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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mmins Magazine - 2014 Spring Vol 78

Special Theme

Special Theme Cummins Anniversary 글. 이명아 사진. 박정로 People of Cummins 01 김종식 커민스코리아 전 대표이사 ‘오늘’을 창조한 어제, 그리고 내일을 만드는 ‘오늘’ 회사의 첫 시작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에겐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전설만큼이나 아득한 먼 과거의 일일 수 있다. 허나 돌이켜보면 불과 20여 년 전 일이다. 격변하는 한국 현대사를 함께 한 우리의 선배들은 그들 스스로 역사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빼곡히 채워나갔다. 그리고 1991년 커민스코리아의 설립 후 2003년부터 2009년까지 대표이사를 역임한 김종식 박사의 뜨거웠던 시절은 커민스코리아의 역사 그 자체였다. 삼성동 다락방과 5명의 직원 “커민스코리아 설립 결정 후 가장 힘들었던 게 우습게도 사무실을 구하는 일이었어요. 당시 한국이 호황이라 임대가 하늘의 별따기였죠. 여의도에서부터 삼성동까지 유명한 곳은 모두 다녔지만 임대가 어려웠죠. 결국 삼성동 작은 다락방 같은 곳에 겨우 사무실을 냈죠.” 80년대 후반부터 석유화학, 자동차, 철강 등 주요 업종에서 신규진입을 제한하던 각종 제도적 진입 장벽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88년에는 수입자유화 정책이 실행됐다. 빠르게 신규 기업들이 시장에 진입했고, 해외 기업 역시 한국 진출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커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991년 당시 엔진기술 제휴사였던 쌍용중공업, 현대, 삼성중장비 등 고객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100% 투자 현지법인 설립을 결정했다. “박현규 대표, 윤석윤 대표 모두 그 시절에 채용한 직원이었죠. 솔직히 말해 과장 직함도 내가 꽤 높여 준 거예요. 그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거든(웃음). 대신 품성과 자질은 훌륭했죠. 사람을 뽑을 때는 스펙이나 스킬이 아닌 성품과 자질을 봐야 해요. 지금도 제 선택이 자랑스럽고 옳았다고 확신합니다.” 처음에는 사무실도 없어 미국 본사에서 출장을 오면 호텔 객실을 임시 사무실로 정해 업무를 처리하곤 했다. 사무실이 없는 상황에 시스템이 갖춰져 있을 리 만무했다. 각자 처리해야 할 일을 스스로 계획하고 수행해야 했다. 아침 9시에 출근해 다음 날 아침 9시에

14 +15 퇴근하는 일도 예사롭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본사와 이메일로 소통하는 일도 보통이 아니었다. 인터넷이 지금보다 100배는 느린 속도에 메일 계정 하나를 유지하는 비용이 비싸 한 사람의 메일 계정을 공유해야 했다. 하지만 김종식 박사를 포함해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삼성동에 ‘다락방’ 같은 작은 사무실을 구한 후 사무실 집기에서부터 운영 시스템을 만드는 것까지 모든 것을 함께하며 전 직원이 커민스코리아의 ‘오늘’에 집중했다. 김종식 박사는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함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모든 일을 상의하고, 같이 추진했으니 팀워크가 좋아지는 것은 당연했죠. 서로의 장단점을 모두 알아 어떤 식으로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협력할지도 분명했고요. 혼자였다면 험난했겠지만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갔기에 이룰 수 있었던 성과였습니다.” 커민스코리아의 이후 행보는 눈부신 나날의 연속이었다. 90년대 초반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커민스코리아의 성장률은 20~30%를 기록했다. IMF를 이겨낸 신뢰 날개 단 듯 성장세를 이어가던 커민스코리아에도 위기는 찾아왔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이 그것이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위기에 국내 기업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던 불안한 시기였다. 하지만 커민스코리아는 다행히 경제적인 손실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파트너사의 경영진도 훌륭했지만 그만큼 저희가 고객과의 신뢰 관계를 잘 맺었던 결과였다고 생각해요. 고객관리란 제품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높은 수준의 신뢰를 형성하는 것이죠.” IMF 당시를 생각하면 김종식 박사는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매출 1억 달러를 달성하면 전 직원이 괌으로 여행을 가자고 공공연한 약속을 하고, 실제로 모든 예약을 끝내고 출발만 앞둔 상태에서 IMF로 결국 여행을 가지 못했다. “직원들이 IMF에 해외여행을 가는 것에 부담을 많이 느꼈어요. 당시엔 전 국민이 공황상태였으니까요. 그래서 비행기 티켓, 숙소 등 모든 예약을 취소하고 용평으로 스키를 타러 갔죠.” 여행과 출장으로 수십 개국을 방문한 김종식 박사는 아직도 괌에는 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루지 못했던 약속의 애틋함이 아직도 그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이다. “커민스는 1955년부터 미국 500대 기업에서 살아남은 57개의 기업 중 하나입니다. 기술력은 물론 윤리적으로도 훌륭한 기업입니다. 제 인생에서 커민스를 선택한 것은 굉장히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해요. 바라는 점이 있다면 커민스코리아의 직원들이 조직 내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분화된 분야의 전문가도 중요하지만 영업, 기술, 고객관리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조직 전체를 아우르며,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안목을 키워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김종식 박사. 커민스를 떠난 지 벌써 5년째,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발전하는 커민스코리아의 오늘처럼 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커민스코리아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크게 자리해 있다. 그렇기에 밖에서 회사와 후배들을 바라보는 선배의 시선과 관심은 예전과 똑같이 따뜻한 동시에 강직했다. 김종식 박사는 1986년 커민스 중앙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입사해 1991년부터 2009년까지 커민스코리아 대표이사와 커민스차이나 대표이사, 커민스엔진사업부 아시아지역 대표를 겸임한 바 있다. 퇴사 후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인도계 글로벌기업 타타그룹 한국 투자법인 타타대우상용차의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커민스코리아 시절부터 후배들에게 자신이 가진 세계의 경험을 나누고 싶다며 ‘사장’이라는 직함보다 ‘박사’라 불리길 더 좋아했던 그는 현재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 교수로 활동하며 단행본 등 저술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