서 샤워실 안에 있는 샴푸라<br />

해도 공용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빨래 말릴 곳이 넉넉지 않기<br />

때문에 옷걸이가 유용했습니다. 화장실 앞에 냉장고가 하나 비치되어 있습니다. 방 안에는<br />

에어컨이 없어 창문만 여러 개 있는데 방안보다 밖이 더 시원할 정도입니다. 보름동안 짧은<br />

기간이기 때문에 바비큐 파티에 갈 단정한 옷이랑 반팔 2~3 개 정도를 번갈아 빨아 입어도<br />

될 것 같습니다. 파티에 간다고 해서 저도 걱정을 했는데 특별히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것<br />

같습니다. 일주일정도 지난 뒤 남자캠퍼들이 캠프에서 쫓겨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캠프<br />

측에서는 스케줄상에 착오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분명히 자리가 남는<br />

숙소가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남자 캠퍼들은 저희 일을 도와주시는 소방관의 집에서<br />

머물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저희는 더 이상 매일 저녁 게임을 하거나 늦게까지 놀 수<br />

없었습니다.<br />

<br />

아침식사는 7 시부터 8 시까지, 점심식사는 13 시부터 14 시까지 저녁식사는 19 시부터<br />

20 시까지였습니다. 캠프에서 주는 식사는 꽤 괜찮았습니다. 아침에는 딱딱한 빵들과<br />

버터나 잼 그리고 우유가 주어지고 점심과 저녁은 각자 3 접시가 주어지며 한 접시는 꼭<br />

과일인데 수박이 특히 자주 나왔고 자두나 체리, 메론, 복숭아도 나왔습니다. 한국처럼<br />

과일을 한 조각 주는 것이 아니라 수박을 큰 덩어리로 5~6 개씩 넉넉히 줘서 너무너무<br />

좋았습니다. 한 접시는 꼭 토마토, 오이를 올리브오일에 버무린 것으로 빵을 찍어 먹으면<br />

맛있었습니다. 그 안에 두부같이 생긴 것이 있어서 먹은 적이 있는데 치즈였습니다. 나머지<br />

메인접시에는 고기나 치킨이 나오기도 하고 그리스 전통음식인 무사카도 나왔는데<br />

치즈범벅에 정말 먹기 힘들었습니다. 매일 저녁식사를 하고 여자숙소 앞 야외테이블에서<br />

게임을 하거나 회의를 했습니다.<br />

<br />

다른 분들의 에세이를 보고 일을 힘들게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는데 여자리더가<br />

설렁설렁 일을 시키지 않아서 힘들었습니다. 다음에는 조금 즐기면서 하는 일에 참여하고<br />

싶습니다. 저희 일은 모두 다 같이 하는 일이 아니었고 더구나 캠퍼들 중 커플이 생기면서<br />

시간이 지나자 다 같이 놀기보다는 둘씩 짝이 지어졌던 것이 아쉬웠습니다. 각자의 성격을<br />

알아가고 친해지는 것은 가능했지만 아쉬웠습니다. 이 캠프를 마치고나니 다음에는 다 같이<br />

일하는 캠프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재 저희 캠퍼들과 FACEBOOK 에서<br />

쪽지와 댓글로 안부를 묻고 있으며 계속해서 연락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들 영어를<br />

잘했지만 저는 대화에 조금 힘이 들었기 때문에 다음에는 실력을 늘려서 여행을 가야겠다는<br />

다짐을 했습니다.<br />

12


NEPAL<br />

심진솔 (홍익대 예술학과 2 년)<br />

NIFC48 Parbatipur, Chitwan 1 월 20 일-2 월 4 일<br />

_나와 ‘다른 것’들에 대하여<br />

나의 네팔이름은 Ganga 이다. 비록 한국어로는 발음이 조금 이상하지만 뜻을 알고보면<br />

좋은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이름의 뜻은 인도의 갠지스강을 의미하는 단어로<br />

강의 여신의 이름이다. 보통 여자의 이름도 아닌 무려 여신의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내가<br />

워크캠프 활동을 하던 Bhorle 지역의 Niruta 라는 작은 여자아이이다. 이 아이와 나는<br />

마을의 앞을 흐르는 에메랄드빛 트리술리강 앞에서 처음 만났고, 그 자리에서 이 아이는<br />

나에게 이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처음에 Ganga 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는 이상한 발음의<br />

이름에 다른 예쁜 이름도 많은데 왜 이런 이름을 붙여준거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br />

그렇지만 그 뜻을 알고나서는 그 아이의 착한 심성에 감동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br />

강가에서 만난 나를 강의 여신일거라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과연 처음보는 외국인에게<br />

이러한 여신의 이름을 스스럼 없이 붙여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br />

나와 다르다면 사람들은 우선 편견을 갖고 보게 되어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br />

부정적이든간에 말이다. 나에대해 생각해보자면 나는 나와 다른 사람, 문화등을 처음<br />

접하게 되었을 때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인 쪽의 편견을 갖고 바라보는 편이었다.<br />

일종의 경계심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네팔에서는 그러한 편견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와<br />

다르다는 것, 다양성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한 나라였다. 이는 네팔 자체가 수많은 민족,<br />

인종, 문화 그리고 언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네팔은 나와 다른<br />

13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어떠한 낯설은 것을 접했을 때 네팔인들의 반응은 대게 ‘그럴<br />

수도 있지뭐’식의 반응이었다. 그들에게 네팔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공통적인 가치관 등에<br />

대해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모두 같았다. ‘사람마다 모두 달라 일반화할 수 없다는<br />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것이 일상이고 그렇게 받아들이며 생활해왔고 인정할 줄 아는<br />

사람들이었다.<br />

우리나라의 경우는 네팔과 상당히 경우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에<br />

단일 전통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인지 우리와 다른 문화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한 편이다.<br />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때론 분노하기도 하며 뒤에서 모여 숙덕거리기도 한다.<br />

게다가 동남아시아나 그 외 발달하지 못한 지역의 사람들을 만날 때에는 미개하다는 인식을<br />

가지고 바라보기도 한다. 나 역시도 이러한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아니었고<br />

이번에 네팔 여행을 통해 나와 다르다는 것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도 이제는<br />

나와 ‘다름’을 생활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가 온 것은 아닐까?<br />

14


GERMANY<br />

강정헌 (홍익대 컴퓨터정보통신전공 4 년)<br />

IJGD0333 Playground of Dreams 7 월 17 일-8 월 7 일<br />

_생각과 경험과의 차이<br />

이번 여름 방학의 거의 모두를 유럽에서 지냈다. 그 이유의 절반은 유럽 여행의 목적도<br />

있었지만 3 주 21 일 동안은 유네스코에서 주최하는 국제자원봉사 캠프에 참여하기<br />

위해서였다. 해외는 몇 번 돌아 다녀봤지만 봉사활동을 하러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br />

때문에 먼가가 생소하였다.<br />

캠프는 7 월 17 일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정확한 일정은 7 월 17 일부터 ~ 8 월 7 일 까지<br />

독일 하노버 근처에 있는 Bielefeld 라는 지역에 가서 아이들 놀이터를 만들어 주는 일이다.<br />

나는 활동을 하기 전에 2 주 정도에 걸친 여행을 마치고 Bielefeld 에 도착하였다. 도착하기<br />

전에 주고받은 메일로 인해 지정된 장소에 가기도 전에 독일에는 특히 중심가나 번화가<br />

이외에는 동양인들이 많이 거주하지도 않고, 여행을 오는 경우도 드물어서 인지 캠프<br />

리더인 플로가 우리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Bielefeld Hbf(하프반호프:역)에서 15<br />

분쯤<br />

걸어서 우리의 숙소로 이동하였다.<br />

숙소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한 것 이상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침낭을<br />

가져오라고 하였으나 메트리스와 이불 그리고 베게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Tv 및 라디오<br />

등 기타 가전제품과 주방, 거실, 샤워장 등 제대로 갖추어진 집이였다. 우리 일행이<br />

도착했을 때 이미 온 친구들도 있었고, 우리보다 늦은 날짜에 도착한 친구들도 있었다.<br />

15


친구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나와는 많이 차이가 있었다. 대게 캠프를 하는 평균적인 나이가<br />

19~20 이어서 인지 모르지만 내가 좀 나이가 많게 느껴졌다. 하지만 서양에는 형 동생이<br />

따로 없지 않은가... 사실이다. 겪어보니 좋은 점도 있고 좋지 않은 점도 있었다. 좋은 점은<br />

나이보다는 같은 사람으로 또는 친구로서 대해주는 것이 가장 좋았고, 좀 안 좋았던 것은<br />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라서 생소 했던 것이 좀 있었다. 한국에선 1 살만 많아도 형<br />

대접을 하지 않는가? 그래서 인거 같다.<br />

이번 우리 캠프에 참여한 인원은 15 명 이였고, 나라는 한국 2 명, 독일 2 명, 프랑스 1 명,<br />

타이완 1 명, 터키 1 명, 우크라이나 2 명, 알제리 1 명, 러시아 3 명, 스페인 2 명이였다.<br />

처음으로 다국적이고 이색적인 사람들과의 만나서 어울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br />

아니었다. 사실 캠프 생활 하면서 몇몇 문제도 있었다. 일단은 언어가 좀 무리수로 작용이<br />

되었다. 첫날 회의 할 때에는 영어 외엔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으나 같은<br />

나라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자기들끼리의 대화에 자기 나라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br />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되는 것이고, 영어를 할 때에도 우리가 평소에 듣던<br />

영어라기보다는 몬가 그 나라의 특색이 있는 영어발음이라 알아듣기 어려울 때도 많았다.<br />

하지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적어서 어쩔 수 없이 영어 이외의 언어를 쓰는<br />

경우가 많았다.<br />

첫날 우리가 모여서 한 것은 방 배정과 식사 당번을 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장 먼저 식사<br />

당번이 되어서 요리를 하였는데, 마트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어서 상당히 장을 보는<br />

데에는 편하였다. 식사 당번은 하루 종일 식사 준비랑 장을 보는 사람들이고, 대체로<br />

일하는 것 보다 힘들다. 3 주가 되다보니 식사 당번도 4 번 정도를 하게 되었다.<br />

식사 당번이 만드는 요리는 이전에 들은 것처럼 각 나라의 전통 요리 위주로 하는 것보다<br />

자기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로 하는 것이 무난하고, 이들도 자신의 나라의<br />

요리들보다는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요리를 만드는 것을 주로 하였다. 사실<br />

전통적인 거나 우리나라의 음식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보다는 재료들을 구하기가<br />

쉽지가 않다. 아시아 마트라는 곳이 있긴 하지만 한국 재료는 별로 없고 중국재료들이 무지<br />

많았다.<br />

우리가 숙소에 도착한 날은 토요일 이어서 주말은 숙소에서 쉬고, 3 일 째 되는 날부터<br />

우리의 일이 시작되었다. 일하는 장소는 숙소에서 차로 20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구<br />

놀이터를 철거하고, 새로운 놀이터로 개장하는 것이었다. 일은 일주일에 5 번을 하려고<br />

했으나 4 번으로 정하고 그 대신 금요일에 일할 시간을 4 일에 나누어 하기로 하였다.<br />

그래서 정해진 주 4 일제 한국에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일을 시작한 첫 날은<br />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잡초 뽑기, 기존에 있던 시설 철거, 시설물 준비 등으로 첫 날은<br />

16


매우 힘들었지만 난 당번이여서 가지 못했다. 그 날은 난 그보다 힘든 밥 짓기를 하고<br />

있었다.<br />

나는 이틀째 되는 날부터 일을 시작하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놀이터 공사에서 할 일은<br />

초반에는 땅파기, 시설물 세울 곳 정하기, 시설물 만들기, 시멘트 만들기, 나무 뽑기<br />

등이었다.<br />

이건 좀 잘못된 생각일 지도 모르겠지만 공사판이 확실하였다. 여러 가지 장비들도<br />

동원되었고, 날이 가면 갈수록 중장비 들이 동원 되었다. 하지만 포크레인이나, 불도저<br />

같은 중장비들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알려주어서 우리들도 시운전과 정식으로 운전을 해<br />

볼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이런 장비들을 사용한다는 것이 새롭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면<br />

사고도 날 수 있는데도 이렇게 친절한 설명과 함께 학생들이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br />

관계자 들이 너무 감사하였다. 일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작업은 많이 없었지만 독일의<br />

날씨가 우리를 많이 괴롭혔다. 독일의 날씨가 원래 좀 변덕이고, 소나기가 가끔 지나가는<br />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가긴했지만 현지에서 우리가 일을 할 때에는 거의 매일 비가 하루<br />

종일 쏟아지는 아주 악덕한 날씨였기 때문에 힘들었다. 그 당시 한국에는 열대야니<br />

폭염이니 하면서 매우 뜨거운 날씨가 이어졌지만 독일에서 우리가 일을 할 때의 기온은<br />

15 도 ~ 17 도 정도로 추운 날도 많았다. 물론 기온차가 좀 있어서 점심때에는 덥기도<br />

하였지만 대체로 기온이 우리나라 가을 기온과 같은 기온이여서 반팔만 가져갔더라면<br />

감기라도 걸렸을 것이다. 특히 새벽이 추워 잠을 자다가 깨는 경우도 빈번히 있었기 때문에<br />

일할 때 졸음이 쏟아지는 날도 있었다. 일은 대체적으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서 2 시간<br />

정도 더 한 뒤에 마쳤고, 일을 끝 마친 뒤에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하거나 개인적으로 시간을<br />

보내었다. 여러 가지 활동으로는 여자 월드컵 개최지여서 경기관람도 하였고, 페스티벌<br />

참여, 클럽가기, 쇼핑하기 등 이다. 참여여부는 개인적인 참여의사를 물어본 뒤에 해도<br />

되고 안 해도 된다. 몸이 피곤한 날은 참여 안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특히 도심지<br />

근처여서인지 클럽이 꽤 가까이에 있어서 클럽을 가거나 살사 댄스를 배우러 가기도<br />

하였었다.<br />

우리의 놀이터 공사는 2 주하고 2 일에 걸쳐서 완공이 되었다. 처음에 보았던 새카만 흙<br />

밭에서 새로운 놀이터로 태어나는 순간 많이 달라진 느낌이 확 들었다. 계속 일을 할 때는<br />

별반 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처음 사진과 전부 마무리된 사진을 보았을 때 엄청난<br />

차이를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은 모두가 모여서 오프닝을 하였다 오프닝 식에서는 마을<br />

주민들과 우리가 만든 놀이터를 이용하게 되는 어린 아이들이 와서 감사인사와 축가를<br />

불러주고, 아이들이 놀이터로 뛰어가서 노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는데 아이들이 놀이 시설을<br />

웃으면서 이용하는 것을 보니까 상당한 작업이었음에도 보람을 한껏 느끼었다. 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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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식에서 주민들이 우리에게 이 지역에 대한 책자와 연필 또 추억이 담긴 CD 를 선물해<br />

주었다.<br />

오픈식이 있은 뒤에는 종강파티를 하듯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위해서 파티를 하였다. 3 주<br />

동안 같이 지낸 친구들과 함께 하는 바비큐 파티였고, 같이 작업을 도와준 토비, 쏘냐,<br />

엔진, 팀과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팀장분도 파티에 참여하였다.<br />

이렇게 3 주 동안 한국이외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대화하고, 토론하고, 배우면서 어느<br />

정도의 친근감과 헤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고 봉사활동은 마무리가 되었다.<br />

봉사활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한국에서 해왔던 것과 달라서 낯설기도 하였다. 한국에서<br />

경험했던 자원봉사는 자기가 주체적으로 일을 하는 것은 맞지만 남과 어울리고, 의견을<br />

교환하고, 회의를 거듭해나가며 공동체적인 봉사활동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 캠프를<br />

통해서 많은 점을 배우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현재 4 학년인 나로서는 곧 취업<br />

전선에 뛰어들어 많은 시련과 고통을 느끼겠지만 여기서 짤막한 대화지만 외국친구들의<br />

위로가 나의 시련과 고통을 무마 시켜줄 수도 있을 것이다.<br />

동료들이 나에게 말했다.<br />

길은 이미 있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가는 거라고, 그래서 힘든 거라고, 우리가 만든<br />

놀이터처럼...<br />

같이 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무지 싫기도 했고, 때로는 무지 좋기도 했던 나의 친구이지만<br />

나에게 전해준 이 말과 이 캠프의 추억을 사진으로 간직하며 캠프를 마무리 하였다.<br />

플로리안, 알렉스, 엔버, 야신, 트리아나, 췐이팅, 마리, 델리아, 샤샤, 폴, 케이트, 정은,<br />

메르세데스, 나탈리 이들이 나와 함께한 14 명의 친구들이다.<br />

18


GERMANY<br />

김수정 (경희대 국제학과 2 년)<br />

IJGD0319 CHECK IT<br />

7 월 31 일-8 월 21 일<br />

_꿈같은 현실에서 돌아오다<br />

D-7. 떠나기 일주일 전, 나는 이미 긴장하고 있었다. 혼자서는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br />

해외로. 생각만 해도 두근거렸다. 캠프지가 있는 뉘른베르크에 도착하면 밤 10<br />

시반.<br />

지도상으로는 가까운데, 걸어가도 괜찮은 걸까, 택시를 타는 게 좋을까. 캠프지까지<br />

찾아가는 구체적인 방법도 다시 알아보고, 기차 왕복 티켓도 예매해놓고, 혹시나 인터넷이<br />

안되거나 느릴 수 있어서 수강신청시간표도 미리 짜서 부탁해놓고, 준비물도 챙기고,<br />

헤어질 때 나눠줄 선물도 준비하고, 날씨도 확인했다. 긴장되기는 했지만 빨리 가고 싶었다,<br />

출국 전날 까지는. 캠프 담당자분께 연락을 해야 했을 때부터는 막상 혼자 떠나려는 게<br />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비행기에 있는 동안은 푹 잘 수가 없었다. 기차역에는 예약한<br />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덕분에 몇 번째 칸의 어느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br />

내 자리로 가기에 편한지 알아볼 수 도 있었고, 기차역을 둘러보았기 때문에, 나중에 혼자<br />

돌아오는 길에도 편안하게 공항으로 갈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잠을 못자서 기차를 탈<br />

시점에는 무지 피곤했다. 졸다가 깰 때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한번은<br />

흑인 남자분이 앉으셨는데, 갑자기 내 팔을 치면서 나를 깨웠다.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워서<br />

쳐다봤더니 자기가 자리를 비켜줄테니, 자기 자리에 가방을 놓으라는 것이었다.<br />

프랑크푸르트에서 도난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고 해서, 창가 쪽에 자리를 배정받은 나는,<br />

캐리어를 내 의자 앞에 놓고, 다리를 꼬아 비좁은 공간에 놓고 앉아 있었는데 그런 자세로<br />

19


잠든 게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기차 안에서는 독일어로만 방송이 나왔다. 그래서<br />

도착시간이 다가왔을 때는, 내릴 준비를 하는 학생들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고 내릴<br />

수 있었다. 그리고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따라 걸어, 출구로 나왔다. 어제<br />

전화했던 분을 찾기 위해 약속장소(information center)로 갔다. 내 이름을 적은<br />

플래카드를 보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Are you Kim Su Jung?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br />

만나 뉘른베르크역에서 5 분-10 분 떨어진 캠프지까지 같이 걸어갔다. 밤 열시반쯤<br />

도착했는데,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이가 떨릴 정도로 무지 추웠다. 패딩조끼를 입은 사람도<br />

보았다. 캠프지 도착, 워크캠프 시작 예정일보다 하루 일찍 도착했는데, 이미 두 명의<br />

캠프리더를 포함해 4 명이 와있다고 했다. city center 구경을 간 친구들을 기다리면서<br />

지하를 포함해 3 층으로 이루어진 캠프지 건물 설명을 들었다. 3 주 동안 지내면서 워크캠프<br />

활동을 하게 된 곳은 국제청년센터였는데, 주변에 사는 학생들이 학교가 끝나고 방과후<br />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시에서 지원해주는 문화센터였다. 그래서 지하에는 미술실, 디스코룸,<br />

매트룸과 샤워실이 있었고, 또, 1 층에는 당구대, 탁구대, 부엌, 플레이스테이션룸, 컴퓨터룸,<br />

스무개도 넘는 보드게임이 마련되어 있었고, 2 층에는 음악실, 부엌을 비롯해 3 개의 교실이<br />

더 있었다.<br />

첫날은 햇빛이 들어오는 2<br />

층에서 지내지만, 그 곳은 페인트칠을 하게 될 곳이라서<br />

캠프리더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 지하에서 지내게 될 것이라고 했다.<br />

친구들이 돌아왔고, 인사를 하고나서, 피곤했는데도 불구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시간<br />

정도 이야기 했다. '와, 재밌다.' 평소에 외국 문화에 관심 있는 나에게는 귀에 쏙쏙<br />

들어오는 문화수업이었다. 나머지 멤버들이 오면 얼마나 다양하고 신기한 이야기들이 오고<br />

갈까 기대가 됐다. 긴장했던 이틀이 휙 지나가고 갑자기 편안해졌다. 한국시간으로<br />

하룻밤을 새서 그런지, 일찍 잠들 수 있었고, 아침에는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지긴 했지만<br />

상쾌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예정된 워크캠프는 금요일부터였지만, 워크캠프 일은 그 주<br />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부터 시작되었다. 주말이 끼어 있었던 터라, 이름도 외워가면서<br />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자유시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키친팀 구성 등 전반적인<br />

규칙을 만들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br />

센터에서 일하시는 직원 분들께서는 우리가 참가하거나 가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br />

설명해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토대로 자유시간 일정을 유익하게 보낼 수 있도록 조금은<br />

벅찬 계획을 세웠다. 키친팀은 하루에 두세명씩 구성되어 그 날의 음식을 담당하는<br />

팀이었는데, 그 하루 동안은 워크캠프 활동에서 제외되어 쇼핑, 요리, 설거지까지 담당하는<br />

것으로 정해졌다. 우리 팀은 총 16 명이었기 때문에 3 주동안 생활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br />

돌아가면서 키친팀을 하게 되었다. 매주 냉장고에 "cookery team"이라는 글씨가 적힌 큰<br />

20


종이를 붙여 놨는데, 자기가 키친팀을 하고 싶은 요일 아래 이름을 쓰는 형식이었다.<br />

그래서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서로 얘기해서 같은 날 배정하기도 했다. 센터에서<br />

5 분만 걸어가면 NIDL,NORMA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마트가 여러 개 있었기 때문에<br />

매일 카트를 끌고 가서 쇼핑을 해왔다. 우리 팀은 한 나라 당 거의 한명씩 왔는데 덕분에<br />

총 12<br />

개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었고, 다양한 레시피를 배워올 수 있었다. 캠프지가<br />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기는 했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세탁기가 없다는 것이었다.<br />

그래서 어떤 학생들은 세탁소를 이용하기도 했고, 가격 때문인지 대부분의 멤버들은<br />

손빨래를 했다. 올해 8 월달의 독일은 독일인들도 놀랄 만큼 날씨가 변덕스러웠다. 낮에는<br />

덥고, 밤에는 추웠고, 갑자기 비가 왔다가도 해가 쨍쨍하기도 했다. 햇빛이 비치더라도<br />

그늘에 지나면 추웠다. 전반적으로는 우리나라의 8 월에 비해 쌀쌀했다. 그래서 두꺼운<br />

후드티와 긴 바지들을 손빨래 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캠프의 모든 일들은 모든 멤버들의<br />

토의 끝에 정해졌다. 워크캠프활동은 센터 직원 분들의 권유에 따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br />

9 시부터 12 시, 1 시부터 4 시까지 일을 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우리 캠프에서 하게 될 팀은<br />

총 5 가지 분야 : 그래피티 (건물외벽꾸미기), 건물내부 페인트칠, 건물내부에 인공암벽<br />

만들기, 정원가꾸기 및 그릴 만들기, 정문에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 만들기 였다. 이 모든<br />

일에는 각 분야 전문가들이 분담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들의 지도 아래 캠프활동을 할 수가<br />

있었다. 각 팀으로 나눠지기는 했지만, 한 팀에 사람이 많이 몰렸을 경우나, 한 팀의 일이<br />

먼저 끝났을 경우에는 다른 팀으로 가서 일을 하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팀은<br />

그래피티였다. 첫날, 우리는 이것저것 그려보면서 벽에 그릴 전체적인 그림을 구성했다.<br />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와서 결국은 그 모든 것을 통합하기로 했다. International Jugend<br />

Zentrum 을 써 넣고, 그 위에 각 나라에서 온 건물들을 그림자형태로 그려 넣는 것이었다.<br />

그래피티 담당자분은 터키 분이셨는데, 동양적인 것을 특이하게 생각하셨는지 글씨 옆에<br />

한국건물을 크게 그릴 수 있게 해주셨다. 그림자형태로는 숭례문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을<br />

했지만, 크게 그리게 될 전통적인 건물로는 무엇이 적합한지 결정하기 힘들었다. 일단<br />

아래서 올려다 보이는 구조의 사진을 보고 무작정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래피티<br />

특성상 알록달록한 단청이나 막새 등을 표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단순화 시켰더니<br />

특정한 건물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한국건축물이 되어 버렸다. 스케치가 끝난 뒤, 그림에<br />

필요한 색깔을 정하고 페인트를 인터넷으로 직접 주문했고, 그래피티를 그리게 될 나무판과<br />

스프레이 페인트가 오기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은 다른 팀으로 나뉘어져서 일을 했다.<br />

건물내부에 페인트칠을 하는 곳은 2 층이었는데 처음에는 원래 그려져 있던 그림을 사포로<br />

지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잘 지워지지 않았고, 페인트 가루가 여기저기<br />

날아다녀서 온몸이 하얘졌고, 머리도 끈적거렸다. 순간적인 힘이 중요한 거라서 그<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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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순간만큼은 지치기도 했지만 페인트칠을 할 생각을 하면서 두 팔과 온몸을 이용해서<br />

지웠다. 잘 한다고 칭찬까지 들어가면서 하니 그리 힘든 것 같지도 않았다. 평평하지 않은<br />

벽에 깁스와 시멘트를 채우고 흰색 페인트로 그림을 다 지웠다.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고<br />

기다리던 페인트칠! 페인트는 따로 담당자분이 배정되어 있지 않기는 했지만, 얘전에<br />

페인터 일을 했었다는 우리팀에서는 가장 나이 많은 캠프리더 중 한명을 따라 흰색과 다른<br />

기본적인 색깔들을 섞어서 페인트할 색을 만들었고, 롤러로 페인트칠을 하기 시작했다.<br />

처음에는 페인트의 양을 조절하는 것부터 잘 안되고, 높은 사다리에 올라가는 것부터가<br />

무서웠지만, 나중에는 그 높은데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무거운 롤러를 들고 페인트칠 할 수<br />

있는 용기가 생겼다. 페인트칠 자체도 재밌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페인트를 묻혀가면서<br />

자유롭게, 그리고 서로 옷에 그림그려주면서 장난치고, 재밌는 사진도 찍어가면서 여유롭게<br />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이렇게 페인트칠을 끝낸 곳은 총 두 개의 방이었는데,<br />

한 곳에는 인공암벽을 설치했다. 이 때는 인공암벽 설계하시는 분이 오셔서 돌 심을 곳을<br />

구성하셨고, 우리는 나무에 구멍을 뚫고, 돌을 박았다. 실내에서 일을 하다가 정원으로<br />

나가면 '맑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공기가 신선하고 좋았다. 맨 처음 센터에 왔을 때는<br />

정원은 풀로, 정확히 말하면 잡초로 가득 차 있어서 정원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큰<br />

잡초부터 잘라내고, 뽑기 시작해서 손톱만한 작은 풀까지 일일이 뜯어내야 했다. 일주일<br />

정도 지난 뒤엔, '여기에 이런 땅이 있었구나'하고 깨달았다. 바비큐 그릴을 만들 곳은 1m<br />

정도 깊이로 땅을 팠는데, 나무판으로 모서리를 단단하게 고정시킨 후에 시멘트를 부어서<br />

단단하게 만들었다. 또, 꽃밭의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서 꽃밭 가장자리도 마찬가지로<br />

작업한 후에, 그곳에 돌을 심었다. 꽃시장에 가서 직접 골랐던 나무들이 왔다. 쪼리를 신고<br />

온 한명이 신발을 벗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모두들 신발을 따라 벗었다. 덕분에 우리는<br />

자연 속에 있는 느낌을 받았다. 센터에서 방에 있을 때까지도 신발을 신고 있었기에<br />

일본에서 온 친구와 나는 맨발로 돌아다닐 수 있어서 신났고, 무엇보다 흙이 부드러워서<br />

웰빙지압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독일에 있을 때는 비가 자주 왔는데, 이 날 만큼은 햇빛도<br />

쨍쨍해서 맨발로 밖에서 일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나무들을 심고, 땅을 폭신폭신하게<br />

만들기 위해서 땅을 일궜다. 정원에 잔디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땅을 평평하게 만들어야<br />

했는데, 익숙하지 않았던 농기구로 일을 하려니 땅이 평평하게 되지도 않았고, 크고<br />

무거워서 허리와 팔도 아팠다. 그렇지만 계속 하다보니까 요령이 생겼고 결국 기분 좋게<br />

끝마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돌을 사와서 직접 깎아, 정원에 놓을 바비큐 그릴과 오븐을<br />

직접 만들었고, 워크캠프 마지막 날, 우리는 그릴의 첫 사용자가 되어 피자도 구워먹고,<br />

바비큐 파티를 하기도 했다. 한편, 앞마당에는 비가 오면 피할 수 있는 정자를 만드는<br />

작업을 했다. 먼저 기둥을 세울 구멍 네 곳을 파야 했다. 앞마당의 땅은 정원쪽과는 다르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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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돌로 구성되어 있어서 돌을 깎은 후에 파내는 일이라 1m 넘는 깊이 파는 데에만<br />

일주일이 넘게 걸린 것 같다. 정자를 만들 나무가 도착했고, 구멍에 시멘트를 넣어 굳히는<br />

동안, 우리는 나무를 깎고, 다듬고, 니스칠을 두 번에 걸쳐서 했다. 나무가 크고 길었기<br />

때문에 한번 니스칠 하고 말리는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만 해도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br />

캠프활동을 하던 시기에는 비가 자주 왔는데, 나무를 잘 보관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기<br />

때문에, 하루 일과가 다 끝나고 그 나무들을 보관시키기 위해서 한 곳으로 모아 놓는 것도<br />

"일"이었다. 그래서 나무작업을 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일주일이 걸렸다. 마지막 일주일이<br />

남았을 즈음엔 그래피티도 야외작업이 시작되었다. 연습판에 얇고 강하게, 그러나<br />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스프레이를 뿌리는 훈련을 몇 번 하고서는 바로 그래피티를<br />

하게 되었다. 몇 번 연습하지도 않았는데, 가로 세로 1m 크기의 그림을 스케치도 없이<br />

바로 그려나가라고 해서 당황했다.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은 40cm 폭 밖에 안되어서 큰<br />

그림을 한눈에 보기가 쉽지 않았고, 밑그림도 없이 긴 선을 한 번에 그리는 훈련이 덜<br />

되었던 터라 처음에는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노란색으로, 두<br />

번째는 연두색으로 점점 진한 색을 써가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결국에는 그 선들을 다<br />

지워가면서 안쪽 색을 칠해야 했다. 내려가서 전체적인 그림을 한번 보고 또 다시 올라와서<br />

그리기를 반복하다보니 내 그림은 아직 멀었는데, 글씨 쪽은 거의 완성이 되어 가고 있었다.<br />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은 예상보다 작았고, 또 선의 굵기는 생각보다 굵어서<br />

스케치보다도 더 단순화 시켜야 했다. 결국 다른 팀이 끝낼 때까지 나는 계속 앉아서<br />

작업을 했고, 제일 먼저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마지막까지 작업을 했다.<br />

그래피티에서 각자 맡은 구간을 끝낸 사람은 정자쪽을 도와줬는데, 준비해 놓은 나무들을<br />

끼워 맞춰서 정자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일이었다. 조약돌이 도착했고, 정자 바닥에<br />

조약돌을 다 옮겨 놓는 순간, 일이 다 끝났다. 우리는 3 주에 딱 맞춰서 계획했던 다섯 개<br />

팀들이 일을 마쳤다. 3 주동안 활동했던 것이 정말 파노라마 처럼 지나갔다. 3 주 내내 일만<br />

한것도 아닌데 이 모든 것들이 시간에 맞춰서 딱 완성되었다는 것이 뿌듯했다.<br />

캠프활동이 끝난 오후에는 주로 뉘른베르크 근처에 놀러나갔다. 뉘른베르크가 기차, 지하철<br />

등이 모두 지나가는 곳에 위치해 있기도 했지만, 캠프지 자체도 센터에서 걸어서 10 분<br />

거리에 있어서 자유시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시티센터에 떠돌이음악회가<br />

열려서 구경 갔다가, 거리 한가운데 같이 앉아, 팀멤버 중 한명이 기타치고 같이 노래<br />

부르기도 했었고, 월드컵 응원하는 인원만큼 모인 큰 공원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br />

보러가기도 했고, 레게 콘서트에도, 도큐박물관(히틀러와 뉘른베르크의 연관성을 설명해<br />

놓은 곳), 벼룩시장, 동굴감옥, 동물원, 담력훈련소 등 가까운 곳, 그래서 상대적으로 시간<br />

제약을 덜 받는 곳으로 주로 갔다. 뉘른베르크의 또 다른 워크 캠프지를 찾아가서 함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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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를 하기도 했고, 주말에는, 뮌헨, 로튼부르크, 밤베르크에 가서 구경하고 왔다.<br />

뮌헨에서는 우연히 다른 캠프를 만나서 님픈부르크에서 함께 피크닉을 즐기기도 했다.<br />

비가 많이 오거나, 식사 전후로 시간이 남았을 경우에는 큰 테이블에 앉아서 캠프멤버들과<br />

보드게임도 하고, 당구도 치고, 서로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br />

캠프는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독일, 멕시코, 러시아, 아르메니아, 벨라루스,<br />

우크라이나, 한국, 일본, 알제리아에서 온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 가지<br />

주제만으로도 꽤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br />

각자 사용할 줄 아는 언어가 달라서 동시에 다섯 언어가 오고갈 때였다. 한번은 독일분이<br />

독일어로 이야기 하셨는데, 러시아에서 온 친구는 제 2 외국어가 독일어였기 때문에 그것을<br />

알아듣고 아르메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친구에게 러시아어로 알려줬고, 또,<br />

아르메니아와 벨라루스 친구들이 옆에 있는 친구에게 영어로 알려주고, 영어를 알아들은<br />

이탈리아 친구가 또 다른 친구에게 이탈리아어로, 그리고 그 친구는 또다시 벨기에<br />

친구에게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해준 경우가 있었다. 서로 몇 개국어씩 하는 것을 알고<br />

있기는 했지만, 동시에 얘기한 경우는 드물었는데 서로 알아들은 후에 우리는 한참동안<br />

웃음을 멈출 수 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다른 언어를 꼭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br />

했고, 3-4 개 국어씩 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워크캠프를 하면서 역시<br />

국가브랜드가치가 높아야 한다는 걸 느낀 적이 많았다. 생각보다 한국에 대해서 잘못 알고<br />

있는 친구들도 많았고, 모르는 부분도 너무 많아서 처음에는 위축되기도 했다. 처음에는<br />

스시, 만화 등 일본에 더 관심을 갖는 듯 했다. '반크'에서 받은 지도와 엽서 등을<br />

보여주면서 한국을 홍보하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내가 직접<br />

쓴 한글이었다. 한국에 보낼 엽서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한글에 관심을 갖게 된 친구들이,<br />

한국음식 등도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글을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br />

가끔씩은 북한과 우리나라는 '한'나라인지, 현재 관계는 어떠한지, 아직 전쟁 중이라서<br />

위험하지는 않은지, 한국의 인구는 어떻게 되는지, 한국의 고유박자가 있는지, 개고기,<br />

고양이고기, 벌레를 먹는지, 동성애자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캠프기간 중에<br />

크리스토퍼데이가 끼어 있었다) 등 너무나도 광범위한 예상외의 질문을 많이 해서<br />

우리나라를 알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 대한 모든 분야를 자세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br />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던 부분도 있어서 아쉽기도 했지만, 한국에 대한<br />

인식이 좋게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뿌듯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br />

지내다 보니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그들만의 생각이나 분위기를 배워온 것 같다. 또, 각<br />

나라의 특징이 있기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생각을 갖고<br />

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워크캠프를 갔다 온 이후로 돌아다닐 때마다, 밥 대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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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만을 고집하던 친구들이 한국에 온다면 무엇을 대접해야 할까, 사람이 많은 뮌헨을 피해<br />

로튼부르크로 간 친구들이 한국에 온다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관광명소는 피해야 할까,<br />

그렇다면 어디를 보여줘야 할까(방송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몰릴 만큼 유명하다고<br />

홍보하는데, 한적한 곳을 즐기는 사람들의 생각은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것일까)등의<br />

의문점이 들기도 했고,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을 하나로 뭉쳐서 '한국적'이라는 것을<br />

느끼기도 하는 등 한국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 놀랐다. 이번<br />

계기로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진 것을 스스로 느낀다.<br />

캠프지까지 혼자 찾아갔다 온 경험과 모르는 사람들과 처음 만나 친해져 가는 과정을<br />

통해서 자립심을 기를 수 있는 계기, 예전부터 알던 친구들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br />

현재 내 모습을 알 수 있는 계기, 내 외국어 실력과 타지 적응력을 시험해 보는 계기가 된<br />

것 같다. 또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유행을 쫓아 똑같이 입고, 똑같이 행동하려는<br />

한국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나'다운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온 것 같다. 우리<br />

캠프의 경우 한국인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느낀 것들도 많았고, 또 많은 나라에서 온<br />

친구들을 한꺼번에 만나서 배운 것도 많았다.<br />

쓰다보니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서 길어진 것 같다. 그 만큼 평생토록 잊지 못할 귀중한<br />

경험을 하고 온 것 같다. 다른 캠프와 다르게 한번도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냈던 우리<br />

캠프 멤버들이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3 주의 워크캠프활동이 끝난지 3 주가 되는<br />

시점에서 되돌아보니, 갔다 온 직후의 깨달은 것들을 어느새 잊고 지내고 있었다는 생각이<br />

든다. 때때로 독일에서 매일매일 썼던 일기를 보면서 내 생활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br />

가져야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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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OS<br />

신지혜 (성균관대 러시아어문학과 4 년)<br />

AVAN 7 월 20 일-8 월 22 일<br />

_싸바이디! (안녕하세요)<br />

싸바이디! (안녕하세요)<br />

“라오스? 반드시 다시 갑니다. 여러분은 그 곳을 평생 그리게 될 거예요.”<br />

“푸딘댕? 천사들이 사는 곳이죠. 천국에 잘 다녀오세요.”<br />

떠나기 전, 선생님들의 말씀을 이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br />

라오스의 첫 느낌은 ‘순하다’.<br />

눈 마주치면 부끄럽게 미소 짓는 사람들<br />

붓으로 그은 듯, 단순하고도 선명한 풍경<br />

조용하게 걷는 소와 개, 닭들<br />

바쁜 마음과 여독이 씻겨져 나가는 기분이었다.<br />

우리의 첫 일과는 ‘친구 되기’ ““카오리?(한국), 기아 아싸싸마? (기아 자원활동가)””<br />

라며 묻더니 눈웃음 짓던 예쁜 아이들. 처음 일주일은 그렇게 서로 말도 없이 눈웃음만<br />

지으며 함께 자수를 놓았다. 꼼꼼히 곁을 지켜 봐주며 실이 엉키지 않게 천천히 하라고<br />

알려주던 아이들.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아이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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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짜이러버?(이해했어요?) 다이버?(할 수 있어요?)<br />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기존 프로그램을 지켜보기로 했다. 평일 오후에는<br />

Library class 와 Social class 라는 이름으로 연령별 3 개의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내가<br />

이해한 바로는 본질은 영어수업이었다. 주말 오전에는 Korean class, 오후에는 아이들이<br />

가장 즐거워하는 Dance club 으로 프로그램이 짜여 있었다. 생각보다 이미 많은 수업이<br />

있어, 우리가 새롭게 수업을 개설할 수는 없었고, 각자 맞는 시간대에 들어가기로 했다.<br />

나는 ‘My storybook’ 이라는 이름 아래, 독서토론과 책 만들기 수업을 준비했다. 하지만<br />

실제 수업을 접해보니, 아이들의 영어수준이 들쭉날쭉한 데다가 통역, 재료준비 등 난관이<br />

많이 있었다.스태프에게 도움을 청하면 무조건 ““Try first””라는 답변이 돌아왔다.<br />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헤매고 나서야, 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수업방식을 찾을 수 있었다.<br />

내가 준비해 간 자료와 계획을 수업시간에 쓸 수 없어 속상했지만, 이것 또한 내 욕심이라<br />

생각하니 포기할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로 하니, 오히려<br />

수업 구성은 단순해지고 반응도 좋았다. 기본적인 영어표현을 알려준 후, 꾸미기 좋아하는<br />

아이들에게 미술 시간을 주고, 발표연습을 주로 시켰다. 서로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br />

표정을 짓던 아이들이 웃기 시작했을 때, 완성된 책을 들고 활짝 웃던 모습, 자기 이름을<br />

기억해달라고 또박또박 내 발음을 고쳐주던 모습, 떠나던 날 좋은 선생님이었다고 팔찌를<br />

묶어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다음 활동자도 ‘아이들’이 가장 중요하단 사실을<br />

늘 생각해주길 바란다. 직접 참여해 보면 내가 할 수 있고, 할 수 없고, 도와줄 수 있는<br />

어떤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br />

컵짜이, 커이 미 쾀숙! (고마워요, 행복해요)<br />

이른 아침 닭 우는 소리, 개 짓는 소리에 깬다. 오늘도 구름 드리운 먼 산 바라보며<br />

아침식사를 한다. 센터에 올라가는 자갈밭 길에는 소들이 누워 느릿느릿 풀을 씹는다.<br />

센터에 들어서면 ““싸바이디!”” 해맑은 아이들의 목소리. 함께 수도 놓고, 기타도 치고,<br />

앨범도 보고, 그러다 눈 마주치면 씨익 웃는다. 하루는 어여쁜 눈으로 하도 사랑스럽게<br />

쳐다보기에 부끄러워, ““왜 그리 쳐다보니?”” 물으니 ““사랑하니깐요.”” 나는 또<br />

부끄러워서, ““왜 사랑하는데?””, ““당신이 내 언니고, 나는 당신 동생이잖아요.””.<br />

순간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서 꼭 안으며 서툰 발음으로 ““커이 미 쾀숙(행복해요)””을<br />

외쳤다. 운동장에 나가면 내가 순식간에 초콜릿으로 변하는 기분이다. 이리저리 안기는<br />

아이들을 욕심껏 품어보려 한 손에 두 세 명의 손목을 잡고, 앞 뒤로 엎고. 오늘 하루도<br />

땀범벅이지만 오늘 하루도 ““커이 미 쾀숙””. 한달 간 묵는 하우스 가족들과도<br />

‘가족’이 되었다. 야시장이라도 서면 작은 수레를 메단 오토바이에 10 명이 한꺼번에<br />

타고 밤 나들이를 나가곤 했다. 함께 달리던 밤길 풍경, 우리를 가족처럼 품어주던 그<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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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한 없이 행복하고 또 행복했다. 내 일기는 항상 ‘행복하다’로 시작해서, ‘헤어질<br />

날이 두렵다’로 끝났다.<br />

커이 학 짜오(사랑해요), 버,바이(No bye)<br />

우리는 너무 쉽게 정들었고, 이별은 어려웠다. 떠나기 하루 전, 동생처럼 아끼던<br />

여자애들이 양 손을 하나씩 나눠 잡고 물었다. ““정말 가요? 같이 살면 안돼요? 여기서<br />

그냥 결혼해서 우리랑 살아요.”” 씩씩하던 장난꾸러기가 ““버(not) bye”” 라고<br />

말하고는 눈물이 핑 돌아 고개를 돌리는데,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햇살이<br />

뜨거워서인지 눈물을 참아서인지 어지러운 마지막 오후였다. 아반 캠프와 함께 한 머드<br />

하우스 보수공사도 마무리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센터에 갔다. 수줍게 인사만 하던<br />

아이들이 하나 둘 나타나 직접 만든 팔찌를 채워주고 직접 그린 카드를 주었다. 하나하나<br />

기억하려 노력하며, 다이아몬드보다 아름다운 보물이라고 말해주었다. 정성스러운 바씨<br />

의식을 마치고,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품에 안았다. 참 친하게 지냈는데 일주일 전부터<br />

눈을 피해 속상하게 하던 아이가 그 누구보다 꼬옥 껴안아주는 순간 모든 오해가 풀렸다.<br />

짧은 귀가 길에 많은 아이들이 동행하며, ““우리 한국까지 같이 걸을까요?”” 라고<br />

말한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마지막 밤, 수북한 카드를 읽으며 울다가 웃다가<br />

결국 밤을 지새우며 답장을 썼다. 가방을 메고 방을 나오는 데, 어제 인사 못한 아이들이<br />

새벽 5 시 부터 집 앞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다시 한번 아이들 손을 잡고 이야기했다.<br />

““No next life, we can meet again. 버바이!!””<br />

폽깐마이! (또 만나요)<br />

마을을 떠나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버스 7 시간 내내 아이들 생각을 했다.<br />

난 아이들에게 받기만 했는데, 준 게 없는데……한국가면 무슨 선물을 보내줄까? 앨범?CD?<br />

내가 더 큰 사람이 되면 자전거랑 헬멧도 사 줄 수 있을까? 그때가 언제일까? 마음만<br />

급하고 커졌다. 나중에 결혼하면 남편이랑 같이 가기로 했는데, 더 빨리 보고 싶다. 3 년<br />

뒤? 내년 여름은? 교실에서 낡은 앨범을 보고 또 보는 아이들을 보며. 절대 낡지 않을<br />

견고하고 예쁜 앨범을 만들어주겠다 약속했다. 예전 기아 활동자들을 그리워하는 아이들을<br />

위해, 모두의 추억을 함께 담기로 했다. ““언니, 우리 빨리 앨범 만들어서 보내야 해요.<br />

빨리 좋은 사람 돼서 다시 가야 돼요.”” 성격 급한 나를 한아 언니는 천천히 라오스<br />

스타일대로 하자고 타이르신다. 우리 모두의 추억과 사랑, 고마움을 담은 책을 천천히<br />

정성껏 함께 만들기로 했다.<br />

비 오는데 우산은 잘 들고 자전거 타고 있을까?<br />

헬멧은 쓰고 오토바이 타고 있을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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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뜨거울 텐데 농장 일은 괜찮을까?<br />

걱정되고 궁금한 맘에 괜히 검색하고 보고 또 보고 나는 예전 활동자분들의 사진에서 앳된<br />

아이들 모습을 보고 언니오빠들은 내 사진에서 자란 아이들 모습을 보고.<br />

우리도 이렇게 여기에서 너희를 계속 기억하고 있고, 너희도 그래서인지 ““카오리(한국)<br />

기아 아싸싸마(자원활동가)”” 라는 소개만으로도 그렇게 좋아하고 안겼었구나. 내가 받은<br />

사랑이 한아, 지훈, 빛나, 지선, 한솔을 그리워하는 마음이었구나.<br />

발가락부터 머리카락 하나하나 아이들의 사랑과 기도로 채운 여름이었다. 이 힘 고이고이<br />

숨겨 힘들 때 조금씩 꺼내 써야겠다.<br />

우리 이렇게 서로 기억하고 영원히 사랑하며, 나이 먹자.<br />

폽깐 마이! (또 봐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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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XICO<br />

박세미 (고려대 사회학과)<br />

VIVE57 Turtles Colola XII 2 월 17 일-3 월 5 일<br />

_잊을 수 없는 콜로라의 석양처럼 선명했던 내 멕시코의 나날들<br />

2 월의 어느 날,<br />

옆자리의 일본인 친구 미유키의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쏴아 쏴아, 파도소리를<br />

들어보니 오늘 물결은 잔잔한 듯 하다. 오늘은 바닷가에 나갈까 그냥 해먹에 누워 책을<br />

볼까? 해먹을 차지하려면 일찍부터 일어나야한다. 부지런히 일어나 씻고 책을 잡고 해먹에<br />

나가 기분 좋은 바닷 바람을 맞고 있으니 저절로 또 다시 눈이 감긴다. 저번 주말에<br />

과달라하라에 가서 사온 멕시칸 모자를 얼굴에 덮고 스스르 잠이 들어버렸다. 누군가가<br />

찰칵 하며 사진을 찍는다. 일회용 수동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찍는 에이든이다. 에이든은<br />

바닷가를 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도 우리 각자 나름대로의<br />

할 일들이 있다. 저 멀리서 손빨래를 하고 있는 토모미가 보인다. 해나와 호경이는 부엌을<br />

왔다갔다한다. 겨우 일주일만에 우리는 가족이 된 것처럼 편안한 광경을 연출한다. 늦잠을<br />

잔 샬롯과 로냐가 하품을 하며 다가와 바닷가에 가겠냐고 묻는다. 안그래도 가고싶었던<br />

차에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하나 둘 모여 결국 모두가 바다에 가기로했다. 물론 코 앞에도<br />

바다가 있긴 하지만 집 앞 바다는 수영이 금지된 곳이다.<br />

인근 바다에 가기위해 마을에서 트럭을 빌렸다. 모두들 트럭 위에 타고 바람을 맞으니<br />

모습들이 정말 웃겼다. 하지만 모두들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게 이 곳의 바람과 냄새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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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뻑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모두들 이 곳에 오기까지 결정내렸을 때, 저마다의 기대와<br />

이상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 활동은 우리에게 비싼 추억이다. 그만큼 남들이 가보지<br />

못한 곳, 하기 힘든 일을 마음하나로 하러 온 사람들이다. 비록 단체가 우리에게 실망을<br />

안겨줬지만 우리 끼리 만이라도 좋은 추억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게 내 마음이다.<br />

수영을 마치고 옆 동네의 슈퍼에서 장을 봤다. 우리 동네보다 조금은 더 큰 규모였다. 차가<br />

없으면 이렇게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같은 날 장을 봐둬야만 한다. 함께 의견을 모아<br />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저녁당번인 토모미와 홍식이가 맛있게 일본식 카레를<br />

