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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대학교 통폐합 및 교명변경반대 투쟁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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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경원대학교</strong> <strong>통폐합</strong> <strong>및</strong><br />

<strong>교명변경반대</strong> <strong>투쟁백서</strong><br />

2010.12.14. ~ 2012.10.25<br />

진리 창조 웅지<br />

제11대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동문회<br />

<strong>경원대학교</strong> <strong>통폐합</strong> <strong>및</strong> <strong>교명변경반대</strong> 투쟁<br />

백서발간위원회


본 백서를 제9대 총동문회 회장단과<br />

반대투쟁의 주인공들에게 헌정합니다.<br />

발행처 : 제11대 총동문회<br />

편집인 : 심우기 외<br />

감 수 : 조규호, 남호식<br />

※ 알림.<br />

1. 본 백서에 등장하는 재단의 공식명칭은 ‘학교법인가천경원학원’이나 통상적인 명<br />

칭으로서 본 백서에서는 재단으로 통일하여 표기함.<br />

2. 백서는 우선적으로 기록서류에 의거 작성되었으며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은<br />

당시 관계자의 기억에 의존하여 작성하였음. 이로 인한 오류를 방지하기 위하여<br />

감수과정을 거쳤으나 투쟁과정에서의 핵심적인 많은 관계자의 명단이 누락될 수<br />

밖에 없었으며 이는 후에 개정본으로 완성되기를 기대함.


백서를 발간하며.<br />

2016년 말부터 시작된 탄핵 정국은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라는 이름하에 국정농<br />

단이 어떻게 처참하게 이루어 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이름의 정점에<br />

있는 박근혜와 최순실은 영남대학교의 자산을 개인의 쌈짓돈처럼 주무르며 그들 재<br />

산의 일부로 만들었었다. 박근혜는 노무현 정부가 사립학교법 개정을 하고자 할 당<br />

시에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던 인물이다. <strong>경원대학교</strong>를 비롯해 영남대학교, 고려대학<br />

교, 상지대학교 등 사학의 문제가 있거나 친일파가 소유한 학교들의 공통점은 그들<br />

이 스스로 설립하지 않은 학교라는 것이다. 하지만 마치 본인들이 설립한 학교처럼<br />

포장을 하고 민족, 민주, 상아탑, 교육, 인재양성이라는 이름하에 개방형 이사제, 공<br />

익 감사제를 철저히 외면하고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활용해 왔으며 학교와 관련된<br />

각종 특혜를 이용해 부동산 투기와 개발, 특혜입학 등 각종 비리와 왜곡된 권력의<br />

온상으로 사용해 왔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학교는 철저하게 비공개적으로, 비민주적<br />

으로 운영해왔다.<br />

<strong>경원대학교</strong>의 교명변경 과정은 달랐을까? 일인을 정점으로 그에 종속된 소수의<br />

간부들은 꼭두각시로 움직이고 이 과정에서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은 마치 현 정권<br />

의 블랙리스트나 종북 놀이처럼 철저하고 비열하게 배척되거나 억압되었을 것이다.<br />

교명변경과 <strong>통폐합</strong>의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주적인 의견수렴과 토론, 담론의<br />

결정과정은 없었으며 오직 오너라고 생각되는 자의 뜻을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br />

다. 이제 경원이라는 이름은 그들이 지우고 싶어 하는 하나의 얼룩이며 다시는 생<br />

각하고 싶지도 않은 과거의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br />

든 행사에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동문회장 명의의 화환은 행사자 들의 자율적(?)인 정중한<br />

사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br />

왜 그런 것일까. 경원이란 이름은 그렇게도 지킬 가치가 있는 값비싼 이름인가?<br />

아니면 가천이란 이름은 그렇게도 살 떨리게 치욕적인 이름인가? 아니 반대로 경원<br />

이란 이름이 현 재단에게 그렇게도 미움 받아야 할 이름인가? 아니면 가천이란 이<br />

름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이름인가? 그런데 왜 이런 이름 가지고 엄청난 갈등이 있<br />

었으며 지금은 왜 두 개의 동문회가(정통성을 지닌 유일한 동문회는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br />

