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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mmins Magazine 2015 Summer Vol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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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괴석이 눈을 홀리는 인왕산 구간이 한양도성의 6개 구간을 이룬다. 아쉬운 점이라면 인왕산 구간과 숭례문 구간이 만나는<br />

돈의문과 숭례문 구간에 자리한 소의문은 현재 소실되어 그 터만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세계의 도성<br />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전체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되어 있어 2012년 11월 23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도<br />

등재되었다.<br />

봄맞이 순성놀이 떠나세<br />

전체 6개의 구간 중 낙산공원과 이화동마을, 낙산공원을 지나는 낙산 구간에 올랐다. 그 출발점은 속칭 동소문이라고도<br />

불리는 사소문 중 하나인 혜화문이다. 한성대역 5번 출구로 나와 5분여를 걸어 올라가면 길 오른편에 ‘혜화문’이 모습을 보인다.<br />

1684년(숙종 10년) 문루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하였으나 1928년 문루가 퇴락하여 홍예만 남겨뒀는데, 일제가 혜화동과<br />

돈암동 사이에 전찻길을 내면서 헐어버리는 통에 형태를 찾을 수 없었다. 양주, 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br />

했던 혜화문은 1992년 복원을 통해 제 얼굴을 찾았다.<br />

혜화문 건너편으로 낙산 구간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나무 계단이 보인다. 다시 한성대입구역까지 내려가 횡단보도를 건너야만<br />

그 길에 다다른다. 간간이 흰 반점들을 얹고 있는 거대한 성돌들이 눈에 들어온다. 축조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성벽 일부<br />

구간에서 풍화, 배부름, 균열현상 등이 발생해 안전 진단과 계측을 시행하고 있어서다. 5~8m 가까운 높이의 성벽 아래로는<br />

조팝나무가 파란 잎을 반짝이고, 왼편으로는 성의 든든한 호위 아래 터전을 마련한 집들이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있다.<br />

옥상에는 색색의 빨래가 바람에 나부끼고, 빛에 반사된 장독대는 ‘반짝’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온<br />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곳이 <strong>2015</strong>년의 서울이 아니라, 1396년의 한양은 아닐까. 앞서 가는 중년 여인에게선 장옷 입은 양반가<br />

규수의 모습이 떠오르고, 이 길을 따라 순성놀이를 했을 우리 선조들의 얼굴이 흰 구름 마냥 스쳐 지나가는 착각에 빠진다.<br />

두 팔을 벌려도 한 품에 들어오지 않는 육중한 초석과 층층이 모양과 색을 달리하는 성돌들이 반질반질한 도시의 빌딩과<br />

미로를 헤쳐 나온 여행객의 등을 듬직하게 받쳐줄 때는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왜 이제야 이 길을 찾았을까’ 후회스럽다.<br />

성돌을 감싸고 있는 검푸른 이끼와 딱딱한 돌 틈에서도 굳건하게 생의 의지를 불태우는 이름 모를 잡초들의 흔들거림이<br />

성스럽다. 30여 분 쯤 동네를 곁에 두고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암문이 보인다. 그곳에 들어서면 낙산공원이 모습을<br />

드러낸다. 낙산공원 내리막길 아래 자리한 이화동 벽화마을이 정겹게 사람을 맞는다. 이화동은 조선시대부터 경관이 수려해<br />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던 동네였다고 한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민들의 보금자리로 자리 잡았으며, 2000년대 들어<br />

‘낙산 프로젝트’를 통해 벽화마을로 탈바꿈했다. 굴뚝에 피어난 연기처럼 사람 사는 냄새가 좁은 골목 곳곳으로 흘러들어가는<br />

동네가 바로 이화동이다. 이곳을 거닐 때는 말수와 발소리를 줄이는 것이 예의다. 넋을 잃고 걷다 보니 그제야 봄이 지천인 게<br />

눈에 들어온다. 산수유와 개나리는 이미 노란 꽃을 터트렸고, 벚꽃도 적당한 시기를 찾고 있는 듯 꽃망울을 한껏 부풀렸다.<br />

한양도성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한양도성박물관 아래로 21세기의 서울을 상징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우주선처럼<br />

납작하게 몸을 엎드리고 있다. 복잡한 도심에서 사람과 자동차들이 분주히 오갈 때 신호등은 수십, 수백 번 색깔을 바꾸며<br />

고된 노동을 이어간다. 불과 1시간가량 낙산 구간을 거닐며 보았던 풍경은 오늘의 것이 아니라 먼 과거처럼 아날로그적 감성을<br />

풍겼다. 그런 공간에 들어서니, 날카롭고 예민했던 감정의 소용돌이들이 스스로 모난 부분을 잘라냈다. 비록 2.1km의 짧은<br />

구간이었지만 아기자기한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양도성길 낙산 구간. 다음번에는 우리 조상들처럼 아침 일찍 순성을<br />

시작해 하루 만에 도성을 완주하는 기쁨을 누려보고 싶다. 노루 꼬리마냥 짧게 지나가버릴 <strong>2015</strong>년의 봄날에는 한양도성 한<br />

바퀴 휘휘 돌며 봄나들이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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