만들어주었다. 음식을 다 먹은 후 우리의 수다는 시작되었다. 프레디가 흥에 겨운지 기타를<br />

가지고 와 한 곡을 멋지게 부른다. 성악을 전공하는 샬롯도 참을 수 없다는 듯 기타소리에<br />

맞춰 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우리의 저녁은 깊어 갔고 마을에서 하나 둘 일꾼들이 찾아왔다.<br />

오늘 내가 맡은 지역은 west 다. 해변 끝으로 한참을 걸어야한다. 벌써 손전등의 약이<br />

다했는지 앞이 잘 보이지가 않아 내 발은 깊은 모래 구덩이 속으로 자꾸만 빠진다.<br />

브라이언 아저씨가 도와줘 가까스로 west 까지갔다. 도착 후 우리는 손전등을 끄고 조용히<br />

자연의 일부가 된 듯 그렇게 거북이가 뭍으로 올라와 알을 낳고 스스로 바다에 갈 때 까지<br />

기다린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알을 낳고 있는 경우에 혹은 알을 낳은 후 아직<br />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가서 땅을 파고 알을 꺼내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패니쉬가<br />

안되니 물어볼 수 도 없고 일꾼들과는 일하는데 있어 의견이 맞지 않았다. 자연을 소중히<br />

생각하는 우리와 그 자연이 일상인 지역 주민과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br />

안에 살았기 때문에 그 소중함이 얼마나 큰 지를 알지 못했다. 그저 정부에서 이 일을 하면<br />

지원금을 주니 일을 하는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 온나는 리더의 무책임함이나 일꾼들<br />

때문에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었다. 첫 날 이<br />

일을 했을 때를 떠올려본다. 달빛 밖에 없는 어둠 속에 생각지도 못했던 커다란 무엇인가가<br />

꿈틀꿈틀 엉금엉금 기어온다. 아, 저게 바로 거북이가 지나간 흔적이구나. 낮에 그 자국을<br />

보았을 때 나는 오토바이가 바닷가를 지나갔나 생각했다. 거북이가 알을 낳은 후 땅을 파고<br />

꺼냈던 알들의 따듯했던 체온.<br />

탁구공 같은 거북이 알들을 조심히 봉지에 담아 옮기던 기억이 어제 같다. 거북이는 우리가<br />

알을 다 꺼낸지 모르고 알을 낳은 장소에 열심히 뒷 발로 흙을 퍼다가 덮는다. 그 모습이<br />

안타깝지만 우리가 동물 없는 곳에 잘 옮겨놓을테니 그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br />

오늘의 임무를 다하고 숙소로 들어가니 아직도 미유키는 인공부화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br />

부화장을 보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새끼 거북이머리가 쏙 하고 올라온다.<br />

그 때부터는 몇 십마리의 연속이다. 미유키를 도와 거북이 수를 세고 바다로 가 거북이를<br />

놓아주었다. 아무래도 달빛의 작용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인데 도무지 그 쪽으로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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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외한이라 설명을 못하겠다. 주방으로가 물을 한잔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벌써 잠을<br />

자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마 이 봉사활동이 끝나면 이렇게 함께 잠을 자고 생활했던<br />

것도 소중한 추억이 되겠지? 다신 없을 이 광경들을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고싶다. 조용한<br />

밤, 쏴아 쏴아. 파도만이 이 밤에 깨어있다. 이렇게 오늘 하루도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이<br />

든다.<br />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내 마음도 멈추지 않는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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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OLIA<br />

남원식 (연세대 경영정보학과 4 년)<br />

MCE/20- Orphanage's farm-6 8 월 18 일-31 일<br />

_대자연과 함께했던 찰나의 시간<br />

Part 1. 몽골에서의 첫날<br />

해외엔 적지않게 나와봤던 나였지만 중국대륙을 지나 광활한 사막풍경이 비행기 아래로<br />

펼쳐지자 워크캠프에 참가한다는 사실만으로 여행의 즐거운 기분보다는 책임감과 긴장감을<br />

실감하였다. 난 저런곳에서 일하는구나. 아직 100%확실한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대 반<br />

긴장 반 설레였다. 일단은 픽업이 제대로 될지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픽업은 타키라고<br />

소개한 아저씨가 차로 친절하게 게스트하우스까지 안내해주었다. 나는 비행시간상 낮<br />

3 시도착으로 조금 일찍도착했지만 두명이 먼저 와있었다. 싹싹하게 먼저 인사를 나누고<br />

그들과 가볍게 게임을 하면서 먼저 친해지게 되었다. 그들과 다음날 같이 하게 될 일을<br />

상상하며 얘기를 나누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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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캠프장으로 GoGo<br />

아침이 되자 어제 만났던 3 명의 봉사자들 외에 21 명이 버스로 모였다. 사람들이 더 있다는<br />

얘기는 들었지만 갑자기 많은 사람들을 만나 어색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를 인솔하게될<br />

몽골인 Chinbaa(난 이애와 가장 친해졌다)를 처음 만났다. 버스에 짐을 싣고 들어가니 다른<br />

숙소에서 머문 친구들이 앉아있었다. 차로 한시간 반정도걸리는 거리였지만 비가와서인지<br />

더 오래걸렸다. 그리고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나자 정말 도로가 엉망이었다. 오프로드<br />

드라이브를 해본적은 없지만 아마 이런느낌이 아닐까 생각될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렇게<br />

심하게 흔들리는 길이었기에 처음만나는 봉사자들과도 함께 웃으면서 친해질수 있었다.<br />

덜컹거리고 흔들리는 차덕분에 이른아침 긴시간동안 잘수 없었던 친구들, 하지만 덕분에<br />

우리는 나중에 다시한번 캠프의 첫 소감을 말하면서 웃고 친해졌다.<br />

이날은 비가 많이와서 일을 할 수 없었고 대신 캠프 주변 정리만 조금 하였다. 비도 오고<br />

정말 추운날씨에다가 텐트에서 지내고, 먹을것도 많지 않았지만 그런 고통은 잊고 이<br />

몽골의 아름다운 초원을 카메라에 담고 뛰어놀았다. 점심때는 워크캠프 진행팀에서 점심을<br />

제공해주면서 각자의 소개시간을 가졌다. 25 명의 봉사자 이름을 한번에 기억하기는 쉽지<br />

않았다. 점심이후 각자의 짐정리를 하고 같은방을 쓰는 애들과 이야기를 했다. 저녁을 먹은<br />

후에 이 캠프의 주최자인 Bataar 가 캠프소개와 앞으로의 할 일등 계획을 말해주었고<br />

이후에 아이들과 몽골어를 간단히 배웠다. 아이들은 장난이 심했지만 나이가 어려서 귀엽게<br />

봐줄수 있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장난이 심해 당황해했다.<br />

비바람이 몰아쳤던 전날에 비해 다음날 아침 몽골의 풍경은 상상이상이었다. 아침 6 시 반.<br />

아마도 가장 먼저 일어난것 같다. 한 개의 수돗가에 25 명이 몰려 지체될까봐 예상보다 더<br />

일찍일어나야 했다. 아침은 쌀쌀했지만 해가 비쳐 어제보단 훨씬 따뜻했다. 몽골와서 첫<br />

머리감기를 도전했는데 정말 머리가 깨질것 같았다. 이렇게 물이 차갑다니. 한국 집에서<br />

가장 찬물로 틀어도 이정도는 아닐 것 같다. 이런곳에서 매일 생활하는 아이들이 정말<br />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이런 차가운물을 아이들은 웃으면서<br />

장난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거에 비해 정말 좋은환경에서 자라고있구나라고 생각했다.<br />

주로 하는일은 잡초뽑는 일로 일 자체는 크게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리쬐는 태양에<br />

3 일만에 피부가 까맣게 타버렸다. 원래는 살타는건 정말 싫어했지만 여기선 하얀피부를<br />

갖고있는게 오히려 어색할정도였다. 봉사하러 온 사람이 피부가 계속 하얗다면 일을 안한것<br />

같지 않은가. 3 일정도 잡초를 뽑다보니 손에는 잔상처가 많이 났다. 가끔 잡초의 가시가<br />

박혀 따끔따끔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한 팀을 이뤄 사진도 찍고 이야기하면서<br />

일했기때문인지 전혀 힘들지 않고 시간도 빨리갔다. 아이들은 한국노래를 좋아했다.<br />

남자들은 노바디를 좋아했고 여자들은 빅뱅, 이루를 좋아했다. 나와 같이 한국에서 온<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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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한국노래를 계속 불러주니까 여자애들이 좋아했다. 3 일이 금방 흐르고 첫 주말이<br />

찾아왔다.<br />

Part 3. 리틀고비 그리고 팀원들과의 추억<br />

자율적 선택이지만 25 명중 23 명이 리틀고비를 가기로 결정. 완전한 사막은 아니지만 그<br />

근처로써 많은것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리틀고비까지는 버스로 4 시간 가량. 하지만<br />

중간에 점심먹고 도로사정으로 인해 조금씩 쉬다보니 6 시간은 걸린거같다. 그 6 시간은<br />

정말 지루한시간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조금 어색했던 팀원들간에<br />

돈독한 우정을 그때 만들었다. 가이드역할로 같이 따라온 친바. 친바는 한국말을 정말 약간<br />

할수 있었고 노바디를 춤과함께 다 외우고 있었다. 나랑은 나이차가 꽤 나서 항상 나한테<br />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정말 재치있고 귀여운 아이였다. 나도 장난치는걸 좋아해서 친바랑<br />

같이 다른사람들한테 장난치다가 엄청 친해졌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Simon. 시몬이라고<br />

불렀는데 정말 재밌는 사람이었다. 이 두명이 오고 가는 내내 버스에서 재밌게 해주어서<br />

우리도 다들 신나는 여행을 했다.<br />

사막은 이 캠프에서 제공되는 여행이다. 50<br />

달러정도를 내고 가는데 아침과 저녁은<br />

유목민이 제공해주고 점심과 기타 음료수, 간식 등은 우리가 따로 구해야 한다. 진짜<br />

사막은 아니었지만 물이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식수가 귀했다. 그리고 사막에서는 또<br />

다른 몽골의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바위산과 고대의 수도, 사막 등은 관광지로서<br />

더할나위 없이 멋있었다. 그 외에 낙타와 말도 탈 수 있었다. 그곳에 사는 유목민<br />

할아버지와 또 친해져서 마지막 전날 밤에 할아버지 아들과 손자 그리고 나와 한국인<br />

친구가 모여서 보드카를 마시면서 즐거운 저녁을 보냈다. 이곳은 캠프보다 훨씬 별이 많이<br />

보이고 날씨도 따뜻했다. 리틀고비에서는 3 일을 있었지만 마치 3 초처럼 짧은 시간이었다.<br />

유목민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캠프로 돌아왔다.<br />

Part 4. 하루하루가 아쉬움, 그리고 작별.<br />

여행을 하고오니까 남은시간은 겨우 7<br />

일이었다. 그새 일주일이나 흘러버린것이다. 그<br />

기간동안 각자 인상깊에 남은 친구들이 있었나보다. 프랑스인들은 벌써 한 커플이<br />

탄생하였다. 한국인 동생도 일본인 여자한테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친바는 그<br />

동생을 지지하면서 또 재밌게 놀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끝나기 3 일전쯤 되는날은<br />

여기 어린이들이 실로 팔찌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묶기 이런걸 잘 못했는데 열심히<br />

만드는 모습을 보고 애들이 이름을 박거나 엄청 어려운기술로 만든 팔찌를 선물해주었다.<br />

그리고 아이팟터치를 매일 빌려주었더니 고맙다면서 다른 팔찌도 선물받았다. 다음날은<br />

아이들과 다같이 할수있는 게임을 하였다. 재밌는 게임을 많이 구상해서 아이들과 신나게<br />

놀았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는 잡초뽑기를 끝내고 여자들은 작물들을 수확하고 남자들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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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주변에 시멘트블럭으로 울타리 만드는것을 도왔다. 포대에 흙을 나르고 무거운<br />

벽돌들을 옮겨야 했지만 나한텐 이런 힘든일이 오히려 보람차고 좋았다. 힘든일을<br />

같이할수록 이곳 사람들과 더욱 친해지게 되었다. 몽골의 대 초원에서 친구들과 몽골<br />

인부들과 같이 술한잔했던 그 시간은 잊을수가 없다.<br />

마지막 전날 여기서 같이 우리와 일했던 어린이들이 농장을 떠났다. 그들은 울란바토르<br />

시내로 가서 각자 공부를 한다고했다. 우리가 올해 이곳에서 애들과 함께 봉사하는 마지막<br />

팀인거 같았다. 아이들이 떠날 때 우리는 무엇인가 너무 아쉬웠다. 장난은 심했지만 정말<br />

귀여웠던 아이들과 한국 노래를 불러줬을때 엄청 좋아했던 여자애들. 같이 축구도 하고<br />

게임도 하고 일도하면서 많이 친해졌는데 막상 떠난다고 하니까 너무 아쉬웠다. 사진을<br />

많이 못찍어둔것이 안타까웠다. 자원봉사자들끼리는 페이스북이나 이메일 등의 연락처를<br />

미리 받았지만 이 애들과는 연락할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깝게 했다. 그래서 친바와<br />

몽골 봉사자들에게 우리가 연락하면서 그 애들소식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br />

그렇게 애들을 보내고 밤에는 우리끼리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 평소에도 술을 많이<br />

마시지 않은 나지만 이날은 15 일이라는 짧지만 그 이상의 소중한 경험을 나누면서 취하기<br />

전까지 마시고 놀았다. 15 일동안 같이 먹고자면서도 서로 얼굴붉힐일 없고 잘 지냈던일을<br />

생각하니 우리 모두들 정말 착하고 배려심있는 봉사자들이란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우리를<br />

잘 인도해주고 챙겨주었던 멋진 리더 친바. 그 친구와는 아쉬움이 너무 많았다.<br />

Part 5. 15 일간의 꿈<br />

"Work time, Work time, Let's go." 라는 소리에 눈을 떴다. '벌써 일할시간인가' 라고<br />

생각하면서 잠에서 깼지만 일어난곳은 내 방이었다. 아쉬움이 너무 컸던 것일까. 몽골에서<br />

온지 3 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시간이 너무 그립다. 이제는 모두들 자신의 집으로<br />

돌아가 그 추억들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그 시간을 그리워하고있다. 대학교 4 년동안<br />

이렇다 할 봉사활동을 해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정말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만큼 소중한<br />

한때였다. 이렇게 좋은것을 왜 예전에는 알지못하고 놀기만했을까라고 매일 아침 후회한다.<br />

나는 작년에 몽골로 봉사활동을 했던 아는 형한테 이곳을 소개받아서 갔다온것이었다. 우선<br />

이렇게 멋진 경험을 할 수 있게 정보를 제공해준 그 형과 이렇게 봉사활동을 할 수있게<br />

노력해준 유네스코에 먼저 감사하고싶다. 그리고 앞으로 나도 후배들에게 적극적으로<br />

추천할 생각이다. 나는 졸업하고 이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 대신 내 후배들에게<br />

알려주어 내 소식과 함께 그들을 다시 만나길 대신하고 싶다. 같이 봉사했던 친구들 모두도<br />

다시한번 만나고싶다. 그 친구들과 오랫동안 연락하면서 훗날 여유가 되었을때 다시 만날<br />

상상을 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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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br />

노지현 (강원대 산림경영학과 4 년)<br />

VFP02B-10 PHILADELPHIA, PENNSYLVANIA 7 월 18 일-8 월 1 일<br />

_글로벌 마인드를 쌓을 수 있었던 나의 워크캠프!<br />

7 월 18 일 드디어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 로 가게 되었다. 나는 미국 내에서<br />

여행중이여서 비교적 가기 쉬웠다. 드디어 숙소도착! 먼저 와 있던 3 명의 남자캠퍼들이<br />

있었는데...다들 윗옷을 벗고 있어서 나는 너무 깜짝 놀랐다;;내가 잘못 찾아온건지;<br />

이곳에서 과연 2 주 동안 버틸 수 있을지;처음에 막연한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br />

친구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숙소를 소개해 주었다. 일찍 온 덕분에 난 싱글룸을<br />

선택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아주 상태가 나쁘진 않았고 규모가 큰 편이라 좋았다. 맨<br />

처음 입구에 우리를 맞아주는 문구가 있었다.<br />

내 인생에서 이처럼 외딴곳에 그것도 전부 외국애들과 함께 생활 한다는 것은 처음이며<br />

정말 긴장되는 순간이였다. 물론 열정과 호기심과 기대감도 많았지만 나는 영어회화 실력이<br />

좋지 않았기에 많은 걱정을 하였다. 우리는 총 8 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나머지 캠퍼들은<br />

저녁과 밤이 돼서야 도착을 했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인이 나뿐이였는데 캠퍼들 명단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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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한국인 남학생 1 명이 있었다. 좋은건지 나쁜건지..일단은 그 닥 반갑지는 않았는데<br />

마침 그 한국인 남학생은 끝내 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다함께 아침식사를 하였다.<br />

우리들의 총 리더 필라델피아 현지인 Ron 을 다음날 아침에 처음 보았고 흑인인데다가<br />

덩치도 엄청나서나는 잔뜩 겁을 먹었다. 하지만 마음이 정말 따뜻하고 재미있는 분이였다.<br />

첫날 우리는 숙소청소를 하며 캠퍼들과 인사도 하고 여러 가지 얘기도 나눴고 이튿날은<br />

Ron<br />

의 친구분(엄청난 부자였다)집에 초대를 받아서 궁전 같은 집에서 수영도 하고<br />

테니스도 치고 휴식을 취하며 놀았다. 하지만 남자캠퍼들은 지붕을 고치고 여러 가지 일을<br />

했다는...그래도 세상에 공짜는 없는가 부다~<br />

우리캠퍼들의 구성원은 독일 2 명(남,여), 이탈리아 2 명(남,여), 한국(나), 오스트리아(여),<br />

스페인(남), 터키(남) 이렇게 총 8 명이였다. 그중 캠프리더는 이탈리아 남자가 맡았는데 왜<br />

그 사람이 리더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드디어 3 일째 우리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br />

원래는 더 부지런히 일어나야 하는데 우리는 9 시에 기상을 해서 10<br />

시가 다 돼서야<br />

출발준비를 마쳤다. 그래서 현지인 리더 Ron 이 많이 애를 먹었다;;우리가 너무<br />

게을러서...처음에는 서두르기를 바랬는데 서서히 포기했다. 오후 10 시반쯤 돼서야 일터에<br />

도착했는데, 우리가 맡은 곳은 흑인교회 였다. 그곳에 페인트칠과 청소, 창고정리 등을<br />

했다. 그 교회에서만 2 주 동안 일을 했다. 또 하나의 우리들 숙소와 같은 느낌이였다. 너무<br />

친숙해서~ 마지막날 떠날 때는 너무서운해서 조금 더 열심히 할껄..이라는 후회감도<br />

밀려왔지만 난 열심히 일했다는^^한국인은 성실하잖아!<br />

내가 한국에서 가져간 빨간색 목장갑이 대단히 큰 인기를 얻었다. 난 원래 준비성이<br />

투철해서 짐이 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다 도움이 되었다. Ron 은 나에게 계속<br />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난 정말 뿌듯했다~ 우린 교회앞마당 트래픽라인도 새로<br />

만들었다~여자들끼리~ 한 가지 느낀건! 서로 다른 나라지만 여자들이 일을 할 때 수다<br />

떠는 것이 비단 우리나라뿐이 아니라는 것에 친근감이 부쩍 늘었다. 한국에서는 내가<br />

행동이 느린편인데 여기서는 제일 성미 급하고 빠른 애가 되었다. 정말 유럽애들 하루만에<br />

끝낼 일을 몇 일동안 잡고 있다. 좀 답답했었다는. 하지만 천천히 해서 나쁠건 없었다.<br />

창고 정리하러 교회로 이동 중 차안에서~찰칵! 먼지가 많아서 마스크를 챙겨 쓰라고<br />

주셨다.<br />

스페인 친구 Orial 과 창고정리 하던 중 찰칵! 개인적으로 내가 참 좋아했던 친구다~<br />

숙소에 와서 만든 우리들 포스터! 사진을 출력해서 오리고 붙이고~ 사진을 보며 엄청나게<br />

웃었다! 숙소에는 옥상에 있었다. 그곳에서 술도 마시고 얘기도 많이 나누고 너무 더워서<br />

못자는 친구들은 옥상에서 잠을 잤다. 각 나라별로 개인공간을 정해서 페인트로 개성있게<br />

낙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인 지인들은 내가제일 잘 그렸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얘네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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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개성이 독특했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항상 일이 끝나면 필라델피아 다운타운에 가서<br />

쇼핑도 하고 Bar 에 가서 맥주도 하면서 많은 얘기들도 나눴고 그 안에서 우정이 쌓였다.<br />

모두들 너무 좋은 친구들이였다. 하지만 한 가지 흠이 있었다면,,,독일인 2<br />

명 캠퍼가<br />

연인사이였는데 우리들과 잘 끼지 않고 둘이서만 놀거나 보기 좋지 않은 행동;;그리고 그<br />

두 사람이 미성년자(18 살,19 살 이였다)였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갈수 없어서 가고 싶은<br />

곳을 포기하는 일도 발생했다.<br />

흔히들 미국은 밤에 위험해서 못나간다고 하지만 나는 친구들 덕분에 무섭지 않았고 너무<br />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만든 불고기! Ron 은 많은 시간을 전 세계 캠퍼들과 만났기에<br />

한국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자꾸만 불고기를 만들어 달라고 졸라대서 한국인 마켓을 함께<br />

가서 결국 만들었다.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겨우겨우 난생처음 만들어본<br />

‘불고기’ 인기 짱 이였다!! 불고기 만 아니라 ‘비빔밥’도 만들었다~ 이탈리아<br />

여자애가 채식주의자 라서 비빔밥만 먹었는데 엄청 맛있다고 나한테 대체 이 채소가<br />

한국꺼냐고 이름이 뭐냐고 묻는데..난 잘 몰라서 그냥 얼버무렸다. 그리고 김치도<br />

샀는데...나만 먹었다. 고추장도 한국에서 가져갔는데 애들이 맵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br />

결국 많이 남아서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한국을 알리기에 좋았다~한 번씩은<br />

다 먹어봤으니깐<br />

우린 주말에는 일을 안했기 때문에 필라델피아의 유명지를 찾아다니며 여행을 했다.<br />

쇼핑센터에서 각자 헤어진 다음에 시간약속 후 다시 만나는 건 나에게는 너무 어색한 약속<br />

이였지만 금방 익숙해 졌다. 우리나라의 쇼핑문화와는 많이 달랐다.<br />

옥상에서 파티! 이 친구들은 술을 만들어서 잘 먹는다. 샹그리에 라고 온갖 과일을 넣고<br />

럼주를 섞은 후 잠깐 재워 논 다음에 얼음 잔뜩 넣고 마신다. 나는 술을 안 마셔서 그냥<br />

구경만 하고 친구들은 날 위해 아이스티를 사다 주었다~ 이친구들에게 맥주란 그냥<br />

음료수일뿐...한 사람당 맥주를 거의 3~4 캔은 마신 것 같았다. 하지만 취한사람은 단<br />

한명도 없었다~<br />

우리가 일했던 흑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물론 안 간친구도 있었지만. 필라델피아<br />

시장님이 손수 싸인까지 해서 우리 각자에게 주셨던 일종의 상장(?)같은 거였다. 바쁘신<br />

관계로 직접오시지 못하셔서 전달을 받았지만 너무 뿌듯했고 또 교회인들이 목사님을<br />

비롯해서<br />

모두가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서 몸둘바를 몰랐다. 점심도 교회에서 대접해 주셨다. 예배를<br />

마치고 카지노에 갔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꽤 긴시간이였지만 옆자리에 앉은<br />

이탈리아 리더랑 얘기를 하고보니 금방 도착했다. 말이 참 많은 친구였다. 우리나라<br />

카지노와는 많이 달랐다. 일단 사진찍는 것이 허용되었고 카지노 안에 음식점들이 꽉 차<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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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딜러들의 의상도. 역시미국사회에 맞게 짧고 좀 특이한 의상들이었다. 난 20 불을<br />

넣고 2 불을 건졌다. 카지노 바로 앞 해변가에서 그날 밤까지 놀았다...<br />

필라델피아의 유명한 음식!! 치즈스테이크~!! 우린 맛집을 찾아다니며 치즈스테이크를<br />

가게를 결국 찾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이 줄을 서서 기다렸기에 그냥 다른 곳으로 옮겼다.<br />

하지만 너무 맛있었다!! 미국은 Bar 의 개념이 우리나라처럼 그냥 술집 이 아니라 오전부터<br />

문을 열기 때문에 식사도 할 수 있고 간단하게 간식도 먹을 수가 있다. 물론 대낮부터<br />

맥주를 마셔도 무관하다. 애들은 치즈스테이크와 맥주를 마셨고, 난 그냥 물을<br />

마셨다~맥주종류도 참 다양했다^^<br />

워크캠프를 마치며...처음에 두려움이 있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그 두려움이 열정과<br />

용기로 바뀌게 되었고 나의 마인드를 바꿔주었으며 나의 시야를 전 세계로 돌릴 수 있었던<br />

큰 경험 이였다. 미국여행을 두 달 동안 했지만 필라델피아에서의 워크캠프 2 주 의<br />

생활보다 더 기쁘고 행복했던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대학교로 돌아가서 교수님의<br />

권유와 부탁으로 미국여행과 유네스코워크캠프를 소개하였고 후배들에게 적극권장 하였으며<br />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기회는 많으니 부디 관심 있게 알아보고 폭넓은 사고를 쌓기를<br />

바란다고 알렸다.<br />

모두가 나의 워크캠프일정을 보고 놀라워했으며 대견하다는 칭찬은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br />

무사히 즐겁게 워크캠프 일정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생김새와 나라는 다르지만 그 안에서<br />

깊은 우정을 쌓을 수 있었던 친구들 덕분 이였던 것 같다. 내 생애 결코 잊을 수 없는<br />

값지고 귀한 시간들 이였다. 이런 귀한 프로그램을 허락해준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청년팀<br />

분들과, Jane Skakel 께 감사를 드립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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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IN<br />

강민정 (홍익대 영어영문학과 4 년)<br />

SVIEK025 ABANTO-2 8 월 1 일-15 일<br />

_다시 떠난 워크캠프<br />

작년 라오스로 홍익봉사단 동계 국제봉사활동을 다녀온 후로 국제교류와 국제봉사에 많은<br />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원하게 된 유네스코 국제워크캠프. 또 다른 이유는<br />

홍익봉사단의 경우 봉사 분야가 대부분 교육, 그리고 부분적으로나마 보수이기 때문에,<br />

이번에는 보수 쉽게 말해 일을 하는 분야를 지원해 보고 싶었다. 학교 홈페이지를 수시로<br />

들락날락하며 유네스코 워크캠프 공지가 뜨기만을 기다렸고, 서류와 면접을 통과해 드디어<br />

정열의 나라 스페인으로 떠나게 되었다.<br />

캠프 첫 날.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터키에서 워크 캠프 참가자들이 도착했다. 처음에는<br />

늘 그랬듯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2 인 1 조로 서로에게 자기소개를 하고, 다른<br />

친구들에게 파트너를 소개하는 활동을 시작으로 워크캠프는 시작되었다.<br />

첫 날과 둘째 날은 일 보다는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br />

일어나 우리가 일하는 장소와 주변 지역을 걸어 다니며 설명을 들었다. 비오는 날 자그마치<br />

3 시간을 걸었다. 다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들어왔다. 모두에게 나라 별로 종이<br />

한 장씩을 나눠주며 자신의 나라를 소개하라고 하자, 모두들 언제 피곤했냐는 듯이 토론을<br />

하고, 그림을 그리고, 꾸미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이 캠프에서 한국인은 나와 기아에서<br />

선발되어 온 동생 이렇게 두 명이었다. 우리 둘은 머리를 맞대고 한국적인 것, 어떤 것들로<br />

한국을 소개하고 알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저번에 왔던 팀의 포스터를 보면서 굉장히 우리<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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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잘 소개했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잘못 그려진 태극기를 보며 마음 한 구석이<br />

씁쓸했다. 우리는 전체적인 한반도와 태극기, 그리고 한글과 한국 전통 음식을 소개했고,<br />

다른 나라 친구들에게는 좀 더 친근한 SAMSUNG, HUNDAI, LG 와 같은 세계적으로<br />

활동하고 있는 기업들과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기문 장관, 박지성·김연아 선수를<br />

소개했다. 다른 나라 친구들도 자신의 나라의 지역이랄지, 역사 등을 설명하고 프랑스는<br />

자국의 유명한 명품 브랜드를, 이탈리아는 종교와 유명한 음식을, 터키는 여러 유적지를,<br />

스페인은 스페인과 바스크 지방의 다름에 대해 설명하였다.<br />

셋째 날부터 시작된 워크캠프의 주된 활동이라 할 수 있는 노동. 드디어 시작이다. 일은<br />

하루에 4 시간 정도밖에 하지 않아서 짧은 시간이라 하겠지만, 굉장히 힘들었다. ‘짧지만<br />

강하게’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원 조성을 위해 GORSE, 다시 말해 가시덤불이라<br />

불리는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말이 잡초지 실상은 내 키를 훌쩍 넘는 가시 나무였다.<br />

팀은 3 조로 나뉘었는데, 각각 하는 일도 다르며 3 일에 한 번 씩 돌아가면서 일을 바꿨다.<br />

가시 나무의 크기 별로 조를 나눈 것 같다. 키 큰 가시 나무의 경우, 캠프에서 일하는 분이<br />

기계로 나무를 자르면 그것들을 모아다가 한 곳에 쌓는 일을 했고, 키가 작은 가시 나무의<br />

경우 가위로 나무를 자르고 땅을 파서 뿌리를 캐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조는 차콜리라<br />

불리는 식물 기르는 일을 도왔다. 일이 생각보다 간단해 보이지만, 가시나무가 내 키를<br />

훌쩍 넘을 만큼 크고 무거워 운반하기 힘들며 산비탈에서 일하기 때문에 서 있기가 쉽지<br />

않았다. 그리고 가시 나무가 어찌나 따갑던지……. 일은 힘들었지만,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br />

서로 도울 수 있는 팀원들이 있어서 즐겁고 신나게 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이<br />

힘든 만큼 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br />

일이 끝나면 샤워와 함께 점심을 먹고, 휴식시간을 가졌다. ‘씨에스타’라 불리는<br />

스페인의 달콤한 낮잠시간 이랄까?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고된 노동으로 인해<br />

모두들 피곤했던지 캠프기간만큼은 다들 씨에스타 문화에 스페인 사람들 못지않게<br />

익숙해지게 되었다. 매일 아침 가시 덤불을 제거 하는 일 외에도, 집안일도 다들 열심히<br />

했다. 그 세 개의 조가 돌아가면서 WASH, CLEAN, MEAL 을 담당했다. WASH 팀은 식사<br />

후 설거지를 담당했으며, CLEAN 팀은 화장실 청소 및 집 안 복도 청소를, MEAL 팀은 식사<br />

준비를 돕는 일을 했다. 이렇게 조를 나눠놓으니, 어느 누구하나 빠지는 사람 없이 다 같이<br />

참여할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br />

가시 덤불을 제거하는 일 외에도, 많은 활동들을 했던 것 같다.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br />

것은 뭐니 뭐니해도 각 나라별 요리하기였던 것 같다. 작은 주방 하나에서 모두들 한꺼번에<br />

음식을 만드느라 한 도마에 세 사람이 붙어서 칼질을 하고, 불 쓰는 일이 많이 다들<br />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정신없고 시끌벅적한 활동이었다. 우리는 잡채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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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를 만들었고, 프랑스는 라다뚜이, 스페인은 또띠아, 이탈리아는 파스타, 터키는<br />

계란요리를 했다. 다들 자신들이 만든 요리에 기대 반, 걱정 반이었지만, 다행히도 우리의<br />

작은 파티는 맛있고 즐겁게 끝이 났다.<br />

야외 활동도 굉장히 많았다. 점심을 먹고 난 뒤, 2<br />

시간 정도는 잠을 자거나 자유<br />

시간이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반 정도는 다 같이 나가서 게임을 하거나, 수영을<br />

하러 가거나, 숙소 주변을 걸었다. 우리나라의 피구와 비슷한 게임도 하고, 우리에게는<br />

조금 생소한 스페인에서 자주 하는 수건 뺏기 게임 등 함께 뛰어다니는 게임들도 많이 하고<br />

근처에 있는 동굴을 구경하고 오기도 했다. 그리고 캠프기간동안 밤에 두 번의<br />

캠프파이어를 가졌다. 저녁으로 맛있는 바비큐와, 불에 다 같이 모여앉아 기타치고 노래<br />

부르며, 이야기를 나누고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 마지막 날에는 축제라고 하기엔 너무<br />

작지만, ‘트리아노 축제’에 참여해 동네 주민들과도 어울리는 시간을 가졌다.<br />

저녁 시간에는 세미나를 가졌다. 주제는 경제위기나 고령화 사회에 대한 유럽의 전반적인<br />

경제문제와 에너지 절약과 효율성에 관한 에너지 문제를 다뤘다. 아무래도 유럽 친구들이<br />

많아서 처음에 경제에 관련된 주제는 유럽에 관련된 것들이 많았는데, 이야기를 하다보면<br />

각 나라의 경제 사정이랄지 복지제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 많은 질문들과 이야기들이 오가게<br />

되어 유럽에 관한 것만이 아닌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에너지 절약에 관한<br />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특히나 쓰레기 분리수거에 대한 이야기도 주제가 아니었음에도<br />

불구하고 여러 번 거론되었다. 우리나라나 이탈리아의 경우 쓰레기를 버릴 때 그 분리가<br />

세세하게 항목별로 나눠져있는데 반해, 스페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캠프의 주제가<br />

‘환경’에 관한 것이었기에 쓰레기 분리수거에 관한 내용은 꽤나 큰 비중을 차지했다.<br />

주말에는 일적인 부분 외에도 스페인, 다시 말해 바스크 지방 문화 탐방을 위해 캠프<br />

밖으로 떠났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유명한 빌바오 지역에 다녀왔고, 프랑스 파리<br />

에펠탑과 같은 방식으로 지어진, 상징적으로 유명한 다리에도 다녀왔다. 그리고 바스크<br />

지역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의회이자 교회에 가서 설명을 듣고 비디오를 봤다. 내가<br />

온 이곳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 단지 스페인이라고 지원했는데, 문화 탐방과 세미나<br />

시간을 통해서 같은 나라지만 지역적 차이, 다름에 대해서 배웠다. 한 나라지만, 이들은<br />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르다. 쉽게 예를 들면, 스페인이 월드컵에서 승리를 하면 바스크<br />

지역 사람들은 이를 자신의 나라가 승리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별로 달가워하지<br />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 스페인 워크 캠프에 오지 않았다면, 이만큼 더 자세하게 알지<br />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br />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보름간의 캠프. 늘 하는 말이지만 좋았다, 아니 좋다. 라오스에<br />

다녀온 작년이나, 스페인에 다녀온 지금이나, ‘뭘 배워왔는가?’라고 묻는다면 난 분명<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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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라고 대답할 것 같다. 배움이라. 남들은 국제봉사, 다시 말해 해외교류를<br />

하고 돌아오면 많은 것을 배워왔다고 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물론, 배움이 없는 것은<br />

아니지만 배움이라는 단어보다는 느낌, 무언가 가슴이 한가득 차 있는 느낌이 나에게는 더<br />

와 닿는 것 같다. 난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담아 돌아왔으니까. 지금은 일상으로 다시<br />

돌아와 있고, 내가 다시 또 캠프에 참여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아쉽기도 하지만,<br />

이번에도 또 한 가지 소중한 기억들이, 추억들이 생겼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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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IN<br />

김미희 (홍익대 디지털미디어디자인전공 4 년)<br />

SVIEK014 TOLOSA-2 7 월 16 일-29 일<br />

_스페인이 아닌 바스크, 그곳은 바로 바스크다.<br />

대학을 입학할 때, 나는 나 스스로에게 세 가지 약속을 했다. 졸업할 때 까지 하나,<br />

장기기증을 신청하자. 둘, 국토대장정을 하자. 셋, 해외 봉사활동을 나가자. 이 세 가지를<br />

하기로 약속했었다. 졸업반이 될 때까지 앞에 두 가지는 모두 했지만 마지막 해외<br />

봉사활동은 해보지 못했다. 물론 해외로 나가는 것이 나에겐 쉬운 것이 아니었기에 휴학 중<br />

일 년 동안 참여한 국내 봉사활동으로 만족하자 했었는데 마침 학교에서 지원하는 유네스코<br />

워크캠프를 발견해서 지원하게 되었고 운 좋게도 합격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스페인을<br />

선택했다. 신입생 때, 라틴문화가 좋아 스페인어를 배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생에<br />

한번은 꼭 스페인을 만나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br />

7 월 12 일 나는 졸업 작품 준비는 잠시 미뤄둔 채 스페인으로 떠났다. 마침, 스페인이<br />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마드리드와 온 도시는 축제 분위기였다. 같은 캠프에 합격한<br />

최형주 학우와 산세바스찬에서 만나 버스를 타고 워크캠프 장소인 톨로사로 갔다. 스페인<br />

북부는 생각보다 날씨가 좋지 않았다. 지중해를 안고 있는 나라라 매일 쨍쨍하고 따뜻할 줄<br />

알았는데 흐린 날이 많았고 아침과 밤은 지구 반대편에 와있는 것처럼 추웠다. 워크캠프를<br />

가는 그 날도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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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로사는 아주 작은 도시였다. 출발하기 전 인터넷에서 톨로사를 검색해 봤지만 거의<br />

정보가 나오지 않을 만큼 한국엔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도시였다. 그 곳은 스페인이 아니라<br />

바스크였다. 스페인 국기 대신 희색, 녹색, 빨간색의 바스크 국기를 걸어놓고, 사람들은<br />

바스크 어를 쓰고, 스페인과는 차별된 음식, 인종, 역사,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br />

스페인과 프랑스에 속해 있지만 계속해서 그들은 바스크 country 의 독립을 외치고 있다.<br />

오후 여섯시 반에 우리는 약속한 타운 홀에서 만났다. 프랑스인 10 명, 한국인은 나를<br />

포함한 3 명, 독일인 1 명, 러시안 1 명, 스페인 리더 3 명 이렇게 총 18 명이었다. 우리는<br />

간단히 워크샵을 받고 다과회를 가진 후 숙소로 이동하였다. 숙소는 다운타운과 좀 떨어진<br />

곳에 위치한 초등학교 체육관이었다. 처음엔 숙소를 보고 당황하였다. 허름한 침대들만<br />

놓여진 강당이었고 게다가 남녀 모두 같이 지내야 했다. 혹여나 베드버그가 있을까<br />

찝찝하고 세탁기도 없었고 화장실에는 냄새가 많이 나서 불만이 많았지만 금방 적응했다.<br />

다행히 베드버그나 해충은 없었고 모기도 많지 않았다. 비가와도 강당에서 농구나<br />

배드민턴을 할 수 있었고, 다 같이 모여 있으니 누구 하나 소외 되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br />

친해질 수 있었다. 아침마다 불편한 침대 때문에 허리 통증을 호소하긴 했지만 말이다.<br />

우리가 일을 하던 곳은 숙소 뒤에 있는 산이었다. 산에 있는 타워를 보건 하는 일이었는데<br />

타워 까지 가려면 거의 한 시간을 등산을 해야 했다. 아침에 고작 핫쵸코와 쿠키를 먹고<br />

등산을 해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나중에 내가 여행 겸 까미노 데<br />

산티아고를 걷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br />

타워는 큰 돌들로 높게 쌓여 있었는데 타워 외부와 내부를 감싸는 흙과 바위들을 제거하는<br />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삽질을 해서 흙을 파내고 파낸 흙을 산 밑으로 버리고, 드러난<br />

바위들도 옮겨 산 밑으로 굴려 보냈다. 이게 군대에서 한다는 그 삽질 같은거구나.<br />

평소에는 해보지도 않던 삽질에 무거운 돌과 흙들을 지고 다녀서 처음에는 몸이 마구<br />

쑤시고 힘들지만 익숙해지면서 여자아이들과 서로 팔뚝에 배긴 알통을 자랑하기도 했다.<br />

고된 일이었지만, 스페인 리더들이 굉장히 시끌벅적하고 용감해서 즐거운 분위기에서 일을<br />

할 수 있었다. 중간에 잠깐 스낵타임을 가질 때에는 서로의 언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br />

우리에게 일을 지도했던 앙헬이 생일이어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데, 영어, 스페인어,<br />

프랑스어, 한국어, 러시아어 모두 노래가 똑같아서 신기했다. 오후 1 시쯤에 일이 끝나면<br />

다시 한 시간정도 걸어 산을 내려와야 했다.<br />

일하는 시간 외에는 액티비티를 하거나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액티비티는 여러 가지<br />

활동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평일에는 숙소 내에서 오후, 저녁에 걸쳐 두 번 액티비티가<br />

있었다. 바스크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스포츠, 댄스, 팀을 나눠서 경쟁하는 퀴즈풀이도 하고,<br />

노래와 춤 대결을 하는 가라오케, 근육을 풀어주는 마사지도 배웠고, 마니또를 위해 선물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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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 주는 시간도 따로 가졌다. 가끔 톨로사 다운타운으로 나가 수영장을 갈 때도 있었고<br />

톨로사 식당에서 각자 자신들 지역의 전통음식을 요리해 같이 식사하기도 했다. 바스크<br />

스포츠 중에 특이한 게 있었는데 라켓을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공을 벽에다 치는 스쿼시<br />

같은 운동이었다. 수영장을 갈 때에는 다 같이 갔다가 각자 시간을 정해놓고 숙소에<br />

돌아오는 식이었는데 수영을 잘 하지 못하는 나는 일찍 수영장을 나와 톨로사를 느긋하게<br />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우리에게 바스크라는 곳이 생소하듯이 그들에게도<br />

아시안, 한국은 생소한 듯 하다. 동네를 한 바퀴 돌면 아이부터 어른까지 신기한 듯 나를<br />

쳐다보곤 했다. 처음에는 그런 시선이 불편했지만 “까이쇼”하고 바스크 어로 인사해주니<br />

다들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둘째 주 화요일에는 톨로사 다운타운으로 가서 각 나라의<br />

전통음식을 만들었는데 우리는 감자전과 호박전을 만들었다. 마음 같아선 라면이나<br />

고추장이 잔뜩 들어간 고추장 불고기를 하고 싶었지만 재료가 없었다. 예전에 호주에서<br />

감자전을 만들어 스위스 친구들한테 주었는데 반응이 좋아 재료 구하기 쉬운 감자전을 하게<br />

되었다. 결과는 모두들 대만족. 그 날 식사는 평소 숙소에서 요리사가 해주던 음식보다<br />

훨씬 완벽했었다. 가끔 점심을 먹고 2 시부터 5 시까지 자유 시간이 주어지기도 했다.<br />

스페인의 시에스타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낮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br />

캠퍼들과 모여 게임을 하거나 운동을 할 수 있었다. 톨로사 다운타운으로 나간 적도<br />

있었는데 시에스타 동안에는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고 길거리에는 개미 한 마리도<br />

지나다니지 않을 정도로 도시가 완전히 죽어있었다. 처음에는 적응이 안되서 답답하고 이해<br />

안됬지만 차츰 시에스타에 적응하고 가게 문 열 시간을 알아서 맞춰서 찾아가게 되었다.<br />

주말에는 숙소를 벗어나 톨로사의 시장이나 박물관을 관람하기도 하고, 바스크 지역의<br />

축제나 해변가로 피크닉을 나갔다. 톨로사에서 기차로 한 정거장 거리인 알레기아 라는<br />

곳에서 바스크 축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쪼리소라는 스페인 전통 음식을 무료로 나누어<br />

주었다. 아마도 내가 스페인에서 먹었던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걸로 기억에 남는다.<br />

공짜여서 더 그랬던건지 모르겠지만. 첫째 주 토요일과 둘째 주 토요일에는 비스카이아와<br />

기푸즈코아 지역의 해변을 갔었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은 비스카이아, 기푸즈코아,<br />

알라바, 나바라 지역으로 나뉘는데 비스카이아와 기푸즈코아 지방은 아름다운 해변을<br />

가지고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한다고 한다.<br />

워크캠프가 끝나기 전날에는 서로에게 롤링페이퍼를 썼다. 한글로 써 주는 친구들도 있어서<br />

너무 고마웠다. 나중에는 자기 이름도 수첩에 한글로 써달라고 했는데 굉장히 신기해했다.<br />

독일 친구는 그냥 글자인데도 동그라미와 직선에서 굉장한 조형미가 느껴진다며 칭찬했다.<br />

전혀 실감하지 못했는데 롤링페이퍼를 쓰면서 벌써 2 주가 다 갔구나. 정 들었던 친구들과<br />

헤어질 준비를 하려니 섭섭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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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에는 톨로사 다운타운에 나가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 곳에는 앙헬과 우리의<br />

식사를 매일 준비해 주시던 요리사 아주머니도 오셨다. 새벽까지 춤을 추고 놀다가 숙소로<br />

들어왔는데 프랑스 친구들은 못내 아쉬웠던지 자기들끼리 손전등을 키고 모여 밤새 수다를<br />

떨었다.<br />

워크캠프를 끝마치고 헤어지는 날도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처럼 비가 왔다. 하늘도 우는구나.<br />

언제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꼭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뜨거운 포옹을 나눈 후 모두<br />

헤어졌다. 바로 프랑스나 마드리드로 돌아가는 친구들도 있었고, 나와 같이 산세바스찬으로<br />

가는 친구도 있었다. 오로라와 마틸데라는 친구와 산세바스찬까지 같이 가서 저녁을 먹고<br />

헤어졌다. 정말로 헤어질 때가 되니 마구 눈물이 났다.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았는데<br />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자꾸 헤어지던 순간이 생각나 울컥 눈물이<br />

나려한다.<br />

보고서를 쓰다보니 내가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 같다. 이름은 워크캠프였지만 일이<br />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을 하기 위해 워크캠프를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만나고 이해하기<br />

위해 워크캠프를 갔다고 생각한다. 막상 일을 하면서도 봉사의 마음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br />

친구에게 이런 맘을 전할 수 있을까, 이 곳과 한국과 다른 곳은 무엇일까 등등 이런<br />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스페인이 아닌 바스크 지방의 톨로사. 고작 스페인의 동북부<br />

지방에 머물렀던 것 뿐인데도 스페인의 역사와 사회의 문제나 생활상등을 모두 이해할 수<br />

있었다. 어쩌면 그 곳은 자신들의 이름이 아닌 스페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고 있어서<br />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 온 도시에 바스크 지도와 국기를 걸어놓고 있는<br />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유명한 곳이나 볼거리가 많은 특이한 곳은 아니었지만 훨씬 많은<br />

추억과 지식을 얻어 왔다.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 그래서 더욱 나만의 도시와<br />

추억장소가 된 것 같아 뿌듯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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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ONIA<br />

김준영 (한양대 경영학부 3 년)<br />

EST12A Tarsi Adventure Camp 7 월 19 일-8 월 1 일<br />

_열정으로 시작하여, 행복의 향기로 남은 짧고도 긴 여행<br />

1 년 가까이 머릿속으로 꿈꾸어 오던 워크캠프를 실천으로 옮길 기회가 왔다. 전역한 이후<br />

친구들과 공부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행과 워크캠프를 위해 해외를 나간다는 것은<br />

주위사람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엄청난 도전이었다. 경유지를 거쳐 2 일 만에 도착한<br />

에스토니아 탈린! 우선 주위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유럽에 도둑이 많았던 경험에 난 잔뜩<br />

긴장하고 있었다. 바로 info 로 달려가서 캠프지로 가는 방법을 물었다.<br />

Meeting 장소에 하루 만에 도착했지만 숙소를 예약하지 않아서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잠<br />

잘 곳을 마련했다. 동양인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작은 마을 탈린 (Tallin), 밤 11 시에<br />

도착하여 혼자 두려움에 떨던 나에게 힘들게 찾은 숙소는 행운이었다. 왜냐면 캠프<br />

참가자를 그 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다음날 약속시간까지 뭘 할지 고민하던 나는 그만<br />

기쁨의 눈물을 찔끔 흘렸다.<br />

다음날 아침부터 미팅 시간까지 Tallin 시내를 구경하였다. 그리고 약속한 장소로 갔다.<br />

오우~! 거의 모든 참가자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서먹서먹해서 말 한마디도 없이<br />

2 시간가량을 기차를 타고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Tarsi 로 향했다. 우리가 머물렀던<br />

Tarsi 는 정말 시골 마을이었다. 4 시간이면 국가를 횡단할 수 있는 나라인, 에스토니아의<br />

수도 Tallin 에서 기차를 타고 2 시간 정도를 와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기도 맑고 물도<br />

맑고 자연도 살아있고~ 진짜 좋았다. 첫 날은 훈련 워크샾에서 했던 것처럼 이름외우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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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등 여러 가지를 했다. 처음에 얼떨떨한 나머지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br />

못했다. 프랑스, 독일, 체코, 이스라엘, 독일인들이 있었고 동양 사람, 한국사람은 둘이여서<br />

많이 긴장했었나 보다.<br />

<br />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랑스식 영어가 심하게 이상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 빼고는<br />

프랑스어를 다 할 줄 안다는 것에 더더욱 긴장을 했었나 보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가고 그<br />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일이 시작되었다. 먼저 길을 만들기 위한 나무를 하는 것이었다.<br />

우리들은 모두 열심히 나무를 썰고, 나르고 손질하고 하였다. 모두가 말이없이 집중하여<br />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처음에 일만 열심히 하길래 다들 재미없는 사람들인 줄<br />

알고 착각하고 있었다. 둘째 날부터 우리의 할 일은 늪지대 위에 길을 만드는 것이었는데<br />

총 4 개를 만들었다. 파진부분은 삽으로 흙을 파서 나무를 심고 망치로 다듬고 작은 나무로<br />

덪대고... 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은 10 부터 12 시까지 일을 하고 한 시간은 점심을<br />

먹으면서 쉬다가 또 2 시부터 일을 하고 숙소로 향했다. 가끔씩 점심 이후의 한 시간의<br />

휴식시간은 정말 꿀맛 같았다. 샤워를 하고 점심을 먹고 유럽의 자랑거리(?)인 시에스타<br />

뒤에 우린 다시 일을 하였다. 일 이후에는 activity 를 했다. 그런데 다른 캠프와는 달리<br />

activity program 이 모두 짜여져 있었다. 식사도 그 캠프 호스트 내외분이 해주셨다.<br />

덕분에 에스토니아의 모든 요리는 거의 다 먹어보고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심하게<br />