동문회 이다.) 활동하는 것일까.<br />

다름 아닌 민주적 절차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토론하고 합<br />

의하는 과정이 없이 일방적인 변경이었기에 10만의 동문들 가슴에 상처를 남겼으며


학교는 졸업생들을 헌 신짝처럼 버려 버렸다.<br />

소모적인 논쟁은 끝내야 한다. 불필요한 갈등도 없애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힘으<br />

로 미래를 향해 머리를 맞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과정을 명확하고<br />

투명하게 알 필요가 있다. 과거 없는 현재는 없으며 과거에 대한 반성 없는 미래는<br />

또다시 과거를 반복할 뿐이다. 과거가 명확하게 청산되지 못함으로 인해서 격어야<br />

하는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그러하듯이 우리 동문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기록하<br />

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고 고민하며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담론<br />

을 만들어야 한다.<br />

본 백서는 사실만을 기록하기 위해 매우 간결하게 작성되어 있다. 하지만 주관이<br />

포함되지 않은 35개의 첨부자료를 통해 관심 있는 모든 분들이 자세한 내용을 알<br />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제9대 조규호 회장의 취임 직전인 2010년 12월 14일 경원과<br />

가천의 통합추진협의 시기부터 2012년 10월 25일 수진리 고개에 총동문회 사무실<br />

을 개소하던 시기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교명변경과정에 대한 평가는 오직 이<br />

기록에 의해서 백서를 읽는 동문들이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br />

이 기록을 검토하면서 새삼 그 힘든 2년간 묵묵히 그 소임을 다 하였던 조규호<br />

당시 회장님과 집행부 동문들께 숙연해 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br />

비록 아직까지도 미흡한 자료이지만 이 백서는 누구를 폄훼하거나 상대를 깍아<br />

내리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있었던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해 둠으로써 더 나은<br />

미래를 위한 현재의 초석으로 본 백서를 활용하고자 함이다.<br />

기록이 사라지기전에, 기억 속에 잊혀 지기 전에 본 백서의 자료정리를 위해 수<br />

고해주신 심우기 위원장을 비롯한 백서발간위원님들과 11대 총동문회 집행부 여러<br />

분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br />

2017년 1월 19일<br />

제11대 총동문회장 이석우 배상.


역사를 통하여 미래를 준비하고 정의를 세우자<br />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 동문의 숨결과 청춘, 그리고 꿈과 추억이 깃든 곳이 모교인 경원<br />

대학교이다. 비록 사립대학이라 재단의 주인은 거대자본이나 소수자에 지배받을지<br />

모르나 학교의 주인은 학생과 교수, 교직원과 재단, 그리고 총 동문과 지역사회의<br />

시민이라고 볼 수 있다.<br />

우리에게는 모교 명을 지키지 못한 아픈 기억이고 그래서 간직해야 할 역사며 아<br />

픔이다. 시작은 모두 모교와 후배들의 발전과 도약을 위한 각자의 입장의 다름에서<br />

비롯되었다. 그것은 틀림이 아니고 다름인 것이다. 물론 과정 중에 비민주적이거나<br />

민주적 의견반영 등이 아닌 형식적 절차와 의사결정 구조 과정은 일반 민주주의의<br />

법적 체계의 문제점을 우리는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나 승리가 아니라 공생과<br />

화합, 발전과 도약을 위한 과정, 시련이라 여겼으면 한다. 그것을 서로 인정하고 힘<br />

을 합칠 때 우리 모교는 한쪽 날개로 나는 새가 아닌 좌우로 자유롭게 비상하는 독<br />

수리가 될 것이다. 짧은 경원의 역사도 어언 40년의 중년으로 들어가게 된다. 10만<br />

동문의 자랑스러운 모교로 다시금 자리매김 하는 데는 원칙과 정의, 도전 정신과<br />

모험정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는다.<br />

비록 힘이 약하여 모교 명을 지키지 못하였으나 선후배들과 동문에게 부끄럽지<br />

않은 총동문회로서 노력하였던 작은 흔적과 기록, 그리고 역사를 남긴다.<br />

비록 졸업하여 전국 전세에 흩어진 동문이지만 이 백서를 통하여 우리의 작은 열<br />

망과 투쟁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당당하고 멋진 경원인 들을 기대한다.<br />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동문회 백서발간위원회 위원장 심우기.