건강해져서 돌아왔지만 말이다.<br />

식사시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에서는 세끼 모두 밥을 먹는다고 하자 모두 믿을 수<br />

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던 일이다. 그리고 내가 ‘아주 맛있다’를 배워서<br />

식사시간마다 말을 하니까 주인아주머니께서 너무나도 좋아하셨다. 나중에 고추장을<br />

맛보였는데 어떤 아이는 먹어보더니 맵다고 눈물을 흘리고, 어떤 아이는 맛있다고 아무거나<br />

찍어먹고.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br />

태어나서 늪지대도 처음이오, 나무하는 것도 처음이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새로운<br />

것이었다. 오염 되지 않은 마을에서 발트해의 강렬한 직사광선을 쬐며 일을 한다는 것은<br />

정말 힘든 일이었지만 우리 조(3 명씩 조를 나눴다)의 친구들이 도와줘서 나는 캠프 내내<br />

즐겁게 일만 했다. 솔직히 처음 이 일을 하면서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힘든 일을 하면서<br />

서로를 더 많이 도와주게 되고 이야기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특히 우리 조는 독일,<br />

프랑스 그리고 한국인으로 구성된 매우 inernational 한 group 이었다. 서로 영어로 이야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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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틀린 발음도 고쳐주고 자기나라 노래도 불러주고 장난도 치면서 힘든 일이 지겹지<br />

않게,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특히 나의 팀명을 만들자는 제안에 ‘CCAP’란 이름을<br />

만들고 난 뒤 우리의 teamwork 는 한층 두터워졌다. 그리고 다른 group 의 아이들과 일할<br />

때는 한국 노래를 불러주면서 그들에게도 가르쳐 주곤 했다. 항상 일을 하면서 지겨워질 듯<br />

하면 장난 거리를 찾아내서 놀았다. 그리고 activity 시간에는 배구, 테니스, 활쏘기,<br />

말밥주기, 악기연주하기, 사우나 기구만들기, 민속 노래배우기, 민속춤 배우기 등등<br />

이때가지 내가 해보지 못한 것들을 많이 했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체험하고 느끼는 그<br />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재미났다. 가장 기억에 남는 activity<br />

는 사우나 기구 만들기와<br />

민속노래 배우기였다. 특히 민속노래는 마을사람들이 다 모인 무대에서 전통 음악을 배우는<br />

학생들이 와서 연주를 하면서 노래와 음악을 배웠기에 그 시간이 정말로 기억에 많이<br />

남는다. 캠프가 알차게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어서 하루가 번개같이 지나갔다.<br />

자유시간에는 수영장에 가서 놀기도 하고 끊임없는 대화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나는 내가<br />

가져간 사진들을 보여주며 한국에 대해서 설명도 해주었다. 고등학교, 대학교, 전공이야기,<br />

가족이야기, 어릴 때 이야기 등등. 특히 한복을 입은 사진을 보며 아이들은 너무 예쁘다고<br />

칭찬을 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한복만큼 멋진 옷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서로<br />

전통무용을 말하다가 모두가 서로들 보고 싶다고 해서 각각 보고 배우기도 하였고, 나 또한<br />

한국 춤도 살짝 보여주고 왔다. 서로의 엄청난(?) 박수갈채와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br />

주말에는 에스토니아의 제주도와 같은 큰 섬을 여행하였는데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br />

자유롭게 수영하고 자유롭게 둘러보며 우리가 직접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br />

목적지에는 맛있는 케익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더욱더 열심히 찾아갔다. 또 밤이면 밤마다<br />

유럽의 술 문화를 즐기기에 바빴다. ‘밤’ 하니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떠오른다. 그<br />

마을에서 며칠 지내다 보니 우리가 있는 지역으로 캠핑온 친구들이 우리를 숲속으로<br />

초대했다. 그 마을은 밤에 별이 쏟아져 내릴 정도로 많았고 달빛이 너무 밝아 서로의<br />

얼굴이 다 보일 정도였다. 그런 곳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에스토니아 전통 음악을 들려주며<br />

서로 같이 부르자고 했고, 또한 에스토니아 맥주와 함께 우리는 모닥불 주위에 앉아 달빛에<br />

서로를 보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며 놀았다. 그 기억은 아마 평생가도 못 잊을 것이다.<br />

그날 밤의 별똥별이 떨어지던 순간까지도 말이다. 캠프 막바지에 있었던 며칠간의 주변<br />

마을 축제에서는 친구들과 젊음을 불사르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날이 너무 빨리<br />

지나간다고 불평까지 할 정도로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추억을 새기며 신나게 지냈다.<br />

하나하나 신경써주며 일도 열심히 잘하고 영어도 잘하던 공대생 마빈, ‘오빠’라는 의미를<br />

가르쳐 주자 나에게 항상 ‘동생’이라고 부르며 늘 내 곁에서 나를 도와주고, 마지막에<br />

나에게 “You are the best!”를 말해주던 솔레느, 우리 팀의 영어선생님이었던 다씨, 나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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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며 한국에 대해서 질문을 해서 나를 당황하게 했던 3 개국어의 달인 미셀, 말은 별로<br />

많이 하지 않았지만 끝까지 나와 인연이 닿았던 이반, 나를 늘 배려해주던 토마스,<br />

에스토니아식 영어로 열심히 에스토니아어를 번역해주던 캠프리더 앨런, 나를 보고<br />

‘한국의 빛’이라고 에스토니아 말로 극찬을 해준 이랄, 한국의 인사법을 가르쳐 주자<br />

열심히 그 인사만 하던 정말 착한 캠프호스트의 아들 메르트. 등등 일일이 나열할 수는<br />

없지만 모두모두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고 마음에 남는 사람들이다. 떠나는 날,<br />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지금은 그리워진 유럽식 인사를 모두에게 하며 나는 너무 아쉬웠다.<br />

헤어진다는 것이, 앞으로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 2 주를 같이 보낸 사이에서 서로들<br />

인정하기 싫었던가 보다. 그리고 모두의 눈에는 15 일간의 아름다운 추억과 아쉬움이 담긴<br />

물방울이 맺혀있었다.<br />

이번 경험은 하나부터 열까지 나에게는 낯선 체험이었고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짧은 시간에<br />

세상을 배우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br />

많았던 만큼 조용히 혼자 생각할 시간도 많았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까지 너무나도 숨가쁘게<br />

달려온 나였다. 이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방황’이라는 것을 지난 학기 때 겪으며<br />

숨막혀하고 있던 나에게 무작정 짐을 꾸려 떠난 캠프는, ‘나’를 선물해 주었다. 내가<br />

소중하다는 것과 나약하다는 것과 내 존재에 비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과 나에게<br />

솔직해지는 방법을 배운 것 등등...<br />

솔직히 지금 나에게 하루 종일 해도 모자라는 캠프 이야기를 종이에 요약해서 쓴다는 것은<br />

고통이다. 어떻게 하면 나의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글로 풀어낼 수 있을까 고민을 해보지만<br />

할 수가 없다. 단지 직접 느껴보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br />

우리는 약속하지 않아도 모두 다 기억하고 있다. ‘2010 Tarsi Adventure'를 말이다.<br />

“Beautiful! Super! Nice!”<br />

하루 일을 마치고, 우리는 저녁에 맥주 한잔씩, 노래를 들으며 별을 보며 모닥불을 피우며,<br />

한마디씩 해 주었다. 이때 우리 캠프원들이 나에게 해준 말이다. 그 후 우리는 서로 춤을<br />

추며 드럼을 연주하며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는데, 간단한 동작과 바람, 백야의<br />

어둠이 어우러져 은근히 멋있게 되었다. 사실 외국인들과는 처음으로 함께 서로 노래를<br />

부르고 춤을 췄는데 굉장히 떨렸지만 기분이 좋았고 다음에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br />

얻었다. Tarsi 친구들에게 감동을 받고 기쁨을 얻었다.<br />

나의 마음에서 너의 마음으로, 나의 눈빛과 너의 눈빛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묻어있는 나의<br />

7 월 28 일 일기의 한 부분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출발할 때 나에게 썼던 편지를<br />

읽었다. 짜여져 있던 생활에서 벗어나 무언가의 기분전환의 요소가 필요했고, 그래서<br />

현지에 가서 그곳에 확실히 미칠 수 있을 것 같다는 현실 도피적인 글이 써 있었다. 그랬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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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재보지 않고 짐을 싸서 훌쩍 떠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내<br />

마음에는 워크캠프에 가는 목적의식이 불타기는 했었나 보다. ‘그곳에서 그들과 눈 한번<br />

더 맞추고 한번 더 안아주고 같이 노래 부르고, 그들과 똑같은 여건에서 함께 생활해보는<br />

것, 그것이 진정 내 마음과 관심이 그들에게로 쏟아지는 증거일 것이다’라고 끝줄에 써<br />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나는 내 말에 조금이나마 실천을 하고 돌아온 것이 아닐까라는<br />

위로의 생각을 해 본다.<br />

나는 어릴 때부터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와 함께 있으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br />

행복해 질수 있도록!’ 말이다. 아직까지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br />

있고 앞으로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내가 에스토니아에서 우리 Adventure<br />

참가자들에게, Tarsi 마을 사람들에게 행복의 향기를 건네준 사람이 되었기를 바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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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ONIA<br />

최진 (홍익대 프로덕트디자인전공 3 년)<br />

EST20 VILSANDI NATIONAL PARK 8 월 9 일-22 일<br />

_나와 180 도 다른 삶을 흡수하다<br />

원래 그리스 아트 분야에 지원했으나 캠프가 취소됐다. 많이 실망했지만 학교에서 연락오길<br />

에스토니아 캠프에 자리가 있는데 참가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사실 처음 듣는 나라여서<br />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고 북유럽의 만만치 않은 물가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br />

내가 다른 곳은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만 언제 북유럽을 한번 여행해 볼 수 있겠나<br />

싶었고, 그리스 캠프는 거의 취소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뜻밖에 생긴 사고에 대해 어쩌면<br />

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겨 신청을 했다. 사실 에스토니아라는<br />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고정관념도 없었고 다만 호기심만 있었다. 가기 전<br />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를 만들기로 하고 당면과 신라면 불고기 소스를 챙겨갔고,<br />

놀이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을 수도 있다 생각해 공기와 윷놀이를 챙겨갔다. 한국에 대한<br />

간단한 소개정도를 같이 참가하는 언니와 맞춰봤다.<br />

도착해보니 일본 3 명, 스페인 2 명, 이탈리아 1 명, 프랑스 1 명, 에스토니아 리더, 한국<br />

2 명으로 총 10 명의 지원자로 구성되어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일본 애들에게<br />

경계를 가졌고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리더는 우리의 기분을<br />

항상 물어봐주며 엄마처럼 우리를 챙겨줬으며 활발하고 친절했다. 유럽친구들도 고정 관념<br />

없이 우리를 받아들여주고 함께 어울리려고 노력했고 경계를 가졌던 일본친구들과는 나중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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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하지 않고 눈빛만 봐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해졌다. 걱정했던 것과는<br />

별개로 에스토니아 사람들과 루나하우스 식구들도 우리를 반겨줬으며 하나라도 더 베풀고<br />

알려주고 싶어 하셨다. 참가자는 10 명의 소수인원이었지만 많지 않은 인원덕분에 서로 더<br />

친해지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br />

도착한 후 3 일째 되는 날이 축제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많은 양의 일을<br />

소화해내야만 했다. 가장 기본적으로 감자를 깎았는데 축제에 오는 손님들의 양을 포함하여<br />

우리의 식사 분까지 함께 준비해야했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감자를 깎았다. 에스토니아<br />

사람들의 주식은 감자로 된 요리였기 때문에 축제가 끝난 후에도 감자를 깎는 일은<br />

매일같이 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해보지 않았던 낯선 일들에 몸도 힘들고 많이 지쳐갔지만<br />

감자를 깎는 일이 익숙해지다 보니 오히려 가장 쉬운 일 중 하나가 됐다. 우리는 음악<br />

콘서트에 참가하기 위해 오는 손님들을 위해 방의 린넨들을 모두 걷고 정리하고 다시<br />

씌우고 방을 청소하는 일도 했다. 린넨을 씌우고 벗기는 일도 어려웠지만 지저분해진 방을<br />

정리하는 것도 손길이 많이 갔다. 주인아주머니는 자기가 묵고 싶은 방처럼 깔끔하게<br />

정리해달라고 하셨고 우리는 호흡을 맞춰 방 하나하나 정성들여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br />

외에도 우리는 축제 틈틈이 쓰레기를 치우고 화장실도 청소했으며 번갈아가면서 음식 배분,<br />

설거지, 그릇세팅 등 다양한 일을 했다. 축제가 끝난 후에는 결혼식이 열릴 예정이어서<br />

결혼식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준비했다. 사실 일이 점점 힘들어지면서 일을 열심히 하지<br />

않는 친구들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다. 나중에는 그런 사소한 불만이 쌓여 서로 감정 상하게<br />

될 뻔도 했지만 서로 대화를 하면서 친해지다 보니 함께 돕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br />

불만들은 사라져갔다.<br />

어려운 일을 함께하면서 서로 뭉쳐 2 주 동안 생활하다 보니 처음엔 낯설고 이해 안 되던<br />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특히 유럽 친구들이 반, 아시아 친구들이<br />

반이라서 처음에서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에 낯설어 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어울리기<br />

위해 우리는 노력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친한 친구 옆이 아닌 고루 섞어 앉기로 했고 일을<br />

할 때에도 서로 돌아가며 자신의 노래를 틀어주었다. 특히 노래를 통해 서로의 문화에 대해<br />

어림짐작이지만 많이 이해하게 됐는데 하나의 교감 대상이 생기니 친해지기 더욱 쉬웠다.<br />

워크캠프가 끝난 후 나는 우선 무엇이든지 덤벼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까지는<br />

해보지도 못했던 어려운 일들을 함께 해나가고 성취해 나가면서 이렇게 힘든 일들도 했는데<br />

이제는 뭐든지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개방적이고 친화력<br />

있는 성격을 가진 외국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한국에 와서도 사람들과 즐겁게<br />

인사하고 먼저 다가갈 수 있는 성격으로 변했다. 워크캠프는 정말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br />

인생에 있어서는 큰 영향을 준 하나의 소중한 시간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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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K.<br />

김민정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4 년)<br />

VAP UK-01 Othona Earthship Open Workcamp 4 월 7 일-5 월 7 일<br />

_봄날, 따뜻했던<br />

나는 대학에서 환경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얼마간 휴학을 하고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했다.<br />

어학연수 후 그곳에서 환경관련 인턴십을 할 계획으로 한국을 떠났지만 일이 잘 풀리지<br />

않아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쯤, 평소 봉사활동에 대한 관심에 습관적으로 들락날락<br />

거리던 유네스코 청년팀 국제자원활동 사이트에서 눈에 띄는 한 워크캠프를 발견한 게<br />

시작이었다. 영국의 Essex 지역에서 열리는, 그러니까 내가 공부하던 도시에서 얼마 멀지<br />

않은 곳에서, 환경 친화적인 방법으로 Zero Carbon 집을 짓는 활동을 하는 캠프가<br />

그것이었다. ‘이거구나‘ 싶었다. 바로 지원을 했고, 얼마 후 참가가 확정되어 캠프 측에<br />

메일을 보내 교통편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받고 픽업신청을 했다. 기차역에서 내려<br />

마을버스를 타고 픽업장소로 가는 길,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그때까지 영국에 머물면서<br />

만나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정말 시골이었다. 그래서 아름다웠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br />

그렇게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린 후에 도착한 곳에는 푸근한 인상의 영국인 할아버지가<br />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자동차에 짐을 싣고 우리는 또, 한참을 갔다. 그렇게 도착한<br />

Othona Community 에는 프랑스, 독일, 한국, 그리스, 일본 등 각국에서 온<br />

자원봉사자들과 그 커뮤니티에 정기적으로 와 봉사활동을 하는 많은 영국인 자원봉사자들이<br />

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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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 일을 구체적으로 적어보자면, 우선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벽돌<br />

만들기. 흙, 모래, 물 그리고 건초만을 가지고 벽돌을 만든다. 적당비율로 흙, 모래, 물을<br />

섞어 적합한 점성을 만들어 내야하는데 이용하는 도구는 봉사자들의 튼튼한 두 다리. 다<br />

같이 모여 냅다 밟다가 조금 지치면 점토를 한번 뒤집고 다시 밟고 또 밟고를 반복한다.<br />

그러다가 건초를 섞어 점토를 강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잘 반죽된 것을 틀에 넣어 모양을<br />

다듬어 완성하는 게 벽돌 만드는 방법. 다른 하나는 벽 쌓기 작업이었다. 벽이 세워질 곳에<br />

나무판자가 일정한 간격의 틈을 두고 고정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나무판자 사이의 틈을<br />

흙으로 채우는 일을 했다. 먼저 한 팀이 흙을 잘게 부수고 다른 한 팀이 그 흙을 벽이<br />

세워질 공간에 부어 무거운 추로 다지는 것. 벽돌 만드는 작업은 다리의 힘을 길러주었고,<br />

벽을 쌓는 것은 팔의 힘을 길러주었다. 일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중간 중간 차와 쿠키를<br />

먹으며 쉴 수 있는 30 분간의 휴식시간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열심히 일했다.<br />

워크캠프에 갔더니 유럽인들은 일을 너무 쉬엄쉬엄 하더라 하는 말을 어느 워크캠프<br />

참가자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내가 함께 했던 사람들은 전혀 아니었다. 나 몰래 보수를<br />

받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나중에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이유를 알<br />

수 있었는데, 그들은 그 친환경적인 건축기술을 보고 배우고 싶어 그곳에 왔고 훗날 자신이<br />

직접 그 방법으로 집을 지을 거라는 이도 많았다. 내가 이 캠프를 하며 가장 좋았던 것들<br />

중 하나는 나와 같은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는 거다. 환경을<br />

생각하고 환경보전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들. 그런 그들을 통해<br />

나는 많이 배웠다.<br />

그곳의 공기는 참 따뜻했다. 쉬는 시간에는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잔디밭에 누워<br />

뒹굴다가 즉석에서 요가수업이 열렸고 매일 밤에는 다들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수다를<br />

떨거나 게임을 했다. 5 분 거리에 있는 바닷가에 엄마 따라 온 7 살 흑인 꼬마와 자주<br />

산책을 가곤 했고 비틀즈를 좋아하던 50 대 영국인아저씨와 비틀즈의 노래들을 함께 불렀다.<br />

나는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2010 년 봄을 맞이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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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Y<br />

박가현 (경희대 경영학과 3 년)<br />

CPI03 Mondiari Antirazzisti 7 월 2 일-17 일<br />

_PART, 그리고 끝나지 않을 part.<br />

Part.1 CIAO (차오! : 이탈리아어로 안녕! )<br />

기아 글로벌 워크캠프는 나에게 머나먼 이야기였다. 치열한 경쟁력과 부담되는 면접.<br />

그래서 지원할 엄두조차 내지 않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와중에<br />

나에게 필요한 건 터닝 포인트였고 그 터닝 포인트가 바로 기아 글로벌 워크캠프였다.<br />

그렇게 꿈꾸던 나라 이탈리아, 그리고 매력적인 도시 볼로냐로 떠났다. 우리의 만남을 위해<br />

미팅 포인트인 광장으로 갔지만 캠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단 한명도 없었다. 시간은 다<br />

되어가고 난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다행이 리더와 연락이 닿아 리더가 날 데릴러 왔다.<br />

볼로냐에는 수많은 광장이 있어서 난 다른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렇게<br />

시작된 어색했던 첫 만남. 긴장되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우리의 구성인원은 한국 3 명, 영국<br />

2 명, 스페인 2 명, 터키 2 명, 세르비아 2 명, 덴마크 1 명, 프랑스 2 명, 멕시코 2 명,<br />

이탈리아 2 명. 캠프 첫날 저녁엔 우리만의 작은 발대식이 열렸다. 서로의 등에 종이를<br />

붙이고 첫인상을 써주기. 그리고 내 등엔 이것이 적혀 있었다 ‘You're gorgeous!'<br />

Part 2. Before the festival<br />

우리는 mondiali antirazzisti 라는 페스티벌을 준비하는 일을 했다. 이 페스티벌은 유럽<br />

각국에서 5000 여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꽤나 큰 축제였다. 낮에는 풋볼, 크리켓, 발리볼<br />

같은 스포츠 매치가 열리고, 저녁엔 콘서트와 곳곳에서 파티가 열린다. 우린 첫날부터<br />

공터에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무거운 펜스를 옮기고 야영장 구역표시를 위해 하루<br />

종일 망치질을 했다. 다음날은 야외 카페테리아를 만들기 위해 무거운 의자와 테이블 몇<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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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개를 셋팅했다. 누가 워크캠프 할 일이 없다고 했는가...일은 점심을 먹고 나서도<br />

계속되었다. 테이블 셋팅한 날 오후, 난 샤워를 하기 위해 텐트 안에 들어가 세면도구를<br />

챙기고 있었다.그러나 갑자기 허리가 아프더니 온 몸에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 텐트 안에는<br />

혼자 있었는데 너무 아파서 소리도 낼 수 없었고 몇 십 분을 옆으로 누운 상태로 끙끙대고<br />

있었다. 그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대로 모든 게 끝이구나. 워크캠프 시작 몇 일 만에<br />

남은 워크캠프는 물론이고 후의 유럽 여행 역시 포기하고 한국으로 가야 되는구나. 이대로<br />

죽는구나 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갑자기 그때 친구가<br />

들어와서 겨우 도움요청을 해 의대에 다니는 친구가 차가운 수건으로 온몸을 적셔주고<br />

간이침대로 날 옮기고 응급처방약을 먹였다. 처음엔 아파서 눈물이 났는데, 친구들이 날<br />

걱정해주고 옆에서 간호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감동해서 더 눈물이 났다. 그 날 이후로<br />

친구들은 매일같이 나에게 오늘은 허리가 좀 어떠냐며 물어보았고, 우리에겐 새로운 문화가<br />

생겨났다. 매일 밤 일하느라 고생한 서로를 위해서 각 나라 스타일의 마사지를 해주는 것!<br />

단연 가장 인기 있는 마사지는 코리안 스타일 마사지! 내가 두피 마사지와 어깨 주물러주기<br />

등의 시원한 한국스타일의 마사지를 선보이자 매일 줄을 서서 마사지를 받곤 했다.<br />

그렇게 축제준비 기간에는 잡초 밭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온 다리와 발은 긁히고 피나고<br />

벌레물리고 이렇게 고생을 하다 보니 그 시기가 찾아왔다. 발대식 때 들었던 워크캠프 기간<br />

동안의 감정 기복 곡선의 바닥. 우리의 유일한 보금자리인 텐트는 낮에는 사우나 보다<br />

더워서 땀이 줄줄 났고, 밤에는 추웠다.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고 샤워는 정해진 시간에<br />

6 명에서 같이하고 세탁기는 사치였다. 손빨래를 해서 야외 빨랫줄에 널어 놓았는데 난<br />

속옷을 도둑 맡기도 했다. 매일 아침은 딱딱한 비스킷 몇 조각과 주스 한 잔이였고, 힘들게<br />

일한 후 점심은 토마토,치즈와 빵. 냉장고가 없어서 항상 미지근한 물만 먹을 수 밖에<br />

없었다. 에브리 데이.<br />

찌는듯한 땡볕에서 고된 일을 하는데 식사가 부실하다 보니 사람들의 불만은 쌓여갔고 나<br />

역시 힘이 들었다.그래도 모든 일을 마치고 샤워를 하는 순간이 내겐 낙이었다. 그렇게<br />

이글거리는 이탈리아의 태양 아래에서 우리는 5 일 동안 축제 준비를 했다.<br />

Part 3. During the festival<br />

축제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점점 모이기 시작하더니 공허했던 그 공간들은 사람들로<br />

북적이기 시작했다. 먹을 거리가 여기저기 넘쳐나고, 볼거리도 많고, 우리를 항상 즐겁게<br />

해주던 crazy people 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축제기간 동안 한 일은 세개의 카페테리아가<br />

있는데 두 명 씩 짝을 지어 테이블 정리를 하고 플라스틱, 유리, 음식물, 캔으로<br />

분리수거를 돕는 일. 그리고 자신의 담당 시간 외에는 자유시간이었기에 돌아다니며 축제<br />

구경을 하고 즐길 수 있었다. 우리도 낮에 열리는 풋볼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팀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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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했다. 나 역시 수비수로 경기에 참가했고 함께 축제를 즐겼다. 우리의 팀 이름은<br />

Shock united! 팀 이름의 기원은 어느 날 저녁 다같이 모여 맥주를 한잔씩 하는데 내가<br />

한국게임인 쇼킹게임을 제안했다. 다들 그 게임에 빠져 서로에게 쇼킹을 외치다가 우리의<br />

팀 이름까지 쇼크 유나이티드가 된 것. 축제 기간 동안은 하루하루가 새롭고 재밌었다.<br />

밤이 되면 곳곳의 장소에서 파티가 열렸다. 음악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막대기로 테이블을<br />

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 특히나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라서 각<br />

나라의 축구 응원가를 부르며 테이블 위에 올라가 방방 뛰며 각자의 현수막을 흔들며<br />

환호하는데 정말 월드컵을 방불케 한다. 마침 그 시기가 2010 남아공 월드컵 시즌이어서 그<br />

열기는 더했다. 매일 밤 야외 넓은 잔디에서는 콘서트가 열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면<br />

야외 부스에서 DJ 가 디제잉을 하며 야외 클럽이 열리곤 했다. 각 장소마다 각각 다른<br />

분위기가 연출되면서 우리는 캠프 멤버들과 함께 축제를 즐겼다. 아침부터 새벽<br />

2 시까지카페테리아에서파트타임으로돌아가면서일을했는데, 2 시까지 일하는 친구가 힘들고<br />

심심할 까봐 나머지 친구들은 항상 일하는 친구에게로 가서 같이 맥주를 마시고 밤을 새곤<br />

했다. 게다가 축제 스텝들에게는 바에서 맥주가 무한제공!<br />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까 워크캠프 멤버들 뿐만 아니라 다른 새로운 사람들과<br />

친구가 될 기회가 많았다. 또한 내가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국내 K 리그 경기도 보러<br />

종종 가는데 K 리그에서 들을 수 있는 응원가와 세계 각국의 응원가가 비슷한 게 많아서<br />

같이 뛰면서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축제가 진행되면서 우리의<br />

감정곡선은 최고조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최고조에 이른 감정곡선은 계속 되었다<br />

캠프가 끝날 때까지.<br />

Part 4. After the festival<br />

5 일간의 환상적이고 열정적인 축제가 끝이 난 후 우리에게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br />

우린 이탈리아 근처 Rimini 라는 바다로 기차를 타고 휴가를 다녀왔다. 그리고 축제 후에<br />

우리가 할 일은 또다시 분리수거를 하고 환경 정화를 하는 일. 축제 기간 내내 rubbish 와<br />

함께 일을 했는데 끝이 나고도 rubbish 와 함께했다. 나중엔 rubbish 와 내 몸과 일체가<br />

되는 기분. 5000 여명의 사람들이 왔다 다녀갔기 때문에 쓰레기 양은 엄청났다. 우리는<br />

쓰레기 봉투를 일일이 다 뜯어내서 쏟아내고 다시 재 분리수거를 했다. 썩은 음식물 때문에<br />

구역질도 나고 화장실 쓰레기까지 손으로 구분을 해야 했지만 우린 오히려 즐겁게 일을<br />

했다. 누군가가 냄새 때문에 구역질을 하면 그 소리가 재미있다고 웃고, 누군가가 봉투를<br />

열었는데 화장실 쓰레기통 봉투일 땐 poor man! 하면서 놀려대고, 그렇게 우리는 쓰레기<br />

더미 사이에서도 신나게 웃으며 즐기며 일을 했다. 일이 끝난 후엔 온 몸과 옷에서 악취가<br />

진동했지만 우리에겐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밤은 다가오고 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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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캠프는 비현실적인 생활의 연속이다. 한국에서는 일상에서는 그렇게 할 수 가 없다.<br />

일을 한 후에는 같이 웃고 즐기고, 매일매일이 새로움의 연속이고 행복이다. 나는 그<br />

비현실속에 도취되어 머물고 싶어졌다. 날씨도 덥고 캠프 시설도 열악해서 힘든 것도<br />

많았지만 그 힘든 것들을 다 잊을 수 있게 상쇄시켜 주는 건 워크캠프에서 만난<br />

친구들이었다. 가끔 내가 우울해하면 그때마다 가슴으로 안아주던 아이들. 그것도 거기서<br />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았는데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나 나와 베스트였던 스페인<br />

친구들 젬마와 로레나. 그녀들은 한국에서 술먹을 때 흥응 돋는 ‘술이 들어간다<br />

쭉쭉쭉~’ 그 리듬을 너무 좋아해서 매일 맥주를 마실 때도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br />

그리고 복숭아 껍질 알레르기가 있는 나를 위해 복숭아 껍질은 만지지도 말라며 매번 직접<br />

복숭아를 먹여주던 젬마와 보기만해도 볼에 뽀뽀세레를 퍼붓던 로레나. 그리고 처음엔<br />

시크해서 다가가기도 어려웠고 식성도 까다로워 유별나다고 생각했던 영국보이 메튜!<br />

그러나 캠프 내내 날 무척이나 챙겨주고 나의 친절한 영어선생님이 되어주었다. 캠프 기간<br />

동안 친구들은 항상 내게 말했다. 넌 유러피안 스타일의 코리안 걸이라고!<br />

난 여행을 하거나 새로운 장소에 가면 그 분위기와 어울리는 노래를 골라 듣는다. 사람은<br />

청각과 후각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난 그 순간들을 기억하고 다시 떠올리고 싶을 때 그때<br />

그 장소에서 들었던 음악을 듣는다. 이탈리아 워크캠프의 주제곡은 영국밴드 You me at<br />

six 라는 그룹의 fireworks 와 always attack 였다. 그리고 캠프가 끝나고 유럽 여행을<br />

하면서도, 심지어 지금까지도 친구들 사진과 동영상들을 보면서 이 노래를 들으며 불과<br />

2 달전의 워크캠프를 그리워하며 추억한다.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br />

워크캠프가 휴양지였다면서 너무 편하게 잘 지내다가 왔다고들 하는데 난 죽을 만큼 고생도<br />

했지만 죽을 만큼 즐거웠다. 고생한 만큼 더 기억에 남는 법. 그리고 고생을 함께 나눈<br />

사람들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법. 이제 와서야 그 말에 지독하게 공감이 간다. 워크캠프는<br />

중독된다. 워크캠프 내내 생각했다. 조금만 더 빨리 워크캠프를 알았다면 매번 여름마다 난<br />

워크캠프를 떠났을 것이다. 우리 멤버 중에는 벌써 7 번째 워크캠프를 하고 있는 친구가<br />

있을 정도였다. 이제 4 학년이고 내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는 마지막 워크 캠프라는게<br />

너무나도 아쉬웠다.<br />

우리는 약속을 했다. 꼭 다시 만나자고.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을 공유했고 함께<br />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올 겨울 스페인에서 그리고 영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br />

한국에 돌아온 나는 몇 가지를 더 느꼈다. 나의 청춘은 아직도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순간<br />

순간 닥치는 상황들에 앞서 용기가 있어서 행한게 아니라 행하고 나니 자신감이 생긴다는<br />

것.<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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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Y<br />

임세정 (조선대 영어과 3 년)<br />

CPI01 San Giorgio a Cremano 6 월 26 일-7 월 17 일<br />

_스물 두 살, 나폴리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br />

2010 년 6 월말, 내 인생에서 있어,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될지 모르는 유럽에서의<br />

워크캠프와 배낭여행을 떠나게 됐다. 거의 3 주간의 준비를 마치고, 바로 가기 직전까지도<br />

인터넷을 뒤적이며 정보를 찾던 내 모습, 처음 혼자서 외국으로 나가는 여행이라 설렘 반<br />

걱정 반으로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 생각난다. 이틀간의 로마여행을 마치고, 나폴리에 가는<br />

것 까지도 너무 힘들어서 정말 이틀간 살이 2KG 빠진듯 한 느낌이었다.<br />

정말 어렵게 워크캠프 장소까지 도착해서 완전 지쳐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고<br />

있었을 때, 혹시 봉사하러 온 친구가 아니냐며 반갑게 맞아주던 이탈리아 봉사자 친구들의<br />

환하게 웃던 모습을 나는 여전히 잊질 못한다. 15KG<br />

배낭을 매고 찾아가느라 너무<br />

힘들었었는데, 반갑게 ‘WELCOME'이라고 써진 종이를 펼치며 양쪽 볼에 키스를 하면서<br />

반겨주는 친구들 덕분에 정말 너무 반가워서, 거의 울 뻔 했다. 숙소는 역에서 그리 멀지<br />

않았다. 걸어서 5 분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하니 미리 도착한 친구들 몇<br />

명이 있었다. 이탈리아 친구들이 음식과 음료수를 줘서 새로운 친구들과 인사를 하며 쉬고<br />

있으니 나머지 친구들도 도착했다.<br />

그 날 저녁 우리는 피자의 본고장인 나폴리답게 엄청 큰 피자와 함께 환영파티를 가졌다.<br />

제일 늦게 도착한 친구가 예상하지 못했던 한국인이어서, 깜짝 놀랐는데 효주(한국인<br />

동생)가 있어서 뭔가 안심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International 봉사자들은<br />

한국, 아르메니아, 세르비아, 러시아, 멕시코, 폴란드 이렇게 여섯 나라에서 온 9 명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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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로 이뤄져 있었고, 성비는 남자 2 명에 여자 7 명이었다. 생각보다 적은 숫자여서<br />

아쉬웠지만, Italian 봉사자들은 15 명이 넘는 숫자였고 가끔은 친구들을 데려 오기도해서<br />

항상 주위에는 이탈리아어가 끊이지 않았다.<br />

숙소는 인포싯에서 읽어서 꽤 괜찮은 곳일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정말 깔끔하고<br />

거의 모든 시설들을 완비하고 있는 곳이었다. 커다란 침실이 2 개가 있어서 그 안에는<br />

이층침대 2 개씩, 한 방에서 4 명씩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여자들끼리만 있는 방을<br />

선택했고, 벽장에, 정말 예쁜 발코니까지...너무 만족스러웠다. 조그맣지만 앙증맞은<br />

받침대가 있는 화장실에서는 한 가지 놀란 게 있었는데, 바로 변기시트가 없다는 점이었다.<br />

변기에 변기시트가 없는데 그 곳에 앉아서 일을 봐야 하다니…….하지만 항상 처음이<br />

어려운 것! 그냥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나중에는 그냥 익숙해졌다.<br />

첫 번째 주말 동안에는 3 주 동안 거주하게 될 San Giorgio 를 돌아다니며 어떤 가게가<br />

어디에 있는지를 돌아봤고 월요일이 되자 본격적으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br />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일 들은 캠프 마지막쯤에 있을 전시회를 위해 15 장의<br />

사진과 두 개의 커다란 그림으로 평화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어떤 것을 다루고 어떤 식으로<br />

사진을 찍을지, 모델은 누구를 할지 등등 여러 친구들과 서로의 아이디어를 내가면서<br />

이야기를 하고 또 며칠간 토론에 토론을 거듭한 끝에 우리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냈고,<br />

투표를 통해서 어떤 사진을 찍을지를 골랐다. 그리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br />

모든 사진들에 참여했기 때문에 각각의 사진들을 찍던 순간순간들이 매번 특별하고<br />

재미있었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사진을 뽑는다면, 하나는 캠프초반부에 찍었던, 우리<br />

봉사자들 모두가 함께 참여했던 사진인데 P. E. A. C. E 이 다섯 글자를 각각 빨강, 노랑,<br />

초록, 파랑, 보라 이렇게 다섯 가지 색으로 나눠서 각자 가지고 있는 색의 티셔츠를 입고<br />

몇 명씩 나눠서 몸으로 철자 하나 하나씩을 표현했던 사진이다. 넓은 공간을 찾아서 모두가<br />

하나가 되어 사진을 찍고 몸을 굽혀가며 글자를 만들었던 기억, 정말 너무나도 재미있었던<br />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나도 P 의 머리 부분을 만들었었는데... 그리고 또 한 장의 사진이<br />

기억에 남는데 이 사진은 종교의 다름을 평화적으로 나타내려는 사진이었다. 나를 포함해서<br />

5 명이 각자 자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종교를 나타내는 복장을 해서 ,뭔가<br />

아이러니하게 나타내면서도 종교는 다르지만 서로 친하게 지내며 서로 다름을 포용하는<br />

것을 나타내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우리 캠프를 주최한 단체인 YAP ITALY<br />

에서<br />

활동하고 있는 사진작가 다리오가 찍었는데, 처음에 다리오가 자세를 취해보라 해서 너무<br />

어색하였으나, 이 정도면 됐다고 그만 찍으려 할 때, 우리끼리 다시 소장용으로 찍기 위해<br />

장난스럽게 취하는 포즈와 우리의 표정에서 더욱 더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되어 이것을<br />

전시회에 출품하게 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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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 동안 워크캠프기간에 우리는 아침식사 제외하고는 모두 당번을 정해서 요리를 했고,<br />

청소도 순번을 정해서 했는데, 나는 한국요리를 두 번이나 만들었다. 처음에는 한국인<br />

동생과 함께 불고기 요리를 하였고, 두 번째는 준비해 간 고추장으로 태어나 처음 직접<br />

시도 해 본 ‘닭 볶음탕’이었다. 비록 두 번째 만든 닭볶음은 고기가 잘 익지 않아서<br />

조금은 아쉬웠으나, 여러 나라의 친구들에게 한국의 음식이 맛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br />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br />

캠프를 하면서 느낀 문제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br />

모였기 때문에 생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문제였는데, 언어가 비록 잘 통하지는 않더라도<br />

함께 문제가 있으면 합심 협력하여 해결하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모든 일은 아니어도 일심<br />

동체가 되어 같이 참여를 해야 하는데, 자기가 졸린다고 억지로 작업장에 나와서도 계속<br />

자고 있거나, 일을 안 하려고 하고, 혼자만 쉬려고 하는 그런 친구들이 있었고, 코디네이터<br />

중 한 명이 자기가 오히려 캠프장의 불화를 조성하고 너무 고집스러울 때가 있어서<br />

힘들었는데 그런 문제가 조금 아쉬웠던 것 같다.<br />

주말에는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 소렌토와 나폴리 시내에도 나가고 월드컵 기간 이라 ,<br />

우리나라는 우승하지 못했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이탈리아인이라 경기가 있을 때는 함께<br />

축구경기도 보면서 정말 즐거운 추억들을 많이 만들었다. 드디어 15 장의 멋진 사진들과<br />

평화 모양이 박힌 큰 그림을 하나 완성해서 맛있는 핑거 푸드도 만들고 샴페인을<br />

준비하고는 지역 사람들을 불러 전시회를 가졌다. 성공적인 전시회였다.<br />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워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마지막 날은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찾아오고,<br />

친구들 한 명 한 명이 먼저 떠나면서 정말 헤어지는 건가 싶어서 믿기지가 않았지만,<br />

서로가 눈시울을 붉히면서 작별을 하게 될 때 가슴이 미어지는 듯 한 느낌에 사로잡혔다.<br />

로마로 돌아가는 친구들과 함께 하루 더 여행을 하고 정말 내가 이제 이 친구들과 헤어질<br />

때는 정말 나도 모르게 진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각자 다시 귀국하고<br />

서로 언젠가 성공해서 다시 한 번 만나기를 기원하면서 헤어졌다.<br />

워크캠프를 끝내고 혼자서 6 개국 여행을 하면서도 계속 내 머릿속에 맴돌던 친구들의<br />

얼굴…….이번 워크캠프와 여행을 통해서 내 스물 두 살의 여름은 정말 너무나 알차고 뜻<br />

깊게 보낸 것 같아 평생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나만의<br />

소중한 추억들을 만들고, 간직하고 왔다는 것이 정말 꿈만 같다. 앞으로는 학교생활 등으로<br />

너무 바빠서 워크캠프를 참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br />

워크캠프에 참가하여 또 다른 세계의 친구들을 만나 더 아름다운 추억들을 만들어 보고<br />

싶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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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A<br />

고영민 (홍익대 산업공학과 3 년)<br />

FSL-WC-452 Bangalore<br />

1 월 4 일-17 일<br />

_새로운 세상, 인도<br />

유네스코 봉사활동을 준비하던 기간과 겹쳤던 기말고사 기간, 설레임으로 가득하여<br />

시험공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머릿속에는 인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br />

도서관에 가서 인도에 관한 책 2 권 을 빌려 모두 읽으니 점점 더 부풀어 오는 나의 가슴을<br />

억누르지 못하고 왠 종일 컴퓨터로 인도에 대해서만 찾아 보았다. 인도 봉사활동을<br />

준비하며 영어공부를 최대한 열심히 하였고, 현지에 대한 가이드북을 통하여 이동수단이나<br />

현지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이드북과 많은 정보차이가 있어서<br />

당황하기도 하였다(뱅갈로르 공항에서 시내 이동까지의 기준이 뱅갈로르 국내공항기준으로<br />

나와있다). 부풀은 가슴을 안고 인도에 처음 도착하여 공항을 나섰는데 열심히 준비한<br />

영어도 잘 나오지 않고 하여 시내까지 이동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공항 앞에는 수많은<br />

사기꾼 택시기사들이 있어서이다. 봉사활동 팀에 합류하고 나서 제일 놀랐던 것은<br />

한국사람은 우리학교에 같이 봉사활동을 하게 된 한국인 3<br />

명이 전부 일줄 알았는데<br />

15 명의 팀원 중 7 명이나 한국인이였다는 사실이었다. 봉사활동의 팀리더도 이렇게<br />

한국인이 많이 겹친 것은 몇 번 없는 경우라고 하였다. 나중에는 외국인 친구들이<br />

한국에서는 원래 이렇게 봉사활동을 많이 하냐고 물어보기도 하였다. 봉사활동 기간 중<br />

숙박한 노인시설에 처음 들어가며 깔끔한 시설에 깜짝 놀랐다. 원래는 마구간 같은 곳에서<br />

잘 줄 알고 있었는데 시설이 너무 좋았다. 단 안 좋은게 있다면 노인시설인만큼 저녁 8 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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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분이 되면 취침준비에 들어가며 9 시면 모두 불을 끄고 주무시는데 우리도 반드시<br />

자야만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인도에는 이미 고기도 같이 먹는데 노인 시설은 채식주의였기<br />

때문에 좀 아쉬웠다.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시작하러 갔을 때 학교로 봉사활동을 하러<br />

간다고 하여 꽤나 큰 건물인 줄 알았는데 학교의 강의실만한 휑~한 1 층 건물하나만 있을<br />

뿐이었다. 도배 상태 등이 안 좋았기 때문에 우리는 제일 처음 벽에 페인트칠을 할 것을<br />

생각하였고, 또 아이들이 모두 영어를 잘 할 줄 알았으나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br />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간단한 영어로 진행할 수 있는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을<br />

준비하였다. 너무나도 착한 아이들이였으나 또 너무 활발하여 힘들기도 하였다. 근데<br />

여기서 깜짝 놀란 것은 아이들이 말을 안 들을때 우리는 말로 타일렀으나 인도의 어른들은<br />

너무나도 쉽게 아이들을 ‘퍽!’ 때리는 것이었다. 선생님들도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br />

다니셨다. 벽에 페인트칠은 먼저 분홍색으로 모두 색을 칠한 후에 아래쪽에는 아이들이<br />

놀면서 때가 많이 탈 것을 방지하여 검은색으로 페인트칠을 하였고 그 위에 분홍색 벽에는<br />

여러 가지의 예쁜 그림들을 그려주었다.<br />

주말에는 봉사활동을 하지 않아서 같은 팀원들끼리 기차로 약 3 시간 거리인 마이소르에<br />

놀러갔다 왔는데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너무 깜짝 놀란게 입석의 경우에는 먼저 타야지<br />

자리를 맡을 수 있기 때문에 인도사람들의 경우에는 기차가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는<br />

와중에도 모두가 달라붙어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저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싶었다.<br />

결국 우리는 자리를 못 맡았고 서서 3 시간동안 이동하겠구나~ 싶었는데 인도인 팀리더가<br />

차장을 데려왔는데 차장이 우리가 외국인이여서였는지 아니면 팀리더가 무슨 수를 부렸는지<br />

모르겠지만 상당한 친절을 베풀어 우리는 앉아서 갈 수 있었다. 마이소르에서 여러 가지<br />

유적지를 보고 저녁에는 모두 함께 술을 한잔을 하러 갔다. 근데 또한 깜짝 놀란 것이 원래<br />

인도 술집에는 여자는 술을 먹으러 못 들어 간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외국인이여서 먹을<br />

수 있었지만 원래 인도 여성들은 술집에 출입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인도에서는<br />

길거리에서 술을 먹으면 경찰이 잡아 간다고 한다. 처음에 그 사실을 모르고 맥주를 사서<br />

먹으려다가 현지인들이 깜짝 놀라며 경찰이 보면 잡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얼른 맥주를<br />

숨기고 도망가기도 하였다. 여행을 하면서 아쉬운 것은 정말 아름다운 유적지들인데 너무<br />

많은 쓰레기들이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많은 쓰레기들이 있는 이유는 인도에는 쓰레기통에<br />

대한 개념이 약한 것 같았다. 내가 주위를 돌아다니며 쓰레기통이 어디 있냐고 물으면<br />

주위를 가르키며 아무데나 버리라고 하였다. 인도가 자유를 추구한다지만 이 정도의 자유는<br />

아닌 것 같았다. 또한 인도에서는 교통법규에 대한 것이 너무 약한 것 같았다. 편도<br />

1 차선의 대관령 같은 산길에서 버스가 앞차를 추월하며 운전하는 모습에 우리는 모두<br />

하얗게 질려서 기도를 하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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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라는 나라는 참 알면서 모를 것 같은 나라다. 길거리에 다니는 수많은 소들, 멋진<br />

자연환경, 멋진 유적지 등이 있지만 이를 제대로 관리하고 있지 않고 있는 사람들, 또한<br />

너무 사람들이 순수하지만 순수한 얼굴로 나쁜짓을 하는 사람들... 인도는 약간 느낌이<br />

다듬어지지 않은 자유의 나라인 것 같았다.<br />

또한 빈부격차가 엄청 심하였는데 가장 깜짝 놀란 것은 호화로운 아파트 옆에는 텐트를<br />

치고 자는 사람들이 있었고 분명 자신의 또래인데 자신의 또래에게 돌아다니며 장난감을<br />

팔고 있는 아이들 의 모습을 보고 정말 안타까웠다.<br />

비록 인도에서의 생활이 3<br />

주로 굉장히 짧았지만 왠지 가난한 인도의 아이들을 보며<br />

우리나라에서 내가 누리고 있던 것들이 굉장히 소중한 것임을 깨달았다. 봉사활동을 하면서<br />

나눔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고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감사함을 알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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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ONESIA<br />

최시영 (삼육대 약학과 2 년)<br />

DJ01Ungaran Disabled School<br />

1 월 16 일-30 일<br />

_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끝난 나라 – 인도네시아<br />

출발- 2 학년 겨울방학, 대학생활의 절반이 뎅강~ 두 동강나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물<br />

흐르는데로 떠내려가는 한심한 생활의 연속, 시류의 물길을 거스르기 위한 노는 고사하고<br />

노 저을 힘조차 없는 무기력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독하게 한심스러워,<br />

친한 친구의 자문을 구해 급히 인도네시아 워크 캠프를 신청하게 되었다. 죽기 전에 꼭<br />

가봐야 한다는 관광명소 발리에서의 5 박 자유여행, 2 주의 워크캠프, 그리고 자카르타에<br />

사는 선배집에서 또다시 4 일........ 한 달이 약간 못 미치는 계획을 짜고 인도네시아로<br />

떠났다. 자카르타에 사는 선배의 도움을 받아(난 master card 나 visa card 가 없었으므로)<br />

Lion air 항공권을 예매하였고, 발리에서의 가벼운 여행을 마친 후 자카르타를 경유해<br />

스마랑으로 향했다. 기내에서 크리스챤 인도네시아 아저씨를 만나 인도네시아의 문화와<br />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여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스마랑 공항에서도 친절하게<br />

DEJAVATO 에 전화를 걸어주셔서 내가 도착했음을 전해주셨고, 택시를 구하는데도 도움을<br />

주셨다.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가... 신의 땅이라는 아름다운 발리와 친절한 시민의식.<br />

인도네시아의 첫 인상은 이렇게 좋았었다.<br />

스마랑(DEJAVATO)- 2 팀이 모여있었는데, 2 팀 통틀어 내가 가장 마지막에 도착하였다.<br />

MEETING TIME 을 넘기지 않았는데도 다들 미리 와있었다. 전날이나 오전에 일찍 와서<br />

미리 캠퍼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br />

포함 한국인 4 명, 독일 스페인 각각 1 명에 인도네시아 리더 2 명으로 이루어진 우리팀은<br />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다른 팀과 인사를 하고 UNARAN SCHOOL 로 떠났다. 암큿(정말<br />

작은 미니버스)을 타고 덜컹덜컹 거리면서 1<br />

시간가량을 가는데 날씨는 덥고 주위에<br />

오토바이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공기는 탁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br />

마침내 도착한 우리의 campsite 는 모든 캠퍼들의 할 말을 가볍게 앗아갔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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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테이블위에서, 남자들은 차디찬 바닥에서 자란다. 한국인들은 테이블이나 바닥<br />

생활에 잘 적응한 것 같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오랜 침대생활 때문인지 편해 보이지 않았다.<br />

화장실 사진을 찍지 못 한게 아쉬운데, 화장실은 우물같은 웅덩이와 변기가 전부이다.<br />

우물처럼 물을 가두어 놓고 바가지로 물을 퍼 날라서 세면을 하고, 샤워를 하고, 용변을<br />

처리한다. 또 인도네시아사람들은 휴지를 사용하지 않아 우리들이 사용하는 휴지를<br />

마련해야만 했다. 워크캠프의 첫날.. 우리는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눈물과 함께 시작했다.<br />

활동 1. teaching- 우리는 2 명씩 1 조가 되어 4 조로 팀을 짜서 매일매일 4 개의 반에<br />

들어가 수업을 했다. ungaran disable school 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운영하는데,<br />

모든 반은 장애의 정도에 따라 크게 3<br />

종류로 구분되는데 , B(청각장애), C(mild<br />

mental 장애), C1(severe mental 장애) 와 같다. 하여 우리는 각 클래스의 수준에 맞는<br />

자료들과 활동들을 전날밤에 토론하고 준비하여 가르쳤다. BINGO GAME, 간단한 수학,<br />

영어대화, 꽃송이 만들기, 도형을 보고 연상하여 그리기, 샌달만들기등 다양한 활동들을<br />

했고, 다행이 모두들 좋아해 주었다.<br />

활동 2. painting & playing with dormitory student - 오후엔 4:4 로 조를 짜서 한조는<br />

학교 gate 의 벽에 페인트를 칠하고 한조는 기숙사 학생들과 놀아주는 활동을 하였다. 비가<br />

오면 휴식을 취하거나 같이 기숙사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br />

활동 3-여가시간 & 식사- 활동이 모두 끝난 여가시간에는 우리를 도와주었던 현지<br />

인도네시아 친구들과 함께 배드민턴도 치고, 주말에는 캠퍼들과 함께 족자카르타에 가서<br />

세계 문화 유산인 보로부들, 쁘란바난등 관광지도 둘러보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식사는<br />

오전에는 시간이 넉넉지 않아 가볍게 빵이나 컵라면으로 배를 채웠고, 점심과 저녁에는<br />

현지인 아주머니 댁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미고랭, 소또, 사떼아얌등 한국에서는 맛 볼 수<br />

없는 인도네시아 전통 음식들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br />

이별-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2 주는 가버렸다. 아이들과는 정이 들었고,<br />

캠퍼들은 소중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준비한 과자와 함께, 단체댄스,<br />

아리랑, 곰세마리 춤등을 보여주었고 아이들은 우리를 위해 인도네시아 전통 댄스를<br />

보여주었다. 크면서도 작은 나라, 많지만 소박한 나라. 인도네시아의 작은 천사들은 나에게,<br />

가진 게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가르쳐 주었다. 즐거운 미소하나에, 따뜻한 체온<br />

하나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 하나하나가 내<br />

가슴속에 눈물 맺힘으로 영원히 남아 내가 또 그러한 사랑을 다른이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br />

일깨워 주었으면 좋겠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꼭 한 번 더 이와 같은<br />

소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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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br />

김광중 (홍익대 역사교육과 3 년)<br />

CIEEJ08 HACHINOHE &NOHEJI 7 월 24 일-8 월 6 일<br />

_그들의 일상을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던 2 주!<br />

도쿄의 높은 기온과 습도에 지쳐갈 무렵, 아오모리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도쿄보다<br />

700km 이상 북쪽에 있어 시원할 거란 믿음, 2 주 동안 영어로만 의사표현을 해야 한다는<br />

두려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기대감 등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br />

시간이었다. 어색하게 악수를 나누고, 우리가 머물 곳으로 이동을 한 후에야 각자의 소개를<br />

들을 수 있었는데 나의 첫마디는 이름도 국적도 아닌 “Sorry, I can't speak English. I<br />

need to help.” 그때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말라고 하는 하즈키, 올가, 아나, 미켈,<br />

마리우스가 얼마나 고맙던지... 첫 만남과 동시에 저녁을 함께 준비하고 서로에 대한<br />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하루는 지나갔다.<br />

2 주간의 캠프 중 첫 주는 라는 장애인 시설(솔직히 “장애인”이라는 말을 쓰기가<br />

꺼려지지만 딱히 대체할 말이 없기에)에서 그들의 일을 도왔다. 관계자 분이 일본어로<br />

설명을 하셔서 확실히는 이해못했지만 육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으나 정상적 사회생활이<br />

불가능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을 하고 생활하는 제법 큰 시설이었다. 그곳 세탁실에서<br />

함께 시트를 개고(처음엔 정말 힘들다 생각했는데 2<br />

주 동안의 활동 중 가장 편한<br />

작업이었다), 정원에서 나무를 손질하고, 마지막 날엔 함께 축제를 준비하고 즐겼다.<br />

축제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고 즐기는 일종의 잔치라고 하면<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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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려나? 이방인인 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고 싶어 하고, 이름과<br />

생년월일을 적어달라고 하는 통에 캠프 리더인 하즈끼가 입으론 통역하고 손으론 우리의<br />

프로필을 적어주느라 특히나 정신이 없는 나날이었다. 일본 현지의 한국 드라마에 대한<br />

관심이 높아서 나에게도 많은 질문을 했는데 정작 내가 한국 드라마에 관심이 없어서 이럴<br />

줄 알았으면 드라마라도 좀 보고 갈 걸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특히나 나만 보면<br />

“체엔~(내 이름이 어려워 ‘중’이라고 부르라 했는데 통역을 맡은 하즈끼가<br />

‘첸’이라고 소개한 듯하다)”이라며 손을 흔들던 ‘마이 브라더’ 야마다와 축제날 먹고<br />

싶은 걸 고르라며 아껴 뒀던 1000 엔짜리 지폐를 꺼내 들던 미까가 많이 생각난다. 가진 것<br />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을 그들의 미소를 통해 새삼 느낄 수 있었는데 어찌나 서로들<br />

잘 지내던지, 모든 게 멀쩡하면서도 더 많은 걸 가지기 위해 웃음을 잃어가는 사람들에게<br />

좋은 본보기가 되리라 생각한다.<br />

하루의 휴식을 가지고 2 주차의 일정을 시작했는데 우리의 나머지 한 주를 맡기로 한<br />

단체가 갑자기 모든 일정을 취소하는 바람에 캠프 시작 전에 보고 갔던 Information<br />

Sheet 와는 전혀 다른 일들을 하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스페인에서 온 미켈이 약간의<br />

항의를 했고 리더인 하즈끼가 눈물을 보였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런 분위기가 오래가진<br />

않았지만. 하루는 여성복지시설에서 그곳 아주머니들과 함께 정원을 다듬고 함께 점심을<br />

준비하고 전통 댄스도 배우는 시간을 가졌는데 신문기자가 와서 지역신문에 우리의 기사를<br />

실어주는 바람에 팀원 모두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다. 8 월 2 일에 있었던 일이 6 일자<br />

신문에 실려 황당하기도 했지만...남은 기간은 우리에게 숙소와 여러 편의를 제공해주신<br />

시모다 선생님의 집안일을 도왔다. 여자 친구들은 정원에서 잡초를 뽑거나 식사나 간식을<br />

준비했고, 우리 남자 셋은 정원에 원두막 비슷한 것을 만들었는데 땡볕에 너무 힘들어서<br />

에서 침대시트 개던 시절이 그리웠다. 일이 다 끝난 뒤의 온천욕과 오후 3 시만<br />

되면 어김없이 주시던 수박 한 조각의 달콤함이 하루하루의 피로를 풀어주곤 했다.<br />

캠프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우리는 시모다 선생님께 그동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음식을<br />

준비하여 조그만 파티를 열었고. 숙소에 있던 가라오케까지 동원하며 즐거운 밤을 보냈다.<br />

미켈과 내가 “My way"를 불렀는데, 선생님께서 가져오신 25 도의 일본 소주에 거나하게<br />

취해 음정과 박자를 무시한 우리의 노래가 분위기를 더욱 달아오르게 했다. 이때 시모다<br />

선생님께서 나에게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아오모리로 오면 먹여주고 재워주겠다는 약속을<br />

하셨는데 기억을 하시려나 모르겠다. 일본의 3 대 축제 중 하나인 아오모리 ‘네부따<br />

마쯔리’를 직접 구경할 기회도 있었는데 종이로 만든 거대한 네부따와 화려한 유카타를<br />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워 장관을 연출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축제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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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한 사람들이 ”라쎄라~라쎄라“를 큰 소리로 외치며 특유의 스텝을 밟던 모습이<br />

생생하다.<br />

캠프가 진행되던 2 주 동안 솔직히 집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막상 헤어질 날이<br />

되니 어찌나 아쉽던지, 이러한 아쉬움을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는 것으로 달랠 수 밖에<br />

없었다. 떠나면서 많은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짧은 영어 몇 마디로 내 감정을 표현하기가<br />

너무 힘들어, 리더 역할을 열심히 해주었던 하즈끼에게 보내는 편지에다 그냥 한글로 원<br />

없이 써 버렸다. "I can't explain my emotion in English."란 말과 함께... 캠프가 끝난 후<br />

다들 도쿄로 향했지만 뿔뿔이 흩어져 지금도 도쿄 시내 어딘가를 누비고 있을 친구들을<br />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녹차와 무술을 좋아하고 일본어를 잘 해서 독일인 같지 않았던<br />

룸메이트 마리우스, 호기심이 많아서 항상 우리를 기다리게 했던 올가, 자신의 국적은<br />

스페인이 아니라 카탈로니아라고 끊임없이 강조하던 아나, 요리를 좋아하고 잘 하지만 항상<br />

설거지를 힘들게 했던 미켈, 자신은 유럽인들이 아직 이해가 안 된다고 슬그머니 얘기하던<br />

하즈끼. 이번 2 주간의 경험은 지난 20 여년간의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모든 경험과<br />

마찬가지로 아쉬움과 그리움을 남겼다. 남들보다 덜 가졌어도 더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br />

외국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의 탈피, 일본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가지는 것만큼의<br />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신, 한국에서도 안 하던 일을 일본에 가서 했다는 약간의<br />

부끄러움, 영어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성 정도로 2 주간의 경험을 요약할 수 있을까?<br />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늘 있던 곳에서 늘 하던 일들을 하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변해있는<br />

내 모습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 동안의 사진을 보며 다시 한 번 귀한 시간들을 추억해<br />

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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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br />

안지현 (홍익대 산업공학과 3 년)<br />

NICE45 UNZEN 8 월 1 일-13 일<br />

_13 일간의 세계일주<br />

처음에 이런 국제 워크캠프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제공한 좋은<br />

기회로 워크캠프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기뻤다.<br />

출발 전에 걱정을 많이 했다. 요즘 엔화가 많이 올라 걱정이 되었고(100 엔 = 1400 원)<br />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아 의사소통에 따른 부담이 걱정되었다. 왕복 비행기 티켓이 비싸서<br />

부산에서 배를 타고 후쿠오카에 가기로 했다. 3<br />

시간밖에 걸리지 않아 지루함 없이<br />

저렴하고 빠르게 일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 후 캠프리더가 알려준 방법으로<br />

기차티켓을 예매하고 그 주변을 지도로 살펴봤다. 약속당일(8 월 1 일) 우여곡절 끝에 운젠<br />

쿠니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도착한 캠프 멤버들이 날 맞아 주었고 바로 캠프장으로<br />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부터 13 일간의 잊지 못할 추억들이 펼쳐지게 된다.<br />

다양한 나라에서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일본인 6 명, 한국인 2 명,<br />

프랑스인 1 명, 이탈리아인 2 명, 홍콩 1 명, 대만 1 명 총 13 명이 모여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br />

대부분 조금이라도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의사소통은 거의 일본어로 진행되었다.<br />

멤버들은 대부분 2 회 이상 워크캠프참가 경력이 있었고 많게는 8 회까지도 있었다. 다른<br />

멤버들에 비하면 난 신참이었지만 열심히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우리는 서예, 꽃꽂이,<br />

차도, 유카타 입어보기, 어린이 캠프, 마을 축제참가, 홈스테이등 다양한 일본문화를<br />

경험하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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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인지 문화차이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br />

차도 상당히 특별했다. 차 한잔 마실 때까지 엄청난 예와 공을 들여 정성스럽게 의식을<br />

치른다. 시범을 보이는 선생님들께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주로 여성이 이러한<br />

예를 차리는 것 같은데, 상당히 조신해보이고 예뻐 보였다. 멤버 모두 참여해 차를<br />

마셔보았다.<br />

<br />

어린이 캠프 개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2 박 3 일 간 NICE 멤버가 주축이 되어 지역<br />

학생들과 함께 팀을 이뤘다. 먹을 것부터 잠자리까지 모두 다 같이 한 식구처럼 지냈다.<br />

짧은 기간이었지만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 볼 수 있게 되었고, 정도 많이 쌓였다. 몇몇<br />

학생들은 워크캠프가 끝나는 날 기차역까지 마중 나와 작별인사를 했다. 순박하고 착한<br />

아이들이었다.<br />

<br />

NICE 멤버를 도와주시는 사카이상의 집에 가게 되었다. 두 부부와 3 명의 아이들,<br />

사카이상의 아버지, 그리고 애완견 미트와 애완고양이 아지뽕이 사는 행복한 가정이었다.<br />

참고로 두 부부는 90 년대 초 NICE 멤버로 이 캠프에 참가한 인연을 바탕으로 결혼까지<br />

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인연이다.<br />

우리는 일반적인 일본인이 사는 형태와 방식을 체험할 수 있었다. 저녁에는 NICE<br />

의<br />

나아가야 할 방향과 현재 개선할 점을 사카이상과 일본 소주를 마시며 토론했다. 다소<br />

무겁고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NICE 의 대한 애정을 갖고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내보였다.<br />

끝나는 날 까지 물심양면으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고, 게다가 아이들이 편지까지 써<br />

줘서 너무 고마웠다.<br />

이 뿐만아니라 우리는 지역주민들을 위해 다양한 일을 하였다. 마을 공터에 풀을 뽑아 농지<br />

개간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캠프장 주변에 풀을 제거하여 보살펴주신 관계자분들께<br />

보답하였다. 또한 지역 신문방송에서 우리 멤버를 취재하여 신문지상에 나오게 되었다.<br />

시간은 쏜살 같이 흘러 어느덧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13 일 동안 동거동락하며 허물없이<br />

친 형제자매처럼 지낸 우리들에게 작별이란 너무나도 가혹했다. 아마 평생 우리 맴버들이<br />

한자리에 모여 다시 얼굴을 보기란 불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쿠니미 안에서의 추억은<br />

기억들은 절대 잊지 못 할 것이다.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걱정들은 모두다 기우였으며<br />

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개인적으로도 다시 한번 참가하고 싶다. 2<br />

주간의 짧은 시간에<br />

세계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캠프에 갈 수 있게 도와주신 학교 관계자 여러분과<br />

유네스코 선생님들, 현지 NICE 관리자분들 쿠니미 주민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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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br />

김영수 (홍익대 영어영문학과 3 년)<br />

JIA-YN2010_LC_TMH Guodazhai<br />

1 월 22 일-2 월 4 일<br />

_지구 어딘가에는...<br />

나는 2006 년 1 월 만 나이로 이제 막 20 살이 되었을 때, 홍익대학교에서 주관하는<br />

홍익봉사단에 참여하게 되어 라오스에 다녀왔다. 그 때까지 해외에 나가본 경험이 없었기<br />

때문에 세상을 보는 시야도 상당히 편협했다. 라오스에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서<br />

다시없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 곳에서 내가 머물던 곳과는 다른 커다란 세상 아래 나란<br />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고 다시 생각해 보고 또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서로 다른 문화와<br />

서로 다른 환경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서로 교류를 통하여 사람과 사물에 대한 내<br />

모든 인식과 인지 범위가 커질 수 있었다. 캠프가 끝난 다음에도 이 같은 국제 자원 활동을<br />

스스로 검색해 보고 참가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왔다. 그러나 병역 문제도 있고 여러 일들로<br />

인해 그 결심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으려던 순간에 2010 년 1 월 드디어 중국으로 국제 자원<br />

활동을 갈 수 있게 되었다.<br />

중국이란 나라는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겠지만 빈부격차가 심하며 인구가 많은 만큼<br />

상대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많다. 만 나이 24 살이 된 지금 나는 이번 유네스코<br />

중국 워크캠프에 참여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무엇을 더 얻을 수 있을까 하는<br />

생각을 출국 전에 수없이 해왔고, 이 캠프 기간이 결코 헛되이 보내는 기간이 되지 않기를<br />

기도했다. 우리는 중국에 가서 마을 파티 혹은 페스티벌 때 보일 안무라든지 노래를<br />

준비하기 위하여 며칠간 모여 회의를 하였고 실제로 안무도 연습하고 노래도 맞춰보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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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각자 역할을 분담해 그 역할을 책임지고 수행하게 하였는데, 가령 나 같은 경우는<br />

중국어를 공부해 약간의 통역을 담당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중국어가 약 2<br />

주 정도<br />

공부한다고 회화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의 쉬운 언어는 물론 아니지만 안 그래도 중국어에<br />

흥미와 관심이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상황별 기초 회화 정도는 어려움 없이 사용할 수<br />

있도록 공부하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출국 날이 다가왔고 준비하는 데에 큰 부담감 없이<br />

지내왔기 때문에 출국 당일 새벽에 짐을 허둥지둥 챙기기 시작하였다. 밤에 춥다는 말에 긴<br />

팔도 몇 장 집어넣고 대부분은 반팔과 츄리닝 그리고 작업복으로 구성된 배낭이었다.<br />

베이징을 경유하여 우리는 쿤밍 공항에 내렸고 체감 기온은 우리나라 초가을 정도의 선선한<br />

날씨였다. 우리는 JIA 숙소에서 마중 나온 중국 측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br />

이번 캠프 기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마워해야 할 중국 대학생 “야”를 만나게 되는데,<br />

이 친구가 없었다면 우리는 엄청난 의사소통 문제에 시달렸어야 했을 것이다. 이 친구 역시<br />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번 목적지에 같이 가게 되는 중국 측 참가자 12 명 중 한 명일 뿐인데<br />

중국어는 물론이고 영어를 거의 native 같이 구사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우리<br />

입장에서는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JIA 숙소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 늦은<br />

저녁을 먹었는데, 꼬치 집에 가서 꼬치와 맥주를 먹었다. 중국 꼬치에 들어가는 향신료<br />

냄새와 맛은 무슨 꼬치든 90% 동일하다고 보면 되는데 첫 날 이렇게 꼬치를 먹어 보니<br />

이제야 중국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밤에는 중국 친구 한 명을 포함해 우리 팀<br />

11 명이 한 방에 모여 술자리를 가졌는데, 중국 과자도 먹어보고 특히 중국 컵라면에 모두<br />

기겁하게 되었다. 다음 날 저녁에 쿤밍에서 10 시간 정도 침대버스를 타고 펀칭이란 곳으로<br />

가게 되었다. 침대 버스는 정말 적응이 되지 않는 구조였는데, 나중에 펀칭에서 쿤밍으로<br />

올 때는 이만한 이동수단이 없다고 감탄하게 되었다. 갈 때는 차 안에서 할 게 없어서<br />

억지로 자고 춥기도 해서 많이 뒤척거렸지만, 올 때는 그 간의 피로가 한 번에 터지면서<br />

10 시간 내내 죽은 듯이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새벽과 아침의 경계 즈음에<br />

펀칭 터미널에 도착해서 중국 팀 참가자들을 기다렸다. 이번 중국 팀 참가자들은 여자가<br />

9 명, 남자가 3 명이었는데 남자가 너무 적어서 그런지 중국 남자들이 원래 그런지 제대로<br />

기를 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펀칭 터미널에서 미니버스로 짐을 또 옮겨 싣고 3 시간<br />

정도를 강원도의 험난한 길이 울고 갈 정도의 길을 달렸다. 그렇게 어느 학교에 도착해서<br />

SK 의 sunny 봉사단을 만나서 같이 점심을 먹고 헤어지고는 본격적인 산행 길을 올랐다.<br />

산을 내려가 저 쪽에 보이는 산을 넘어야 마을이 나오는 상황이었는데, 나이 25 살이<br />

되어서야 ‘산을 넘는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거의 4 시간 정도를 걸어서 우리<br />

모두는 드디어 우리 목표인 텅미에허 마을의 조그마한 분교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해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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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해질 즈음이라서 우리는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방을 청소하고 매트를 깔고 침낭을<br />

깔았다.<br />

서론이 너무 길었는데 본론 즉, 1 월 23 일부터 2 월 2 일까지의 캠프 활동과 활동하면서<br />

느낀 점은 시간에 상관없이 정리하도록 하겠다. 우리가 가장 주로 했던 일은 마을의 가정<br />

방문, 페인트칠, 아이들 교육, 장작 운반이었다. 이 중심 일과 중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br />

일은 물론 장작 운반이었다. 모든 요리를 하거나 물을 끓이기 위해서는 장작이 필요했는데,<br />

며칠 간 쓸 만큼만 들고 오기 때문에 우리는 캠프 기간 동안 4-5<br />

번 정도 나무를<br />

운반하였다. 아직까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나무를 하러 가는데 40 분 정도 산을 더<br />

올라가야 했고, 거기서 나무를 베고 주워 적당히 얇은 나무줄기로 묶어서 다시 들고<br />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냥 빈손으로 올라가는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엄청난 무게의<br />

나무를 들고 가파른 길을 내려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 뿐만 아니라 목, 어깨, 팔, 허리<br />

모든 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무리가 가는 작업이었다. 여기서 중국 여자<br />

참가자들한테 진심으로 감동한 점은 분명히 자신들이 간신히 들 수 있을 정도의 무게의<br />

나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오면서 앞뒤에 있는 우리 한국 팀 참가자들을 챙겨주고 다른<br />

한 손으로 계속 나무를 주워 더 가져오는 데에서였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정말 이 친구들은<br />

일을 열심히 하고 배려심도 깊고 무엇보다 성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분교 한 구석에 장작을<br />

내려놓자마자 의자에 앉아 힘들다고 쉬고 있는 한국 참가자들과 달리 곧바로 다시 문을<br />

나가 나무를 들고 내려오는 친구들을 도와주는 모습에 또 한 번 감동했다. 초반에 이런<br />

장면들을 보게 되자 중국 친구들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도 좋아지게 되었다. 원래 나쁜<br />

이미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 중국 참가자들이 서로 의사소통에 너무나도 큰<br />

어려움이 있어 누구하나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런 때에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게<br />

된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도 역시 중국 팀 친구들과 처음부터 이야기를 하고 친하게<br />

지내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오전 일과와 오후 일과 시간 외에 남는 시간에 틈틈이<br />

중국 친구들에게 접근하여 중국어도 물어보고 아이들과 같이 운동도 하면서 금방 친해질 수<br />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나가는 우리들 관계 그 자체가 너무나도 좋았다. 내가 먼저<br />

한 발 접근함으로 인해 중국 친구들이 우리 팀에 대해 조금씩 호기심을 보이는 것이고,<br />

그게 여러 명이 되자 우리는 이제 친구와도 같았다. 한국에서 며칠 합숙한다 해도<br />

그렇게까지 친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별할 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아쉬움은 더욱<br />

커져만 갔다. 중국 친구들과 그렇게 허물없이 지내다가 이제는 어쩌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br />

이별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슬펐다. 한국, 중국 팀 리더들이 의견을 모아<br />

우리는 일정에 없던 펀칭에서 1 박을 더 하기로 하였다. 그냥 이대로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br />

다 같이 펀칭 터미널 근처에서 숙소를 잡고 1 박 2 일 동안 추억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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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미에허 마을에서 마지막 페스티벌을 마치자 그 씁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눈 깜짝할<br />

사이에 10<br />

일 정도가 지나가 버렸고 이제는 다시 산을 내려올 시간이었다. 새벽<br />

4 시 30 분에 일어난 우리는 짐을 다 챙기고 학교 청소를 깔끔하게 마친 후 텅미에허 마을을<br />

떠났다. 정든 교실, 부엌, 화장실 그리고 아이들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동안 마음속은<br />

허전함으로 가득했다. 얼음같이 차가운 물, 깜깜한 화장실, 새벽에 겨울 같은 날씨 등은<br />

이곳에 다시는 오기 싫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보다는 내 몸과 머리가 기억하는 하나의<br />

추억이 되었다. 항상 흙먼지 날리는 곳에서 했던 식사와 밤마다 마셨던 大 米 酒 , 아이들과<br />

함께 했던 순간들 하나하나를 평생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br />

간절했다. 한국에 돌아와 중국 친구들과 이별할 때 포옹했던 장면과 그 친구들이 흘렸던<br />

눈물을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진다.<br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번 캠프를 통해 내면의 성숙을 확실히 이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br />

밖으로 하는 것 자체가 겸손하지 못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분명 얻고자 하고<br />

깨닫고자 하는 바를 성취했고 한 단계 더 높이 성장했다고 자신한다. 라오스에 가서 얻었던<br />

것과는 또 다른 깨달음이고 이번 깨달음이 내 남은 인생에서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할<br />

것이라고도 확신한다. 이번 캠프 기간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그들과의 인연 자체가 여기서<br />

끝이 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록 직접 만나는 건 상당한 제약이 따르겠지만<br />

그들의 이메일과 연락처를 통해 계속해서 소식을 주고받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br />

있는 중이다. 각자의 가슴 속에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채로 각자의 삶을<br />

살아가고 계속해서 나눔을 실천하고 다름을 이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유네스코<br />

찌아요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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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ZANIA<br />

김민정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4 년)<br />

UVMTV-07 Orphanage Center 6 월 11 일-9 월 3 일<br />

_검은 땅이 준 선물<br />

다르에스살람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심사장으로 걸어가면서 들었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하다.<br />

‘내가 탄자니아에 오다니, 내가 아프리카 땅에 드디어 다시 발을 디뎠구나, 내가<br />

탄자니아에 있다니’ 그곳에서 10 주간의 중장기 봉사활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그<br />

때 쯤에는 처음 공항에서 느꼈던 그 설렘과 감탄, 호기심과 흥분이 더, 커져있었다. 꼭<br />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과 함께.<br />

나는 예전에 아프리카의 수단에 다녀온 적이 있다.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 이었는데 그 때<br />

그곳에서 한 한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갔었다. 나는 거기, 그 아이들의 눈동자를<br />

통해 무한의 순수함을 보았고 ‘너희들을 내가 도와야겠다.’ 가 아니라 그냥 함께 하고<br />

싶다, 너희 옆에 오래도록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br />

하루뿐이었고 그 날 이후로 내 맘 속에는 그들을 다시 찾아가리라는, 그 때는 더 오래<br />

함께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수단의 그 고아원에 다시 가지는 못했지만 유네스코를 통해<br />

탄자니아의 한 고아원에 갈 수 있게 되었고 이번에는 10 주였다. 캐나다에서 온 25 살의<br />

자원봉사자와 첫 주를 시작하였다. 중장기 활동은 단기의 워크캠프와는 다르게 참가자들이<br />

직접 기관 측과 대화를 통해 스케줄을 짜는 것이 일반적인데, 요일별로 시간대별로<br />

고아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활동들을 생각해 내어 일주일의 시간표를 만들어 냈다. 영어,<br />

수학, 프랑스어 수업, 서류작업, 부엌일, 스포츠와 게임, 청소, 아이 씻기기, 가축 돌보기<br />

등 다양한 활동을 계획했는데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이 고아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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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불규칙한 등교시간, 식사시간의 등의 문제로 쉽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는 정해진<br />

시간표 없이 고아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일손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돕고,<br />

모래장난이 놀이의 전부인 아이들에게 새로운 게임에 호기심을 갖게 하고, 공부하고 싶어<br />

하는 아이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 아이를 붙잡고 수업을 진행하는 식으로 그들과 함께 했다.<br />

생각보다 규모가 큰 고아원 이였다. 그 곳에 등록된 아이들은 약 150 명 정도였는데 태어난<br />

지 한 달도 채 안된 어린아이에서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준비 중인<br />

친구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 중 살라마 라는 한 소녀가 기억에 남는다.<br />

유창한 영어실력을 지닌 똑부러지는 십대 소녀였는데 대학에 가고 싶으나 등록금을<br />

마련하지 못해 꿈을 접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등록금은 우리 돈으로 약 100 만원<br />

정도였던 것 같다. 사정을 알게 된 자원봉사자들은 자신들의 여행경비로 계획하고 가져왔던<br />

돈의 일부를 모았고, 그녀의 대학진학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행복해 하던 살라마의<br />

얼굴이 여전히 눈앞에 선하다.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던 그 비장한 목소리도- 고아원의<br />

몇몇 아이들은 그들이 대학에 입학 할 때까지 금전적 후원을 해주는 후원자가 있다고 한다.<br />

그런 아이들을 뽑는 선발 기준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후원자의 수가 충분치<br />

않아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단다. 봉사자들은 고국에<br />

돌아가서도 후원자를 찾아줄 수 있는 노력을 계속 하자고 약속했다.<br />

고아원에는 세 살 이하의 아이들이 7 명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그들과 가장 많은<br />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아침에 고아원에 도착하면 2<br />

살짜리 사내아이 아이작 이라는<br />

녀석이 저 멀리에서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르곤 했다- ‘민정! 민정!’ 그 소리에 달려가<br />

아이를 번쩍 들어 안으면 다른 아이들이 자신도 안아달라며 나의 양쪽 팔, 다리에 달라붙어<br />

나를 흔들어 대곤 했는데. 아이들 목욕 시키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날이 많았고 밥<br />

먹이고, 기저귀 갈고, 분유먹이고, 재우고, 같이 놀다보면 어느덧 해질 무렵이 되던 날도<br />

많았다. 그 작고 여린 녀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물론 엄마가 된다는<br />

것은 정말 힘든 일이겠구나― 하는 깨달음도 있었고. 마지막 날에는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br />

하다가 울컥하여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그런 나를 위로하듯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며 내<br />

곁을 떠나지 않던 그들이었다. 뭐 결국엔 저쪽에서 누가 사탕 나눠주는 걸 보고 그쪽으로<br />

쪼르르 달려갔지만. 아이들은 자라서 어린 시절 언젠가 자신들과 놀아주던 한 동양여자를<br />

기억할까?<br />

가진 건 많이 없어도 탄자니아의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행복의 근원을 아는<br />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런 그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나의 10 주는 행복 그 자체였고 잊을 수<br />

없는 순간순간 들이었다. 10 주의 꿈같았던 시간은 끝났지만 그곳에서 느끼고 배운 많은<br />

것들은 선명히 내 가슴속에 남아있기에 나는 여전히 행복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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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ILAND<br />

김기연 (홍익대 영어영문학과 4 년)<br />

GW51AKHA10 1 월 11 일-24 일<br />

_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br />

캠프를 가기 전 3<br />

일부터 긴장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약간의 들뜬 기분과 약간의<br />

걱정들이 섞여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곳저곳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자료를<br />

찾아보기도하고 태국 북부지역을 갔다 왔다는 지인들의 말도 들어보고, 나 자신 나름대로<br />

준비한다고 했지만 정작 태국 공항에서 도착하면서 무언가 빠뜨린 것은 아닌가, 준비를<br />

너무 안 해 온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친화력과 적응력이 좋다는 나의 장점을<br />

믿고 미팅 포인트로 갔다.<br />

막상 캠프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긴장감이 확 풀렸다. 모두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고<br />

만나자마자 서로 소개를 하며 좋은 분위기로 캠프생활이 시작되었다. 영국에서 온 헨리와<br />

레베카, 네팔에서 온 헨리의 아내 핑키, 네덜란드에서 온 왕언니 뮤리엘, 벨기에 출신의<br />

어린왕자 토마스, 덩치는 크지만 정말 착한 캐나다인 브라이스, 체코에서 온 미카엘,<br />

왕오빠 도연오빠, 너무 착한 희진오빠, 같은 학교 준범오빠 그리고 예쁜 막내 예림이까지<br />

12 명의 캠퍼들이 참가하였다. 원래는 13 명이었지만 끝내 미국에서 온 여자 캠퍼는 오지<br />

않았다. 우리가 간 마을은 태국 치앙라이라는 태국 북부지역의 아카 마을이었다. 아카족은<br />

고산족이라서 높은 산을 옮겨 다니며 지낸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모든 집이 대나무로<br />

지어져있었고, 집 자체는 지면에서 떨어져있었다. 처음에 숙소에 들어갔을 때가 기억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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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다. 아무리 대나무가 튼튼하다고 하지만 우리 13 명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까하는<br />

생각에 정말 조심조심 걸어 다녔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었던 것 같다.<br />

일하는 시간은 보통 아침 8 시나 9 시부터 오후 4 시까지였다. 오후 4 시가 되면 어두워지기<br />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아침 7 시에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고 일할 준비를 했다.<br />

보통 캠프리더가 전날 저녁 회의시간에 무슨 일을 할지 알려주기 때문에 아침에 시간을<br />

허비하지 않고 바로 일을 할 수 있었다. 한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모든 일이 쉽지만은<br />

않았다. 숙소 앞의 시냇가에 댐을 만들 때에는 물 바닥에 있는 돌을 옮겨서 댐을 쌓고 흙을<br />

퍼내야했다. 댐을 만들 때 힘들었던 것은 무거운 돌이 아니라 흙이었다. 흙을 퍼내느라<br />

허리를 장시간 굽히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퍼낸 흙은 돌담<br />

만들 때 사용하였다. 시멘트 가루와 흙을 섞어 시멘트를 만들었다. 물 비율이 정말<br />

중요한일이었던 것 같았다. 물이 너무 많이 들어가게 되면 묽어서 돌을 고정시킬 수가<br />

없었다. 개인적으로 제일 재미있었던 일은 대나무 집을 만드는 일이었다. 다른 집으로 이사<br />

가려는 집이 있어, 우리 손으로 직접 집을 지어드렸었다. 기둥을 제외한 집을 만드는 모든<br />

재료는 대나무였다. 지붕까지 대나무로 하게 되면 비가 새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잎처럼<br />

얇게 말린 대나무를 여러 겹 겹쳐 물이 새지 않는다고 한다. 산에 올라가 기둥이 될 나무를<br />

해오고 자르고 집을 짓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하지만 키가 작은 나로서는 조금 불리한<br />

일이기도 했다. 지붕과 벽면이 맞닿는 쪽에서부터 지붕을 얹어야하는데 키가 작아 다른<br />

캠퍼의 목마를 타야했다. 학교 방문 또한 재미있었다. 마을에 학교가 없는 대신, 산 아래<br />

여러 고산족 아이들이 다니는 특이한 학교가 있었다. 여기 다니는 아이들은 태국 시민권이<br />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 아이들 또한 시민권이 없다고 한다. 시민권이 없다보니 시내에 있는<br />

학교를 다닐 수가 없고, 나중에 ID 카드 또한 받을 수가 없다고 한다. 아카족 아이들뿐만<br />

아니라 다른 마을 아이들도 있었다. 신기한 것은 아이들이 태국어로 수업을 하고 놀 때는<br />

자신들 언어 논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과<br />

하루 종일 얼굴 맞대고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노니 정이 들어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br />

둘째 주 목요일은 산에 올라가서 텐트치고 야영을 했었다. 텐트와 간단한 짐만 가져가,<br />

식기도구는 모두 대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였고 밥 또한 대나무 통을 이용하여 조리하였다.<br />

야영을 마치고나니 정말 이제는 어느 곳을 가도 살아갈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br />

가기 전, 머릿속이 이런저런 생각들로 많이 복잡한 상태였다. 이런저런 생각들과 취업문제<br />

등 많은 걱정을 안고 간 캠프였다. 캠프에 가서 생각정리를 해오리라고 기대는 하지<br />

않았지만 의외로 차츰차츰 정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올 땐 확실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br />

새로운 경험 또한 내 사진을 바꾸는 데에 한몫했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해외에서<br />

생활해왔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내심 나 자신에게 큰 문화적<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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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을 주거나, 내가 알지 못했던 고정관념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정말 많이 들었던<br />

생각은 해외생활을 오래했지만 나 역시 한국인이구나라는 생각이었다. 12 명의 캠프인원 중<br />

나를 포함하여 5 명이 한국인이었다. 서로도우며 일을 한 2 주를 돌아보면 나도 모르게<br />

한국인들 더 많이 도와주게 된 것 같았다. 마음속으론 우리다 똑같은 캠퍼들이라고<br />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차별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마지막 금요일 날<br />

마을에서 작은 세라머니를 해주었다. 작은 의식을 하며 실 팔찌를 손목에 채워주었다.<br />

무병을 뜻하는 팔찌인데 아직도 이 팔찌를 보면 아카마을이 생각난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br />

추억이 될듯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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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ILAND<br />

박진솔 (성균관대 법학과 2 년)<br />

1004MUS Music&Travel 4 월 5 일-19 일<br />

_Music is the language of us all<br />

군에서 막 전역을 하고 무엇인가 뜻 깊은 일을 하고 싶어 워크캠프를 찾던 중 나에게 꽤나<br />

깊은 울림을 주었던 말이었다. 지구촌 이라는 말처럼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마치 한 마을<br />

사람들처럼 만나고, 소식을 주고받지만 긴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심지어 다른<br />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완벽하게 소통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하면 60 억<br />

인구 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이 순수한 감정을 공유하고 서로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줄 수<br />

있을까? 이런 점에서 ‘음악’은 우리 모두의 언어가 아닌가 싶다. 몇 번의 고민 끝에 나의<br />

첫 워크캠프를 Thailand 의 NGO 인 DaLaa 에서 주최하는 이 캠프에 참여 하게 되었다. 첫<br />

워크캠프이기도 하였고,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준비가 쉽지 않았지만 4 월 4 일 아침 나는<br />

인천 공항을 떠나 태국 Bangkok 에 무사히 도착 할 수 있었다.<br />

하지만 막상 방콕에 도착하고 보니 거기서 부터가 문제였다. 아직 꽃샘추위로 쌀쌀한<br />

우리나라와는 달리 확 더워진 태국의 기후와 나와는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br />

나는 다음날 오전 10 시까지 캠프의 개최지인 태국 남부의 도시 HatYai 로 혼자 이동해야<br />

했던 것이다. 간신히 Hualamphong Train Station 에서 물어물어 Travel Agency 를 찾아서<br />

HatYai 로 가는 버스를 예약 할 수 있었고(몇일 뒤가 신년이라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br />

굉장히 많아서 기차역이 붐볐다), 난생 처음 16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2 시간이나 늦게<br />

Meeting point 인 HatYai Train Station 앞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아마 전 워크캠프를<br />

통틀어 이 때가 가장 정신없고 힘이 들었던 시기가 아니었나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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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tYai 에 위치한 DaLaa Office 에서 나는 이번 워크캠프에 참여한 모든 캠퍼들을 만날 수<br />

있었다. 한국인이 나까지 포함하여 4 명(남자 1 명, 여자 3 명)으로 가장 많았고, 독일인<br />

2 명(캠프리더 1 명 포함), 러시아인 1 명, 태국인 4 명(캠프리더 2 명) 순이었다. 짧은 만남<br />

후 우리는 다시 Songkhla 에 위치한 숙소로 이동 하였다. Camper 들은 태국의<br />

‘썽태우’라는 교통수단을 타고 이동하였는데, 썽태우는 작은 트럭의 짐칸에 지붕을<br />

씌우고 길다란 나무 널빤지 의자를 양옆으로 길게 두 줄 만들어 놓은 교통수단으로, 택시도<br />

되고 버스도 되고 하는 트럭이다. 태국을 여행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썽태우를 쉽게<br />

발견할 수 있다. 아무튼 우리는 한 주 동안 Songkhla 에 위치한 다른 태국인 camper 인<br />

Yui 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첫날 저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악기를 소개 하는 날이었다.<br />

처음 만난 어색함과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의 운치 속에서 서로를 소개 했다.<br />

나는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나의 악기인 Flute 를 소개 하였다. 또 한국에서<br />

가져 온 단소로 아리랑을 연주 하였다. 밤공기를 뚫고 우리가 연주 하는 악기와 노랫소리가<br />

멋들어졌다.<br />

우리가 이번 워크캠프 기간 동안 하게 될 일은 태국의 Local Market 을 돌면서 공연을<br />

하는 것이다. 공연을 통해서 Donation 을 받고, 거기서 모인 수익금으로 학교에 기부를<br />

한다. 그 학교는 태국 남부 Satun 지역의 섬에 있는데, 전교생 30 명에 전기도 들어오지<br />

않는 지역이다. 워크 캠프의 첫 번째 주는 공연을 위한 토의와 연습, 그리고 Songkhla 와<br />

HatYai 의 Market 을 돌며 실제 공연을 하는 것으로 결정 되었다. 직접 플랜카드와<br />

홍보물을 제작하기도 하고, 캠프리더인 Kai<br />

가 연주하는 (긴 파이프처럼 생겨 코끼리<br />

울음소리가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악기) ‘디저리두’, 또다른 캠프리더인 Sakkarin<br />

과<br />

Joe 가 연주하는 흥겨운 타악기인 젬베, 그리고 나의 flute 와 단소가 모여 즉흥연주도<br />

하였다. 나머지 camper 들은 영화 클래식의 주제곡 ‘너에게 난 나에게 넌’과 아리랑,<br />

그리고 한복을 준비 하였고, 함께 모여 춤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저녁에는 앞마당에<br />

모닥불을 피워놓고 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였고, Songkhla<br />

의 해변에서 잠시 몸을<br />

쉬면서 연습을 하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기타리스트 Anars 가 이때 처음<br />

합류하였는데, 그때 만들어낸 멜로디는 아마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3 일째 되던<br />

저녁, 우리는 Songkhla 의 야시장의 시끌벅적한 축제 속에서 첫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br />

물론 모금도 성공적이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 어색하고 투박한 공연이었지만 어느 때<br />

보다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여기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히치하이킹’이다.<br />

첫날부터 우리는 히치하이킹을 한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마치 택시를 잡듯이<br />

너무도 당연히 지나가던 차에게 손을 흔드는 DaLaa 멤버들을 본 이후 우리도 곧<br />

히치하이킹을 하고 트럭 짐칸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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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캠프에 적응 하는 데는 애를 좀 먹었다. 4 월의 태국의 날씨는 무척이나 덥다. 일년중<br />

가장 더운 때가 바로 이때로, 너무 더워서 움직이기도 싫고 너무 더워서 입맛도 없을<br />

정도이다. 가만히 있어도 힘들다는 말이 딱 알맞다. 또 열대기후에 기승을 부리는 모기와<br />

문화적 차이로 인한 의사소통의 답답함은 누구나 겪는 문제이지만 누구에게나 힘든<br />

문제였다.<br />

이렇게 때론 즐겁게, 때로는 어려움을 겪으며 한 주를 보내고 두 번째 주 부터는 이곳저곳<br />

여행을 하며 공연을 하는 일정이 시작되었다. 주말동안 Klongdan 이라는 평화로운 어촌<br />

마을에서 낚시도 하고, 학교에서 아이들과 놀기도 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낸 후에 우리는<br />

Satun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Satun 은 태국 남단에 위치한 무슬림 지역으로, 히잡을 쓰고<br />

돌아다니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보수적인 이슬람의 문화의 정취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날<br />

Satun 의 Market 에서 우리는 또 공연을 하였다. 우리의 음악은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다.<br />

Sakkarin 와 Joe 의 젬베 리듬에 Anars 의 기타가 악상을 전개하면, 이어 나의 Flute 의<br />

멜로디가 합쳐서 어느새 즉흥적인 화음을 이루면 나는 가끔씩 아찔한 느낌을 느끼곤 했다.<br />

공연 중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고 어떤 음악을 요구하는지 또렷이<br />

느낄 수 있었다. 국가도 언어도 다른 우리들은 확실히 교감하고 있었다.<br />

Satun 에서 HatYai 로 이동 한 후에 연휴를 이용하여 휴식을 취했다. 두 번째 주는 태국의<br />

신년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설처럼 신년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가기도<br />

하고 Sonkran 이라는 축제에 참여하기도 한다. 우리도 물론 HatYai 의 시내에서 Thai 의<br />

가장 큰 축제인 Songkran 축제에 참여 하였다. 일년 중 가장 더운 시기에 행해지는 이<br />

축제에서는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까지 물을 뿌리며 서로 즐긴다. 또한 흰색의 파우더를<br />

발라주며 ‘Happy New year’라고 외치며 신년을 축하하기도 한다. 이 경우 물을 끼얹는<br />

행위 자체는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Songkran 은 잊지 못할 축제였다.<br />

수많은 사람들이 시내에 모여 물총을 쏘고, 바가지로 물을 뿌리며 거리를 활보 한다.<br />

우리도 물론 물총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하루종일 즐겼다. 온 몸이 쑤시고 아플 때 까지.<br />

Songkran 축제 이후 HatYai 의 Night Market 과 배 위에서 물건을 파는 선상 시장에서<br />

공연을 하였다. 그동안 canon<br />

변주곡을 편곡하였고, '눈의 꽃'을 기타 반주와 flute<br />

멜로디로 편곡하였다. 쏟아지는 음악과 흥겨움 속에서 둘째주 금요일인 16 일의 공연을<br />

마지막으로, 우리의 공연은 끝이 났다. 그리고 이튿날, 마지막 임무를 위해 Satun 으로<br />

향했다.<br />

Satun 에서 1 시간 정도 배를 타고 나가면 섬이 하나 있다. 그 섬에는 원시의 맹그로브<br />

정글이 울창하게 우거졌고, 그 숲 사이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학교가 하나 있다.<br />

우리의 목표는 공연을 통해서 모금한 돈을 이 학교에 기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캠프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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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점에서 우리는 이 임무를 잊지 않았다. 그간 했던 활동들을 발표하고 기부금을<br />

전하는 자리에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캠프의 모토였던 Music is the language of<br />

us all 이라는 말처럼 음악은 모두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가장<br />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br />

현기증 나도록 뜨거운 남국의 열기 속에서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던 가슴 뛰었던 2 주.<br />

그리고 짧고도 뜨거웠던 한여름 밤의 꿈. 그 시간의 지나간 날들의 모든 실수조차도<br />

젊은날의 헤프닝으로 기억 되며,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br />

가능성을 생각한다.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을 넘어 피부 색깔도, 향유하던 문화도,<br />

사고하는 방식도 다른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소통하고 공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이다.<br />

또한 서로의 것을 빼앗지 않고 함께 생활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생각 할 수 있는 우리의<br />

가능성을 믿기로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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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KEY<br />

김은지 (홍익대 프로덕트디자인전공 4 년)<br />

GSM12 ODEMIS<br />

7 월 31 일-8 월 15 일<br />

_상상 그 이상의 나라, 터키<br />

대학생활의 마지막 방학, 4 학년 여름. 국제 자원봉사활동을 결정하기까지 쉽지만은 않은<br />

선택이었다. 어쩌면 한 달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소비해 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 그리고<br />

무언가를 얻어와야겠다는 부담감이 더해져 함께 터키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br />

떠나는 전날까지 이것이 옳은 선택인가라는 고민했고 자유여행에 대한 계획도 없었으며,<br />

봉사활동에 대한 어떠한 준비도 없이 그렇게 무작정 길을 나섰다.<br />

이스탄불에서 3 일, 카파도키아에서 3 일, 페티예 2 일, 파묵칼레 1 일, 이즈미르 1 일, 10 일<br />

동안의 자유여행 이후 GSM012 Odemis 캠프가 시작되었다. 캠프장소인 외데미쉬에 내렸을<br />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더위’였다. 처음 느껴보는 찌는 듯한 무더위와 한국을 연상케<br />

하는 불쾌지수를 치솟게 하는 습기. 외데미쉬의 더위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내가 있었던<br />

2 주 동안 최고 49.2 도까지 올라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매일같이 이 더위와<br />

싸워야함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br />

캠프 숙소는 외데미쉬 청소년 축구장의 도미토리를 이용했다. 축구장 옆의 작은<br />

도미토리였는데 총 10 개의 방, 그리고 각 방마다 2~3 개의 베드가 있었으며 서로 다른<br />

국적의 캠퍼들이 룸메이트가 되어 방을 사용했다. (총 17 명의 캠퍼가 있었으며 터키 2 명,<br />

프랑스 1 명, 이탈리아 1 명, 일본 1 명. 세르비아 2 명, 아제르바이잔 2 명, 우크라이나 2 명,<br />

스페인 3 명, 한국인 3<br />

명이 참여했다.) 화장실은 터키식(재래식)으로 2 곳이 있었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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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실은 숙소 내 1 곳과 7 인용 야외 샤워실 1 곳이 있었으며 다행이도 뜨거운 물의<br />

이용에는 지장이 없었다. 식사는 주방에서 이루어졌으며 아침, 저녁을 먹었고 점심은<br />

레스토랑에서 먹었다.<br />

아침에는 항상 에크맥과 토마토, 오이, 올리브, 터키치즈, 삶은 달걀, 다양한 잼으로<br />

이루어진 터키식 아침식사를 했고 점심, 저녁에는 다양한 메뉴가 나왔다. 식사는<br />

대체적으로 간이 조금 강했지만 상당히 훌륭했고 탄수화물 중심의 고열량 식이<br />

반복되어서인지 고된 노동과 체험활동에도 불구하고 살이 빠지지 않고 찌는 기이한 현상을<br />

체험할 수 있었다.<br />

캠프에서의 활동은 9 시에서 1 시 30 분까지의 오전 작업과 점심시간 그리고 오후의 단체<br />

체험 및 자유 시간과 저녁시간으로 나누어졌다. 오후 활동에 대해서는 리더들이 자체적으로<br />

프로그램을 제안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기대하지 않았다.<br />

자유시간이라는 명목 하에 주어지는 시간이 많았고 단체 체험에 있어서도 반강제적으로<br />

개인비용을 지불해야하는 경우가 많았다.<br />

하지만 문제는 오전일과에서였다. 일전에 페인팅과 유적 복구 작업에 관한 내용을 캠프의<br />

인포 시트에서 보았고 복구 작업에 대한 기대로 캠프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하루도<br />

페인팅이나 복구 작업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매일 아침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지도<br />

모른 채 작업장으로 향하고, 일용직 노동자처럼 그날그날 하라는 대로 일을 받아서 해야<br />

했다. 야외에서 작업을 하는지, 실내에서 작업을 하는지 조차 캠퍼들은 알지 못했다. 매일<br />

아침 리더들에게 물어보지만 그들도 외데미쉬 측에서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다는<br />

식의 대답뿐이었다.<br />

매일같이 이어지는 작업 또한 아파트나 도로 주변의 잡초를 뽑는 일 이었는데 이러한<br />

작업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처음부터 작업에 대한 계획이 없었던<br />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까지 했다. 오후 활동에서 방문하기로 했던 유적지도<br />

공사 중인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쓰레기로 뒤덮여 더 이상 유적으로써의 기능을 하지<br />

못해 그냥 발걸음을 돌린 경우도 많았는데 어떻게 사전방문도 없이 계획을 세울 수 있는지,<br />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음에도 왜 캠퍼들을 의미 없는 일에 소비하는지 안타까웠다.<br />

작업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에 이에 있어서 어떠한 성취감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 가장<br />

아쉬움이 남는다.<br />

캠프에서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외데미쉬 사람들이었다. 이스탄불이나 카파도키아<br />

페티예 등의 관광지를 여행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따스한 정을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기<br />

때문이다. 외데미쉬에선 항상 주민 분들이 차이나 애플티를 권하곤 했다. 상점에 가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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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고를 때에도 길거리를 거닐 때에도 언제나 차이를 대접했다. 아이들은 우리를 졸졸<br />