<strong>경원대학교</strong> <strong>통폐합</strong> <strong>및</strong> <strong>교명변경반대</strong><strong>투쟁백서</strong><br />

1. <strong>통폐합</strong> 논의<br />

2005년부터 2007년에 걸친 이전의 경원전문대학교와 <strong>경원대학교</strong>와 부실 <strong>통폐합</strong><br />

저지 투쟁 이후 두 대학은 <strong>통폐합</strong>되었고 <strong>경원대학교</strong>와 인천의 가천의과학대학교와<br />

통합 이야기가 2010년 12월 14일 당시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장 이길녀와 가천의과학대학<br />

교 총장 송석구 간에 통합 추진 협의를 맺음으로부터 본격적인 <strong>통폐합</strong> 추진의 이야<br />

기가 구체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br />

자료 1. 통합추진 협약서<br />

또한 그전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교수, 노조 그리고 언론과 교육 당국의 관계자<br />

로부터 <strong>통폐합</strong> <strong>및</strong> 교명 변경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당시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동<br />

문회는 관련 사실의 진실과 사태를 파악하고자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그 의도와 방<br />

향에 대해 자문과 대책을 강구하고 회의를 갖기 시작하였다.<br />

자료 2. 총장면담 신청서<br />

공식적으로는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제9대 총동문회장으로 조규호 동문의 취임으로 이에 대<br />

한 대책과 방안에 대해 체계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전라남도 신안<br />

군수였던 박우량 4~5 대 전 총동문회장의 초대로 동문회 임원 연수회를 2011년 1<br />

월8~9일(1박 2일)에 진행하였으며, 첫날 주된 주제로 모교 <strong>통폐합</strong>에 대한 동문 임<br />

원들의 분임토의를 실시하였고 학교 측의 브리핑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동<br />

문들은 이와 상관없이 저마다의 의견을 개진하여 반대의사와 여러 우려를 표하였<br />

다.<br />

자료 3. 2011년 총동문회 워크샵 일정과 자료


참석자 모두는 통합과 특히 교명 변경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명하였으며, 당시<br />

소문으로 들리던 대학이사장이자 총장의 개인 호인 가천 사용에 대한 반대의견과<br />

사수의사를 표력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 투쟁과 준비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br />

학교 측은 이후 가천의과학대재단과 <strong>경원대학교</strong>재단 간의 통합을 진행하였고 차<br />

근차근 자신들만의 일방적이고 비민주적인 계획된 절차를 진행 시켰다.<br />

이에 총동문회는 반대의견을 표력하고 총동문회 임원회를 거쳐 수차례에 걸쳐 반<br />

대의견을 채택하였고 모두 의결하였다. 또한, 공개서한과 질의 문안을 작성하여 1<br />

차와 2차에 걸쳐 질의서를 발송하여 학교와 재단의 입장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였<br />

다.<br />

자료 4. 교명반대 회의록 <strong>및</strong> 모금자료 일부<br />

자료 5. <strong>통폐합</strong> 1, 2차 질의서와 답변서<br />

2. <strong>통폐합</strong> 반대 투쟁<br />

총동문회는 2011년 3월 9일 당시 국제홀에서 오후 7시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경<br />

원대학교 총동문회 통합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통합대책위원장으로 탁귀환 당시<br />