따라다니며 신기해했고 사진을 찍자고도 했다.<br />

처음에는 이런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왜 이분들이 우리에게 이런 대접을 하는 것인지<br />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오해는 해결되었고“차이?”한마디면<br />

우린 언제나 “OK"를 외쳤다. 그들과 별다른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손짓<br />

발짓으로 하는 대화가 이어졌지만 마음으로 우리를 환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br />

가끔은 카페에서 노인 분들과 차이 한 잔과 함께 루미큐브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br />

졸졸 따라 다니던 아이들과 친해져 터키 결혼식에 초대받기도 했으며, 집에 초대받아<br />

자연산 벌집과 함께 차이를 마시기도 했다. 하루하루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즐기는 차이 한<br />

잔의 여유에 설레고 즐거웠으며 지금도 그 더운 여름의 따뜻했던 차이가 그립다.<br />

물론 캠프에서 단연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캠퍼들과의 추억일 것이다. 2 주 동안의 길다면<br />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우리는 어떤 캠프보다도 친목도모엔 성공했다고<br />

자부할 수 있다. (매일 밤마다 친목도모에 힘썼으니까;) 작업에서 성취감을 얻기 보다는<br />

사람들을 얻었다는 것에 대해 만족하는 캠프였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라고 했을 때<br />

모두들 울음바다가 되었던 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다시 만남을 기약하지<br />

못할지라도 언제 어느 곳에 있든 무엇을 하든 나에겐 2010 년 여름의 외데미쉬의 기억이<br />

함께 할 것 같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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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KEY<br />

이애란 (홍익대 교육학과 4 년)<br />

GSM05 AFYON 7 월 10 일-25 일<br />

_가장 값진 경험<br />

일요일 아침, 걱정과 기대를 반반씩 가슴에 품고 Afyon 에 도착했다. 리더 전화번호를<br />

몰라서 종이에 GSM 이라고 크게 써서 들고 있었더니 터키 경찰이 나를 경찰서로 데려가서<br />

뭐라 뭐라 하더니 그곳으로 리더가 찾아왔다. 프랑스인 3 명, 스페인 1 명, 터키인 2 명,<br />

벨라루스 1 명, 폴란드 1 명, 체코 1 명, 한국인 4 명 이렇게 총 13 명이었다. 한국인은 나와<br />

우리학교 동기 단 두 명인 줄 알았는데 도착해보니 한국인이 두 명 더 있었다.<br />

명지대학교에서 온 학생들이란다. 너무너무 반가워서 한국말을 썼더니, 여기 사람들은<br />

한국어로 서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가급적 영어를 쓰자고 했다. 오 나의 실수.<br />

한국인이 4 명이나 되었지만 우리는 서로 모여 있어도 영어를 사용하도록 노력했고 외국인<br />

친구들에게 영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할 때 서로 도와주었다.<br />

내가 도착했을 땐 저녁을 먹을 시간이라서 레스토랑으로 곧장 가서 저녁을 먹고 물담배를<br />

피고 차이도 마시고 놀다가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결승전을 보았다. 둘째 날 오전에는<br />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다가 저녁에는 미팅룸에 모여서 맥주를 마셨다.<br />

술을 마시면서 각 나라별로 노래를 한 곡씩 부르며 춤을 추었다. 서로 아직 어색하고<br />

서먹서먹했지만 부끄러움이란 단어는 여기서 허용되지 않는다.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br />

있을까하는 생각 따위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야 한다. 나를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br />

귀 기울여 듣고, 영어를 잘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하는 말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면<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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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마음을 열고 내게로 다가온다. 나의 진심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그들도 나에게<br />

진심을 보여준다. 진심을 어디서나 통한다는 말을 평소에는 실감할 수 있는 상황이 별로<br />

없는데 워크캠프에서만큼은 가슴에 와 닿을 정도로 실감하게 된다. 조금 느리지만 진심은<br />

어디서나 통한다.<br />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공원에 잔디를 심는 일이었다. 아침 아홉시 반부터 2 시까지 일을<br />

하고 점심을 먹으면 그 뒤의 시간은 자유시간이다. 잔디를 깔기 위해서 먼저 흙을 파내서<br />

수로를 연결하고, 다시 흙으로 덮은 다음 땅을 고르게 만들어 그 위에 잔디를 심었다.<br />

하지만 워낙 뜨거운 햇볕으로 인해 일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십분만 그냥 서 있어도 온<br />

몸이 땀으로 샤워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 땡볕에서 삽으로 땅을 파고, 다시 덮고,<br />

그런 일을 반복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들은 농사를 지을 때 민요를<br />

부르면서 흥을 돋우고 힘을 내는 풍습이 있다. 그래서 우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br />

모두들 알 만한 팝송을 부르면 서로 따라 부르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다. 한국의 노래를<br />

듣고 싶다고 해서 원더걸스의 Nobody 를 춤과 함께 알려주었더니 모두들 재미있다면서<br />

일하다 말고 노래와 춤을 알려주었다.<br />

진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외국인 친구들은 남한과 북한이 휴전상태인지 모르고 아예<br />

다른 나라인 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가 왜 분단이 되었는지,<br />

우리가 왜 통일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성형수술에 대해서도 심도<br />

있는 토의를 했다. 내가 코를 높이 세우고 턱도 깍고 지방흡입을 하고 싶다고 하니까<br />

프랑스 친구가 나보고 ‘stupid Korean girl’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눈이 크고 코가<br />

높고 턱이 뾰족하고 마른 여자가 미인의 기준이라고 설명했지만 날 이해해주지 않았다.<br />

나는 넌 한국남자가 아니라 프랑스 남자라서 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 친구가 나에게<br />

해준 말이 정말 기억에 남는 명대사다. "You don't just live in Korea, You live in the<br />

world." 그렇다. 나는 단지 한국에만 살고 있지 않다.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세계 속의<br />

한국인으로서 살고 있다. 한국인의 시각으로만 보지 말고 세계인의 시각으로 날 대하고,<br />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는 더 넓은 자세를 배운 것이다.<br />

워크캠프 중간에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2 박 3 일 동안 캐니언 트립을 떠났다.<br />

캐니언 트립을 떠나기 전에 유의사항을 들어보니 줄을 잡고 암벽을 타고, 머리높이까지<br />

오는 계곡을 건너는 험난한 여정이라고 했다. 또 언제 야생동물이 공격할지 몰라서 매우<br />

위험하다고도 했다. 머리 높이 정도까지 오는 계곡을 줄을 잡고서 건너야 하므로 수영을 할<br />

수 있으면 좋다고 했다. 캠프 베이스는 0 도 정도까지 내려가므로 매우 춥다고도 했다.<br />

나는 수영도 못하고, 긴팔도 하나밖에 없고, 야생동물이 두려웠기에 정말정말 겁을 먹고<br />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 친구가 나에게 “다들 우리를 도와줄거야. 우리 다 같이<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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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데 뭐가 걱정이야.”라며 얘기해 주었다. 맞다. 산행에서 힘이 들거나 수영을<br />

못해서 허우적거릴 때 모두들 나를 도와서 손을 내밀어 줄 것이다.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br />

사람들 같았다. ‘함께’가기 때문에 외롭지 않고 힘들어도 힘을 덜 수 있다. 그런<br />

위험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함께’라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과 위로를 가져다주는지 새삼<br />

깨달았다.<br />

우리는 텐트를 치고, 장작을 구해오고, 음식도 만들어 먹었다. 산행은 힘들었고, 물을<br />

건너는 것은 무서웠다. 난 수영을 하지 못해서 매번 누군가의 등에 업히거나 누군가에게<br />

안겨서 갔다. 그러다가 두 번 정도 물에 빠져서 구출되었는데, 어찌나 끔찍했던지 울먹이며<br />

눈물이 막 나려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내가 물에 빠져도 우리가 도와줄 것이니 걱정하지<br />

말라면서 또 물에 빠지면 소리를 지르지 말고 호흡을 가다듬으라고 했다. 모두들 나를 위해<br />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니 절대로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다.<br />

모두들 다 나를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나를 감동시켰다. 인종도,<br />

국적도, 나이도, 성별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를 도와주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br />

사실을 깨달았고, 또 그러한 그들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캠프 첫째 날 밤에는 다<br />

같이 돗자리를 깔아 머리를 맞대거나 누군가의 배에 눕거나 무릎을 베고 누워 밤하늘의<br />

별을 바라다보며 엠피쓰리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br />

별똥별도 몇 번 보았다. 우린 그렇게 감성적인 시간도 가졌다. 그날 밤은 내 생에 가장<br />

행복한 순간 Best 5 에 들 수 있을 정도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br />

마지막 날 Bye-bye Party 는 마침 프랑스 친구의 생일이여서 생일 파티와 함께 진행되었다.<br />

비록 조촐하게 케이크 하나에 큰 풍선 4 개만 준비했을지언정, 우리들의 마음은 조촐하지<br />

않았다. 한국인 친구들은 다들 워크샵에서 교육받은 대로 열쇠고리나 핸드폰고리 등을<br />

준비해왔다. 한 친구가 복주머니를 준비해 와서 핸드폰고리와 열쇠고리, 북마크를 넣어서<br />

주었더니 정말 좋아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을<br />

기념하기 위한 사진을 찍었다. 한국인 친구들은 모두 다음날 새벽 5 시에 첫차를 타고<br />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늦게까지 놀지 못했다. 모두들 우리를 위해 새벽 4 시에 일어나서<br />

마중을 나와 주었다. 그렇게 나의 15<br />

일 동안의 워크캠프는 끝이 났지만 아직 우리는<br />

Facebook<br />

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던 외국인<br />

친구들은 우리 때문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한국에 꼭 한 번 와보고 싶다고 했다.<br />

나도 역시 그렇다. 폴란드와 벨라루스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이 없었지만 꼭 가보고 싶다.<br />

무엇보다 터키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가슴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준 소중한 곳으로 간직될<br />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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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AND<br />

김슬아 (이화여대 교육공학과 3 년)<br />

FIYE12 WIELISZEW-2 8 월 7 일-23 일<br />

_한국은 작지만, 한국인은 강하다<br />

워크캠프에 참가를 신청할 때, 내가 강조했던 것은 나의 전공이 교육공학이라는 것이었다.<br />

폴란드에서 열리는 Folk Festival Assistant 프로그램은 나의 전공을 적용해 볼 수 있는<br />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교육공학이란, 교육활동의 전반을 계획, 설계, 개발, 실행,<br />

평가하는 학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교육은 교재가 있고, 교육과정이 있는 교과교육만을<br />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분명하고 대상이 있는 모든 교육활동을 의미한다.<br />

축제기간동안 나는 레크레이션과 문화적 교류를 목적으로 그 지역 아이들과 주민들에게<br />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활동과 게임, 한국의 문화, 음악, 음식 등을 소개하게 될 것이었고,<br />

여기서 나는 이 대상자들에게 적합한 수준과 내용, 도구를 찾아 그 누구보다 전략적으로<br />

접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br />

나의 이 확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우선이었다. 한국의 문화를 크게 게임,<br />

음식, 전시, 공연이라는 네 가지 카테고리로 구분하였다. 게임으로는 윷놀이, 제기차기,<br />

그리고 공기놀이를 선정하였고, 음식으로는 김치, 불고기, 쌀밥, 김밥, 비빔밥을 위한<br />

재료와 약과와 한과를 가져갔다. 전시를 위해서는 큰 태극기와 한복을 입은 인형과 핸드폰<br />

줄, 그리고 한국의 역사, 음식, 궁, 관광지의 사진이 담긴 엽서를 준비하였고, 마지막으로<br />

공연을 위해서는 부채춤과 검무를 직접 배웠고 부채와 검, 그리고 한복과 전통음악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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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하였다. 이렇게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힘들거나 귀찮기는커녕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를<br />

소개하고 있는 내 모습이 한없이 기대되기만 하였다.<br />

이렇게 벅찬 마음을 안고 나의 워크캠프는 시작되었다. 바르샤바에서 버스로 한시간 쯤<br />

떨어져 있는 Wieliszew 라는 지역의 Zespol 학교가 우리의 숙소였다. 교실에서 매트리스를<br />

깔고 침낭에서 잠을 잤고, 샤워실과 화장실, 주방과 메인룸은 사용하기에 전혀 불편함이<br />

없었다. 그 외에도, 체육관을 사용할 수 있어서 운동과 공연연습에 용이하였다. 우리<br />

캠프의 참가자는 한국, 폴란드, 프랑스, 스페인, 체코, 세르비안, 일본, 타이완의 국적을<br />

가진 19 살에서 25 살 사이의 친구들로, 남자 4 명, 여자 12 명의 구성이었다. 첫날<br />

자기소개를 하면서 나는 KIA MOTORS<br />

의 지원을 받고 이 캠프에 참가하게 되었다고<br />

말했는데, 모든 캠퍼들이 KIA 회사를 알고 있었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캠퍼들이 나를<br />

굉장히 대단하게 생각해주어서 어깨가 으쓱하였었다.<br />

우리 캠프의 주요활동은 환경보호 캠페인, 아이들과의 레크레이션, 축제 도우미라는 세<br />

가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는데, 활동 외 시간에는 근처의 호숫가에서 물놀이를 하거나,<br />

낮잠을 즐기기도 했고, 윷놀이와 공기놀이, 제기차기 게임을 하기도 했다. 폴란드 가정집에<br />

방문하기도 했는데, 학교에서 캠퍼들끼리만 생활했다면 알지 못했을 폴란드 가정의 생활을<br />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또한, 고추장 불고기와 비빔밥을 요리해주었는데,<br />

친구들은 한국음식의 매운맛에 물을 몇 컵씩 들이 마시면서도 맛있다며 불고기 소스에<br />

밥까지 비벼먹기도 했다.<br />

우리 캠프의 주요 활동 중 첫째는 환경 보호 캠페인을 홍보하는 일이었다. 해변이나 숲으로<br />

이동하여 쓰레기를 주웠는데, 우리의 목적은 쓰레기를 주워서 환경을 깨끗이 청소하는<br />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워크캠프 참가자들이 쓰레기를 줍는 모습을 보면서 지역<br />

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야겠다고 각성을 하도록 일깨우는 것이었다. 지역 주민들은<br />

우리에게 반갑게 인사해주었고, “진도브레”라는 폴란드어가 “안녕하세요”라는 뜻임은<br />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녜 시몌 지체 폴라츠”는 “쓰레기를 버리지<br />

맙시다”라는 뜻으로 지역 주민들과 아이들을 만나면 인사와 함께 꼭 말하곤 했다.<br />

둘째로는, 해변과 학교에서 지역의 아이들과의 레크레이션 진행하는 활동이 있었다. 해변에<br />

가족단위로 피서를 온 지역 주민들의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누어 주고, 페이스페인팅을<br />

해주고, 공놀이를 하기도 하고, 색칠공부를 가르치고, 함께 물놀이를 하면서 아이들과<br />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또한 지역의 초등학생, 중학생들과 함께 체육대회를 하였는데, 네<br />

팀으로 나누어 달리기와 뜀틀, 훌라후프와 공굴리기 등의 종목으로 구성된 체육대회에서<br />

우리 팀이 1 등을 하여 상품으로 티셔츠를 받기도 했다. 아이들은 동양인인 내가 신기한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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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진을 찍자고 먼저 다가와 주었고, 메일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면서 메일을 보낸<br />

아이들도 있었다.<br />

마지막으로, 이틀간 해변에서 열리는 Folk Festival 에서 국가별로 데스크가 주어져 각<br />

국가의 전시품을 진열하고 전통음식을 판매하며, 축제준비와 진행을 돕는 것이 우리에게<br />

주어진 일이었다. 이때, 나는 한국의 데스크가 가장 빛나야 한다는 의지로 ‘Welcome to<br />

COREA’라는 문구의 빨간 뿔이 달린 포스터를 만들어 태극기와 함께 천막에 달았고,<br />

전지를 두 장이나 이어 금색지로 ‘COREA’라는 문구를 붙이고 한국의 역사, 음식, 궁,<br />

관광지의 사진이 담긴 엽서를 전시하였다. 또, 밤새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요리한 김<br />

오무라이스와 한국에서 가져온 약과와 한과를 판매하였는데, 여러 국가의 데스크 중에서<br />

단연 돋보였음을 자신한다. 특히 한국엽서는 폴란드 지역 주민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는데,<br />

창경궁과 경복궁의 모습이 담긴 엽서는 가장 인기가 좋아 경쟁리에 팔리기 까지 하였다.<br />

또한 붉은 악마의 응원가를 노트북으로 틀어놓고 태극기의 문양을 얼굴에 그렸는데 몇몇<br />

아이들은 이 문양으로 페이스페인팅을 해달라고 하기도 하였다.<br />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캠퍼들에게도 한국무용의 공연이 우리 캠프의 가장<br />

하이라이트였다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닐 것이다. 8 명은 부채춤을, 5 명은 검무를 춰서<br />

12 명의 모든 여자캠퍼들이 모두 한국무용으로 무대에 섰는데, 함께 연습하는 과정을<br />

통해서 우리는 더욱 친해질 수 있었고, 사실 이 공연이 아니었으면, 페스티벌을 진행하는<br />

캠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대에 설 기회가 아예 없었을 것이다. 친구들은 일과가<br />

끝나고 놀고 싶고 쉬고 싶을 텐데도 나의 의욕 넘치는 연습제안에 전혀 불평하거나<br />

귀찮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임해주었고, 공연 당일 날에는 아침 6 시에 일찍 일어나 함께<br />

마지막 연습을 하기도 하였다. 공연 전, 머리를 한 명, 한 명 땋아주면서 그동안 고마웠던<br />

것, 기억에 남는 것들을 서로 나눌 수 있었는데, 공연이 끝나면 다음날 헤어지게 될 것을<br />

알았기 때문인지 그 짧은 시간조차도 너무나 소중했다.<br />

"우리는 열심히 준비했고, 공연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그동안 연습했던 것이 아니라,<br />

함께 하기위해 연습해왔던 것이었어. 함께 연습하면서 너무 즐거웠어. 우리의 무대도<br />

신나게 즐기자!"라고 무대에 오르기 전 이렇게 말한 뒤, 다 같이 파이팅을 외치고 무대에<br />

올랐다. 음악이 시작되었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입장을 하였다. 부채를 잡는 법도,<br />

부채를 펼 줄도 몰랐던 서양친구들과 부채를 들고 호흡을 맞추며 춤추고 있는 무대 위의 그<br />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특히, 부채로 파도를 만들 때와 꽃을 펼칠 때에는 관중들이<br />

탄성을 터뜨렸는데, 분홍 꽃잎과 한복이 서양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다고 했다.<br />

부채춤 멤버들이 한복을 벗고, 검무 멤버들이 한복으로 갈아입는 시간을 벌기 위해<br />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자'는 메시지가 담긴 짧은 연극을 한 뒤, 우리는 양손에 검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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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들고 입장했다. 관중들의 당황해 하는 표정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처음<br />

캠퍼들에게 이 도구로 춤을 출 것이라고 하면서 검을 들이대며 장난을 쳤을 때, 스페인<br />

남자애가 가까이 오지 말라며 겁냈던 것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검무를 출 때,<br />

쇠가 부딪히면서 나오는 소리는 관중들을 긴장시키면서 무대로 주의를 집중시켰다. 한<br />

손으로 검을 머리 위로 들고 절도 있게 마무리하는 엔딩포즈를 멋지게 해냈을 때, 관중들의<br />

박수와 환호하는 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외국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br />

나 같이 작은 여자애 하나가 외국친구들에게 대한민국의 전통무용을 가르쳐 무대에 설 수<br />

있다는 것 자체가 나 혼자만의 성취감을 넘어서, 대한민국의 한 대학생으로써 큰<br />

감동이었다.<br />

이 공연을 끝으로 우리의 공식적인 워크캠프 활동은 끝이 났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에 차마<br />

잠들지도 못하고 새벽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엽서에 편지와 함께 "50 년이 지난<br />

후에 만난다 하더라도, 그 때에도 우린 여전히 '친구'"라는 메시지를 적었다. 태극기, 부채,<br />

윷놀이, 제기, 공기, 한복을 입은 인형과 핸드폰 줄, 그리고 마지막으로 폴라로이드로 찍은<br />

사진들을 밤새 포장하여 엽서와 함께 친구들에게 주었다. 헤어지기 전에 내가 물었다.<br />

'한국인에 대한 생각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 난 이번 캠프에 완전히 만족한다.<br />

조금의 후회도 없다. 최선을 다했고, 내 노력보다 더 갚진 대답을 얻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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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AND<br />

박신응 (국민대 경영학과 3 년)<br />

FIYE7 WIELISZEW-1 7 월 23 일-8 월 8 일<br />

_소통하는 법을 알려준 워크캠프<br />

워크캠프에 가기 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가는 나라에서 처음 참여하는 캠프에서<br />

과연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누구를 만날까? 많은 생각들로 잠을 못<br />

이루며, 밀려오는 기대감으로 행복한 준비과정을 가졌습니다. 또한 제가 길을 잘 찾지<br />

못해서, 어떻게 길을 찾아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였습니다. 하지만 워크캠프<br />

리더로부터 Pick Up 메일이 와서 고민을 덜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가기 전<br />

우리나라의 문화와 음식을 외국인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서 반크라는<br />

한국홍보사이트로부터 우리나라 문화, 역사에 관한 자료와 선물들을 받아서 준비하였습니다.<br />

또 개인적으로 인사동에 가서 부채와 여러 작은 핸드폰 열쇠고리를 준비하여서 한국의<br />

아름다움과 전통성 있는 선물을 준비하였습니다. 제일 신경을 많이 썼던 부분은 바로<br />

음식이었습니다. 한국의 대부분 음식들이 맵기 때문에 어떠한 재료와 소스를 가져가서<br />

외국인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그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br />

하고 어머니와도 상의를 하였습니다. 한국의 전통 소스인 고추장과 갈비양념소스 슈퍼에서<br />

일회용 팩으로 나와서 파는 육개장과 햇반, 김, 라면을 준비하였습니다. 캠프에서 우리가<br />

요청하는 기본적인 식재료가 나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기를 사서 불고기와 닭볶음탕<br />

그리고 볶음밥을 준비할 생각이었습니다.<br />

특별히 여름에 출국하였기 때문에 여분의 속옷과 옷, 그리고 모기약 등 15 일간 생활하면서<br />

필요한 것들은 빠짐없이 챙겨갔습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이런 것보다 함께 참여하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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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고자 하는 적극성과 열정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워크캠프 시작 전에 미리<br />

유럽으로 출국을 하여, 다른 나라를 여해하다가 폴란드에 하루 전 도착을 했습니다. 그리고<br />

당일 날 약속장소에 모여서 함께 워크캠프 장소로 이동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용했던<br />

장소는 학교를 빌려서 교실 2 곳에 남녀가 각각 숙소를 잡고 그 곳에서 우리 자체적으로<br />

음식과 빨래, 놀이, 모든 것들을 해결하였습니다.<br />

처음 도착해서 받았던 풍경은 한적한 시골에 옆에 큰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관이었습니다.<br />

하지만 침대가 따로 있지도 않고 달랑 메트리스를 제공해서 약간의 실망은 있었지만<br />

그것조차 재밌게 느껴졌습니다. 처음 워크캠프 참여자들을 보았을 때 낯설고 뭔가 순진해<br />

보이지 않았던 아이들의 표정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다양한 외국인을 처음에 한꺼번에 봐서<br />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로 소개를 하고 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모습에 마음은<br />

풀어지고 더욱 그들이 좋아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캠퍼들은 총 15 명이고, 여자가 10 명<br />

남자가 5 명이었습니다. 나라별로는 스페인 3 명, 폴란드 2 명, 이탈리아 1 명, 우크라이나<br />

2 명, 터키 1 명, 타이완 2 명, 한국인 3 명, 몬테네그로 1 명 이었습니다. 서로 사는 나라도<br />

다르고 문화도 달랐지만 함께 이해하고 서로 친해지기 위하여 노력하고 어울리는 모습이<br />

너무 보기 좋았습니다. 이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지고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br />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br />

우리는 이곳에서 크게 3 가지 일을 하였습니다. 첫째날은 뮤직페스티벌을 위한 준비를<br />

하였고, 그다음부터는 강가에서 쓰레기를 줍는 일과,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 일을<br />

하였습니다. 일은 힘들지도 않았고 더욱더 적극적으로 일하는 외국인 친구들의 모습에<br />

놀랐고 감동 받았습니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일은 3 시간 정도 하였는데, 일을 하는 것이<br />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더 챙겨주고 배려해주고 함께 하나 되는<br />

과정에서 많은 보람과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일이 끝나고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br />

자유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보통 점심을 먹고 낮잠을 1~2 시간 정도 자고, 그 뒤에<br />

일어나 서로가 준비한 게임을 하던지,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던지, 강가로 수영을 하러<br />

가던지 하였습니다. 보통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했는데 게임하다가 운동하고 운동하다가<br />

수영하고 수영하다가 자전거 타러가고 그랬습니다. 작은 시골마을 이었기 때문에,<br />

대중교통이 불편해서 우리는 자전거를 이동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큰 강가에서 수영과<br />

일광욕을 즐길 수 있었고 카누도 즐길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더 개방적이고<br />

자유로운 외국인 친구들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었고 부럽기도 하였습니다. 요리는 날을<br />

정해서 2 명씩 짝을 지어서 하루 3 끼를 요리하였습니다. 보통 아침은 빵과 시리얼을<br />

먹었고 점심, 저녁은 각 나라의 전통음식을 준비해서 함께 먹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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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준비한 데로, 볶음밥, 닭볶음탕, 불고기, 육개장을 준비하였습니다. 외국친구들이<br />

먹고서는 너무 맵다고 그 날 물이 동이 났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매운맛에 적응하는 외국인<br />

친구들이 귀여워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라면은 2<br />

종류는 준비했는데 일반적인 라면은<br />

매워서 싫어하였고 짜장라면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배가 고프면<br />

간식으로 짜장라면을 끓여서 함께 나누어 먹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로를 위해서 요리를<br />

하고 서로를 위해서 하나 더 헌신하고 해줄 수 있는 즐거움이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특히<br />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춤도 잘 추고, 매운 것도 잘 먹어서 더 쉽게 친해졌습니다. 또 라디오<br />

프로그램 제작진들이 와서 한국의 음악을 소개해달라고 하였을 때 같은 한국인 여동생과<br />

함께 단소를 불면서 아리랑을 불러줬습니다. 또 외국인 친구들에게 가끔씩 판소리를<br />

들려줬는데 정말 신기해 하였고 너무 재밌어 해서 좋았습니다.<br />

우리는 저녁에는 항상 파티를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주류가 지원이 되지 않았기에 모든<br />

주류는 각자가 사서 먹었습니다. 이 부분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저녁에 간단한 술과 과자<br />

그리고 촛불을 키고 음악을 들으며 춤추고 술을 마시며 함께 놀고 재밌는 게임도 하며<br />

파티를 즐겼습니다. 파티는 보통 저녁 10 시에 시작해서 새벽 1~2 시까지 진행하고<br />

놀았습니다. 파티를 통해서 더 친해질 수 있었고 정열적이고 열정적으로 임하는 외국친구들<br />

모습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친구들이 저보고 자기들이 만났던 한국인 사람중에 가장<br />

적극적으로 잘 놀고 즐기는 사람인 것 같다고 놀랬습니다. 대부분 아시아 사람들은<br />

수줍어하고, 춤을 잘 추지도 않고 소극적인 모습이 많은 것 같습니다. 워크캠프를 통해서<br />

정말 좋았던 건, 외국 친구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모습에서 더욱 더 많은<br />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15 일간 함께 동고동락 하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을 더<br />

익히고 배웠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법을 더 배운 것 같아 너무 좋았습니다. 아마 평생<br />

잊지 못 할 것입니다. 조금 놀랐던 점은 유럽친구들이 상당히 자유로워 보여도 그들의<br />

일정한 틀 속에서 자유로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해진 방식이나 틀은 항상<br />

지킬려고 하는 모습에서 무엇인가 보수적인 곳에 진보가 있다 라는 말이 어울린다고<br />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일 도 열심히 임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br />

헤어질 때 먼저 울음을 터트리며 가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고 진정 그들과 하나가 되고<br />

친구가 되어서 너무 기뻤습니다. 워크캠프는 제 인생에게 커다란 추억을 만들어준 캠프이며<br />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알려준 고마운 프로그램입니다. 워크캠프를<br />

통해서 더욱 더 성장하고 많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이번 워크캠프를 다녀온 뒤로<br />

한 가지 결심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더 영어를 마스터해서 캠프리더로 워크캠프에 한번 더<br />

참여를 할 것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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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br />

김석진 (경희대 건축공학과 3 년)<br />

JR10/211 CHATEAU GAILLARD 8 월 1 일- 21 일<br />

_나에겐 잊지 못할 소중했던 21 일간의 추억<br />

기대되는 워크캠프를 꿈꾸며 7 월 20 일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8 월 1 일부터<br />

시작하는 워크캠프에 참가하기 전에 10 일여정도 스페인(마드리드, 바르셀로나)여행을 하게<br />

되었습니다. 워크캠프 전 하게 된 여행이라서 그런지 몇 일 후 있을 워크캠프에 대한<br />

기대감으로 인해 제대로 된 여행조차 즐기지도 못하였습니다. 워크캠프 첫 미팅 전날<br />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프랑스 리옹으로 이동을 하였습니다. 직통으로 가는 열차를 구하지<br />

못해 여러 도시를 거쳐 12<br />

시간 만에 프랑스 리옹 근교에 위치한 ‘Amberieu en<br />

Bugey’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도착시간은 저녁 8 시, 시골이기 때문에 마을의 모든<br />

상점을 문을 닫았고 주변 호텔 모두 영업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마을 주민<br />

분들은 영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하는 나에겐 큰 위기였습니다.<br />

한 시간 정도를 헤매고 있던 중 마을 주민 한분이 나에게 다가 오셨고 숙박 하는 곳을 찾고<br />

있냐고 물으셨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떤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처음 본 마을 주민의<br />

차를 타고 마을 근처에 유일하게 영업하는 한 호텔로 이동 하였습니다. 도착 뒤 간단히<br />

짐을 풀고 프랑스에서의 첫날밤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오고 드디어<br />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워크캠프 첫날이 되었습니다.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미팅 장소인<br />

'Amberieu en Bugey Station'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늘 미팅 시간은 PM 17:00 시간이 되자<br />

역내에는 여러 친구들이 큰 가방을 끌고 모여 있었습니다. 나는 다가가 그들에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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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캠프에 참가하게 되었냐고 물었고 거기에 있던 친구들은 모두 워크캠프에 참가한<br />

친구들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유학중인 한국인 친구 ‘지영이’, 옆나라 일본에 살고 있는<br />

착한 ‘Rika' 그리고 웃긴 ’Naoko', 프랑스에 살고 있는 귀여운 ‘Alexis' 잘생긴 터키<br />

친구들 ’Nihan', 'Inan', 'Ramazan', 스페인에 살고있는 범생이 ‘Antonio' 우크라이나에<br />

살고있는 코믹한 'Den' 그러고 캠프리더 모로코에사는 든든한 ’Youssef' 모두 11 명의<br />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모든 친구들이 다 모이고 우리는 모두 캠프장소로 이동하였습니다.<br />

캠프 장소는 마을 ‘Football Club’으로 사용 되고 있는 곳입니다. 캠프 장소에는 식당,<br />

화장실, 샤워실, 잠을 잘 수 있는 분대형 텐트 3 동이 있었습니다. 캠프 첫 날 밤이 되었고<br />

우리는 모두 모여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워크캠프의<br />

첫날은 지나갔습니다. 워크캠프 첫날의 추억은 아직도 생생히 생각날 정도로 나의 머리속에<br />

기억되고 있었습니다.<br />

캠프의 주된 목적인 자원봉사활동은 ‘CHATEAU GAILLARD’ 마을의 공동 오븐이 총<br />

3 동이 있는데 오래되고 낡아 사용하고 있지 않아 우리는 이 공동오븐의 기존 지붕을 모두<br />

철거하고 새로이 지붕을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업에는 숙련된 마을 주민분과<br />

함께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11 명의 캠프원들은 매일 2 명씩 돌아가면서 식사를 준비하고<br />

9 명의 친구들이 자원봉사활동을 나갔습니다. 작업 순서는 기존에 있는 지붕의 벽돌,<br />

나무를 철거하고 새로운 목재로 기본틀을 잡고 합판을 설치, 그 위에 방수효과가 있는 방수<br />

천을 대고 마지막 기와장으로 덮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1 주에 1 동씩 3 주동안 3 동을<br />

완성하는데 처음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능숙한 기술자 마을<br />

주민분과 캠프원들이 열심히 한 결과 예상 작업 종료일보다 2 일 빨리 자원봉사활동을<br />

종료할 수 있었습니다. 작업을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고 남자 비율이 높았던 만큼 빠르게<br />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나는 군대에서도 해보았던<br />

작업이었던 만큼 작업 시 중점적인 역할을 하면서 팀원들을 이끌었습니다.<br />

자원 봉사활동이 끝난 후 오후에는 자유로운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휴식을<br />

취하는 날도 있지만 대부분 날은 마을 주변 유명한 장소에 방문을 하는 등 여가시간을 즐길<br />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만 보던 집 마당 앞에 있는 야외 풀장에서 물놀이, 프랑스 강가에<br />

가서 즐기는 물놀이, 군대에서나 해볼 수 있었던 유격체험, 중세시대 성 방문 그리고 성<br />

내부에서 보는 프랑스 영화, 개 훈련장 방문, 주말엔 근교도시 아름다운 도시 리옹 여행,<br />

마을의 역사가 담겨 있는 기차박물관 방문, F1 선수가 된 것처럼 즐겼던 카팅, 다양한<br />

새들을 볼 수 있었던 새 공원 나들이, 너무나 많은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도록 마을<br />

이장님을 주축으로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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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하기 전 워크캠프에 참가하는 나는 어떤 방법으로 그들에게 한국에 대해 알리고 소개<br />

해줄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알게 된 것은 ‘반크 홍보전사’ 올<br />

여름 외국으로 나가는 대학생 300 인을 대상으로 사이버외교단체 반크에서 300 인의<br />

홍보전사에게 한국홍보 책자 및 지도 등을 무료로 배포해주었습니다. 특히 홍보책자에는<br />

우리의 아름다운 땅인 ‘독도’에 대한 소개글 및 아직 외국에 많이 오류로 표기 되어있는<br />

독도 , 동해에 대한 표기 오류를 정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스티커 등, 한국 홍보물을<br />

미리 수령 받아 워크캠프에 참가하는데 가지고 갔습니다. 이 영어로 된 홍보물들을 외국인<br />

친구들이 보면서 흥미를 갖고 보게 되었고 더 쉽게 더 자세히 한국을 홍보하는데 큰 도움이<br />

되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 불고기 소스, 라면, 짜장, 카레 소스 등을 미리 챙겨두어<br />

캠프를 진행하는 동안 3 차례의 한국음식을 할 수 있는 기회에서 마음껏 한국음식을 자랑할<br />

수 있었습니다. 한국식품, 한국 홍보물은 이번 캠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준비물이<br />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됩니다.<br />

이번 캠프를 떠나기 전에 조금 걱정하고 있던 부분은 친구들과의 소통이었습니다.<br />

영어회화에 원어민 수준으로 능숙하지 않은 나는 어떻게 준비를 해가야 할이지 고민을<br />

하였습니다. 간단한 회화 문장을 학습한 정도의 준비로 워크캠프에 참가를 하였습니다.<br />

사실 처음 이틀 정도는 외국인에 대한 기피증(?)으로 인해 친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br />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요구를 할 것이 생기거나 내 의견 내 감정들을 표현하여야만<br />

했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갔습니다. 적극적으로<br />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더니 친구들 모두 나에게 다가왔고 쉽게 대화를 나눌 수<br />

있었습니다.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하다보며 지내다보니 나도 어느새 쉽게 그들과<br />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친구들이 쓰는 문장 배열, 어휘, 표현방법 등을 자세히 보고<br />

나도 바로 사용하는 등 이러한 방법을 통해 영어능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습니다. 3 주라는<br />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영어를 사용하는 캠프에서 있었기 때문에 나름 듣기 및<br />

말하기 능력이 향상되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문제는 캠프원들과 생긴 것이 아니라 마을<br />

주민분들과 소통을 할 때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두 나이가 많으신 어른들이었기 때문에<br />

영어는 사용하지 않으셨고 프랑스어로 마을분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br />

이러한 문제에 생겼을 때 프랑스어가 가능한 친구들이 이러한 상황에서는 영어로 나에게<br />

다시 말해주면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br />

주 동안 있으면서 간단한<br />

프랑스 회화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워크캠프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좋은<br />

기회였다고 생각됩니다.<br />

캠프를 마치고 귀국을 하고 많은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보고 싶기도<br />

하고 그때의 행복했던 하루하루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면서 다시 가고 싶다, 다시 친구들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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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물론 귀국 후 앞으로의 계획도 철저히<br />

세워놓았습니다. 특히 영어공부에는 소홀히 하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할 계획을 세우고<br />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한 번 워크캠프에 신청하기 위해 많은 자기개발을 위해 노력할<br />

것입니다.<br />

이번 워크캠프는 나를 많이 변화시켰습니다. 사고방식, 정신력, 모든 부분에서 나를<br />

향상시키도록 도와주고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정말 잊지 못 할 2010 년<br />

여름의 추억이 되었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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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br />

원영경 (홍익대 상경학부 3 년)<br />

SJ38 Saint-Aignan 7 월 17 일-8 월 6 일<br />

_21 일간의 특별한 Life<br />

7 월 11 일, 캠프에 도착하기 전에 유럽에서의 시차, 날씨, 생활 적응을 위해 6 일 전에<br />

유럽으로 떠났다. 6 일동안 다른 나라를 구경하는 동안 잠시 캠프를 잊고 나만의 여행을<br />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7 월 17 일, 캠프에 가려고 하니 그제서야 캠프에 대한 걱정과<br />

설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SJ38<br />

의 미팅 포인트였던 Montauban 역에 도착했다.<br />

Montauban 역은 아주 작은 시골역이였기 때문에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캠프 리더를 만날<br />

수 있었다. 함께 온 마을 주민들도 나에게 인사를 청했다. 나보다 먼저 온 다른 캠퍼들과도<br />

인사를 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어색해 하며 뻘쭘하게 섞여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br />

이름과 국가를 물어보았다. 쑥스러워 하면서 대답해준 외국인 친구들의 이름이 어려워<br />

당혹스러웠다. Montauban 에서 St-Aignan 까지는 차로 30~40 분을 가야하는 곳이었다.<br />

상점하나 없는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주민들이 자가용을 이용하여 우리는 드디어 숙소에<br />

도착했다. 숙소는 15 년 전 까지 학교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폐교가 된 곳이었다. 우리는<br />

낡은 교실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나마 마을의 축구클럽에서 사용하고 있어서 부엌이나<br />

화장실은 현대식이었다. 군대식 낡은 침대에 짐을 풀고 우리는 부엌 겸 다이닝 룸에 모여서<br />

어색한 시간을 가졌다. 리더가 만들어준 파이를 먹으면서 드디어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며<br />

대화를 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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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캠프에는 한국인 3 명, 세르비아인 2 명, 리투아니아인 2 명, 대만인 2 명, 스위스인<br />

1 명, 러시아인 1 명, 아프가니스탄인 1 명, 이탈리아인 1 명, 프랑스인 2 명, 인도인 1 명,<br />

일본인 리더, 독일인 리더 이렇게 18 명이 있었는데 캠프시작 3 일 후에 인도인 방카가<br />

캠프를 떠나 총 17 명이 20 여 일 동안 지냈다. 생각보다 캠프에 동양인이 많았다. 많은<br />

유럽친구를 사귀고 싶었던 나는 처음에는 실망을 했지만 동양인만의 끈끈한<br />

정을 느낄 수 있어서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br />

우리는 마을의 오래된 벽을 보수 하는 일을 했다. 거의 무너지고 흙과 이끼로 약해져버린<br />

벽을 다시 깨끗하게 튼튼하게 만드는 일을 했다. 무너지려고 하는 벽을 뜯어내고 다시<br />

튼튼한 벽돌로 쌓았다. 그리고 브러쉬를 이용하여 벽을 깨끗이 닦고 시멘트로 빈 공간을<br />

채워나갔다. 우리는 일주일에 5 일정도 일을 하였고, 아침 8 시부터 오후 1 시까지 일을<br />

하였다. 처음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우리에게 일을 가르쳐주셨는데 우리가 좀 더 전문적인<br />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자 크리스챤이라는 테크니컬 리더가 도와주셨다. 일은 굉장히<br />

단순하고 반복적이였다. 일을 할 때 눈 보호대와 장갑이 필요할 정도로 거친 작업도 있었다.<br />

그래도 그나마 여자들에게는 단순한 일을 시켜서 많이 힘들지 않았다. 일을 할 때 리더가<br />

캠퍼 한명 한명에게 오늘 해야 할 일을 정해 주었고 모두들 불만 없이 자기가 맡은 일을<br />

열심히 하였다.<br />

우리가 일을 할 때 마을 주민들이 와서 같이 일을 해주어서 우리 모두 고마워했다.<br />

우리는 일이 끝나면 점심을 먹고 각자 자신이 맡은 당번 일을 하였다. 요리팀, 설거지팀,<br />

화장실 청소팀, 샤워실 청소팀, 부엌바닥청소팀, 침실 바닥청소팀이 있었는데 팀원 모두가<br />

이 일을 해야 했고 매일 자율적으로 정해서 불만도 없었다. 그렇게 숙소 청소가 끝나면<br />

비로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우리는 거의 자유 시간에 마을 밖으로 나갔다. 교통수단은<br />

자전거였다. 마을에서 우리에게 자전거 18 대를 빌려주었다. 낡은 자전거들이<br />

대부분이었지만 우리가 직접 수리해서 사용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br />

도로를 달려야 했기 때문에 자전거 초보들은 연습이 필요했다. 다행히 배려심 많은<br />

캠퍼들이 초보들을 도우고 기다려주어 다같이 다닐 수 있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옆<br />

마을 마실도 가고 수영하러 강가에도 갔다. 일을 한 뒤 자전거를 4 시간이상 탔기 때문에<br />

많이 힘들었지만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어서 좋았다. 더 먼 곳으로 갈 때는 마을<br />

주민들이 자가용을 가지고와 도와주었다. 매번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관심을 가져주시는<br />

마을 주민들 덕분에 여가시간을 보람차게 보낼 수 있었다.<br />

우리는 와인 만드는 곳, 치즈페스티벌, 뮤직컬 페스티벌, 중세 마을, 성 등 다양한 곳에서<br />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거의 리더들이 마을 주변의 행사들을 알아와 여가를 정하였지만<br />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리더들이 현명하게 일정을 잘 잡아주었기 때문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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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자주 모여 파티를 열고 식사를 하였다. 우리가 처음 온 날 웰컴<br />

런치를 준비해 주셨고 우리에게 바비큐파티, 이별 파티 등을 열어주셨다. 우리는 그에<br />

보답하는 의미로 International Meal 을 준비하였다. 각 나라의 음식을 만들어서 마을<br />

주민들에게 대접을 하였다. 우리는 열흘 전부터 메뉴를 짜고 재료를 사서 마을 주민들을<br />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노력하였다.<br />

캠프의 시설은 좋지 않았다. 침대는 매트가 깔린 폭신한 침대가 아닌 철골에 천을 맨 간의<br />

침대였고 큰 방에 남녀가 모두 생활을 해야 했으며 샤워실은 숙소에서 5~10<br />

분 정도<br />

떨어진 마을 잔디구장 공동 샤워실을 써야했다. 화장실은 남, 녀로 구분을 했으나 남자<br />

화장실은 좌변기가 아니여서 결국 여자화장실 하나로 모두 사용하였다. 그래도 우리는<br />

침대를 빼고는 나머지에 대해서 아무 불만이 없었다. 샤워하러 가는 길에 캠퍼들과의<br />

수다를 통해서 친해지기도 하였다. 숙소에 세탁기가 없어서 자전거로 20~30 분 떨어진 옆<br />

마을의 코인 세탁기를 이용해야했다. 빨래감을 가득 넣은 배낭이 무겁기는 했지만 세탁소<br />

가는 것도 즐거웠다. 한국에서는 절대 해보지 못할 그런 일들이 재미있었다.<br />

캠프에서는 영어를 주된 언어로 사용하였다. 나는 모두들 기본 회화정도만 할 줄 알 것<br />

이라고 생각했지만 거의 모두가 영어를 잘 구사하였다. 그래서 영어를 잘 못하는 나는<br />

캠퍼들과 깊은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없었다. 만일 내가 영어를 잘 했더라면 더 많은<br />

생각들을 공유 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아직도 있다. 캠프에 있는 3 주 동안<br />

프랑스어에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씩 마을사람들에게 프랑스어를 배웠고 간단한<br />

인사도 나누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인<br />

줄 몰랐다. 그리고 또한 우리말도 가르쳐 주었다.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 친구들이<br />

안녕~하고 인사를 하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우리말은 캠프 내에서 인기가 많았다.<br />

우리 캠퍼들은 캠프 초반에 House Rules 를 정해서 서로에게 에티켓을 지키고자 하였다.<br />

그 중 하나가 서로를 존중하자였다. 그래서 인지 캠프를 지내는 동안 서로에게 기분이 상할<br />

만한 행동과 말을 하지 않고 화목하게 잘 지내었다. 상대방의 나라에 대해 궁금한 것을<br />

물어볼 때는 혹시나 실례가 되지 않을까 조심 조심 물어보았는데 특히 북한에 대한<br />

이야기를 할때 그랬다. 나와 한국인 친구가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면 다른 캠퍼들은 우리의<br />

생각을 존중해주며 받아들였다. 참으로 고마웠다.<br />

캠프에서 21 일 동안 생활 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다른 마을에 놀러 갔을 때 좀 더 재밌는<br />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준비를 했다면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br />

솔직히 몇 군데는 지루하고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캠프에 있는 동안 비가 몇 번<br />

왔는데 그 때문에 2 일 정도 일을 하지 못하여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벽 보수 작업을<br />

완전히 끝내지 못한 점이다. 후에 알게 된 것은 마을 주민들과 일본이 리더가 우리가 미처<br />

107


다 하지 못한 작업을 하여 끝냈다는 것이다. 이 점이 가장 아쉬운 점으로 남으며 참으로<br />

마을 주민들께 죄송하다.<br />

캠프에서 지내면서 나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특히 유럽 친구들과 지내면서 많은<br />

생각을 하였다. 그들은 대기업에 취직을 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꼭 행복이라고 생각하지<br />

않는다고 했다. 적당히 돈을 벌고 주변 사람들과 행복하게 지낸다는 그것이 최고가<br />

아니냐는 그들의 대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취업에 허덕이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과연<br />

그들은 이해 할 수 있을까? 또 그들은 환경에 대해 아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br />

분리수고를 철저히 하고 물을 아끼며 쓰레기 양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우리나라<br />

젊은이들에게서 볼 수 없는 모습일 것이다. 또 빨리 빨리를 외치는 한국에 있다가 여유로운<br />

삶은 살아가는 그들과 함께 있으니 나 또한 여유로운 마음으로 생활을 할 수 있었다.<br />

21 일 간의 캠프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서로 다른 17 명이<br />

21 일 동안 동고동락하며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하루가 지나가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br />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행복했다. 캠프를 시작하기 전에는 내가 언제 여러 나라의<br />

외국인들과 함께 생활을 해 보겠어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캠프를 끝마친 지금은 내가<br />

언제 이런 값진 경험을 또다시 해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br />

캠프가 끝나갈 무렵, 우리는 다같이 모여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br />

우리가 다하지 못한 벽 보수작업을 하러 내년에 다시 모이자!<br />

그때 다들 우스겟소리로 여기며 이야기를 했지만 속으로는 정말 다시 모였으면 좋겠다는<br />

바램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때의 나처럼......<br />

108


NEPAL<br />

백준안 (영남대학교 건설시스템공학과 3 년)<br />

NIFC 1 월 7 일-1 월 20 일<br />

_네팔이 나에게<br />

팀장을 기준으로 한 열다섯 명의 각각 개성이 다른 우리들은 짧지 않은 준비기간을 뒤로한<br />

채 네팔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br />

장시간의 걸쳐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힘을 못 펴는 작지만 멋진 절경을 가지고 세계의<br />

지붕이라 불리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하였다. 생각과는 달리 시끄럽고 먼지가 많은<br />

도시였다. 하지만 열다섯 명의 열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br />

NIFC 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앞으로의 봉사캠프장의 리더인 네팔 출신<br />

‘수달산’과 일본에 서온 ‘아키’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다.<br />

우리의 캠프장은 ‘치트완’에 있는 ‘보를레’라는 작은 마을.<br />

이곳에서 다시 ‘아시스’ ‘사비나’ ‘요기’ ‘스리’ 등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br />

이들과 함께 일정을 짜고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br />

아름다운 산, 강, 하늘과 별 등등 잊을 수 없는 풍경들을 가지고 있는 곳이지만 캠프장은<br />

난방이 되지 않아 처음엔 추위에 적응 하느라 힘이 들었다. 그밖에 음식이나 화장실의 같은<br />

경우에는 원체 식성이 좋고 환경적응력이 빠른 터라 큰 무리는 없었다.<br />

이곳에서의 활동은 크게 노력봉사, 교육봉사, 문화교류 활동 등으로 나눌 수 있었다.<br />

우선 노력봉사경우 오전 2 시간 오후 2~3 시간씩 마을 사람들과 지역사원 담을 축조하기위한<br />

돌들을 나르고, 캠프장 확장을 위한 진입로확보와 집터확보를 하였다.<br />

109


다음으로 교육봉사의 경우엔 A, B, C, D 조로 나누어 하루에 한 팀씩 미리 준비한<br />

수업내용으로 ‘보를레’마을 학생들과 함께했다. 수업내용으로는 한국소개 및 간단한<br />

한글교육, 종이접기, 가족그리기, 영화상영, 레크리에이션 및 체육활동을 하였다.<br />

문화교류 활동으로는 Korea day 와 Nepal day 로 나누어서 서로의 문화를 소개하고 서로의<br />

요리를 대접하고 받았다. Korea day 의 경우 미리준비해간 한국 현대 춤과 태권도 네팔의<br />

전통춤 ‘레쌈삐리리’를 준비해갔는데 주민들은 자신들의 음악에 맞춰 춤추는 우리들에게<br />

뜨겁게 성원해주웠다. 이를 계기로 ‘치트완’에서 열리는 만 명 이상이 모이는 큰 축제<br />

무대도 서게 되었다.<br />

Nepal day 때는 마을사람들이 네팔전통의상을 입고 네팔전통춤을 보여 주었다. 그날<br />

밤에는 홈스테이 프로그램에 참여 하였는데 색다른 경험이었다. 나의 경우엔 영어를 하는<br />

사람이 한명도 없는 집으로 가게 되었는데 말이 안통해서 처음엔 답답했지만 서로 교감하고<br />

웃고 즐기는 데에는 언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br />

저녁이면 전기가 수시로 나가는 캠프장에서 매일 밤이면 캠프파이어를 피워놓고 세계<br />

각국에서 온 우리들은 미숙한 영어를 사용해 하루하루 느낀 점이나 있었던 점을 서로<br />

이야기하면 더 가까워 질 수 있었다. 이 시간에 들었던 가장 인상 깊었던 ‘수달산’의<br />

말이 생각난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언어가 있는데 하나는 웃는 얼굴 다른 하나는 우는<br />

얼굴이라 한다. 그랬다 처음에 왔을 때 피부색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다르고 하나하나 문화<br />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다름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면 같음이 보인다고 했듯이 그들의<br />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은 우리들과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br />

있는 우리에게 ‘수달산’은,<br />

“앞으로의 자기 길은 내가 왜 나이고 왜 나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왜 나라는 이름으로<br />

평생을 살아가는지를 알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걸어 나간다면 그것이 자기 길”<br />

이라고 선인들의 선문답 같은 말을 했다.<br />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고 교통도 불편한 먼 이국이지만 나는 이곳에서 ‘봉사’라는 이름을<br />

배경으로 또 다른 인생을 배웠다.<br />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도전정신과 용기, 웃음의 미학, 소중한 친구들, 그리고 나의<br />

미래까지도….<br />

110


NEPAL<br />

이지혜 (영남대 분자생명과학전공 2 년)<br />

NIFC 1 월 7 일-1 월 20 일<br />

_잘 다녀왔습니다<br />

그저 신나기만 해서, 그저 설레기만 해서 그래서 집을 나서던 날 엄마의 붉어진 눈을 모른<br />

체 했다. 들뜬 나와는 달리 부모님은 걱정이 참 많으셨다. ‘나는 어른이다’라는 생각이<br />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잘 자고, 잘 먹고, 잘 지내고 올 것이라는 내 나름의 확신이<br />

있었다. 네팔이라는 곳을 다녀와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을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 인 것<br />

같다. 네팔에서는 문득문득 생각나던 가족들이 내게 힘을 주었는데 한국에 돌아온 지금<br />

20 여일을 함께한 누리마루 팀원들이 벌써 그리운 것을 보면 항상 곁을 지켜주던 사람들의<br />

정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br />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난 꿈을 꾸고 돌아온 듯하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br />

가기 전 각오했던 수많은 상황들에 비해 고생을 많이 하지도 않았고 힘들고 복잡한 일을<br />

하지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난 우리 팀원들의 사랑을 받았고, Bhorle 마을 사람들의 정을<br />

받았고, 외국인 친구를 만났고, 히말라야 설산을 보았으며...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br />

약속을 남긴 채 힘든 이별을 겪었다. 누군가 가장 힘들었던 일을 물어본다면 Bhorle 를<br />

떠나던 그날 아침이라고 말할 것이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고 또 참았던 그 날을 지난<br />

지금의 나는 훌쩍 자라온 느낌이다. 이제 정말 깨어있다는 생각이 든다.<br />

손끝이 시리다 못해 나중엔 감각을 잃을 정도였던 그 차가운 물에 설거지를 하고 세수를<br />

하고 몸을 적시던 우리, 빗물이 새서 잠자리를 옮기느라 정신없었던 그 날의 밤, 나중엔<br />

111


정이 들어버린 화장실과 카레의 향기(훗!). 흙집이라며 여기서 어떻게 지내겠느냐던 우리는<br />

나중엔 호텔이 불편하다며 캠프하우스로 돌아가길 원했었다. 그만큼 편해졌고 정이 들었던<br />

우리의 숙소. 내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추워서 몇 번씩 잠을 뒤척여도<br />

화장실이 불편해도 그 상황 자체를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항상 함께하던 누리마루가<br />

있었기 때문에 땀을 흘리면서도 노래가 흘러나왔고 몸이 좀 아파도 금방 털어 낼 수 있었다.<br />

엄청난 크기의 무대에 올라 공연하던 우리들, 밤마다 조그마한 장작불을 둘러싸고 나누던<br />

이야기들. 단체 생활에서 어떻게 남을 배려해야 하고 챙겨야 하는지 제대로 배운 것 같다.<br />

우리 누리마루에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혼자였다면 나약해 졌을 지도 모를 나를<br />

일으켜준 우리 팀원들을 정말정말 사랑한다.<br />

밤하늘이 너무나 예뻐서 그 하늘 그대로 챙겨오고 싶었던 그 곳 치트완 Bhorle. 태어나서<br />

처음 본 별똥별과 한 스푼씩 퍼오고 싶었던 수많은 별들. 마을 사람들의 웃음과 노랫소리와<br />

춤사위들이 아직도 눈에 보이는 듯하다. 스위치를 켜면 전기가, 수도꼭지를 돌리면 온수가,<br />

화장실엔 변기 뚜껑이. 한국에서 또 이런 편한 생활들에 당연한 듯 적응 하겠지만, 평생<br />

잊지 못할 경험을 가진 내가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br />

정이 넘치던 NIFC 관계자 분들, Bhorle 마을의 사람들, 특히 내가 하룻밤 묵었던 집의<br />

Shamiksha, 우리 마미.. 캠프하우스에서 만난 홍익대 언니오빠, 경희대 언니동생, 우리와<br />

모든 일정을 함께한 일본친구 아키, 동네 개에 쫓길 때 뛰어나와 물리쳐준(?) 슈퍼 아저씨,<br />

우리가 민폐 아닌 민폐를 끼친 타멜 거리 상점들.<br />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할 누리마루.<br />

또 다시 이런 기회가 나에게 온다면 그때도 나는 진심을 다해 활동 할 것이며 또 인연을<br />

만들어 나갈 것이다. 내가 옮기던 돌 하나하나가 모여 다음 내가 Bhorle 마을을 방문 했을<br />

때 새로운 길이 생겨있다면, 새로운 집이 세워져 있다면 그 것 만큼 뿌듯한 일도 없을<br />

테지만, 무엇보다 지금 현재 내가 한 많은 경험들과 나를 보며 웃어주던 아이들의 웃음과<br />

버스 밖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던 마미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 생생하기 때문에 나는 정말<br />

행복하다.<br />

112


LAOS<br />

권다운 (강남대 영어영문학과 4 년)<br />

AVAN 8 월 9 일-8 월 22 일<br />

_Thank you for being nice to me, Laos<br />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지, 어떤 언어를 주로 사용하며,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어떤<br />

환경으로 둘러싸여있는지.. 이런 많은 궁금증을 단지 마음에 품은 채 한국을 떠났다.<br />

한국을 떠나기 전, 한국 캠퍼들과 개인적으로 만나 라오스에서 만날 사람들에게 줄<br />

기념품들을 사고, 비엥사마이 초등학생들과 푸딩댄 센터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교육<br />

자료들을 준비하였다. 솔직히 여기까지였다. 그 이상의 준비는 안하였으며 그저 가벼운<br />

마음으로 다녀오자 라는 생각이였다. 라오스까지의 다이렉트 비행기가 없어서<br />

호치민(베트남)을 거쳐 비엔티엔 공항으로 가는 일정을 짰다. 총 한국 캠퍼들이 6 명이<br />

참가하는 가운데, 나를 포함한 다른 캠퍼 4 명과 함께 라오스행에 올랐다. 경유시간이<br />

길어서 호치민(베트남)에서 하루를 체류한 다음에 다시 공항에 와서 라오스로 향하였다.<br />

라오스로 도착하기 한 한시간전, 캠퍼중 한명이 가져온 라오스어 기본회화를 펼쳤다. 난생<br />

처음보는 언어였으며 도통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간단한 인사,<br />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등을 몇 번 읽고 기억 하려 애썼지만<br />

발음이 어려워 계속 까먹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책을 닫는 순간, 드디어 라오스에<br />

도착하였다. 그래도 수도에 있는 공항이니 작아봐야 얼마나 작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정말<br />

작았다. 아니 여태까지 가본 나라의 공항에 비하면 최소의 크기라고 말할 수 있을 거다.<br />

덕분에, 일본인 캠퍼 들과 현지 코디네이터인 장경아 씨를 만나기 쉬웠지만 말이다. 일본<br />

캠퍼들과 첫 만남이였다. 그들은 생각보다 어렸고 잘 되지 않는 영어를 써가며, 한국어<br />

113


책을 내밀며 이야기를 먼저 건내는데 참 귀여웠고 기분이 좋았다. 라오스 캠프 참가자들은<br />

이미 숙소에 있다며 버스를 타고 최종목적지인 방비엔으로 향하였다. 버스로 이동하는 내내<br />

피곤해서였는지, 도착할 때까지 잠만 잔것 같다. 4 시간 정도 지났을까, 울퉁불퉁한 길이<br />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차가 멈추었다. 일어나서 둘러보니 칠흙같은 어둠때문인지, 아무것도<br />

볼 수 없었고 강물이 흐르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어디 깊은 산 속에 들어온 느낌이였다.<br />

우리가 2 주동안 머무르게 되는 게스트하우스에 드디어 도착하였다. 그 곳은 오두막으로 된<br />

집이였고, 우리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라오스캠퍼들 5 명이 있었다. 중,<br />

고등학생들이였다. 그들은 낯선 이방인들을 만나서였을까 표정들이 하나같이 무뚝뚝하며<br />

웃지 않는 얼굴이였다. 첫 만남이 이루어 진 뒤, 한국인, 일본인, 라오스인들을 랜덤으로<br />

방 배치를 하였다. 나는 라오스 친구와 2 주 동안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생각보다 벌레도<br />

많았고, 화장실도 한국과 다르고 여러 가지 걱정을 품은 채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이 떠져<br />

밖으로 나와 내가 어떤 곳에 있는지 보게 되었다. 굉장히 많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br />

산 중턱에는 구름이 있었다. 항상 책에서만 보았던 광경이라 뭐라 말을 할 수 없을 만큼<br />

아름다웠던. 그냥 자연 그대로의 광경이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리고 앞으로<br />

내가 평생 이러한 경관을 볼 수 있을런지 의문도 갔다. 기상시간에 맞춰 모두 일어난<br />

가운데, 어색한 분위기에서 각자 소개도하고 앞으로의 할 일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며, 2 주<br />

동안 함께 지내는 가운데 지켜야 할 규칙들이나, 여러 가지 것들을 정하였다. 한국인,<br />

일본인, 라오스인들과 섞어서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 두 그룹 중 한 그룹은 일주일동안<br />

먼저 비엥사마이 초등학교를 가고 그 다음주는 푸딩댄 유스센터로 가는 방향으로 정하였다.<br />

첫 주 동안은 오후에 비엥사마이 초등학교, 푸딩댄 유스센터에서 두 그룹으로 나눠져<br />

교육을 하게 되었으며 오전에는 비엥사마이 초등학교 재건축을 모두와 함께 시작하게<br />

되었다. 또한, 쿠킹 팀을 나누어서 3 일 동안 아침, 점심을 준비하였으며 저녁은 집 앞에<br />

있는 레스토랑에서 정식 라오스 음식을 먹게 되었다. 아침시간은 8 시였으며 하루의 일과는<br />

9 시부터 시작하였다. 내가 속한 쿠킹 팀이 첫 조여서 삼일동안 음식을 하게 되었다.<br />

재료도 살겸 방비엔 타운에 있는 마켓을 가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재래시장과 거의<br />

흡사하였다. 그래도 라오스만의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아침을 먹고<br />

처음 비엥사마이 초등학교에 가보았다. 숙소에서 걷는 거리로는 한 10 분정도 걸렸나? 가는<br />

내내, 소, 돼지 등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사람들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br />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여서 흥미로웠다. 또한, 가는 내내 동물들의 어마어마한 양의<br />

배설물을 보는 것 또한 처음 겪는 경험이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양쪽으로는 오두막처럼<br />

되어있는 집들이 있었는데, 밖에서 지나 갈 때마다 집안을 바로 볼 수 있는 정도였고, 그<br />

흔한 부엌이나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는 것 같아보였다. 또한, 어린아이들은 신발을 신지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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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또 몇 명 아이들은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상태에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해맑게<br />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때 묻지 않은 자연에서 그대로 자란 아이들 같았다. 처음 그리고<br />

낯선 것들을 보면서 신기해하고 있을 때 즈음, 비엥사마이 초등학교에 도착하였다. 내가<br />

여태까지 생각했던 그런 학교가 아니였다. 지푸라기와 나무로 만든 형태로 되어있었으며,<br />

교실 안에는 그 흔한 불빛도 없이 어두운 정적만 흘렀다. 학교운동장에서는 풀이 무성하게<br />

자라나있었으며 그곳에는 어린아이들이 자기 집인 마냥 뛰어놀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을<br />

경계하는 눈빛이 아닌 신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단지<br />

작은 어린아이들이였다. 하지만, 말로는 표현 할 수 없이 기분이 묘했다. 첫 일을 시작했다.<br />

우선 낡고 허름해진 창문을 제거하기부터 시작했다. 일을 하고 있는 가운데 아이들을<br />

교실에 들어와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따라 도와주었다. 그 중 몇 명 여자애들이 근처에<br />

꽃을 꺾어 수줍은 듯이 나에게 건네주었다. 음..엄청 기뻤다. 낯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br />

먼저 다가와서 나를 반기는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았다. 점심시간 때까지 일을 하고,<br />

점심을 먹고 휴식시간을 가진 뒤 계속해서 일을 하였다. 이러한 일을 마친 뒤에는 한 시간<br />

동안 휴식시간을 가진 뒤, 내가 속한 그룹은 비엥사마이 초등학교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칠<br />

교육자료를 준비하였다. 아직 아이들을 만나지 못해서 그 쪽 아이들의 수준을 잘 몰랐기<br />

때문에, 쉬운 알파벳부터 가르치자 하는 마음으로 갔다. 먼저 들은 바로는 초급, 중급,<br />

고급반이 있다고 들었지만, 막상 가니 초급반과 고급반 두 반으로 나뉘어져있었다.<br />

고급반의 임무를 맡은 나와, 일본인 친구 2 명과 한국인 친구와 라오스 친구 한명과 함께<br />

수업에 들어갔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적지 않은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있었다. 물론, 펜과<br />

공책도 함께. 생각보다 어린아이들이였다. 대략 8 살 9 살 아이들. 아이들이 영어로 하는<br />

말을 아예 못 알아듣기 때문에 라오스 친구가 통역을 대신 해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br />

라오스어를 좀 많이 공부해 갈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고급반이여서 그런지, 알파벳<br />

같은건 기본으로 잘 하였다. 그래서 수준을 좀 높여서 가르치기도 하고, 게임도 하였다.<br />

아이들이 배움에 대한 열성적인 반응 때문이였는지 첫날 수업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고<br />

앞으로가 기대되었다. 한 시간 반 동안의 수업을 마친 뒤 , 집 앞에 있는 레스토랑에서<br />

라오스 음식을 먹게 되었다. 향이 강한 음식을 잘 못 먹는 편이였지만, 나오는 음식마다 내<br />

입맛에 맞아서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하루일정이 끝나고, 오늘하루에 대한 느낀점을<br />

돌아가면서 얘기하였다. 좋았던 점과, 나빴던점, 개선해야 할 점 등등. 이런식으로<br />

하루하루가 진행되었다. 모든 일들이 나에겐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들을 가르쳐본 적은<br />

있었지만, 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내 마음과 태도도 달랐다. 또한, 노동작업 같은 것들도 한<br />

번도 한 적이 없어서 처음 몇 일 동안은 힘들었지만 새로운 경험 이였다. 4 일정도 지났을<br />

때 즈음, 라오스에서의 생활이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처음 몇 일 동안은, 모든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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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달라서 좀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첫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이런 반복적인<br />

활동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점점 지나는 사이, 다른나라 캠퍼들과도 많이 친해졌으며, 낯을<br />

많이 가렸던 친구들도 점차 이야기도 많이 하기 시작했다. 토욜날과 일요일은 오전에는<br />

free time<br />

이 있어서 시내에 나가 시내 구경도 하며 자유시간을 즐겼고, 오후에는<br />

푸딩댕센터에서 하는 댄스 클래스에 참가하였다. 한 3<br />

시간동안 이였을 것이다.<br />

푸딩댕센터에 다니는 아이들의 춤을 배웠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어쩜 그런 춤사위가<br />

나오는지 감탄의 연속이였다. 라오스의 전통춤도 배워보고 그렇게 오랜시간동안 댄스를<br />

배운건 처음이여서 나름 재미있었다. 이렇게 일주일이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한국<br />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일주일 밖에 안 남은 시간 때문에 아쉬워하고 있었다.<br />

새로운 주, 마지막주가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푸딩댄센터에가서 학교벽을 다시 칠하며<br />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 오후에는, 내가 속한 그룹이 푸딩댄센터에 가서 교육을<br />

하게되었다. 이번에는 한국팀과 일본팀을 나누어서 한국에 관한 것들을 알려주며 정보<br />

공유의 시간을 가졌다. 푸딩댄 유스센터 아이들은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오는<br />

곳이였다. 이쪽 아이들은 영어로 말하면 거의 다 알아들을 정도 였으며 영어로 말하는<br />

아이들이 꽤 많았다. 그 쪽에서 만난 한 학생이 있는데, 그 친구는 집이 비엔티엔인데<br />

방학동안에 센터에 영어를 배우러 오게 되었다고 한다. 멀리까지 와서 이렇게 영어공부를<br />

하는걸 봐서는 참 대견하고 열성적인 아이라 생각하였다. 하루하루가 갈수록, 유스센터에<br />

있는 아이들과도 얘기도 많이하고 친해지고, 물론 캠퍼들은 말할 것도 없이 가족같았다.<br />

어디에 있든, 시간은 항상 빨리 지나가는 것같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이 코 앞으로<br />

다가왔다. 이곳에는 '바시'라는 세레모니가 있는데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하얀색 실로 된<br />

팔찌를 채워주며 행운을 빌어준다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바시' 세레모니가 토요일 저녁에<br />

있었는데, 그 전까지는 정말 돌아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바시'세레모니가<br />

열리는 비엥사마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순간, 내가 가르쳤던 수많은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br />

언제나 맑고 해맑은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만나고 헤어지는것은 당연한 것이며<br />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였나보다. 비엥사마이 교장선생님이<br />

세레모니를 시작하는 동시에, 아이들을 보는 순간 울음이 터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때<br />

그렇게 서럽게 울었는지.. 오랜만에 거의 통곡 수준까지 운것은 정말 처음이였다. 애들<br />

하나하나 이름도 다 못 외웠고 의사소통도 거의 안되어서 개인적으로 수많은 얘기도 하지<br />

못하였는데.. 아마 그 따뜻하고 해맑은 아이들을 이제는 다시 못볼 것 같다는 생각에<br />

그렇게 울은것 같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열성을 다해서 도움이 되주지도 못한 것<br />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였을까.. 지금도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울었는지 생각이 안난다.<br />

그렇게 우는 도중에, 내가 가르쳤던 아주 똘망똘망한 여자 아이가 울지말라는 제스처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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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달래주었다. 더 울음이 나왔지만, 웃음도 나왔다. 세레모니가 끝날때까지 눈에는<br />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단체사진을 찍어러 학교운동장으로 나오는데, 계속해서<br />

아이들이 옆에서 옷을 잡고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너무 아련하고<br />

슬펐다. 무슨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라오스어를 하지 못해서, 영어를 알아 듣지<br />

못해서.. 볼을 쓰다듬어주고 웃음으로밖에 대처해 주지 못하였다. 숙소로 돌아가기까지<br />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들도 이별을 아는지, 마지막 인사를 아쉬운 미소와 함께<br />

해주었다. 그렇게 숙소에 돌아온 후, 정말 마지막 밤이다. 2<br />

주동안 동거동락한 우리<br />

캠퍼들과도 마지막이다. 다시 언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또다시 울음이 터졌다. 내<br />

인생에서 2 주동안 라오스에서 지내는 내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하나 더 짊어지고 가게<br />

된것같아 기쁘면서도 슬프다. 다시 내자리로 돌아가면 언젠가는 라오스에서 만난 사람들,<br />

했던 일들이 점점 희미해져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겠지만 한국으로 돌아온지 일주일째 되는<br />

오늘도 어제일같이 하루하루 생각이 난다. 갔다오기전과 갔다 온 후에 태도의 변화를<br />

묻는다면 글쎄 간단명료하게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내 자신에게 물어봐도 정확하게<br />

어떠한 문장으로 입밖에 안나온다. 하지만, 이번에 라오스로 국제자원활동을 가지 않았다면,<br />

이 나라에 대한 어떠한 호기심도 안가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게 낯설었던 라오스,<br />

지금에 나에겐 어떠한것보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해 주어서 너무 감사하고, 많은<br />

사람들,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내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라오스라는<br />

나라가 나에게 더 알고 싶어지는 나라로 인식되어서 이것만으로 나에게는 값진 경험이 된것<br />

같다.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 아닌, 다음 인연이 기다려지는 라오스. 다시 볼때까지 안녕!<br />

Thank you for being nice to me, Laos. See you again, soo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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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OS<br />

김지훈 (영남대 특수체육교육과 3 년)<br />

Naleut 2 월 15 일-2 월 28 일<br />

_24 살의 라오스, 그리고 폽칸마이<br />

벌써 한달이나 지났다.<br />

캠퍼스를 누비는 학생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더욱 더 얼마 전에 라오스에 있었다는<br />

사실이 꿈만 같다.<br />

다녀와서 사진을 정리하다가 정말 행복했던 모습들을 다시 봤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br />

그리고는 문득 거울 속에 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의 나는<br />

얼마나 행복한가.<br />

라오스 사람들은 어딜 가나 항상 우리를 환대해주었다. 먼저 손을 내밀어주고 대가를<br />

바라지 않았다. 대가를 바란게 있다면 오히려 내쪽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내 스스로<br />

자극을 받기를 원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조금이라도 더 마음에 드는 사진을 위해 욕심을<br />

부렸다.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그곳에서 난 참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br />

그곳에서 있었던 일 모두가 새로운 자극이었고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br />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일어나도, 우리 문화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도 여기는<br />

라오스니깐 이해한다. 우리네 사고방식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이 상황을 좋게<br />

만드는데에 온힘을 쏟으며 피곤한 일들을 여기저기 벌려 놓겠지만 이곳은 라오스다.<br />

118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br />

비엔티엔에서 친구랑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신호위반을 하게 되었다. 곧바로 경찰이<br />

우릴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다른곳을 가르키며 그 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에게 우릴<br />

데려갔다. 그 사람은 곧바로 종이에다가 대문짝만하게 쓰기 시작했다. 50000 + 2 = 100000<br />

kip 비록 이 돈이 우리에게는 얼마 되는 돈은 아니지만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br />

외국인하고 거래를 하자는건지 이런 모습에 우습기도하고 화가 났다. 결국엔 쇼부아닌<br />

쇼부(?)를 봐서 두사람에 50000<br />

킵을 주고는 풀려났다. 아직까지 분이 덜 풀려서<br />

씩씩거리는 나를 보면서 나와 같이 오토바이를 탔던 친구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br />

“괜찮아요, 여긴 라오스잖아요.”<br />

사진을 찍으러 마을 곳곳을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은 바로 “그 사진 뽑아줄 수<br />

있어?” 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내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교차하게 했다. 사람들을 찍으며,<br />

라오스의 풍경을 내 카메라에 담으면서 만족했던 순간의 기억들은 어쩌면 찰나의 아쉬움을<br />

붙잡고 싶어 하는 순전한 나만의 욕심이 아니을까.<br />

내가 아는 한 형님은 내가 겪었던 2 주간의 라오스는 정말 니가 보고 싶은것만 보고 좋은<br />

것 들만을 담아올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내<br />

입맛대로, 제멋대로 이 나라를 판단하고 좋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라오스를 다시<br />

겪어보고싶다. 아직 나는 라오스의 겉모습만 보고 좋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달콤한<br />

겉모습에 이렇게 열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이유로 그곳에 꼭 다시<br />

가야만 한다. 아니 가야한다. 꼭 돌아가야한다.<br />

2010. 03.02<br />

하루가 지났지만 무척이나 현실로 돌아오기 힘들다<br />

어제까지 비엔티엔에 있었다는게 믿기 힘들다<br />

늦잠을 자버려서, 머리도 안감고 깜빡하고 세수도 안하고 뛰어나갔다<br />

너무 익숙해져서 일까.<br />

택시를 타고, 바쁘게 뛰어서 강의실로 들어가고<br />

마주쳐도 표정이 없는 학생들,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는 사람들<br />

하루종일 정말 너무 머리가 어지러워서<br />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에게도 반갑게 대해주지 못하고<br />

집으로 곧장 돌아와서는 뻗어버렸다<br />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br />

세상이 웽웽 도는 것 같았다.<br />

가기전에는 몰랐지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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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오고나서 이렇게까지 휴유증이 클지는 몰랐다<br />

아직 손목에 달려있는 실들과 아직 현상하지 않은 사진들이<br />

그간 2 주간의 일들이 결코 환상은 아니었다는것을 증명해주지만<br />

그 모든 일들이 끝났을 때<br />

이 2 주간의 일들이 아련한 옛 추억이 될까봐 두렵다<br />

라오스를 떠나면서<br />

언젠간 다시 돌아올게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br />

언젠가라는 말은 남아있는 사람에게도, 떠나는 사람에게도<br />

참 무책임하고 잔인한 말인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br />

라오스에서 진심으로 우릴 대해주신 분들에게,<br />

그렇게 말하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br />

바꿔서 말하면, 사실은,<br />

왠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돌아갈수 없을 것 같았다.<br />

모든 2 주간의 일들이 꿈같고 환상같더라도<br />

어쨋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br />

얼마뒤 지나지 않아서 나도 다른사람들처럼 무표정해지고<br />

매일밤 과제에 치여서 바쁜 삶을 살아간다 할 지라도<br />

비록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똑같은 삶을 살아가더라도<br />

지금 내 마음속에 있는 감정들은 결코 사라지지않겠지<br />

진심으로 고마웠다<br />

24 살의 라오스,<br />

그리고 폽칸마이.<br />

120


LAOS<br />

김재훈 (고려대 경영대학 3 년)<br />

Naleut 8 월 9 일-8 월 20 일<br />

_시간이 멈춘 Naleut<br />

지난 여름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국가 Laos<br />

에 있는 Naleut 캠프에 참여했다. 나는<br />

학교에서 하는 국제 인턴십의 과정으로 워크캠프에 참여하였다. 원래 일찍 지원하여<br />

유럽이나 선진국 쪽으로 지원하고 싶었지만 교환학생으로 7 월달에 한국에 들어와서 남아<br />

있는 곳이 라오스 밖에 없어서 라오스에 지원하였다. 지원을 매우 늦게하여 지원 후<br />

2 주일만에 라오스로 가게 되었는데, 나 역시도 한국에 돌아온지 한달도 되지 않아<br />

이것저것 준비한다고 라오스에 대해 하나도 모른 채, 막연히 70 년대 한국 시골 모습에<br />

정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여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음부터 최악을<br />

가정하였기 때문에 가서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캠프 지내는 곳은 예상했던 것보다는<br />

너무나도 좋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할 수 있었다. 단, 인터넷은 기대조차도 안<br />

했다. 아이팟에 스피커, 여가 놀이를 즐길만한 갖가지 카드(물론 우리가 다 들고 간거지만).<br />

여기에 생각지도 않은 맥주까지. 생활은 완벽했다. 여름 시즌은 우기라 비가 매일 한차례<br />

이상 쏟아진다. 하지만 일회성 소나기로 한시간 안에 그쳐 언제 비가 내렸다는 듯 하늘은<br />

맑아진다. 한국 요즘 날씨보다 훨씬 좋다. 단지 우기라 물이 프랑스보다 훨씬 심한<br />

석회수라는 것이 가장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참고로 물 색깔은 회색이다. 물은 생수를 사서<br />

사 마시고, 식재료는 풍부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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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은 한국에서 간 우리팀 7 명에 코디네이터 수현누나, 라오스 현지 봉사자 4 명, 총<br />

12 명이 생활한다. 라오스 현지 봉사자들은 라오스 최고 명문대생들이며 우리랑은 영어로<br />

대화한다. 하지만 이 때 말고는 워크캠프에서 영어는 통하지 않는다. 생활하면서 필요한<br />

생활 필수품이나 식재료는 코디네이터가 부족함 없이 채워 넣어 주신다. 음식은 모두<br />

우리가 직접 해야 하지만 팀별로 나눠 하지만 매번 은근히 경쟁 분위기다. 라오스 친구들도<br />

라오스 현지 요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웬만한 라오스요리는 우리 입맛에 맞지만 몇몇<br />

음식은 좀 비리기도 하다.<br />

오전 일과는 현지 초등학생 교육, 오후 일과는 건물 페인트칠이다. 우리가 활동했던 시기는<br />

학교 방학기간이라 인근 중학생들도 청강하러 온다. 학생들 수는 70 명 정도라서 저학년 한<br />

반, 고학년 한 반으로 나눠 수업한다. 내가 맡은 반은 저학년 반이라 내가 영어로 진행하면<br />

라오스 친구들이 라오스 어로 통역하여 진행되었다. 저학년들은 ABC 알파벳부터<br />

가르쳤는데 예상외로 아이들의 공부 열의가 엄청나 나조차도 놀랐다. 8 시 반부터 11 시<br />

반까지 3<br />

시간 가량 가르치는데 중간중간 라오스 친구들이 준비한 동요와 율동을<br />

가르치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다들 순수하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 아이가 없었다. 주변<br />

환경을 벗삼아 나무위에 원숭이처럼 매달리기도 하고, 그냥 풀 밭에서 맨발로 뛰어놀아도<br />

즐거워보였다.<br />

오후 일과는 건물 내외벽 페인트칠이었는데 초반에는 학교건물 내부에 붙은 학생들의<br />

그림이나 책상정리였는데 그림 떼는 일이 은근 성가신게 아니었다. 페인트칠을 위해서는<br />

깨끗하게 떼어내야 하는데 본드로 붙였는지 끌칼과 솔을 동원해서 다 떼어 내는데 일주일이<br />

소모되었다. 다행이 마음씨 좋은 동네 아이들이 점심을 먹고 우리가 일 할 때 즈음엔 다들<br />

나와 우리는 50 명 정도가 그림떼어내는 일을 하고 청소도 하며 즐겁게 보냈다. 솔직히<br />

우리가 꺼려하는 좀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들은 그냥 아이들 시킨 적이 없잖아 있었다.<br />

5 시쯤 일과가 끈나면 자유시간이었다. 저녁을 만들어 먹고, 쉬다가 매일 저녁엔 그 날<br />

있었던 일에 대한 소감을 말하며, 다음날 가르칠 커리큐럼에 대해서 팀별로 회의를 하고<br />

일과를 마무리 짓는 시간이었다. 주로 저녁에는 맥주를 먹으며 애들끼리 애기하고 노는<br />

것이 대부분이었다.<br />

2 주가 흘러간지도 모른 채 날럿의 캠프는 끈났다. 모든 것이 일상의 반복이었고, 날씨도<br />

동물도 아이들도 매일 똑같이 지내왔다. 하지만 한국의 일상의 반복과 다른 점은 마음의<br />

여유를 가진 반복이라는 점이다. 서울에서 매일 똑같이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 지겨움을<br />

느끼는 것과는 달리 날럿에서는 매일 똑같은 반복. 심지어 날씨조차도 반복이지만 같은<br />

반복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고 할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만 왠지 싫지<br />

않는 그런곳에서의 2 주는 정말 짧게 느껴졌다. ‘보펜냥!’ 이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br />

122


통하는 라오스. 이 곳에서의 생활이 나에게 마음 한 구석 여유를 찾아준 캠프 날럿. 바쁜<br />

일상에서 나와 정말 순수한 아이들과 여유를 찾고 성질을 정화시켜준 이 곳 캠프는 정말<br />

잊지못할 추억이 될 듯하다.<br />

123


BANGLADESH<br />

김철주 (영남대 기계설계전공 3 년)<br />

BWCA 1 월 24 일-2 월 7 일<br />

_“아쌀라 말라이꿈, 방글라데시”<br />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하얀 구름은 영화관의 하얀 스크린과 같고 그 위를 비추는 햇살은<br />

영사기가 되어 15 일간의 추억을 조심스레 떠올리게 한다.<br />

“후~~읍 ~~하!!!”<br />

경산에서-인천- 홍콩- 다카까지 약 하루만의 이동 끝에 도착한 다카공항에서 가장 먼저<br />

한 행동은 크게 숨을 한번 들이키는 것이었고 그 순간 코끝으로 전해오는 새로운 세상의<br />

향기는 내 심장을 설레이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면서 겪었던<br />

어이없는 세관문제(천신만고 끝에 현지 유네스코직원의 도움으로 잘 해결되었다.)와 한눈에<br />

들어오는 어두컴컴한 도시의 밤 모습이 우리대원들의 걱정, 근심을 드리우게 하였지만 또<br />

한편으로는 BWCA 의 직원들과 책임자인 MR.라마의 환대 , 공항 앞에서 서성이는 맨발의<br />

불쌍해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기쁨과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공항에서<br />

우리가 묵게될 숙소까지 가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도로위에 수많은 차량, 사람들, 인력거,<br />

오토바이들이 아무런 교통 체계 없이 난잡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신호로<br />

사용하고 있는 건 단지 경적 소리 하나였다는 것. 그 수많은 경적소리들이 내 귀를<br />

어지럽혔다.<br />

전날까지 이동한다고 힘들었던 피로를 숙소에서 훌~~훌 털어내고 우리의 최종 도착지인<br />

BOGRA 까지 이동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 뜻하지 않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첫<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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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째 손님은 ‘샤키’라고 하는 일본인 여자대학생이었고, 두 번째 손님은 방글라데시<br />

현지인인 대학생 ‘마문’ 이었다. 두 사람 다 뛰어난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br />

모두와 어느 정도 대화가 되었다.(우리 팀원 중 소연, 다애는 영어를 잘해서 대화를<br />

잘했지만 나머지 팀원은 말도 안 되는 영어를 써야만했다. 영어 공부의 절대적 필요성을<br />

느낀 순간이었다.)<br />

이렇게 총 14 명의 대원들은 하나가 되어서 BOGRA 로 향하였다. 어제와 같은 도로를<br />

지나면서의 느낌은 또 다른 것이었다. 어제는 불빛이 별로 없는 컴컴한 도시에 무질서한<br />

차량들이 뿜어대는 매연과 경적소리에 가라앉아 보였던 도시였지만 낮의 도시는 무질서한<br />

차량, 경적소리, 매연 등은 여전하였지만 땀을 흘리면서 인력거를 끄는 사람들의 모습들,<br />

앞만 보며 빨리 걸어가는 사람들, 빨리가기위해 속력을 내는 차량들, 그 와중에도 접촉사고<br />

한번 내지 않는 모습은 무질서함속에서의 질서와 삶을 살아가는 고됨에서 나오는 활기참을<br />

느낄 수 있었다. 수도인 다카를 빠져나와서는 끝없이 펼쳐진 논과 밭들, 그 위에서 풀을<br />

먹고 있는 소, 양들과 농사일을 하고 있는 아저씨들, 연못에서 씻고 있는 여인들의<br />

모습에서 평화로움과 자유로움을 느끼고 나 또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 같았다. 4 시간의<br />

이동 끝에 다. 어에 도착하였고,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몰려드는 마을 주민들과 어린애들,<br />

그들의 때 묻지 않은 듯한 순수앨에 나도 자연스레 인사를 하였고 어린애들과 같이 나도<br />

모르게 뛰놀고 있는 나를 보면서 벌써 이 마을의 주민이 된 듯한 착각을 하게 되었다. 밤이<br />

되어서는 자주 일어나는 정전과 우리나라와는 다른 물의 색깔과 냄새에 모두들 당황하기도<br />

하였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에 우리가 적응해야 하였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고<br />

불평하지 말자고 이야기 하였다. 삼일째부터는 매일 같이 VTC 에 가서 일을 했었는데<br />

시멘트 작업, 벽돌 작업등이었다. 그 작업들은 힘들지는 않았지만 단순 반복 작업이었기에<br />

지겨웠고, 그것을 참아내면서 해야 했기에 우리대원들은 틈틈이 농담도 주고받으면서<br />

분위기를 활기차게 유지하였다. 또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동네 꼬마아이들도 가끔<br />

다가와서 작은 손으로 도와 줄때면 더욱더 우리를 힘나게 만들었다. 14 일 모두다 VTC 에서<br />

일을 한 것은 아느낄 마을 시장에 나가 하도 구입하고, 학교로 가서 운동회에 참석하여<br />

시상도 해보고, 환경이라는 주제로 수업도 하고 우리가 지만한 요술 풍선과 페이스페인팅,<br />

공연을 하였다. 하지만 아쉬웠던 것은 현지 사정으로 인해 요술 풍선과 페이스페인팅을<br />

직접 해주지 못하고, 그냥 주고 와야 했다는 것과 공연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br />

문화와 달라서 나오지 조용사일을분위기가 아쉬웠다. 비록 우리가 지만한 걸하였대는 않여<br />

줄 순 직접지만 그래도 그만큼 지만한 것에 의의를 두고 만족하기로 했다.<br />

식사를 하고 가졌던 휴식시간에는 숙소 밖으로 나와 어린아이들과 술래잡기도 하고,<br />

구슬치기, 땅따먹기도하며 놀았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젋은 청년들과 아주머니와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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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도하고 그래서 서로 이름도 외우게 되고 친구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이찌다, 고비,<br />

빌룸, 후노이, 쭈띠, 리사, 소피아, 사미아, 우샵...) 비록 언어가 잘 통하진 않았지만<br />

약간의 영어와 방글라데시어, 몸짓, 눈빛만으로도 의미를 파악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는<br />

않았다.<br />

일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들렸던 어린 이찌다의 집. 그리고 그 가족들의 환대.<br />

쭈띠와 함께 단 둘이 불렀던 타이타닉의 주제가. 후노이와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 내가<br />

팀장님몰래 이찌다, 리사, 소피아, 사미아에게 주었던 선물로 그 어린애들도 나에게 답례로<br />

주었던 선물인 조개껍질과 구슬, 나무로 만든 새 모형등... 나와 주민들만의 있었던 일이<br />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런 활동 중에서의 추억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대원들과의<br />

소중했던 추억. 비록 중간에는 갈등도 있었지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면서 그 다음부터는<br />

서로 더 친밀하게 되었다. 또 컴컴한 밤하늘에 수백개의 별을 12 명 모두가 보면서 불렀던<br />

노래는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br />

이렇게 수많은 추억을 간직한 BOGRA 를 떠나게 된 건 13 일째. 아침부터 분주하게 떠날<br />

채비를 하면서 내 마음 또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숙소를 나오자 많은 주민과 어린애들이<br />

나와 있었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우리를 진정 배웅하기위해 나온 것이<br />

아니라 우리가 떠나기 전 무언가를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라는 걸. 그걸 알면서도<br />

섭섭함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차에 짐을 실고 주위를 둘러싼 주민들과<br />

어린애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나와 친했던 친구들과 마을 어른들의 모습을<br />

담아두고자 한명, 한명씩 보면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차에 탑승하고 출발하기 직전 이찌다<br />

어머니의 “컴투 어게인 방글라데시”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와 가장 친했던 이찌다를<br />

말없이 계속 보면서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다. 그 슬퍼하는 듯한 눈망울은 아직도 잊을 수<br />

없다. 마을을 빠져나와 VTC 에 들려서는 우리가 그 동안 해놓았던 일들을 바라보고 우리와<br />

같이 했던 마을 청년 마아블과도 작별인사를 하였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졌던 친구.<br />

한국에 언젠가 올 거라는 그의 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그렇게 BOGRA 와 헤어지고<br />

말았다.<br />

다카에 도착한 우리는 MR.라마 집에 초대받아 저녁식사도하고 마지막 날 오후까지 다카<br />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구경도하고 인력거를 타고 시장에 가서 물건도 사는 경험을 하였다.<br />

이렇게 짧았던 방글라데시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하고,마지막까지 같이 했던 방글라데시의<br />

밝은 미래가 될 대학생 마문과 MR 라마씨와 아쉬운 헤어짐을 뒤로한 채 비행기에 올라탔다.<br />

올 때나 갈 때나 같은 밤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글라데시지만 난 조그마한 것을 주고 더<br />

많은 것을 가지고 가기에 이 나라는 나에게 친구나 다름없었다.<br />

“발로 탁쿤, 방글라데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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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GLADESH<br />

김단비 (Cornell University, Hotel Administration, 2 년)<br />

BWCA 8 월 5 일-8 월 19 일<br />

_콜라 한 모금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나라<br />

내가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로 워크캠프를 간다고 얘기를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br />

“도대체 왜?” 였다. 그 질문에 나는 항상 똑 같은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냥”이라고.<br />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봉사활동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평소에 자원봉사에 헌신하는<br />

그런 학생도 아니었다. 이번에 휴학을 하게 돼서, 정말 “그냥” 한번 해보고 싶어서, 좀<br />

늦었다 싶을 때 해외 자원봉사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이 캠프를 찾게 됐다. 근데 “그냥”<br />

가게 되었던 방글라데시에서의 추억은 앞으로 평생동안 잊혀지지 않을 듯 하다.<br />

공항에서 만난 캠프멤버들은 아직까지 서먹서먹 한 면도 있었다. 아니, 사실 다카에서의<br />

하룻밤도 어색했다. 하지만, 우리가 캠프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린 이미 가족이 되어있는<br />

듯 했다. 내가 기억나는 우리 캠프의 첫 인상은 이러하다. 난생 처음보는 크기의<br />

바퀴벌레와 거미, 그리고 시커먼 쥐.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도마뱀들. 엥엥 거리며<br />

날아다니는 수많은 모기들. 말도 안 되는 화장실 (문만 열면 벌레)과 샤워실(녹물로 샤워).<br />

엄청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발전기와 자꾸 꺼지는 전기. 냄새나고 딱딱한 침대. 그리<br />

괜찮다고는 하지 못할 시설이었다. 그치만 다른 나라들에서 침낭깔고 샤워도 못하고 지내실<br />

분들을 생각하며 “우린 그래도 괜찮아..괜찮아..” 하면서 나를 위로 햇다.<br />

하지만, 첫 3~4 일 동안 나에게 위로 따윈 없었다. 불평, 불만의 연속이었으니. 괜찮다고<br />

생각하다가도, 미칠듯한 더위와 벌레들 사이에서 일을 하고 잠을 자면서, 입맛에 잘 맞지<br />

않는 음식을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수백 번 했던 것 같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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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가지고 있던 정보가 현지에 막상 와서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 많이 있었던 점도<br />

큰 기여를 한 듯 하다. 우선적으로, 여자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이 우리가 한국에서 입을 수<br />

있던 옷과 너무나도 다르다는 점이 40°C 를 왔다갔다하는 습기 가득한 방글라데시에서의<br />

생활을 가장 고달프게 했던 요소 같다. 반바지나 치마가 무릎위로 올라오거나 민소매<br />

셔츠를 입고 나오면 옷을 갈아입고 와달라는 현지 coordinator 분이 너무나도 미웠던 적이<br />

많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겪어왔던 더위와는 차원이 다른 날씨와 자꾸 꺼져버리는<br />

전기가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었던 것 같다. 우리 그룹이 사전에 알고 있던 교육 내용과<br />

현지에서 요구하는 교육 내용이 완전 다른 내용이라 당황했던 적도 있다. 그 자리에서<br />

급조해서 교육 내용과 준비물을 만들고 지난번 팀이 놓고 간 자료들을 쓰면서 현지<br />

coordinator 와 volunteer 들에게 굉장히 미안해 했던 기억이 있다.<br />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우리가 이 곳에 남기고 가는 인상이 이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국<br />

사람들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이야 2<br />

주만 있다가 한국으로<br />

돌아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앞으로 올 한국 팀들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가<br />

housemeeting 을 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br />

정해서 방글라데시로 온 것이 아닌가. 이런 말을 했더니 우리 착한 팀원 언니, 오빠,<br />

동생들이 다들 동의해주고 대안 법을 생각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우리 팀원들과 현지<br />

coordinator 와의 대부분의 communication 을 담당했던 나와 내 친구 연지는 중간에서<br />

힘들었던 점도 많았는데 이 housemeeting 을 하면서 정말 위안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br />

이날 후로 우리들은 더욱 더 열심히 프로그램에 임했다. 그러면서 웃는 시간도 더 많아지고<br />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일을 하다가 갑자기 불어오는 한줄기의 시원한<br />

바람. 중간에 나눠주는 너무나도 맛있는 파인애플과 망고. 일 하다가 마시는 미지근하지만<br />

너무 맛있었던 콜라. 가끔씩 내리던 시원한 비. 저녁에 다같이 마시던 tea. 그러다 보니<br />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항상 웃고 있는 이유를 살짝 알 것도 같았다. 나도 근심 없이 활짝<br />

웃고 하다 보니 정말로 마음이 행복해 지는 듯 했다. 나와 2 년을 같이 생활했던 친구<br />

연지가 방글라데시에 와서 나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는 것 같다고 했으니, 내가 뭔가가<br />

다르긴 했나보다.<br />

방글라데시 사람들과 정도 참 많이 든 것 같다. 같이 게임도 하고, 일도 하고, 밥도 먹고<br />

하면서 깊은 얘기도 나누고 웃고 떠들고 했던 시간들이 나에게 이렇게 소중한 추억이 될 지<br />

생각도 못했었다. 토모, 살라딘, 폴라시, 그리고 마하불. 이 네 명의 친구들과 많은 얘기를<br />

하면서 정말 이 친구들이 너무도 순수하고 착한 친구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엔<br />

어색해서 말도 잘 안 섞었던 우리였다. 하지만 24/7 같이 있다 보니 저절로 서로에게<br />

마음을 열게 되었던 것 같다. 떠나기 전 몇 일 동안은 같이 있는 시간이 아까워서 잠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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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안 잤던 우리들. 앞으로 평생 연락을 하고 친하게 지내자는 이 친구들이 너무나도<br />

고마웠고 마지막에 눈물을 글썽이던 눈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 것 같다.<br />

방글라데시에서 무엇이 제일 좋은 것 같았느냐고 누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 없이<br />

“사람” 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우리가 나가면 쪼르르 달려 나와 “따따~”라고<br />

외치며 우리 손을 잡았던 꼬마아이들. 우리가 지나가면 너나 할 것 없이 웃으며 손을<br />

흔들어주던 사람들. 밤이 되면 어김없이 tea 를 같이 마시던 네 명의 친구들. 그리고<br />

무뚝뚝하고 무서운 듯 하지만 너무나도 마음이 좋은신 우리 coordinator. 마지막 날, 내가<br />

너무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라만씨에게 tea 한 잔을 타드렸다. 그런데 그 것이 정말 마음에<br />

남으셨는지, 그날 저녁에 가졌던 housemeeting 에서 이런 말을 하셨다. “아까 단비가<br />

타주었던 한 잔의 티는 그냥 티가 아니다. 너희들은 모두 떠나가겠지만, 그 한잔의 티의<br />

따뜻함은 내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너희들의 따뜻한 마음과 열정 정말<br />

너무나도 고맙다” 고 하셨던 라만씨. 오히려 우리가 더 고마워 해야 할 입장이었는데도<br />

우리에게 연신 고맙다고 얘기를 해주셨다. 방글라데시에서 보냈던 2 주의 시간은 내 기억<br />

속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같이 갔던 13 명의 친구, 언니, 오빠,<br />

동생들과 네 명의 현지인 친구들과의 우정도.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해주었던 2 주간의<br />

방글라데시 워크캠프, 너무나도 고마운 시간이었다.<br />

129


INDIA<br />

권순범 (영남대 도시공학과 3 년)<br />

FSL 1 월 25 일-2 월 7 일<br />

_내 머릿속의 또 하나의 추억<br />

우리 팀이 인도에서 봉사활동을 마치고 난 지금, 이 국제 자원 활동이라는 추억이<br />

생기기까지 준비했었던 모든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br />

해외자원봉사를 알게 된 것, 공고 모집 설명회에 참석한 것, 서류접수가 시작되는 그날<br />

새벽 그리고 면접과 합격.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들이었다. 합격한 후에 가져야할 첫<br />

미팅 때의 모습 또한 선명하게 기억난다. 같이 웃고 같이 힘들어해야 할 짧지만 긴 여정의<br />

첫날이었다. 자신들의 학업도 중요하지만 팀을 위해서 학업과 동등한 자격을 두고 시험기간<br />

며칠 전까지도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강한 의지를 우리 팀은 보여주었다.<br />

발대식이 끝나고 이제 모든 준비를 마쳤다. 2010/01/21 우리가 떠난 그날, 설레기도하고<br />

약간 무섭기도 했다. 처음 외국으로 나가는 점도 있었지만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 속에서<br />

“우리가 처음 가졌던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순간 잊어버리고 행동하지 않을까?” 라는<br />

걱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델리 여행을 마치고 쿤다푸르에서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이<br />

시작되었다. FSL 스텝들이 망갈로르 공항에서 반갑게 맞이해주었고 우리가 말로만 들었던<br />

주 프로젝트, 화장실 만들기에 대해서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와 다른 삽, 다른<br />

지반 환경에 조금은 당황했었다. 하지만 막상 프로젝트에 돌입했을 때 왜 그들이<br />

우리나라와 다른 삽을 가지고 일을 하는지, 다른 방법으로 화장실을 만드는지에 대한<br />

궁금증이 완전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 나라에 맞는 그리고 그 지역 환경에 맞게 적응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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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모습들인 것이다. 해외자원봉사를 오기 전에 수 없이 들었던 그 지역의 문화<br />

배우기와 이해하기를 눈앞에서 몸으로 체험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인도는 한국과 다른<br />

날씨와 음식들 그리고 다른 환경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마음가짐만으로는 안 되는<br />

점들이 있었다. 더운 날씨에 몸이 지치고 한국음식과 다른 인도음식들을 먹으며 다른 여러<br />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로 우리를 힘들게 했던 물갈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설사를 하고 그<br />