수석부회장과 장상, 이협 등을 위원으로 하였다.<br />

또한, 당년 3월 25일 대학의 각 구성원 주체인 총학생회, 경원전문대학 동문회,<br />

교수협의회, <strong>경원대학교</strong> 노조의 의견과 성명 등을 취합하며 반대의사를 모았으며,<br />

이를 학교 대내외에 공표하고 알렸다.<br />

자료 6. 통합추진에 대한 노동조합 입장 회신<br />

자료 7. 통합추진에 대한 교수협의회 의견서


그해 3월 30일 숨기고 있던 재단 통합일정표와 통합 후 학사 편제 안을 입수하여<br />

당 동문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입장을 표명한다.<br />

자료 8. 통합추진 일정표<br />

자료 9. 총동문회 입장표명서<br />

2011년 4월 8일 재단의 통합설명회가 개최된다. 오후 1시에는 교직원을 대상으<br />

로 오후 7시에는 총동문회를 대상으로 하는 통합설명회가 개최된다. 당시 재단과<br />

학교 측 발표자로 윤원중 기획처장이 발표하고 질문응답을 하는 순서를 가졌다. 이<br />

에 여러 우려와 의심을 했던 동문들이 <strong>통폐합</strong>일정을 묻고<br />

, 특히 교명<br />

변경에 대한 학교 측의 공식적 입장을 요구한다<br />

. 이에 바꿀 의사와<br />

의도가 있음을 기획처장이 표력 하여 이를 강력히 항의하고 격렬한 반대를 하였다<br />

또한 이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동문들의 의견이 계속되었다 .<br />

그러나 이것은 법적인 요건을 갖추기 위한 형식적 공청회라는 것이 후일 드러난다.<br />

비전 타워에서 개최된 공청회에 당시 총동문회 동문 100여 명과 학생 기자 등이<br />

참석 반대의견을 피력하고 항의를 하였다. 교명 등의 변경에 대한 과정의 비민주성<br />

과 전통의 부재 등을 지적하고 동문 학생, 교수 <strong>및</strong> 교직원과 지역사회가 합당하고<br />

인정받을 수 있는 교명채택을 요구하고 그대로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br />

재단의 태도는 가천이라는 교명을 사전에 확정하고 관철하기 위한 요식행위로 공청<br />

회를 개최하였다는 의심을 갖게 만들었다. 일부 동문은 교명 변경에 있어 구성원<br />

간의 인정과 합의를 기반으로 하기 위해 조사와 연구를 제안하였다. 또한, 객관적인<br />

기관을 통한 설문조사나 컨설팅을 요구 제시하였으나 모두 묵살되었고 당시 학교<br />

관계자인 윤원중 기획처장은 학내 구성원들의 의견을 물어 신중히 결정하겠다는 형<br />

식적인 답변으로 정식 답변을 회피하였다. 결국, 형식적인 절차를 채우기 위한 거짓<br />

으로 끝났다.<br />

4월 11일 재학생인 학생을 상대로 한 통합설명회를 학교 측이 개최한다.<br />

4월 18일 교무위원회에서 학교 교명을 가천대학교로 확정한다. 당시 <strong>경원대학교</strong><br />

1표, 가천대학교 26표, 기타 5표가 나온다. 이어 개최된 학교재단 평의회에서 교무<br />

위원회의 결정 사항을 통과시킨다. 참석자 중 10인이 찬성하고 1인이 불참했으며<br />

총동문회의 자격으로 참석한 8대 총동문회 회장이었던 김동욱


은 조건부 찬성을 한다.<br />

2011년 4월 19일 4·19혁명을 맞아 임시 학생총회가 학교 대운동장에서 개최된<br />

다. 재학생들은 각자의 의사를 표명한 후 학교 교명 개명에 대해 찬반투표를 한다.<br />

당시 수천 명이 모이는 집회는 최근 10년 내에 처음이었다. 2574명의 학생이 투표<br />

하여 반대 2488표(96.65%)와 찬성 32표(1.28%), 무효 53표(2.06%)로 압도적으로<br />

참석자 대부분인 97%가 반대 의사를 나타내었다. 이는 당시 학생들의 의사표시였<br />

으며 교명 변경 반대분위기를 증명해주는 잣대였다. 약 2,600여 명이 참석한 학생<br />

비상총회를 통한 반대 분위기와 의견도 무시하고 당시 학교와 재단은 이길녀 총장<br />

의 개인 호인 ‘가천’이란 이름을 밀어붙였다. 또한, 재단 <strong>통폐합</strong>도 수순에 따라 같<br />

이 진행시켰다.<br />

자료 10. 학생 총회 결과<br />

4월 26일 <strong>경원대학교</strong> 교수협의회는 성명서를 발표해 충분한 논의과정 없이 진행<br />

되는 통합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교수, 직원, 학생 등 구성원들의 견해를 수렴할<br />

것을 촉구한다.<br />

자료 11. 교수협의회 성명서<br />

20011년 4월 28일 당시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학생회 회장과 부학생회장이 교명 반대 삭<br />