영향으로 몸이 아프기 시작했을 때 모두들 많이 힘들어 했다. 그럴 때마다 더욱 힘들어했던<br />

점은 봉사활동에 대한 마음가짐이었다. 나부터 점점 그 마음가짐이 약해지는 느낌을<br />

받았었고 또 걱정이 되었다. 처음 가졌던 그 마음을 잊고, 봉사활동은 하지만 왜 해야 하는<br />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봉사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br />

그렇지만 힘들어 했던 우리의 몸은 자연스럽게 그 모든 것을 적응하기 시작했고 팀원들<br />

모두다 서로 힘내라고 응원하고 도와주는 모습에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 힘든<br />

기간들을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정신력과 初 心 不 忘 (초심불망)의 마음가짐을 다시금<br />

재정비하는 시간들이었다고 생각되고 훗날에도 역시 그렇게 기억될 것 같다.<br />

화장실 5 개 만들기, 벽면 페인트칠, 학교 학생들과 만남... 이 모든 시간들이 나에게 또<br />

하나의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냥 보통 추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br />

나에게 있어서 처음 경험했던 부분들이 많았고 그만큼 더 열심히 임했었다. 또한 학교 선배<br />

형들, 누나, 동기들, 후배들, 인도 현지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FSL 스텝 그리고 숙소<br />

사람들 모두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해외자원봉사활동을 갔다 오면<br />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들 얘기 하지만 솔직히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앞으로<br />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생각하고 반응하고 행동할 모습들은 나도 모르게 예전보다 많이<br />

성숙해져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달라진 모습을 유지하며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도록 나는<br />

항상 노력할 것이다.<br />

131


INDIA<br />

조성협 (영남대 전자공학과 4 년)<br />

FSL 1 월 25 일-2 월 7 일<br />

_인도의 중심에서 봉사를 외치다<br />

대학 생활의 꽃이라 하는 것들이 여러 가지 있다. 동아리, 봉사활동, 미팅 등등. 나는<br />

해외자원 봉사활동을 우선으로 꼽고 싶다. 여기에 대한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br />

당신이 대학생이라면, 열정과 패기를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해보아야 할 것이다.<br />

인도로 떠나기 위한 준비는 해자봉 합격발표가 있고나서부터 계속되었다. 발대식 준비를<br />

하면서 우리는 인도바라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발대식 준비, 미션수행으로<br />

학생지원센터는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고, 많은 시간을 함께하였다. 준비과정이 길었지만<br />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힘든 봉사활동을 하기 전에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있었던 것 같다.<br />

인도로 떠나기 전에 많은 것을 미리 준비했다. 기대 또한 많았다. 출국 전에 받는 자료로는<br />

인도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생활 할 것인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br />

그래서 다양한 경우에 대해 조사하고 연습했다.<br />

우리 인도바라기가 인도에 가서 한일은 바로 화장실 만들기였다. 출국 전에 많이 준비를<br />

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현지에서 본 화장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깨끗하고 좋았다.<br />

현재 화장실을 이용 중인 가구는 전체 가구 중 30%도 안됐다. 어린이, 부녀자들에게는 꼭<br />

필요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우리가 주체가 되어 건축 하는게 아니라 우리는 재료를 옮기는<br />

일을 주로 하였다. 기술이 필요한 부분은 전적으로 전문가가 맡아서 했었다. 돌을 옮기는<br />

일과 시멘트로 된 링을 옮기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우리들이 열심히 한 덕분에 예상된<br />

시간보다 빨리 일이 진행되어 처음 2 일은 정말 힘들었지만 남은 기간 동안은 수월하게<br />

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 풍선아트, 태권도 시범등 교육활동도 할<br />

시간이 있었다. 처음 일주일은 인도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물갈이로 고생하는 인원이<br />

132


많았다. 아픈 사람은 아파서 고생하고 남은사람은 2 배로 일도 힘들었지만 밤마다 가지는<br />

미팅시간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줄 수 있었다. 화장실을 만드는 동안 현지인들의<br />

도움과 많은 관심을 받았다. 옆에서 지켜만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같이 일을 해주거나,<br />

마실 음료와 과자를 가져다 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우리나라의 시골과 같은 인심을 느낄<br />

수 있었다.<br />

우리나라에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많은데 해외로 까지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br />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받은 적이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봉사활동을 해보았다. 그러나<br />

이번에 해외자원봉사이라는 좋은 기회가 생겨 어려운 사람도 도와주고, 인도라는 곳에 대해<br />

알아 볼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외자원봉사을 통해 단순한<br />

봉사활동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고 우리나라의 문화까지 그들에게 알린다면<br />

금상첨화가 아닐까?<br />

내가 본 인도의 모습은 ‘도시와 시골 그리고 부자와 거지‘의 이미지였다. 처음 인도로<br />

도착한 곳은 델리이다. 이곳은 인도의 수도이기도 하다. 델리의 첫 이미지는 안개속의<br />

도시였다. 공항에서 기차역까지 가는 그 길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한 치 앞도 보이지<br />

않는 안개 속에서 택시기사 아저씨는 싸이드 밀러도 접은 채 운전을 했다. 한국에서는<br />

생각도 못한 일이였다. 델리의 이미지는 서울과 같았다. 많은 사람들, 릭샤, 택시들...<br />

반대로 봉사활동을 한 쿤다푸라는 시골 같은 이미지였다. 델리에서 기차연착, 상인들,<br />

거지로 인해 인도에 대한 약간의 실망감을 가졌지만 남인도의 쿤다푸라에서는 순수한 시골<br />

사람들, 바다가 보이는 자연환경으로 인도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br />

유명브렌드 매장과 지하철, 공원으로 꾸며진 곳이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 물가의 1/4 정도로<br />

물건을 파는 상점들, 인력거(릭샤), 도로하나만 건너면 도시와 시골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br />

볼 수 있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것 같았다.<br />

현지인들과 힘들지만 즐겁고 보람된 18 일을 보내고 많은 것을 배웠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br />

몸짓으로 의사소통하며 ‘틀림이 아닌 다른, 그리고 같음’을 배웠다. 자원봉사를 다녀와서<br />

가장 많이 달라진 부분도 이 부분 일 것이다. 바로 ‘생각의 차이’이다. 다른 사람을<br />

이해하는 마음, 배려하는 방법 등 나는 많은 것을 이번 자원봉사를 통해 배웠다. 앞으로<br />

많은 대학생들이 국제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했으면 좋겠다. 세계로 나가 세상은 하나라는<br />

것을 깨닫고 우리 모두가 하나 되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주변 친구들에게 권유와 추천을<br />

하고 있다. 꼭 경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리고 반드시 해보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br />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과 보람찬 겨울 방학을 선물해 준 우리 인도바라기들, 인도에 있을<br />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br />

133


INDONESIA<br />

이동건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2 년)<br />

DJ 1 월 10 일-1 월 30 일<br />

_DJ 워크캠프, 1+1=3<br />

대학생의 신분으로서 대학 생활을 마치기까지 해보고 싶은 것은 참 많을 것이다.<br />

해외교환학생, 유럽배낭여행, 제 2,3 외국어 공부, 유명한 연사의 강연을 듣는 등의 많은<br />

것들이 언급되지만 그중에서도 누구에게나 빠지지 않고 등장 하는 것이 해외봉사활동이<br />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나에게도 해외 봉사활동이란 그런 대상이었다. 한국의 대학생으로서<br />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꼭 한번 하고 싶은 그런 대상들 중에 하나 였다. 그렇게 막연하게<br />

해외봉사 활동에 대해 생각을 하던 중 유네스코의 단체파견 워크캠프 모집공고를 보았고,<br />

친한 친구와 함께 지원을 하였고 결국 인도네시아 겨울 워크캠프에 참가하게 되었다.<br />

출국 전 8 명의 한국인 파견자들과 한국에서 만나며 우리의 봉사 진행방향과 현지에서<br />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몇 번 가진 뒤 친목도모 여행도 함께 가며 서로의<br />

서먹함을 약간은 누그러뜨린 뒤 출국을 하였다. 하여 출국을 앞두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br />

세마랑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Dejavato 티셔츠를 입은 캠프 주관단체의 사람들이 우리를<br />

반갑게 맞아주었다.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다음날 우리가 머물 워크캠프 지역인 우노소보<br />

마을에 도착하였고 우린 먼저 타국의 캠퍼(인도네시아인, 독일인)들과 함께 2<br />

주간의<br />

캠프기간동안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하였다.<br />

이튿날부터 실제 우리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활동은 크게 아이들 교육과 화장실<br />

보수공사로 나뉘었다. 주로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활동을 하였다. 처음 보는<br />

134


외국인인 우리에게(이 지역에 외국인이 온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처음에 인도네시아<br />

아이들은 낯설어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금방 우리에게 정중하게 악수를 청하며<br />

진심으로 우리를 환영하며 맞아주었다. 우리 팀원 중 인도네시아어를 할 수 있는 팀원이<br />

없었기에, 항상 교육은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 캠퍼가 짝을 지어 우리는 영어로 설명을<br />

하고 그 영어를 인도네시아인 캠퍼가 다시 인니어로 통역을 해서 가르치는 구조였다. 사실<br />

한국에서는 영어만 하면 문제없겠지 라고 생각을 하고 인도네시아어 공부를 전혀 하지<br />

않았다. 사실 처음 배우는 언어인 인도네시아어를 새로 배우고 그것을 구사하기란 쉬운<br />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공용어가 영어가 아님을 상기하고 어느 정도는 배우고<br />

왔더라면 조금 더 효율적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날마다<br />

교육의 주제는 달랐다. 영어를 교육하는 날도 있었고, 한국어를 교육하는 날도 있었으며<br />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려주는 날도 있었다. 난 그중에서도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br />

대해 알려주는 날이 가장 인상 깊었다. 직접 동아시아의 지도를 그리고 한국의 위치와<br />

서울의 위치를 가르쳐주며 한국이 왜 분단국가가 되었는지, 한국의 의식주는 어떠한지 등에<br />

대해 설명해주었다. 가끔 아이들이 지루해하는 것처럼 보이며 한국의 외모기준이나 한국<br />

축구에 대해 설명을 해주기도 하며 즐거운 분위기를 유지시키기도 하였다. 사실 내가<br />

가르쳐 준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는 너무도 사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타국에서 10<br />

살<br />

남짓한 아이들에게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조금은 친근감을 갖게 해주었다는 것을 생각하면<br />

보람찬 기회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br />

다른 활동인 화장실 짓기는 막상 가보니 정부가 내년에 그 학교에 화장실을 지어주는<br />

것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활동은 현재 있는 화장실의 보수공사를 맡는<br />

것이었다. 새로 화장실을 짓는 것이 더 보람차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슨 일을<br />

하든 그 지역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곧 보람찬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br />

성실하게 임하도록 하였다. 건설 쪽에 경험이 없는 우리 캠퍼들은 벽에 시멘트를 다시<br />

바르기 위해 기존의 낡은 벽을 망치로 부수고 새로 시멘트를 바를 자리를 만드는 조금은<br />

단순해 보이는 일을 주로 하였다. 쉬워 보이는 일이었으나 망치로 벽을 부수는 일이<br />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우선 더운 지방에서 가만히 있어도 더운데 망치질까지 하니<br />

무척이나 더웠다. 또한 단순한 일에 지루하기도 하였고 망치질을 하고 다음날엔 팔에<br />

근육통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 둘째 날 부터는 서로서로 도와가며 쉬는 시간도<br />

규칙적으로 갖고 농사를 지을 때 노동요를 부르듯 중간 중간에 핸드폰으로 한국 가요를<br />

틀어놓으며 외국인 캠프참가자들과 함께 우리 노래를 따라 부르며 지루함과 피곤함을<br />

달래며 활동에 임하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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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이 끝나면 캠퍼들과 집에 모여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 독일인 Arnaud 의<br />

경우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북한과 남한에 대해서도 많이 궁금해 했고, 한국의<br />

이성 친구문화, 결혼문화 등 우리나라에 대해 각종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나도 잘 모르는<br />

내용에서는 다른 한국 참가자들과 토론 아닌 토론을 하며 Arnaud 의 질문에 답하는 경우도<br />

있었다. 또한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의 술 게임을 전파하였다는 점이다. 사실 활동이<br />

끝나면 6 시고 잘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그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낼까 하다가 한국인<br />

세 네 명이서 하던 게임에 다른 캠퍼들도 관심을 가져서 결국 많은 종류의 한국 술 게임을<br />

영어로 설명을 해준 뒤 즐길 수 있었다. 벌칙으로는 인디안밥의 전통(?)까지 전수해주며<br />

친목도모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br />

주말에는 근교 여행을 갔다. 우노소보 마을에서 차를 타고 4<br />

시간 정도를 가면<br />

인도네시아의 3,4 위의 도시인 족자카르타(yogjakarta)에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세계 7 대<br />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보로부드르 사원에 방문하였고, 레프팅을 즐기며 낮 시간을 보냈고<br />

정말 오랜만에 에어컨 공기를 쐬고 우노소보 마을과 비교 했을 때 약간의 사치를 부리며<br />

여행지에 온 기분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말 관광 후 우노소보마을에 다시 왔을 때<br />

우리 한국인들은 모두 심하게 화상을 입었다. 선크림을 발랐어도 래프팅을 하며 선크림이<br />

다 지워지고 워낙 햇볕이 강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인 8 명 모두가 감자팩을<br />

하며 외국인 캠퍼들에게 독특한 인상을 심어주기도 하였다.<br />

여행을 다녀온뒤 다시 한주간 교육봉사와 화장실 보수공사를 진행한 뒤 그렇게 2 주간의<br />

짧은 워크캠프는 끝을 맺고 있었다. 학교 교육 마지막 날 우리는 그간 배웠던 교육내용을<br />

아이들에게 다시 알려주며 작별을 고했다. 그러자 많은 아이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br />

시작하였고, 한 반에서 시작한 울음소리가 전교로 모두 퍼지게 되었다. 많은 아이들이<br />

우리에게 오며 한국에 가지 말라며 눈물을 흘릴 때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정말 많은<br />

것을 해주지 않은 우리인데, 우리를 너무 소중하게 여겨준 아이들이 무척이나 고마웠기<br />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의 많은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악수를 하며 인도네시아인 캠프<br />

참가자로부터 배운 짧은 인도네시아어로 현지작별인사를 해주었다. 그때 내가 했던<br />

인도네시아어는 지금 생각이 안나지만 학교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던 ‘꾸왓’이란 아이에게<br />

우리말로는 ‘꾸왓, 축구선수가 되고싶다그랬지?? 친구들하고 싸우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br />

꿈 이뤄야해!! 많이 보고 싶을꺼야’ 라고 전했던 것 같다.<br />

그렇게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지역주민들이 마련해준 작별 파티에 참석하였고, 마을<br />

촌장님이하 많은 마을 주민으로부터 2 주간 고마웠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되었다. 그래서<br />

우리 한국인 캠퍼들도 마을 회관에 다들 모이신 지역 주민 분들께 2 주라는 시간이 너무도<br />

빨리 지나가서 아쉽고, 우리가 우노소보 마을에 준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배워간다면서<br />

136


고맙다는 인사를 함께 전하였다. 우리의 작별 파티때 학교에서처럼 많은 지역주민들과<br />

아이들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고 숙연해졌었다. 그렇게 작별 파티를 마치고 저녁때는<br />

14 명의 캠퍼들이 둘러앉아 2 주간의 활동에 대해 얘기하며 서로에게 롤링패이퍼를<br />

써주기로 하였다. 13 명의 캠퍼들과 만들었던 각기 다른 추억을 적으며 2 주의 시간동안의<br />

일들을 빠르게 회상하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아침에 서둘러<br />

공항으로 향했고 공항으로 향하며 우리 14 명의 캠퍼들끼리도 서로서로 헤어지게 되었다.<br />

그렇게 2 주간의 워크캠프는 끝이 났다. 내가 한국에서 워크캠프에 지원할 때 쯤 막연하게<br />

해외봉사 한번쯤은 가봐야지 라고 말을 할 때 워크캠프를 다녀온 학교 선배로부터 이런<br />

소리를 들었다. 단순하게, 막연하게 꼭 한번 해보고 싶은 대상이어서 참가하기엔 그것이<br />

주는 교훈이 너무 크다는 말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br />

2 주간의 기간의 워크캠프 참가 후 나는 그 말이 어떤 것인지 십분 알 것 같다. 너무도<br />

순박한 아이들과 지역 주민과의 추억을 통해 얻은 이질감 속의 동질감, 조금은 불편했던<br />

환경 속 에서 더욱 돈독해질 수 있었던 캠퍼들 간의 우정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 등 내가<br />

준 것 그보다 몇 배 더 큰 것을 얻게 되는 것 그것이 워크캠프의 참 모습이 아닌가<br />

생각된다.<br />

137


INDONESIA<br />

강경범 (영남대 경제금융학부 3 년)<br />

DJ 7 월 17 일-7 월 30 일<br />

_순수의 나라 인도네시아<br />

합격자 발표날 아침이었다. 같이 지원한 친구들이 지금 밖이라서 확인을 못한다기에 대신<br />

확인해주기 위해 이메일함을 열어보았다. 면접을 잘 못 봤다고 생각했기에 내 이름은 찾을<br />

생각도 하지 않고 친구들 이름만 찾아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친구들 이름은 없고 내<br />

이름만 있어서 탈락자 명단을 보낸 줄 알았다. 그래서 “너희는 붙고 난 떨어졌어”라고<br />

말해주고 가만 생각해보니 탈락자 명단을 보낼 리가 없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보니 합격자<br />

명단이었다. 친구들도 이 사실을 알고는 축하해주었다. 드디어 난 해외자원활동의 기회를<br />

잡은 것이다! 나도 기뻤지만 무엇보다도 부모님께서 기뻐하셔서 더 좋았다. 이제<br />

인도네시아를 향해 불타는 준비를 시작할 때가 온 것이었다.<br />

모든 팀원들이 열정을 가지고 준비에 임했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준비면 준비!<br />

못하는 것이 없는 팀원들이었다. 매주 모여 머리를 맞대고 무엇을 할 것인지 회의를 했다.<br />

그 결과 우리는 페이스 페인팅, 종이 접기, 풍선 아트, 춤과 노래 등등 여러 가지를<br />

준비하기로 했다. 대부분 처음 해보는 것들이라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에 가서<br />

성공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준비하다보니 어느새<br />

출국날이 다가왔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그래도 막상 출국일이 다가오자 걱정이 앞섰다.<br />

인도네시아에 가서 잘 할 수 있을까? 계속 의문이 들었지만 그냥 잘 될 거란 자신감으로<br />

묻어버리고 우리는 인도네시아를 향해 출발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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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공항에 도착한 순간, 픽업 온다던 사람이 보이지가 않았다. 처음엔 당황했지만<br />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출구로 나갔다. 그런데 웬 젊은 청년이 백지를 들고 날 빤히<br />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당황해서 머릿속이 멍하던 나도 아무생각없이 한참을 쳐다보고<br />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청년이 자신의 종이를 한번 쳗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종이를<br />

뒤집었다. "KNCU Volunteer Team" 라고 적혀있었고 나는 반가움에 환하게 웃으면서<br />

다가갔다. 그 청년도 반가운 듯이 다가오더니 “Are you from Korea?" 라고 하기에<br />

예쓰!!예쓰!! 하면서 두 손으로 악수를 했다. 아차! 인도네시아는 왼손을 사용하면 실례가<br />

되는 걸 깜박해버렸었다. 그래서 얼른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으로만 다시 악수를 나누었다.<br />

"My name is Dedi" 그의 이름은 데디였다.<br />

데디와 함께 우리는 캠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무려 6 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3 시간이나<br />

미니 버스를 탄 뒤에야 겨우 도착하였다. 기차를 타고나서 또 다시 버스를 타고<br />

이동해야한다기에 한숨이 나오던 찰나에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Are you Dedi's<br />

team?" 응? 어떻게 알았지? 하면서 예쓰! 예쓰 하니 또 다른 인도네시아 대학생<br />

참가자들이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3 시간 버스를 타고 다시 이동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br />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도 우리만큼이나 들떠있었다.<br />

한국인 15 명, 인도네시아 친구들 4 명, 총 19 명의 자원활동가들은 드디어 목적지인<br />

깔리멘동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길가에 서서 우리를 쳐다보면서 웃고 있는 사람들.<br />

처음에는 어색하고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떠날 때 그렇게 펑펑<br />

울 정도로 정이 들것이라고.... 도착 시간이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숙소에<br />

들어가 잠이 들었다. 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우리에게 표창장을 주는 꿈을 꾸었다. 다른<br />

팀원들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br />

드디어 캠프활동은 시작되었다. 교육과 건설이 주요 활동이었다. 교육이라고는 한 번도<br />

해본 적이 없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일단 교실에 들어서자 날<br />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이 날 선생님으로 만들어 주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호기심이 가득한<br />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 눈빛들은 정말 순수 그 자체였다. 학업에 찌들어 사는 우리나라<br />

학생들과는 매우 다른 모습들이었다. 학교도 작았다. 시설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br />

표정은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훨씬 더 밝고 행복해 보였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과연<br />

행복함과 물질적 풍요가 비례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br />

창고를 지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와서 도와주었다. 장비가 부족해서 맨손으로<br />

시멘트를 바르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힘든 일<br />

속에서도 얼굴에는 항상 웃음이 가득했고 어두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세계학력평가<br />

10 위안에 드는 한국. 선진국 반열에 올라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해주는 나라로<br />

139


바뀐 한국. 하지만 자살률 1 위에 대다수 사람들이 외로움과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나라.<br />

경제적 발전과 기술의 발달만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번<br />

경험으로 이런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br />

만약 당신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인도네시아로 가길 바란다. 그곳에 당신에게<br />

필요한 답이 있을 것이다.<br />

140


INDONESIA<br />

정선우 (서울대 생활과학대학 의류학부 3 년)<br />

IIWC 1 월 6 일-1 월 19 일<br />

_마음으로 느낀 인도네시아<br />

각각 다른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떠난 9 명의 팀원들과 함께한 2 주. 24 시간 계속되는<br />

단체생활로 여러 가지 충돌과 갈등이 충분히 있음직했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하나처럼<br />

움직일 수 있었다. 우리가 깊숙이 파묻혀 지내던 망캉이라는 작은 마을의 분위기에 한<br />

마음으로 젖어들 수 있어서이지 않을까.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다름의<br />

현장에 흡수되어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경험했다. 사소한 생활습관부터<br />

새로웠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항상 배워야하는 유동적인 자세로 팀원들이 함께 잘 흘러갈 수<br />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열린 자세로 두 주 동안 현지인처럼 생활한 것 자체만으로 새로운<br />

경험을 통해 넓은 지경을 얻고 싶었던 나의 목적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었다.<br />

동남아지역으로 해외선교활동을 몇 번 해보았기 때문에 떠나기 전 준비를 할 때는 도움이<br />

되었다. 아이들과 놀 때 좋았거나 효과적이었던 기억을 되새겨보며 각종 게임이나<br />

페이스페인팅 같은 활동을 준비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br />

아이들은 우리 얼굴만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꺄르륵 웃으며 좋아했다. 그런 것을 보면<br />

놀이시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축구공이나 풍선이 아닌 우리의 미소와 관심이라는 생각이<br />

들었다. 더운 날씨에 짜증을 느끼며 의무적으로 놀아준 것에 대한 후회가 되는 것은 항상<br />

진심으로 대해주지 못한 나의 태도 때문인 것 같다. 찢어진 옷을 입고 맨발로 뛰어다니는<br />

아이들을 보며 가난함에 불쌍함을 느끼다가도 밝은 표정에서 느껴지는 천진함과 순수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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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보며 내 마음도 어린아이 같아짐을 느꼈다. 우울한 눈으로 책가방의 무게를<br />

짊어지고 있을 한국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어떤 쪽이 더 불쌍한 학창시절일지 고민이 되었다.<br />

경험적으로 별로 새로울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기대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br />

하였다. 베풀러 왔지만 얻어가는 것이 더 많다고 느낀 것은 여느 때와 같다. 살아가면서<br />

가식이 조금씩 섞이는 우리의 미소와 달리 우리를 맞이해주는 현지인들의 웃음은 진심으로<br />

따스함이 느껴졌다. 아플 때 간병해주던 아주머니나 파티 후 대신 설거지를 해준<br />

이웃집이나 음식이 남았다며 가져다주던 가족 등 도움 받은 일들은 여럿 기억에 남는데<br />

우리가 딱히 도움을 주고 온 건지 잘 모르겠다. 목장갑을 끼고서도 쓰레기를 주울 때<br />

멈칫하며 인상 짓던 것이나 진흙에서 냄새난다고 나무 심는 것을 쉬는 나의 모습을 보며 이<br />

멀리까지 봉사를 하러 와서 정작 더러운 곳에 뛰어들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br />

경험적으로 특히 새롭다고 느낀 부분은 앞에서 말했듯이 현지인의 라이프스타일을 그대로<br />

받아들인 부분이다. 지금까지 해외봉사를 갔을 땐 우리의 것을 전파하려던 마음이 더 컸던<br />

것에 비해 열린 마음으로 이곳의 것을 따랐다. 사소한 예로 들자면 우리는 해 뜨는 시각에<br />

마을과 함께 깨고, 무더운 정오에는 마을과 함께 낮잠을 잤으며, 해가 지는 초저녁부터<br />

졸려 했다. 마을이 먹는 칩스를 즐겨먹고 밤에는 집에 방문한 도둑고양이들과 함께<br />

지냈으며 물고기가 사는 욕조의 물로 샤워를 했다.<br />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 중 인상에 남는 사람들을 써내려가자면 가장 먼저 마마가<br />

떠오른다. 우리가 쓰던 집 주인의 아내이기도 한 그분은 요리를 매우 잘하시고 우리가 아플<br />

때 마다 찾아오셔서 간호해주셨다. 우리가 정말 '마마'로 여길 수 있는 분이었고 우리가<br />

떠날 때 눈물을 글썽이며 슬퍼하셨다. 그 분의 남편은 수루리씨로 망그로브 나무 사업을<br />

운영하신다. 수루리의 대가족의 아이들은 똑똑하고 열심이었던 라일리, 아스마의<br />

친구이기도 한 여자 삼총사 아낄라, 귀여움을 많이 받던 예쁘고 어린 아뷔바, 도도한<br />

도련님 파뜨릴 등이 있다. 오피스 직원들 중에는 작은 체구이지만 카리스마 있던 이즈미,<br />

껄껄거리는 웃음소리의 마른 청년 아르와니, 소녀 같이 발랄하던 알리, 그리고 우리의<br />

캠프리더로 수고해준 오팟과 중간에 장티푸스로 고생한 밝은 티까, 티까 대신 와준 이까가<br />

생각난다. 그 외 가끔 활동을 같이 한 독일인 클라우디아, 애교 많던 장난꾸러기 이잣,<br />

눈웃음이 너무 예뻤던 이즈까, 자꾸 자기 이름을 물어보던 우만, 오토바이 태워준 소파와<br />

앞머리를 옆으로 기름칠해 넘긴 여러 아이들이 생각이 난다. 그들의 이름으로 나의<br />

마음속에 한 획을 그은 것 같이 나도 그들의 마음속에 한 획을 그었다면 참 좋겠다.<br />

열악한 캠프사이트 환경으로 어려움이 많았고 중간에 팀원들이 아파서 걱정도 많았고 너무<br />

뜨겁거나 너무 비가 오던 날씨가 장애가 되기도 하였다. 한 개의 화장실을 11 명이서 쓰던<br />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집에 같이 살던 쥐들과 바퀴벌레는 참 불쾌했다. 쉬려고 해도<br />

142


계속 귀찮게 하는 아이들 때문에 신경질이 날 때도 많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정이<br />

취소되어 무료하고 지루한 시간들도 많이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불러 줄 때 기뻐하는<br />

아이들의 표정이나 편하게 쓰라며 화장실을 빌려주던 이웃들의 친절함이 그런 것들을<br />

무마시켜주었다. 뭉게뭉게 구름으로 아름다운 하늘, 땀 흘린 후 불었던 선선한 오후바람,<br />

정전되었을 때 촛불 키고 저녁을 보내던 낭만도 그랬다. 우리가 떠남을 슬퍼하며 주소를<br />

받아 적어가던 마을 사람들도, 아무 생각 없이 늘어지게 쉴 수 있던 여유로움도 작은<br />

노력이었지만 조금씩 깨끗해지는 거리를 보며 느끼던 뿌듯함도 소중했다. 눈으로 관광한<br />

것이 아닌 마음으로 느낀 인도네시아였기 때문에 오래오래 머리, 아니 가슴 속에 남을 것<br />

같다.<br />

143


JAPAN<br />

김효진 (영남대 중국문화정보전공 3 년)<br />

GOOD 8 월 1 일-8 월 7 일<br />

_이치노세키, 게센누마 캠프<br />

언제나 새로운 시작에는 기쁨과 두려움이 함께 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새로운 사람들을<br />

만나서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이 마냥 즐겁고 기대되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흘러<br />

출국날짜가 다가올수록 과연 내가 그곳에서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겨났다.<br />

그러나 두려움은 잠깐뿐인 것 같다. 워크캠프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지금 다시<br />

생각해보면 캠프를 준비하며 그리고 캠프기간동안 나는 항상 설레임과 흥분으로<br />

가득했었으니깐...<br />

7 월 31 일 오전 10 시 우리는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센다이 공항에 내려 우여곡절 끝에<br />

미팅 포인트까지 도착한 우리들은 더운 날씨와 커다란 배낭에 눌려 피곤한 몸에도 불구하고<br />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br />

이치노세키역에서 20 분정도 기다린 끝에 우리는 이번캠프의 리더인 욧짱과 이와오상을<br />

만날 수 있었다. 캠프 시작일 보다 하루 먼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픽업까지 와주신<br />

두분은 우리들을 너무나도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br />

8 월 1 일 드디어 9 명의 한국인과 17 명의 일본인으로 이루어진 26 명의 모든 캠퍼들이<br />

한자리에 모였고 우리들은 짧은 인사와 자기소개만을 한 후 바로 이치노세키에서의 일정을<br />

시작했다. 8 월 4 일까지 이치노세키는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이곳에서 우리들이 한 일은<br />

사용하지 않는 농경지를 가꾸어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처음에 그<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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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에 갔을 때는 나무와 풀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있어서 어느 정도의 넓이 인지 가늠 할<br />

수도 없었다. 막막했다는 표현이 정확했을 것이다. 하지만 3 일 동안 모두가 묵묵히 힘을<br />

합쳐서 일을 하고보니 어느 순간 나무와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던 자리에 커다란 공터가<br />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곳에 나무를 심었다. 100 그루쯤 되는 도토리나무를.<br />

우리가 묶었던 숙소의 주인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전쟁으로 인한 마구잡이식의<br />

벌목으로 인해 산림이 파괴되었고 그로인해서 환경 또한 오염되었다고 한다. 산의<br />

환경파괴와 오염의 결과 바다에도 영향을 주었고 결국 바다 환경의 오염이라는 결과까지<br />

초래하게 되었다. 그래서 산과 바다의 환경을 되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나무를 심는 활동을<br />

했다. 우리가 심은 도토리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커다란 숲을 이루려면 20 년이라는 세월이<br />

걸린다고 한다. 우리가 심은 도토리나무가 도토리 숲을 이뤘을 20 년 뒤를 상상하며 우리는<br />

게센누마로 캠프를 이동했다.<br />

8 월 5 일 우리들은 아쉬운 이치노세키에서의 캠프를 뒤로하고 게센누마로 이동했다.<br />

게센누마는 바닷가 마을로 태평양을 접하고 있다. 게센누마에 도착한 후 우리들은 배를<br />

타고 근처 바다로 나가서 바다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들은 굴<br />

양식장으로 가서 일손을 거들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굴에 붙은 불순물들을 제거하고<br />

바구니를 옮겨 담는 일이었다. 모두가 집중해서 일한 덕분에 일을 빨리 끝낸 우리들은<br />

욧짱과 이와오상이 우리들을 위해 준비했다고 하는 특별한 물놀이 장소에 가서 한여름<br />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 보냈다.<br />

캠프의 마지막 날 8 월 7 일. 헤어짐을 앞두고 아쉬움에 쉽게 잠을 청하지 못했던 지난밤을<br />

뒤로하고 우리들은 아침 일찍부터 헤어짐을 서둘렀다. 도쿄로 이동해야 하는 시간 때문에<br />

한국인 9 명이 먼저 캠프를 떠나오게 되었다. 짧게만 느껴졌던 일주일이었는데 일본인<br />

친구들과 어느새 그렇게 많은 정이 들어버렸는지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고 눈에서는<br />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어렵게 발길을 돌려 기차역에 도착해서 표를 예매한 후, 마지막으로<br />

욧짱과 이와오상과 인사를 나누었다. 뒤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두사람을 뒤로한 떠나는<br />

우리 9 명은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br />

내가 기억하고 있는 17 명의 일본인 친구들은 모두 웃음이 많고 정이 많은 사람들 이었다.<br />

항상 괜찮냐고 먼저 물어봐 주고, 서로 도와주려했으며 확실한 의사소통이 불가능 했음에도<br />

불구하고 마음과 마음으로 통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의 마음에 감동했고 그<br />

친구들의 적극적인 행동을 본받았으며, 함께했던 닭싸움과 수건돌리기, 제기차기, 마사지<br />

시간 시간을 떠올리면 나도 몰래 웃음 짓고 아유미의 깜짝 생일파티와 한국어 퀴즈시간이<br />

지금도 그들을 매우 그립게 만든다. 그리고 부족한 솜씨로 만들어 줬던 한국음식을<br />

너무나도 맛있게 먹어줬던 그 친구들이 너무 고맙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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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배웠고 너무 많은 추억들을 가지고 돌아왔던<br />

이번캠프는 지금까지의 나의 대학생활 중 어떤 것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br />

되었다. 뿐만 아니라 20<br />

대라면 누구나 꼭 한번은 해봐야할 필수 코스로서 주위의<br />

친구들에게 꼭 권해주고 싶고, 나 또한 기회를 만들어 한번 더 참여 해보고 싶다. 이번<br />

캠프는 혼자만이 가지는 추억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기에 더 오랫동안<br />

남아있고 더 오랫동안 우리를 하나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20 년 후 도토리나무 숲이<br />

되어 있을 그곳에서의 동창회를 기다리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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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br />

백지혜 (영남대 도시공학과 4 년)<br />

GOOD 8 월 1 일-8 월 7 일<br />

_꿈 같았던 워크캠프!<br />

7 월 31 일, AM 00:30 반복되던 일상생활에서 벗어난다는 생각만으로 설레어 했던 그날.<br />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우리는 가서 무얼 할까, 무얼 볼까 하면서 들떠 있었다.<br />

해외자원봉사단에 합격하고 나서부터 일본에 가서 소개 할 한국소개라던가 선물이라던가<br />

많은 준비를 해왔던 우리팀원 9 명은 오전 7 시 인천공항에서 티캣팅을 끝내고 즐거운<br />

마음으로 센다이로 향했다. 센다이에서 JR 철도를 타고 드디어 욧짱, 이와오상, 츠무기짱을<br />

만났다! 어색했고 아직은 서투른 일본말로 한 간단한 자기소개에...엄청 떨렸었던게<br />

기억난다! 욧짱이 내일부터는 많은 일을 해야한다면서 데려가준 곳은 온천! 일본 온천은<br />

우리나라와 많이 다를꺼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가<br />

묵을 숙소로 가서 meeting! 내일부터는 일본인 15 명과 생활한다고 생각하니깐 너무 설레고<br />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부터 파이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잠이 들었었던 것 같다.<br />

8 월 1 일~4 일<br />

첫째날, 드디어 일본캠퍼들과의 만남. 만난지 10 분만에 자기소개를 시작해 바로 일하러<br />

갔다. 일을 하면서도 전날 미팅때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다가가려고<br />

노력해야한다”라는 욧짱 말이 계속 떠올랐지만 말을 걸기에는 많이 어색했고, 언어의<br />

장벽이란 것이 겁나서 인사만 했었다. 그렇게 오후 5 시쯤 일이 끝나고 우리 여자캠퍼들은<br />

몸을 씻기 위해 팀을 짜기로 했다. 한국인이 적은 우리는 일본인 2 명에 한국인 한명꼴로<br />

같이 씻기로 했다. 내가 처음으로 일본인 두명과 들어가게 되었는데, 두명 다 한국어를<br />

아예 모르는 아이들이였다. 카나와 유이 였는데 솔직히 말하면 첫날 씻으면서 ‘정말 말이<br />

안 통하는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데도 의사소통이 잘<br />

안되었던 것 같다. 씻고 나와서 저녁미팅 때에는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제대로 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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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를 했다. 아직도 그때가 기억난다. 다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자기소개를 했고<br />

모두가 한사람한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었었다. 각 캠퍼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겼고,<br />

이름을 외우기 위해 많이 노력했었다. 그렇게 미팅이 끝나고 우리는 모두 침낭을 펴고 다<br />

함께 같이 하루를 끝냈다.<br />

둘째날, 아침 7 시반 숙소 앞의 공터에 모여 우리나라 체조로 다 같이 하루를 시작했다.<br />

이름하여 ‘개구리쏭’ 우리팀원 모두가 율동을 하고 일본인들이 따라하는 거였는데<br />

재미있었다. 내 생각에 이날 일본인들은 6 시반 쯤 모두 기상을 했었던 것 같다. 내가<br />

7 시에 일어났는데 모두가 일어나 있었고 누워있는 사람은 몇 안되었다. 일본의 팀장인<br />

욧짱이 모두 일찍 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 했는지 다음날부터 7<br />

시부터 체조를<br />

시작한다고 말했다. ‘정말 일본인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이다‘라고 우리 팀원들끼리 감탄을<br />

금치 못했다. 일을 할 때에도 부지런한 모습은 항상 보였다. 둘째날 이라서 그런지 모두가<br />

어제보다는 친밀해졌다. 도토리 나무를 심기위해 가시나무나 넝쿨나무를 같이 자르고<br />

정리하면서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들과 서로서로 질문도 했고 사적인 이야기도 하면서<br />

대화를 늘려갔다. 대화의 장벽은 물론 있었지만 막히면 옆에 사람에게 단어도 물어가며<br />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날 저녁 날씨도 더웠고 일도 힘들었던 터라 우리는 배구선수인<br />

유코의 구령에 맞춰 숙소에서 트레이닝을 했다. 모두 함께 누워서 같이 운동하며 더 친해질<br />

수 있었던 것 같다. 저녁마다 하는 전체미팅은 일찍 끝이 났고, 한국팀원들끼리 미팅을<br />

시작했다. 이제는 일본인들과 같이 생활하다보니 느껴지는 서로의 문제점 서로의 장점 등을<br />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서로 많은 이야기를 했고 모두가 같이 더 잘해보자고 서로를 다독였다.<br />

셋째날,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전날과는 다른 더위와 일의 강도에 조금씩 힘들어하는<br />

기색이 보였다. 어제보다는 휴식시간을 좀더 가졌는데 우리는 손수건돌리기와 닭싸움을<br />

했다. 모두가 하나되는 자리라서 정말 뜻 깊었던 것 같다. 닭싸움음 한국인 대 일본인으로<br />

했었는데 나는 하기전에 조금 걱정을 했었다. 혹시나 감정이 상하진 않을까 하는<br />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친해질 수 있었던<br />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더위와 힘든 일에 지쳐있던 우리는 욧짱의 마사지 시간을 가졌다.<br />

두명씩 짝을 이뤄 서로 마사지를 해주는 시간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아직<br />

안친하던 사람이나 말을 안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시간을 통해 모든 사람들과 이야기<br />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욧짱의 마사지타임 제의는 좋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br />

넷째날, 오늘도 일본인들은 정말 부지런하다는 것을 느끼며 일어난 하루다. 정말<br />

본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오전 9 시 우리는 나무가 정리가 된 땅에 도토리 나무를 심었다.<br />

이제는 모두가 어울리고 대화하고 웃고 일하고 정말 재미있게 일을 하게 된 것 같다. 특히<br />

나무를 다 심고 물을 줄때에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나르니깐 하나됨을 느꼇고 일도 빨리<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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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고 정말 좋았다. 저녁은 특별히 우리팀이 준비한 한국음식! 병규표 미소된장국과 나의<br />

김치전 경식이오빠의 불고기! 우리팀 모두가 하나되어 만든 저녁을 모두가 맛있게 먹어줘서<br />

너무 고마웠고, 우리가 준비할때에도 계속 와서 도와줄꺼 없냐는 아이들에게 너무 고마웠다.<br />

정말 하나 됨을 느껴가는 하루였다.<br />

8 월 5~7 일<br />

다섯째날, 오늘은 정들었던 이치노세키를 떠나는날.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체조는 계속<br />

되었다. 오늘 아침체조는 정말 재미있었다. 쯔무기가 선보인 시크릿체조! 모두들 웃으며<br />

체조를 한 덕분에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동안 신세졌던 주인 할아버지의<br />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학을 접어 자그마한 선물도하고 사진도 찍고 아쉬운 발걸음으로<br />

게센누마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1 시간 정도 탁 트인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가<br />

도착한 곳은 바로 앞에 바다가 있는 정말 좋은 곳이였다. 도착해서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br />

빨래를 하고 여유롭게 다음 일정을 준비했다. 게센누마는 다행히 이치노세키보다 시원해서<br />

모두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 같이 간단한 오니기리로 점심을 먹고현지인의 마코토상을<br />

만나 바다로 향했다. 마코토상이 해양생물에 대해 설명하는 걸 들으면서 우리는<br />

게센누마에서의 오후를 보냈다. 정말 신기했다. 이날 저녁은 특별히 이와오상이 준비한<br />

회와 생선을 맛있게 먹었다. 가다랑어회와 생선 등등 이였는데 일본인들은 어떻게 그렇게<br />

크게 썰은 회를 먹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솔직히 맛있긴 했지만 비위가 안좋아졌던 것<br />

같았다. 모두가 씻고 맛있고 배부르게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한국인의 밤 행사를 시작했다.<br />

캠퍼들에게 줄 선물을 포장하고 일본인두명에 한국인 한명이 붙어서 한국말을 가르쳐 줬다.<br />

모두들 상품이 걸려있어서 그런지 열의를 가지고 열심히 배웠다. 나는 정말 운이 좋게<br />

한국말을 정말 잘하는 아키나와 준이랑 함께 팀을 짜서 오히려 내가 일본말을 더 배웠던 것<br />

같다. 한국인의 밤이 끝나고 우리는 내일 일정을 위해 미팅을 일찍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다.<br />

여섯째날, 9 시에 바다로 향했다. 모두들 무슨 일을 하게 될까 하면서 향한 바다! 우리는<br />

굴양식을 하는 곳에가서 일손을 도왔다. 재미있는 작업이였고 일본인들과 함께 숫자를<br />

세어가며 굴을 넣었던게 재미있었다.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br />

더 즐기면서 일을 했던 것 같다. 일이 일찍 끝나고 욧짱이 우리를 정말 멋진 곳에 데려가<br />

준다고 했다. 그곳은 바로!! 태평양바다로 바로이어지는 어느섬의 바다!!! 정말 좋았다.<br />

모두들 바다를 보자마자 탄성을 내질렀고 우리는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에 한껏 빠져있었다.<br />

50 분의 물놀이시간. 짧았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정말 재미있었던 기억이고<br />

모두가 이렇게 함께 어울려 놀았던 것이 정말 좋았다. 바다에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br />

저녁을 먹고 마지막 미팅을 가졌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지만 모두들 각자의 소감을 말했다.<br />

아키나와 미즈호 데니즈 앗코 등등이 울었고,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정말 모두 정이 많이<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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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짧은거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미팅이 끝난 후 우리는 모두<br />

마지막 추억을 남기기 위해 바다로 가서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마지막 밤을 즐겼다.<br />

여섯째 날은 그렇게 흘러갔다.<br />

일곱째날, 마지막날... 마지막날도 역시 아침체조^^ 오늘은 귀염둥이 카즈마의 구호에 맞춰<br />

체조를 했다. 떠나기전 게센누마의 숙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각자의 짐을 정리했다. 이제<br />

정말 마지막.. 마코토상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선물을 전해드리고 모두가 모여앉아 마지막<br />

말을 했다. 우리팀은 기차시간이 일찍이라서 먼저 출발하게 되었다. 모두가 나와<br />

배웅해줬다. 어느 순간 울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모두들 다시만나자, 메일 할게 등등의<br />

말로 악수하고 안고 인사를 나눴다. 차를 타고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모두가 손을<br />

흔들어줬다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이였다. 기차역에서도 욧짱과 이와오상과 쯔무기가<br />

배웅해줬다. 안 울려고 했는데 모두들 울고 있었다 한명도 빠짐없이 모두가...<br />

그렇게 해서 우리팀은 캠프를 끝냈고 자유여행을 위해 도쿄로 향했다. 도쿄로 향하는<br />

기차안에서 우리는 다들 숙연해진 마음으로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br />

어느샌가 우리 마음속에 정말 좋은사람들, 정말 잊지못할 추억으로 남겨진 이 캠프와<br />

캠프를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생각하고 있었다.<br />

난 이번 캠프를 통해 많은걸 느꼈다. 갔다와서 캠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니 나는 캠프에<br />

적응을 잘했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 스스로에 대해 실망했고, 나는 바뀌어야<br />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다. 어떤 것을 느끼고 깨닫고 얻어갈지 몰랐던 이 캠프에서<br />

나는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많이 얻어간다. 평생 잊지못할 추억과 평생 잊지 않을 소중한<br />

사람들과 내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내가 고쳐야 할 것들 등... 특히나 제일 많이 배워가는<br />

것은 주변사람들에 대한 감사다. 일본인들을 보면서 느꼈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br />

그들에게는 고마움이 묻어난다. 정말 이 캠프를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나에게 아주 큰<br />

의미를 가지는 캠프였다.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은 서로 좋지 않은 역사의 흐름속에서 살고<br />

있긴 하지만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할 거라고 나는 생각하며 우리 모두는 하나라고<br />

생각한다. 이 캠프에서 만난 모든 인연들에게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이야기 하고<br />

싶다.<br />

욧짱, 이와오상, 쯔무기짱, 이치노세키의할아버지, 마코토상<br />

리리, 아유미, 앗코, 유코, 리리, 미즈호, 아키나, 카나, 유이, 카오루<br />

야스, 히데, 준, 가즈마, 데니즈<br />

진원, 경식, 창원, 병규, 경은, 원석, 효진, 인영<br />

모두 감사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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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INES<br />

정혜미 (울산대 건축학과 3 년)<br />

EYES 1 월 7 일-1 월 20 일<br />

_그리운 올랑고섬<br />

대학입학 후 3 학년을 마치고 4 학년이 되기전의 설레이는 방학이었다. 4 학년이 되기 전<br />

무언가 뜻깊은 일을해보고 싶어 방학이 되기 전부터 알아본 해외봉사활동을 정말 방학이<br />

되고 다녀오게 될 줄이야..<br />

처음에는 정말 이러다 가긴 가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막상 가는 날이 다가오니 아<br />

가고싶다는 마음과 가기 싫다는 마음이 반반 섞여서 마음을 어지럽게 했었다. 생각보다<br />

많이 드는 비용에 내가 정말 갔다와서 많은보람과 깨달음이 있어야 할텐데 하는 걱정도<br />

사실 있었다. 신종플루가 잠잠해졌다고는 하나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었기에 집에서는<br />

걱정도 많았고 끝까지 나를 말리려는 엄마의 모습까지 아직 눈앞에 선선한거 같다.<br />

짐가방을 부랴부랴 싸매고 있는 모습도..<br />

2 주라는 시간이 짧은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 보낸 2 주는 왜그렇게 짧게<br />

지나가 버렸는지 이제와서 생각해보아도 신기할 따름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한국에<br />

온지 2 주쯤 되는데 필리핀에서의 2 주와 현재 2 주의 시간은 너무나도 다른거 같다. 내가<br />

갔다온 게 맞나 싶기도 하고 꿈을 꾼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2 주간의<br />

기억은 아직도 생생한 거 같다.<br />

첫날 밤비행기를 타고 떠나 도착한 낯선 곳 필리핀..<br />

추워서 옷울 두껍게 입고 떠날 때와는 반대로 도착하자마자 더워서 옷을 훌렁훌렁<br />

벗어던지고 땀을 흘리며 짐가방을 끌고 차를 타고 처음 간 니또의 여동생 집.<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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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이었기에 다들 씻고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서로서로 어색한<br />

분위기를 깨기위해 이름 외우기 게임을 하면서 서서히 친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팀원들<br />

한명한명 이름을 외우며 2 주간 함께 할 우리 팀원들을 보며 다들 좋은 사람들인 것 같은<br />

기분에 순조로운 첫발걸음을 내딛었다.<br />

배를 타고 가는 올랑고섬까지의 바다는 생각했던 초록빛바다와는 거리가 먼 바다색깔이었고<br />

도착한 올랑고섬은 어느 시골마을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자마자 우리들을 반기는<br />

사람들과 여기저기서 인사하는 목소리가 아직까지 시끌시끌한 거 같다. 우리가 생활할<br />

숙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괜찮은 곳이었기에 좋아하고 있었지만 이게 웬걸. 처음보는<br />

변기에 샤워할 때 한양동이씩 들고 가서 샤워를 해야한다니...<br />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적응하는 것이 많이 힘들진 않은 거 같다.<br />

무엇보다도 걱정했던 것은 음식이었는데 생각보다 맛있는 현지음식을 맛보며 감탄을 했다.<br />

2 주간 잘먹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행복감에.<br />

아침은 항상 빵에 핫쵸코, 점심은 현지음식, 저녁은 우리가 만드는 한국음식 한가지와<br />

현지음식, 무엇보다도 처음맛보는 망고의 그 달콤함은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br />

우리가 눈뜨고 눈감기전까지 언제나 우리 숙소에 찾아와서 뛰어놀며 놀아달라는 눈빛을<br />

보내는 아이들과 배가 너무나도 홀쭉한 불쌍한 개들과 고양이, 갑자기 나타난 독이 있다는<br />

도마뱀 출현으로 며칠간 떠들썩 했던 일, 학교찾아갔던 일, 밤에 별구경하러 바다근처로<br />

나갔던 일, 빈스의 마술, 제프의 생일파티, 올랑고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올랑고 빵, 교회,<br />