발식을 비전 타워에서 실시한다.<br />

3차에 걸친 반대 집회와 총회를 거쳐 4월 28일 오후 7시 당시 비전 타워 앞 계<br />

단에서 300여 명의 동문과 재학생의 참석을 통해 부실통합 반대 <strong>및</strong> 개명 반대 사<br />

수결의대회를 개최하였고 성남시민에게 드리는 글과 학생들에게 드리는 호소문을<br />

낭독하고 대내외 언론에 알리었다. 당시 정대성 영문과 동문은 연설을, 남호식 간사<br />

는 촬영을 진행한다.<br />

자료 12. 교명 사수 결의대회 자료 <strong>및</strong> 구호 등<br />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 28일 오후 3시 재단은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이사회를 개최하고 통합을 의결한다. 이때 이사들의 발언을 정리하면 “학<br />

생들의 충분한 입장표명이 있었다.” “교직원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 “총장<br />

으로 인해 학교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등의 발언을 하였으며 만장일치로 통폐<br />

합을 가결한다.<br />

다.<br />

이어 재단은 다음날 4월 29일 학교법인 가천경원 명의의 통합승인신청을 실행한<br />

자료 13 이사회 회의록<br />

당해 5월 4일 교육과학기술부에 교명 반대 <strong>및</strong> <strong>통폐합</strong> 부당함에 민원을 신청한다.<br />

또한, 감사원, 대통령비서실, 교육과학 기술부, 성남 단체, 지역 국회의원, 정당 등<br />

에게 공문과 민원사항을 접수하였다.<br />

자료 14. 교육과학기술부장관에게 보낸 총동문회 의견서<br />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총동문회 주관으로 <strong>경원대학교</strong> 교명 사수 성남시민<br />

지지 서명 운동을 시행한다. 남한산성 성남 유원지 입구에서 약 1,800여 명의 성남<br />

지역 시민들이 서명에 동참한다. 이후 서명운동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여<br />

다음과 아고라 등에 게재하여 약 일만명의 서명을 받는다. 또한 교명사수 모금운동<br />

을 진행하여 전국 각지와 타국에서 동문의 후원금과 지지가 들어왔다.<br />

자료 15. 성남시민 서명받기 - 남한산성<br />

자료 16. 총동문회 각종 호소문<br />

학교 측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5월 6일 당시 총동문회실의 전화와 전기를 단전한<br />

다. 그리고 5월 9일 학교 비방자제와 엄단의 조처를 하겠다는 공문을 접수한다.<br />

자료 17. 대외협력처장 명의 공문


한편 5월 11일 총동문회는 동문회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하게 대표성을 갖지 않은<br />

개인적 자격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총동문회의 의견인 것처럼 재단 측에 <strong>통폐합</strong> 교<br />

명변경 찬성의견을 표명한 자가 있었음을 확인하고 3월 11일 교과부에 재단 통폐<br />

합과 교명 변경에 찬성한 동문이 누구인지 12인의 명단을 밝혀 달라고 요구한다.<br />

그러나 재단측은 찬성한 동문 이름 명단을 개인비밀통신비밀보호법에 근거해 공개<br />

를 거부한다.<br />

자료 18. 통합관련 동문찬성 서명의 관한 건 명단요구 공문<br />

이 과정을 통해 당시 사무총장 노찬호가 사퇴하고 일부 부회장단이 총동문회에서<br />

나가고 탁귀환, 나병철<br />

, 이진휴<br />

등 몇 명의 임원단 그리고 학교 교직원이자<br />

당시 동문회 부회장이었던 권병국 등과 전임 8대 총동문회 회장이었던 김동욱<br />

의 이탈이 이루어진다. 동문 간 입장차이로 인한<br />

분열 등으로 이들은 교명변경 <strong>및</strong> <strong>통폐합</strong> 찬성의 행동을 취하고 교과부 찬성 동문<br />

입장에 명단을 올린다.<br />

당시 9대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동문회는 회의를 통해 이들을 동문회에서 공식제명하고<br />

결별한다. 이들의 대표성을 갖지 않은 개인적 일탈행위를 재단 측은 마치 대표성이<br />

있는 것처럼 왜곡 시키고 이들로 인하여 후에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대학<strong>통폐합</strong> 심<br />

의소위원회 소명심사과정에서 동문회의 찬성도 거의 반이나 되는데 무슨 소리냐는<br />

공박과 면박을 당시 심의위원으로부터 듣게 된다. 학교 <strong>통폐합</strong> 과정에 있어 이면<br />

합의 설로 인한 갈등과 분열로 당시 통합대책위원장인 탁귀환과 위원들은 사실관계<br />

없음을 천명하고 위원들과 함께 일괄 사퇴한다.<br />

이에 총동문회는 체제를 다시 개편하여 본격적인 반대 투쟁체제로 전환하여 당시<br />

사무총장이었던 노찬호가 사퇴하고 새로이 심우기를 사무총장으로 임명하고 정선근<br />

, 김동훈, 남호식, 유성수, 안광림, 김미라<br />

, 박찬웅, 정대성 등과 당시 재학생이었던 고낙준, 김병조 등을 보강하여 조직<br />

체계를 재편하고 강화하여 강력한 모교 교명 사수를 위한 대응을 꾀한다.<br />

5월 11일 <strong>경원대학교</strong> 대동제 현장에서 학생들의 반대 의사의 표시가 여러 가지<br />

행사와 표현으로 각 단과대학 <strong>및</strong> 학과별로 진행된다. 재학생들도 자발적으로 교과<br />

부 앞 1인 항의시위를 한다. 또한, 5월 13일 가천 화형식이 일어난다. 5월 15일 성


남 소재인 성일고등학교와 풍생고 총동문회 체육대회에서 교명 변경 반대 서명을<br />

받는다.<br />

총동문회는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의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면<br />

담을 거절 당하였다.<br />

자료 19. 장관면담 거절 공문<br />

동문과 재학생 등 두 그룹을 주축으로 학내외 대자보 부착과 유인물 배포 등의<br />

반대 선전전이 이루어졌다. 5월 19일 상임이사회를 개최하여 불분명한 임원들을 정<br />

리하고 다시 한 번 동문 임원들의 반대의사 서명을 받아 결의를 다지고 교명 사수<br />

의 의견을 다시 결의한다.<br />

2011년 5월 23일 이재명 성남시장의 교명 반대 성명서가 나온다. 또한, 지역사회<br />

각 단체의 교명 반대 연대 성명과 당시 성남시의원과 성남문화원장등의 교명 반대<br />

서명이 나온다.<br />

자료 20. 성남시장 <strong>및</strong> 외부단체 통합반대 성명서<br />

이 과정에서 <strong>통폐합</strong> <strong>및</strong> 교명변경과 관련된 투쟁은 지역사회의 뜨거운 관심과 논<br />

쟁을 야기한다.<br />

자료 21. <strong>통폐합</strong>관련 언론기사<br />

5월 31일 교과위 <strong>통폐합</strong> 심사가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에서 있었고 6월8일 총장<br />

면담 신청을 하나 하와이 출장 등의 이유로 면담불가 통보를 받다.<br />

6월 들어 재단은 <strong>통폐합</strong>승인신청서 수정본을 교육과학기술부에 다시 접수하였으<br />

며 이에 총동문회는 6월 20일 교육과학기술부를 항의방문을 한다.<br />

자료 22. <strong>통폐합</strong>승인신청서(수정제출본)