현지사람들에게 선보일 춤을 위해 연습했던 일, mangrove 씨 따고 심은 일, 저녁마다<br />

게임하던 일, 간단한 맥주로 분위기 업됐던 일, 마니또, 세부시티구경, 페이스패인팅,<br />

처음해보는 스노쿨링 등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2<br />

주간 빡빡한 일정으로 밤만되면<br />

지친몸에 낯선곳임에도 불구하고 잠에 푹 빠져들 수 있었던 너무나도 소중한 추억들.<br />

덥고 습도도 높고 갑자기 비올 때도 많고 짜증스러울 때도 많았지만 신기한 건 팀원들과의<br />

다툼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 너무나 다들 서로서로 챙겨주고 위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큰<br />

다툼없이 너무 잘 지내고 와서 신기하고 또 신기할 따름이다.<br />

아쉽다고 해야하나 후회된다고 해야하나 진작에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둘껄이라는 생각이<br />

아직까지도 든다.<br />

너무나도 얕은 영어지식에 아이들과 한마디한마디가 너무 힘들었고 내가 영어를 좀 더<br />

잘했더라면 많은 이야기를 하며 더욱 친해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제일 큰 거<br />

같다. 영어를 항상 뒷전으로 해 두고 살아온 나에게 정말 크나큰 한 획을 그어주며 아!<br />

정말 영어가 절실히 필요하구나 라는 걸 정말 몸소 깨닫게 해준 캠프기간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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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한달밖에 남지않은 방학을 영어에 모든 힘을 쏟으려고 하고 있다.<br />

다음에 해외봉사활동에 참가할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에 갔던 후회됐던 일을 다시는<br />

반복하지 않기로 다짐하면서 앞으로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해 힘내서 파이팅을 외친다!<br />

너무나도 소중한 기억을 준 필리핀 올랑고섬에서의 2 주간의 기억들.<br />

좋은 팀원들을 만나서 같이 생활했기에 더욱 재밌게 갔다올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br />

든다. 그런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이 워크캠프가 너무 소중하고 감사할 따름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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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PINES<br />

홍진우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4 년)<br />

EYES 1 월 7 일-1 월 20 일<br />

_국제자원활동을 다녀와서<br />

대학교 4 학년 취업준비생이 된 나는 그동안의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일상 속에서의<br />

목표만을 쫒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과 다른 색다른 경험으로 나 자신에 대해 좀<br />

더 생각해보고 발전시켜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방학 때 할 특별한 일을 찾던 중<br />

친구의 추천으로 유네스코에서 하는 국제자원활동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국제자원활동이라는<br />

말을 들은 순간 ‘이거다!!’ 라는 생각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신청서를 냈다. 막상 가는<br />

것이 확정되었을 때 처음 해외봉사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봉사활동을 해본 적 없는 내가 잘<br />

할 수 있을까? 라는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미리 하는 준비워크샵을 참여하게 되었고<br />

거기서 봉사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상황에서의 소통이 주를<br />

이루고 있어 문화교류의 느낌을 많이 받았다. 2 주간 동거동락할 멤버들을 만나 이야기<br />

나누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려움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어떤 일들도 이겨 낼 수<br />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br />

드디어 설레임으로 부푼 마음을 안고 세부로 떠났고 세부의 더운 날씨 때문에 코트를 벗어<br />

던지듯 마음도 일상의 걱정을 벗어 던져서 한결 가벼워져있었다. 현지 코디네이터를 만나고<br />

임시숙소에 도착한 뒤 조금 어색한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 필리핀의 거리를 산책하며<br />

느낀 점은 정말인지 평온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평화로운 마을이란 이런 곳을 말하는 것<br />

같았다. 그 평화로움과 이국적이고 멋진 경치를 느끼며 우리가 2<br />

주간 생활할 올랑고<br />

섬으로 가게 되었다. 콘크리트 벽이 아닌 멋진 울타리와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숙소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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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다. 조금 불편하지만 오토바이 옆에 좌석이 달린 트라이시클을 타고 도착한 숙소는 바로<br />

옆에 하얀 해변이 펼쳐져있는 생각보다 멋진 곳이었다. 바로 점심을 먹었는데 현지음식으로<br />

구성된 점심은 먹는데 무리가 없었다. 현지 코디네이터인 에딜이 와서 영어로<br />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올랑고 섬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힘들게 가져온 모기장을<br />

방에 설치하고 짐을 풀고 나니 조금씩 숙소가 아늑해져갔다. 수줍게 인사해오는 아이들은<br />

현지 평화로운 분위기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곳 아이들은 정말 순수하고 착해보였고<br />

마을전체 아이들이 다들 함께 뛰어노는 행복한 모습을 보며 나도 그것에 동화되어<br />

행복해짐을 느꼈다. 처음 아이들과의 만남은 어색함 그 자체였다. 어떻게 해야될지를<br />

고민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나의 이름을 물어봤고 나도 아이들의 이름을 물어보게 되었다.<br />

그렇게 시작되어 이름을 불러 주기만 해도 그 아이들은 너무 좋아했고 볼 때마다 이름을<br />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조금 가까워짐을 느꼈다. 그곳 사람들 모두가 한국인을 반겨주는<br />

분위기였기 때문에 다가감에 있어서 너무나 편했다. 남자아이들과는 축구를 하며 조금씩<br />

친해짐을 느꼈지만 여자아이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그네<br />

태워주기와 이름 부르면 화답하는 정도의 선에서 멈추고 더 이상 다아짐이 보이지 않았고<br />

불편함도 있었기에 나중에는 잘 다가가지도 않았다. 만약에 다시 간다면 같이 간단히<br />

할만한 무언가를 준비해간다면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에서는 개방적인<br />

부류에 속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곳의 생활은 내가 폐쇄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었다.<br />

현지 volunteer 들과 시티투어를 갔을 때 시간약속개념이나 느긋함을 보고 상당히 답답함을<br />

느꼈다. 처음에는 화도 났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 때문에 이들이 더 행복하지 않나<br />

생각해보니 더 이상 나빠 보이지 않았다. 진성이의 경우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 않았지만<br />

자신을 완전히 보여주며 현지 volunteer 들에게 접근했고 그들도 화답하며 서로 친해지는<br />

모습을 보고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성격상문제도 있어서인지 쉽지가 않았다. 멤버들과<br />

친해짐에 따라 편하고 재밌는 멤버를 많이 찾게 되었고 그들과는 함께 하는 시간의 힘을<br />

빌어 아주 조금씩 가까워짐을 느꼈다. 나의 성격상으로 봤을 때 다음에 가게 된다면 그들과<br />

가볍고 재밌게 함께 할 만한 무언가를 준비해놓거나 생각해두고 가야할 것 같다. 그곳에서<br />

가장 힘들었던 것은 위생 상태였다. 장염 비슷한 무언가를 걸리고 고생을 톡톡히 한 뒤에<br />

그곳의 좋지 못한 위생 상태가 보였고 이곳에 오래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br />

지사제는 한국바이러스용이라 여기선 듣질 않았고 그저 고통을 안고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br />

그곳에서의 Construction work 는 우리가 도와준다는 느낌보다는 체험의 의미였기 때문에<br />

우리는 내추럴 센터 근처 나무에 걸린 쓰레기에 새가 다칠 수 있다고 해서 그곳 쓰레기를<br />

줍는 일도 사람을 나누어 하게 되었다. 작업상 필요한 것은 땅이 너무 질퍽질퍽하기 때문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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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벗겨지지 않는 슬리퍼나 샌달이 필요했다. 품질이 안 좋은 쪼리는 끈이 끈어지기 쉬웠고<br />

난 맨발로 다니다가 발에 많은 상처가 났었다.<br />

이번 활동에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팀원들이다. 낯선 환경에서 함께 생활하는<br />

과정에서 단 한 번의 다툼도 없이 서로서로 도와주었기에 더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고<br />

더 멋지게 마치고 온 것 같아서 우리 팀원 모두가 다 자랑스럽고 감사하다.<br />

그리고 2 주간의 생활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추억이 되어 하나하나 떠올릴 때마다 감동과<br />

행복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그 곳에서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그들을 보며 이 세상에<br />

사는 나 자신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br />

앞으로 30 년 40 년 후에도 이 잔잔한 감동이 가슴에 메아리치길 기대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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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MANY<br />

안지은 (영남대 사범대학 유아교육과 3 년)<br />

IJGD 8 월 14 일-8 월 29 일<br />

_언어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 우리는 친구!<br />

워크캠프에 참가하기 전에는 독일에 가게 되면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 지, 또 어떤<br />

일들을 하게 될지 정말 궁금했었다. 워크캠프에 참가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더욱 더 떨리고<br />

기대되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조사하고 우리나라를<br />

소개해 줄 수 있을 만한 책자와 선물도 준비하였다. 또 다른 참가자들에게 우리나라 음식과<br />

게임을 소개해주기 위해 다양한 재료들도 준비했다.<br />

드디어 출국 날이 되어 설렘 반 긴장 반으로 독일에 도착했다. 따로 픽업은 나오지 않아서<br />

지도를 보며 캠프장을 찾아갔다. 캠프장은 Heiligengrabe 라는 마을에 있었다. 캠프장에서<br />

만난 캠프 참가자들은 독일인 4 명 프랑스인 4 명 한국인 4 명으로 총 12 명이었다. 첫 날은<br />

모든 것이 어색하고 낯설기만 하였다. 하지만 함께 생활하며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서로에<br />

대해 알아가게 되었고 편해지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모두 친절했고 활기가 넘쳤다.<br />

프랑스 팀은 나이가 어린편이라 동생 같았고, 독일 팀은 캠프장이 2 명이나 있어서 그런지<br />

우리들을 잘 챙겨주었고, 무척 어른스러워 보였다. 이렇게 만난 우리는 하루에 5 시간씩<br />

수도원 건설 공사하는 작업을 했다. 아침마다 몇 명 씩 나누어 서로 다른 작업을 하였다.<br />

처음 작업을 시작한 날에는 길 가 담벼락에 있는 흙더미를 옮기는 일을 했다. 삽으로 흙을<br />

퍼는 일은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조금 힘들 긴 했지만 재미있었다. 다음날에는 오븐에 흙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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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어서 오븐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 외에도 페인트 칠하기, 정원 만들기, 잡초 뽑기,<br />

청소하기, 벽돌 나르기, 톱질하기 등 많은 일을 했다. 일이 끝난 후 여가시간에는 자전거를<br />

타고 마을을 돌고, 낮잠을 자고, 축구를 하는 등 각자 자유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은 모두<br />

다 같이 모여 보물찾기나 마피아 같은 게임도 했다. 저녁식사 후에는 미팅을 하여 서로에<br />

대한 이야기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각국의 게임을 소개해 주고 함께 즐기며 보냈다.<br />

주말에는 다 같이 카누를 타러 가고, 베를린 여행도 가면서 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br />

캠프 기간에 우리는 한국, 프랑스, 독일 이렇게 3 개국으로 나누어 각 나라의 날을 정했다.<br />

그래서 정해진 날마다 자기 나라의 전통 음식을 만들어 주고,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해<br />

주는 워크샵을 하기로 했다. 독일 워크샵과 프랑스 워크샵을 하고난 후에는 독일과<br />

프랑스의 전통 음식과 식사예절, 그 나라의 특징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독일의<br />

식사예절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반면 프랑스의 식사예절은 우리나라와 조금<br />

달랐다. 프랑스는 우리나라와 달리 여성을 우선시 하는 문화였다. 그래서 식사를 시작 할<br />

때에도 제일 나이가 많은 여성이 식사를 시작하여야 다른 사람들도 식사를 시작 할 수<br />

있다고 했다. 그래서 프랑스 날의 저녁식사 시간에는 여자 참가자 중 최고 연장자였던 내가<br />

제일 먼저 식사를 시작 했다. 한국에선 어르신들이 식사를 먼저 하는 문화인데, 내가 제일<br />

연장자가 되어 먼저 먹으려고 하니까 어색하기도 하면서 재미있는 색다른 경험이었다.<br />

코리아 워크샵 하는 날에 우리는 신경을 써서 준비해야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독일과<br />

프랑스 참가자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br />

친구들은 코리아라는 나라에 대해 더욱 호기심을 가졌고, 자세히 알고 싶어 했다. 이 날<br />

우리는 한국 전통 음식으로 불고기를 준비했다. 미리 한국에서 준비해 간 양념장과 고기,<br />

야채를 이용해 만든 불고기는 참가자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았다. 입맛에 맞지 않을 까봐<br />

걱정했는데 모두 맛있게 먹어주어서 뿌듯했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우리나라의 지도와<br />

세계지도를 펼쳐서 우리나라의 위치와 문화, 음식 등에 대해서 소개해 주었다. 또<br />

우리나라의 전통 게임인 윷놀이를 가르쳐 주었다. 처음에는 어려워했지만 모두들 이내<br />

익혔고, 재밌는 게임이라며 호감을 보였다. 게임이 끝나고 난 뒤에는 우리나라 태극문양의<br />

열쇠고리와 전통인형이 달린 핸드폰줄, 전통 그림이 그려진 찻잔을 선물해 주었다.<br />

이렇게 캠프장에서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아가게 되었고,<br />

ijgd 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br />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서로의 언어를 배우며 즐거움을 느꼈다. 나중에는 아침인사,<br />

저녁인사 등 기본적인 대화를 할 때에는 서로의 언어를 썼다. 독일 친구한텐 독어로<br />

‘잘자’라고 말하고, 프랑스 친구한테는 프랑스어로 ‘잘자’ 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에게<br />

한국말로 ‘잘자’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영어 실력이 능숙하지 않아서 내 감정과 의사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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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표현 할 수 없어서 아쉬운 점은 많았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려고 노력하는<br />

시간이 너무나 좋았던 것 같다. 캠프에서의 하루하루는 나에게 있어 너무 의미 있는<br />

시간들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풍경을 가진 곳에서 평화롭게 자연을<br />

즐겼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또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면서 여유롭고 알찬 시간을 보낸<br />

가치 있는 시간들이었다. 이번 캠프를 참가한 계기로 나는 외국에 대한 관심과 우리나라를<br />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지게 되었다. 또 예전엔 학교에서 마주치는 외국인들을<br />

무심하게 쳐다보았지만, 이제는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다시<br />

워크캠프에 참가하게 되는 기회가 생긴다면 또 다시 참가하고 싶을 만큼 즐겁고 유익한<br />

시간이었던것 같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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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MANY<br />

박재일 (영남대 건축공학전공 3 년)<br />

OH-06 8 월 1 일-8 월 18 일<br />

_국제자원활동을 다녀와서 (로라캐슬)<br />

먼저 국제자원활동에 설발 되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행운이였던거 같다. 솔직히<br />

지원은 했지만 내가 붙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거의 없어서 합격자 발표를 같이 지원했던<br />

친구들 보다 늦게 확인 했던 기억이 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는데, 나<br />

같은 경우는 그 반대의 경우 인거 같다. 합격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정말 기뻤다.<br />

사실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내가 독일을 가기 위해 가장 먼저<br />

걱정했던 것은 바로 돈 문제 였다. 학생의 입장에서 120 만원이라는 돈은 결코 적은 돈은<br />

아니였다. 물론 부모님께 손을 벌여야 한다는 사실도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사실이였다. 두<br />

번째로 걱정 되었던 것은 영어 문제였다. 평소에도 토익을 공부한다고 나름데로 열심히<br />

공부를 하긴 했지만, 토익에서도 문제시 되었던 것이 듣기 였다. 평소에도 영어가 안<br />

들려서 큰 고민이 었던 나인데, 외국인들과 직접적으로 영어로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br />

걱정되기 시작 했다. 두 번째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매일 영어단어를 시험 치러 갈<br />

때부터 인터넷에서 CNN 뉴스와 대본을 다운 받아 MP3 에 넣고 매일 반복해서 들으면서<br />

독일에서의 의사소통을 준비했다. 갔다 와서 느낀 것이지만, CNN 뉴스가 도움이 되긴<br />

했지만, 다양한 외국인들과의 소통에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들던<br />

CNN 뉴스는 미국인이나 영국인 한국인이 발음하는 영어였기 때문이다. 사실 8 개국에서<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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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명의 다국적 사람들 모두 다가 미국식 발음이나 영국식 발음을 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br />

잘못 된 일이였다. 특히 프랑스인의 영어 발음은 내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런데 미스테리한<br />

것은 유럽 사람들은 그런 특이한 발음에도 의사소통이 자연스럽게 가능했다는 것이었다.<br />

물론 프랑스 친구들이 이상하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독일에 머물면서 가장 친해진 것도<br />

프랑스 친구들이고, 같은 방을 쓰면서 가장 정들었던 친구들도 프랑스 친구들이다. 프랑스<br />

친구들은 정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책임감이 참 강했다. 물론 프랑스뿐만 아니라 여러<br />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프랑스 친구들이 가장 배울 점이 많았다고 생각한다.<br />

내가 국제자원활동을 가기 전에 들었던 유럽인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쉬는<br />

것을 우선시한다고 들었지만, 그 사실은 완전 거짓이었다. 예를 들면 남자들이 적어서<br />

남자들은 전기관을 설치하기 위해 땅을 파는 작업을 했는데, 땅을 파는 작업은 군대 갔다<br />

온 사람이면 모두 알 수 있듯이 정말 어려운 일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일 할<br />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을 했다. 더구나 독일의 날씨는 갑작스런 비가 많이 오는 날씨이다.<br />

그래서 땅을 파던 중에 비가 오면 비를 피하고 잠시 나오면 파놓은 구덩이에 비가 차게<br />

되면 물 고인 구덩이는 진흙이 되어 질퍽질퍽 해지고 땅을 깊게 파다 보니 그 안에 있던<br />

쓰레기가 썩는 심한 냄새가 났다. 솔직한 나의 심정을 말하자면 이런데 들어가서 일하고<br />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구덩이에 들어가길 약간은 주저했지만, 프랑스 친구들은 자신들이<br />

먼저 거기에 들어가서 일을 다시 시작하자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나는 신발이<br />

걸레가 되어 새로 신발을 하나 사게 되었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나이에 참<br />

많이 얽매여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어른을 존중하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우리나라가<br />

잘못 됐다는 것은 아니다. 거기서 나는 같이 갔던 우리 팀의 형보다는 적었지만, 거기서<br />

2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 나이가 제일 어린 아이와 6 살 차이가 났으니 말이다. 그런데도<br />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고 부를 때는 “형”이런 호칭보다는 그냥 이름을 부른 다는 사실이<br />

정말 낯설게 다가왔다. 하루는 재미있는 날이 있었는데, 프랑스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br />

있었다. 물론 프랑스 친구들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어렸다. 내가 프랑스 친구인<br />

사이먼이라는 친구를 놀렸는데, 그 친구도 웃으면서 장난으로 정말 친한 친구사이에 하는<br />

행동인 머리를 툭 치는 행동을 했다. 처음에는 좀 어의가 없었다. ‘이걸 화를 내야하나<br />

말아야 하나’ 라고 속으로 고민했는데, 사이먼이라는 친구는 계속 해맑게 웃고 있는 파란<br />

눈을 보면서, 외국은 나이라는 숫자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br />

물론 그 뒤로는 나도 사이먼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서로 장난을 쳤지만, 내가 당하는 것<br />

같다는 느낌을 지우는 데 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더 걸렸다. 처음에 독일에서 생활 할 때<br />

가장 적응되지 않았던 것은 신발을 신고 집안으로 들어가 생활 한다는 것이었다.<br />

영화에서만 보던 일이었다. 신발을 신고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불편한 일이다. 그리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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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적응 되지 않았던 것은 화장실에 세면대와 샤워실을 제외하면 배수구가 없다는<br />

것이다. 그리고 샤워를 할 때에 샤워실 밖으로 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그<br />

좁은 샤워실에서 샤워를 할 때, 물이 밖으로 튀지 않게 조심조심 씻으려고 스트레스 받던<br />

기억이 난다. 그리고 불편했던 점은 우리가 갔던 숙소만 그럴 수도 있지만, 쥐가 정말<br />

많았다. 물론 평소 한국에서 보던 그런 커다란 쥐가 아니라 햄스터 같이 작고 귀여운 쥐<br />

라는게 다행인 일이였지만, 침대위에는 어떻게 올라왔는지 시트위에는 항상 쥐똥이 있었다.<br />

우리 숙소는 세탁기 같은 빨래를 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서 세면대에서 직접 손빨래를<br />

했는데, 군대 전역 이후로 처음 해보는 손빨래 정말 불편 했다. 나는 외국인 친구들한테서<br />

많은 것을 배워 온 것 같다. 독일에서 친구들에게 배운 많은 것을 내것 으로 만들어 내가<br />

앞으로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페이스 북을<br />

통해서 계속 연락은 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 친구들이 보고 싶고, 그립다. 앞으로<br />

기회가 된다면 또 다른 나라에 가서 국제자원활동을 하고 싶고, 내가 나이가 들었을 때,<br />

로라 캐슬을 가서 거기가 어떻게 변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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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MANY<br />

정연주 (영남대 중국문화정보전공 3 년)<br />

OH-07 8 월 1 일-8 월 13 일<br />

_꿈만 같았던 2 주간의 모든 것<br />

‘워크캠프는 대학생활 중 꼭 해봐야 할 것 중에 하나야’‘무조건 참여해봐’선배들에게<br />

이런 말을 들을때마다 워크캠프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꼭 참여해 봐야겠다고<br />

생각해왔다. 그러다우연히 우리학교에서 지원하는 해외자원봉사에 유럽이 추가되면서<br />

워크캠프가 생겼고 자연스럽게 아주 당연히 신청했다. 뽑히고 나서도 출국 전까지 준비하는<br />

과정에서 오히려 워크캠프보다는 워크캠프 끝나고 할 여행에 더 신나있었다. 그러나<br />

워크캠프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시간이였고 왜<br />

선배들이 그렇게 추천했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9 개국에서 모인 21 명의 사람들. 처음엔<br />

누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외우기 힘들었지만 함께 일하고, 대화하고,<br />

밥먹고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한 가족처럼 같이 있기만해도 웃음나고 즐겁고 일이 아무리<br />

힘들어도 그것보다는 함께 무엇을 한다는 것에 더 의의를 두고 있었다. 같은 조였던<br />

한국오빠들이 캠프기간 내내 이곳 생활과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부럽다고 했다. 그 말에<br />

정말 공감했는데 우리가 거기서 만난 친구들은 항상 기다림이 생활화 되어있었고 짜여져<br />

있던 계획이 예정과는 달리 어긋나도 불평 하나 없이 웃으면서 받아들였고 무엇이든 긍정적<br />

으로 생각할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유럽에서 온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영어를 늘<br />

접하고 배워서 그런지 다들 영어를 생각만큼 잘했다. 그 아이들이 나에게 영어를 잘한다고<br />

칭찬해주고 아시아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으며 영어를 잘<br />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해줬을 때 그 동안 영어 공부를 했다는것에 정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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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을 느꼈다. 외국 사람들이 가지고있는 한국인의 편견중 하나는 한국인은 대체로<br />

조용하고 먼저 말 걸기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인데 이번에 우리 한국팀이 그런 편견을 깨고<br />

한국인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팀을 이끌고 활발하다는 인식을 심어준거 같아서 뿌듯했다.<br />

나는 원래 좀 감정적인 편이라서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아서 2 주 동안 정말 정들었던<br />

친구들과 헤어질 때 울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헤어지는 날 다시는 이 캠프<br />

장소에 올 수 없을 거라는 생각과 친구들의 눈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br />

친구들이 우린 지금 헤어지는게 아니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거라고 했지만 모두가<br />

본국이 아닌 곳에서 2 주동안 일도하면서 때로는 의사소통에 조금 어려움도 있었지만 뜻<br />

깊은 추억을 만들었기 때문에 2 주가 아닌 2 달동안 함께 생활했던 것처럼 헤어짐이<br />

아쉬웠다. 그리고 한국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과연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br />

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계속 들었었는데 워크캠프에서 친구들과 자기가 하고 싶은<br />

일등을 얘기하면서 서로 용기를 북돋아 줬을 때, 꼭 내가 이 꿈을 이루어서 다시 이<br />

친구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고 웃고 떠들고 시끌벅적하게 지냈던 나의 소중한<br />

친구들과의 2 주일. 기회가 된다면 졸업 전에 다시 한 번 더 워크캠프에 참여하고 싶다.<br />

나의 선배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후배들에게 추천하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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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ENIA<br />

예병동 (영남대 행정학과 4 년)<br />

HUJ 7 월 27 일-8 월 13 일<br />

_아르메니아, 우리들의 뜨거운 여름<br />

3 월 30 일, 비가 내리고 있던 오전이였다. 학교홈페이지에 접속한 나는 “해외자원활동”<br />

공고를 보게 되었고 이런 사소한 마우스 클릭 하나가 5 달이 지난 지금 나에게 이리도 큰<br />

영향을 끼치고 있을 줄 몰랐다. 사실 나는 대학교 4 학년이다. 취업준비생이란 말이다. 이<br />

시기에는 일반적으로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해야하는 시기이고 더더욱이 외국에 장기간<br />

체류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원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솔직히<br />

말해서 이력서에 “해외자원활동”이라는 한줄을 더 써 넣기 위해서 였다고 해도 과언은<br />

아니다. 최소한 지원할때의 마음가짐은 그랬기에 어쩌면 자격이 없는 사람 중<br />

한명이였다고도 말 할 수 있지만,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이기에 활동이 끝난 지금 더<br />

큰 감흥으로 나에게 남겨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br />

합격자 발표가 나고, 출국전까지 수많은 토론과 준비, 그리고 연습을 하면서 내가<br />

담당해야할 내 자리를 스스로 찾게 되었고, 팀원들간의 원활한 관계 속에서 점차<br />

“해외자원활동”에 대한 정당성과 긍지가 높아짐과 동시에 한 학교를 대표하고, 한 단체를<br />

대표하고,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책임감도 느꼈기에 출국전 한여름 땡볕밑에서 그리도<br />

부단히 준비한게 아닐까 생각한다.<br />

아르메니아 도착 후 현지 대학생들과의 교류 속에서 한국을 알리고, 아르메니아라는 나라를<br />

알기위해 노력했으며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우리의 자원활동이 주로 work 에 집중되어<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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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아쉬움이 컸다. 놀이터공사, 센터 내 건물 철거 공사, 밭 일구기등 매일 같은<br />

노력봉사가 거의 전부였으며 이 외에는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가<br />

지는 시간이 오후 10 시였기에 아르메니아사람들의 생활패턴은 한국과 많이 달랐다. 한국<br />

같았으면 아이들이 모두 집에 들어가는 저녁 6 ~ 8 시 사이에 우리는 대낮같은 야외에서<br />

아이들을 돌보았고 저녁시간은 항상 저녁 9 시경이 되어서야 식사를 하는 등, 초기에는<br />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br />

특히나, 아이들을 돌볼때는 영어로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기에 상당히 고전했다.<br />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매번 현지인에게 통역을 부탁하는 번거로움이<br />

있었지만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그랬던가? 심야시간에 현지 대학생들에 의해서<br />

이루어진 아르메니아어 강습의 효과와 더불어 아이들과 친해지고 나니 언어는 큰 문제가<br />

되지 않았다.<br />

아르메니아는 동양인의 방문이 드문 나라인 듯 하다. 그래서 현지주민들은 우리와<br />

사진찍기를 원했고 시내나 마트에 갈때면 항상 신기하게 쳐다본다. 또한 사람들이 모두<br />

친절하고 순박하여 위협을 당한적도 없으며 한국과 비슷한 부분이 많은 나라라 한국 같은<br />

편안함이 도시에 물들어 있었다.<br />

건물외장재로 많이 쓰는 아름다운 색상의 붉은 벽돌로 인해 “장미의 도시”라고도<br />

불리웠을만큼 도시미관이 화려하고 역사가 깃든 도시이기에 도시 곳곳을 다녀도 지루한<br />

풍경은 없었다.<br />

길다면 길다고 할수 있는 기간동안 아르메니아에서 나는 조금 더 넓은 세상을 봤고,<br />

아이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천진난만함이 두 눈에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고, 20<br />

명에<br />

육박하는 단체에서 활동 해나가는 방법을 배웠고, 작업을 하면서 보람도 느꼈다.<br />

순간순간의 괴로운 기억들은 모두 잊혀지고 고작 귀국한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br />

벌써 한 여름밤의 꿈 같이 느껴지는 것은 귀국 후 막막한 현실속에서 아르메니아에서의<br />

추억이 아련해서가 아닐까?<br />

그리고 함께 해준 13 명의 우리 팀원들과 현지에서 같은 목적으로 만났던 Areg, Garnik ,<br />

Lucy , Lena , Ani 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글을 마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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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ENIA<br />

박일찬 (영남대 경제금융학과 3 년)<br />

HUJ 7 월 27 일-8 월 13 일<br />

_이것저것 생각나고 기억에 남는 것들<br />

사실 아르메니아라는 나라를 처음으로 알고 접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br />

해외자원봉사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들었다. 우리 아르메니아팀 사람들과<br />

친해졌다면 아주 많이 친해졌다. 해외자원봉사를 다녀오면 느끼는 점이 많다고 다른<br />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자주 듣던 소리였다. 여기서 처음 하는 것들이 상당이 많았다.<br />

비행기도 처음타고 외국에도 처음 나가고, 여권도 처음 만들었다. 아르메니아팀으로써<br />

함께한 지난 시간이 즐겁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br />

7 월 25 일부터 8 월 16 일까지의 우리의 여정을 다녀왔다. 팀에서의 나의 역할은 아주<br />

미미했다고 밖에 없었다. 해외자원봉사에서의 나의 진가를 사람들이 알아주더라. 좀 웃기긴<br />

하지만 약간은 기분이 좋긴 했다. 남들보다 특출한 뭔가가 없는 나에게는 삽질이나<br />

힘쓰는일에 일가견 있다니.. ㅋㅋㅋ 머리 굴리기가 아닌 몸으로 하는 거란다.<br />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의 거리는 거의 몸소 알게 되었다. 매일매일 오전 일과를 마치고<br />

오후에 예레반의 명소를 한 군데씩 다녀야 했었다. 관광이 하루일과에 포함되어 있었기<br />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인이 제일 잘 마시는 맥주 공장에 방문했었는데 이름이 킬리키아였다.<br />

그 맥주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퐁퐁 맛이라고 할까나 맛이 좀<br />

희한했다. 거품도 3~4 배 이상이나 부불어서 컵에 넘치기도 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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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으로 워크캠프에 참여한 아레그, 레나, 아니, 가드닉, 루시 이렇게 4 명이었다. 울팀<br />

14 명과 같이 합숙을 했었다. 아레그는 세반 호수 여행가서 우리 먹여줄려고 돼지고기<br />

통구이 해줄 때가 좋았다. 혼자서 준비한다고 고생은 했지만 가지, 양파 굽기도 전에<br />

우리들은 바비큐를 다 먹어버렸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또 가장 기억이<br />

남는 한 마디 "wake up" 늦잠 잔다고 7 시 50 분쯤 되면 그 소리가 이층 계단 올라오면서<br />

들린다.. 각 방마다 돌면서 말한다. 아직도 아레그를 따라 나도 "wake up"이라고 말하면서<br />

팀원들과 장난을 친다.<br />

아르메니아어 간단히 할 수있는 몇마디가 있다. “바레브”[안녕하세요] ,“하족”[잘가요]<br />

“하”[알았어] ,“체”[아니야] ,“인치카츠카”[무슨일이야] 등 있다. 저녁 6 시가 되면<br />

장애아동과 어울리는 시간을 가졌다. 어린이들과 말도 통하지 않아서 의사소통이<br />

어려웠지만. 바디랭기지를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레나를 무지 좋아하는 아람은 레나<br />

사진을 보여주기만 하면 기겁을 해서 나랑 장난치게 되었다. 애들과 함께한 시간이<br />

즐거워서 피곤한지도 몰랐었다. 처음 하이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사탕을 주었지만<br />

싫다고 거부했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하이꼬도 우리랑 노는 걸 반가워하고 즐거워했다.<br />

어린이들을 위해서 우리팀 여자애들이 페이스 페인팅을 해주는 날은 장난이 아니었다.<br />

어린애들 얼굴에 해달라고 하고 팔에도 하고 심지어는 하루 지나서도 지우지 않은 어린이도<br />

있었다. 그만큼 즐겁고 재미있어 하길래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난다. 그리고 마지막<br />

우리가 떠나기 이틀전 아미가 플로로이드 사진기를 들고 와서 어린이들 어머니에게 사진을<br />

찍어 드렸다. 어머님들이 플로로이드 사진을 보고 무척이나 기뻐하더라. 그 때 뿌듯함을<br />

느끼기도 했다.<br />

너무나 행복하고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조금 나 자신에게 아쉬운 점이 많이 남게<br />

되었다. 워크캠프에서 같이 활동하는 현지인들과의 의사소통을 영어로 하는데 난. 거기서<br />

약간 소외되고 있었다. 영어를 못해서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간단한 영어 몇마디씩<br />

던지기만 했다. 현지인들과 더 친해지고 싶고 문화교류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너무나<br />

아쉬운 점이다. 아무 이야기도 못하고 벙어리 신세마냥 지냈으니 한심했었다.<br />

아르메니아에서 지내는 동안 나 자신에게 되돌아보는 시간도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br />

무의미하게 사는 것보다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그 것을 달성하기까지의 노력을 해야겠다고<br />

말이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접하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br />

한 번 더 외국의 문화를 직접 체험, 경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강렬히 든다.<br />

여기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된 것도 추억을 가지게 된 것도 우리 아르메니아 팀원들을<br />

만났기에 지금 오늘 이 순간이 있다고 생각 됩니다.<br />

아르메니아 팀 파이팅입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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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KEY<br />

최선규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3 년)<br />

GEN 1 월 20 일-2 월 13 일<br />

_'촉 귀젤!'의 마력으로 세계를 품다<br />

'촉 귀젤!', 이 말은 터키어로 '아주 훌륭하다'라는 뜻이다. 영어에서 'Excellent'와 같은<br />

의미로 쓰이는 이 감탄사는 그들에게 아주 흔한 말이었다. 그리고 이 말을 하는 사람은<br />

물론 듣는 사람 모두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터키어로서 가장 먼저 배운<br />

말도 바로 이 '촉 귀젤!'이었다.<br />

동양과 서양이 교차하는 곳, 옛 실크로드의 중심지였으며 한 때 세계를 재패했던 막강한<br />

오스만 투르크의 후예들이 사는 곳, 터키. 그들의 붉고, 푸른 홍채 속에서 빛나는 자신감은<br />

21 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강렬했다. 그러나 그들의 강렬함도 이 '촉 귀젤!'앞 에서는 한없이<br />

부드러워져서 서로에게 그윽한 미소와 환한 웃음을 선사했다. 나는 바로 그 마력을 지닌<br />

'촉 귀젤!'에 매료된 것이었다.<br />

사람은 처음 볼 때 누구나 경계하게 된다. 처음의 낯설음이 어색하듯, 처음이란 그<br />

순간에는 서로를 경계하며,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렵다. 이것을 보이지 않는 장막이라고<br />

한다면, 이 장막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장막을 당당히 걷고,<br />

자신있게 상대방을 매료시킬 수 있는 매력을 가진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그의 친구가 될<br />

것이다.<br />

나는 바로 그 장막을 시원하게 걷어버릴 매력을 가지고 싶었다. 나와 눈 색깔이 다르고,<br />

내가 쓰는 언어와 다르며, 나와 다른 문화 속에서 사는 그들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고<br />

싶었다. 서로 '다르다'라는 이 논리를 극복하기 위한 뭔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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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서 배우기로 마음 먹었다. 그들처럼 생각하고 그들의 문화 속에서 그들의 언어를<br />

알고 싶었다. 언어는 그 나라의 자존심이요, 문화의 정수이고, 그 민족의 정신이기<br />

때문이었다.<br />

예상을 적중했다. '촉 귀젤', 그들의 언어를 쓰는 외국인이 한 없이 신기했을 것이다.<br />

그래서 터키라는 이국 땅에서 그들의 언어를 쓰는 한국의 한 청년은 사람들의 시선을<br />

사로잡았다. '촉!귀젤', 단 한마디의 짧은 감탄사이지만, 이것을 통해 그들은 경계를 풀고,<br />

나의 웃음에 미소를 띄었고, 나중엔 더 큰 웃음으로 화답하였다. 서로의 사이를 가로<br />

막았던 보이지 않는 장막은 그렇게 눈 녹듯 사라져갔다.<br />

'촉!귀젤', 단지 이 짧은 감탄사 하나가 열쇠가 되어 서로를 이어준 것이다. 그 언어는<br />

그들이 쓰는 언어였고, 그들의 자존심이 담겨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은 내가<br />

봉사활동으로 무언가를 베푼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배워서 그들을 행복하게 해<br />

준다는 것에 있다. 나의 명찰에는 당당히 영남대학교라는 이름이 걸려 있었고, 내 이름<br />

석자가 걸려 있었으며, 나의 등 뒤로 대한민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많은 이름의 대표로서<br />

그들 앞에서 겸손해야 했다. 그 겸손함으로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는 것은 내가 낮아지는<br />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높이고, 그들과 소통하게 하는 훌륭한 것이었다.<br />

그들에게 나의 이미지는 곧 영남대학교의 이미지이며,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된다. 공적인<br />

영역에서의 지원보다 사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이 더 중요한 것은 그들과 깊숙한 곳에서<br />

만나고 소통한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문화를 먼저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은 '서로<br />

다르다'의 논리를 깨부수었고, 나아가 영남대학교와 대한민국을 환한 웃음과 겸손함을 갖춘<br />

품위있는 신사로 남게 했다.<br />

나는 세계를 품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그들의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겸손해야<br />

한다. 우리가 가진 것을 주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먼저 배우고<br />

갖추어야 한다. 촉!귀젤의 마력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세계는 '다르다'의 논리를 깨는<br />

배움과 겸손함 앞에 무한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 터키에서 그렇게도<br />

외쳤나보다. 촉! 귀젤. 그리고 이제 세계를 향해 외친다. 촉! 귀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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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KEY<br />

이주미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4 년)<br />

GEN 7 월 10 일 –7 월 25 일<br />

_세상을 만나고 나를 만나다.<br />

에세이 : 고무르겐, 그 곳에서의 15 일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br />

처음 해외자원봉사를 신청했을 때만 하더라도 ‘봉사활동’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br />

그저 외국에 나가 외국인들을 만나고 외국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설렘만 가득했다.<br />

자원봉사단원으로 선발되고 워크캠프를 통해 외국봉사자들과 함께 숙식을 하며 봉사활동을<br />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우선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고<br />

외국인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스탄불에서 외국친구들을<br />

만나면서 그 모든 두려움은 쓸데없는 걱정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자칫 동양인에 대한<br />

차별이나 편견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는데, 편견은커녕 멀리 아시아에서<br />

날아온 우리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친근감을 표시해주었다. 덕분에 긴장하고 있던<br />

나의 마음도 쉽게 열릴 수 있었다.<br />

고무르겐에서의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처음부터 나무를 심는 일이라 쉽진 않겠다고<br />

생각했지만 예전에 교내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농활도 9 박 10 일 거뜬히 해낸 적이 있기에<br />

별다른 문제없이 적응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쉽게 생각했다. 환경이 달랐다.<br />

똑같이 땅을 파고 땀을 흘리며 일한다고 해도 엄연히 국내에서의 활동과 국외에서의 활동은<br />

달랐다. 낯선 기후, 낯선 음식들에 적응도 하기 전에 시작된 일은 몸에 익숙해지기는커녕<br />

몸을 혹사시켰고, 결국 지병이었던 허리통증으로 약을 달고 지내야만 했다. 육체적 고통은<br />

호소한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몇 시간을 허리를 숙이고 일을 하다 보니 허리통증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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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하는 봉사자는 늘어갔고, 강한 햇빛은 피부 염증까지 일으켜 몇몇 봉사자들은 병원의<br />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누구하나 몸이 힘들다고 일을 게을리 하진 않았다.<br />

파스를 바르고 진통제를 먹으면서도 자기가 맡은 일은 해내고야 마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br />

자극을 받았고 견뎌낼 수 있었다. 아침마다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끌어올리며, 주머니엔<br />

진통제와 약을 챙겨 일터로 나갔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면 견뎌낼 수 있었다. 오히려 그<br />

시간들이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매일 6 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혼자 묵묵히 맡은<br />

일을 하며, 점차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에게 봉사활동은 무엇인지, 나는 왜<br />

여기에 왔으며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 등에 대해서<br />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고된 작업 속에서 나는 나를 만나고 돌아왔다.<br />

누군가 나에게 이번 해외자원봉사가 어떤 의미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br />

세상을 만나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누군가를 돕는 봉사활동이 아니라 내가<br />

도움을 받은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외국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는 것도<br />

의미 있고 좋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일 수 있었음이 더 감사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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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br />

민성복 (영남대 기계시스템전공 3년)<br />

SJ 7월 26일-8월 9일<br />

우리가 남이가!<br />

처음 학교에서 해외자원봉사자(해자봉=워크캠프)를 모집한다고 하였을 때 기대 반 호기심<br />

반으로 프랑스에 지원하게되었다. 지원후 면접을 보았고 운좋게도 합격하였다. 그때부터<br />

우리 팀원들을 알게 되었다. 그게 벌써 2010 년 4 월의 일이다. 사람들도 모두 좋았었고<br />

프랑스로 간다는 생각에 모두들 의욕들이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br />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었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미션들, 학업과 병행하기 위해 자기<br />

시간들을 포기하게 되었고 그러며 조금씩 해자봉에 대한 불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br />

하지만 프랑스를 향한 날이 다가 올수록 우리들은 다시금 열정을 불태웠고 조금씩 서로를<br />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제 출국하기 몇일 전 워크캠프에서 필요할 만한 물품 체크리스트를<br />

보며 장을 보았다. 그러니 우리가 곧 떠난 다는 것을 실감했었다. 준비가 끝나고 이제<br />

출국하는날.... 인천공항으로 가기위해 우리는 동대구터미널에 모였다. 리무진을 답승,<br />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밟고, 공항안을 여기저기 둘러보며 부품 꿈을 키웠다. 월요일<br />

새벽 첫차를 타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워크캠프를 할 곳으로 떠났다. 리옹, 물랑,<br />

라팔리스.... 가는데만 4<br />

시간 가까이 걸렸었다. 드디어 라팔리스에서 워크캠프 리더를<br />

기다렸고 캠프리더들이 차를 가지고 와서 우리들을 픽업해갔다. 아니나 웬걸 그런데 우리는<br />

점점 문명과를 거리가 먼 깊은 숲으로 숲으로 계속해서 들어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넓은<br />

평지, 소 이것이 전부였다. 도로에 달리는 차는 우리차 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1 시간<br />

가량을 계속해서 달리고 나서야 우리가 머물곳인 크레노 성에 도착! 외관이 꽤나 괜찮았고<br />

갖출것은 다 갖춘 성이었다. 우선 먼길 왔다고 식사를 대접을 해주었는데 빵과 치즈, 우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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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이었다. 치즈또한 엄청난 숙성상태로 고약한 냄새, 그리고 비위생적인 주방상태들이 우릴<br />

경악케 했다. 외국인 캠퍼들이 지내고 있었지만 쉽게 그들과 대화할 엄두도 나지 않았고,<br />

불편했으며 물론 먼저 대화를 걸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우리들이 도착하고 잠시후<br />

우리와 함께 지내기로한 캠퍼들이 속속도착했다. 프랑스사람, 독일사람.....모두들 너무나<br />

낯설고 불편했다. 특히 영어를 잘못하는 나로선 무서움과 걱정이 앞섰기에 한국인들과만<br />

어울리려고 했을뿐 쉽게 나서질 못하였다. 그렇게 불편한 캠프의 첫날이 지나고 캠프의<br />

일정이 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선 오전부터는 겨울에 땔감으로 쓸 나무를<br />

옮기는 일이었다. 대화보다는 육체로 하는 일이 너무나 편했고 그래서 쉽게 시간이 지났다.<br />

하지만 수요일부터는 본격적 그룹을 나누어 인종차별, 장애인 차별등에대한 생각과 토론,<br />

그리고 연극등을(영어로) 하며 나에게 영어 스트레스를 계속이고 안겨주었다. 그렇게<br />

연극을 연습하고 우리는 아른 지역 워크캠프사람들에게 우리의 공연을 보여주로<br />

돌아다녔었고, 그러면서 우리 팀 내의 캠퍼들은 조금씩 보이지 않는 믿음과 신뢰, 우정이<br />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식사가 맞지 않고 빵만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지만 그것도 조금씩<br />

적응이 되어가고 서로의 음식에 대한 불만도 조금씩 줄어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br />

캠프가 끝을 향해 달려갔고, 마지막 평일인 금요일은 한국인의 날이라고 하여 한글교육,<br />

안마, 그리고 우리가 준비해간 한국 음식들을 그들에게 대접하였다. 메뉴는 제육볶음,<br />

주먹밥, 라면등이 있었고 외국인들이 우리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다 버리지 않을까 하는<br />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잠시, 내 생각과는 반대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br />

맵지만 맛있다며 딜리셔스를 외치를 그들을 보니 내가 다 뿌듯하였고 이래서 부모님이<br />

자식들 밥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이 새삼 실감이 났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이 흘러<br />

이제 정말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 마지막을 서로 아쉬워하며 롤링페이퍼를 적었고 그때<br />

까지만 해도 나는 그들과 정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지막날 밤 서로의<br />

롤링페이퍼를 보며 기념촬영, 그리고 이별의 포옹을 하자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이별이<br />

아쉬웠었다. 정말이지 내가 이렇게 정이 많은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무튼 그렇게<br />

워크캠프가 끝나고 나서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에 캠프리더가 우리를 내려주었다.<br />

정말이지 만났던 곳에서 이별이라니....<br />

정말 처음에는 남이라고 생각하고 쉽사리 친해질 마음도, 내 마음을 열 생각도 없었지만,<br />

함께 일을 하며 같이 일들을 수행해 나감으로써, 피부색, 사는곳 생김새, 언어가 달라도<br />

우리는 통했고 남이 아니라 친구라는 것을 느낄수 있었던 최고의 기회였던것 같다. 또한<br />

영어에 대한 불안과 막연한 울렁증이 이곳을 통해 자신감으로 바뀌어 돌아왔고 좀더 열심히<br />

내 자신을 갈고 닦아 언젠가 그때 만났던 인연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들앞에 영어잘하는 나<br />

민성복으로 다시금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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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미래 국제자원활동 Internatioanl Voluntary Service<br />

참여 Participation 란?<br />

인간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 사회, 문화,<br />

정치적 과정에 밀접하게 개입하는 것이다.<br />

UNDP, 1990<br />

국제자원활동 International Voluntary Service 이란?<br />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br />

개개인의 자유로운 실천 행동이다.<br />

UNESCO, 1996<br />

국제워크캠프 International Workamp 란?<br />

2-3 주 동안 한 지역사회의 구체적인 프로젝트에 참가하는<br />

형태의 프로그램으로 활동내용이 매우 다양하다.<br />

주로 여름(6 월-9 월)에 세계 각지에서 실시되며, 10-20 명<br />

정도의 국적이 다른 젊은이들이 모여, 공동생활을 한다.<br />

KNCU, 1999<br />

참가자격: 대한민국 신체건강한 청년이면 누구나<br />

어디서?: 전세계 5 대륙 40 여개국<br />

시기: 연중 2 주~6 개월<br />

문의: workcamp@unesco.or.kr<br />

개인파견: http://youth.unesco.or.kr/volunteer<br />

단체파견: http://youth.unesco.or.kr/group<br />

한 해 동안 100 여개의 나라에서 3400 여개의 프로젝트가 진행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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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신청안내]<br />

1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캠프정보를 통해 참가하고 싶은 캠프 선택<br />

2 홈페이지에서 한글신청서를 다운 받아 workcamp@unesco.or.kr 로 접수<br />

3 정회원 가입비 100,000 원을 아래 계좌로 입금한 후 E-mail 로 입금 여부 확인<br />

납부처: 국민은행 375301-04-059172 / 예금주: 유네스코한국위원회<br />

4 담당자가 E-mail 로 보낸 영문신청서를 작성하여 E-mail 로 접수<br />

[참가확정안내]<br />

1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청년팀에서 참가자의 영문신청서를 현지단체에 전달<br />

2 약 3 주내로 참가자의 참가확정 여부를 E-mail 로 통보<br />

3 참가자는 확정된 경우 국가별 참가비를 반드시 7 일 이내에 입금(입금계좌 상동)<br />

4 개별적으로 파견준비(항공권 구입, 캠프활동 계획, 여행 계획 등)<br />

[참가비안내]<br />

1. 참가비 40 만원: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기본으로 아래의 3 지역을 제외한 모든 나라<br />

2. 참가비 30 만원 + 현지추가비: 위의 1지역중 현지추가비가 있는 경우 (예, 30 만원+70Euro 등)<br />

3. 참가비 15 만원 + 현지추가비: 아시아 및 아프리카, 남미지역 국가 (예, 15 만원+200Euro 등)<br />

*참가비는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청년팀에 납부, 현지추가비는 현지캠프장소에서 리더에게 직접납부<br />

*단기워크캠프와 장기(LMTV)프로그램의 참가비는 같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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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사항]<br />

1. 정회원비 10 만원은 정회원 가입시 필요한 금액(교육훈련비/자료/기념품 등)이며<br />

국제자원활동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도 환불되지 않습니다. 이점 참가신청시<br />

유의하시기 바랍니다.<br />

2. 참가비 입금 이후에 개인적인 사유로 인한 캠프 참가 취소시 환불 규정은 아래와<br />

같습니다.<br />

가. 캠프개최일 기준 2 달전 : 전액 환불(미국워크캠프 제외)<br />

나. 캠프개최일 기준 2 달-1 달전 : 50%환불<br />

다. 캠프개최일 기준 1 달-개최일 : 환불되지 않음(캠프신청시 유의바람)<br />

3. 참가 확정시 자원활동훈련 혹은 국가별 오리엔테이션에 반드시 참석해야 합니다.<br />

[단체파견 참가안내]<br />

유네스코국제자원활동 단체파견은 2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br />

1. 대학과의 파견협력을 통한 단체파견 프로그램<br />

-해당 학교별 모집시기에 학교를 통해서 지원<br />

2.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청년팀에서 단체파견팀을 구성<br />

-매년 비정기적으로 청년팀 홈페이지를 통해 공고<br />

※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하세요. 궁금한 사항은 자유게시판 또는 E-mail 로 문의바랍니다.<br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청년팀<br />

서울 중구 명동 2 기 50-14 유네스코회관 (우) 100-810<br />

Tel: 02) 755. 9068<br />

Fax: 02) 755. 9069<br />

개별파견: http://youth.unesco.or.kr/volunteer<br />

단체파견: http://youth.unesco.or.kr/group<br />

Email: workcamp@uneso.or.k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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