6월 22일 심우기 총동문회 사무총장이 광화문 교과부 정문 앞에서 오전 출근 전<br />

부터 도착하여 일일 일인 시위를 진행한다.<br />

자료 23. 교육부 1인 시위중인 심우기 사무총장<br />

6월 22일 학교 대외협력처장이 사의 표명한다.<br />

조규호 총동문회 회장과 김동훈 사무국장이 교과부 취재 기자들로부터 관련 인터<br />

뷰를 진행한다.<br />

심우기 사무총장은 담당 주무관인 최윤정 씨와 면담을 하여 당시 재단<strong>통폐합</strong>에<br />

있어 특히 교명 변경에 대하여 재단과 학교의 일방적인 한쪽만의 입장만을 들은 것<br />

은 부당하고 인정할 수 없으며 동등하게 총동문회의 입장을 말할 기회를 달라고 주<br />

장하고 정당한 소명과 발언의 기회를 달라고 요구한다. 이에 담당 주무관이 총동문<br />

회 입장을 수용하고 교과부 해당 심사소위원회의 일정을 알려주고 참석자 3인을 조<br />

정하여 통보를 준다.<br />

이에 2011년 6월 23일 교과위 해당 소위에 조규호, 심우기, 정성근 3인이 참석하<br />

여 소명과 반대의 의견을 개진한다. 그 자리에는 안광림, 김동훈 동문 등이 동행하<br />

여 회의장 바깥에서 함께 대기한다. 롯데호텔 소공동 페니쉴라 식당 조찬 식사자리<br />

에서 이루어진 해당 회의에 조규호 당시 회장은 몇십 년 된 학교 역사의 끝이 이런<br />

조찬자리에서 끝난다는 것에 대한 비참함을 토로하였고 심우기 사무총장은 10인 재<br />

단이사만의 결정으로 수십 년 된 학교의 이름이 변경될 수 있다는 모순과 교육에<br />

입각하지 않은 사적 기업식 발상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한다. 정성근은 절차와 과정<br />

의 불법성을 주장한다. 이어 동문대표들은 당시 심사소위원회 왕상한 위원장<br />

의 막말<br />

에 항의하며 박차고 나온다.<br />

자료 24. <strong>통폐합</strong> 심사소위원회 반대 의견문 자료<br />

2011년 7월 11일 교과부로부터 <strong>통폐합</strong> 승인서가 학교로 하달되고 이후 관련 보<br />

도자료 발표가 언론에 나오기 시작한다.


자료 25. 교육과학기술부 <strong>통폐합</strong> 승인서<br />

학교 측은 관련 사후 작업을 진행하고 이에 총동문회는 관련 법적인 대책과 대응<br />

을 모색하고 이를 위한 준비팀<br />

을 구성하고 소송을 위한<br />

재정과 법률 자문 변호사<br />

를 정하여 행정심판 소송을 위<br />

한 준비를 착수한다.<br />

또한, 총동문회는 임원회와 집회를 통하여 행정심판을 통한 이의 신청 소송을<br />

진행하기로 결의를 하고 대내외적으로 알린다. 소송의 비용은 당시 도시계획과 동<br />

문회의 찬조로 진행하였으며, 서초행정 법원에 출석하여 3차례에 걸친 재판에 참여<br />

하였으나 결국 2012년 4월 6일 총동문회의 소는 기각되었다. 또한 헌법재판소에<br />

제기한 소송역시 헌법재판소에서 ‘경원대 <strong>통폐합</strong>은 헌법소원 대상이 아니다’로 판결<br />

나 패소하게 된다.<br />

자료 26. <strong>통폐합</strong> 승인처분 취소 행정소송 재판 <strong>및</strong> 관련자료<br />

성남지역사회 시민단체에서는 성남시 유일한 종합대학교인 <strong>경원대학교</strong> 교명과 학<br />

교 지키기를 위한 서명운동과 지지성명을 동참해주었고 또한 촛불집회와 교명 지키<br />

기 사수대회에 연대 참여하여 지지 발언 등을 한다. 성남시민 3만여 명이 반대 서<br />

명을 해주셨고 남한산성 은행동 입구에서 수많은 분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또한,<br />

온라인 다음까페 개설을 통해 전국의 흩어진 동문의 성금과 반대 지지 의사를 결집<br />

하였다. 또한, 언론 광고(노컷뉴스 신문)를 통해 통합과 교명 변경의 부당함에 대하<br />

여 알렸다.<br />

자료 27. 교명유지를 위한 총동문회 신문광고<br />

당시 국내외 전국 10만 동문의 지지표명과 후원 등이 들어왔으며 인터넷의 아고<br />

라 등에서 부당함을 알리는 선전전을 동문 각자들이 전개하였고 서명 또한 수만 명<br />

을 받았다. 디시인사이드 등도 통합과 교명 반대 찬성과 반대 논쟁이 개시되었다.<br />

또한 총동문회는 재단 이사회에 대한 정보 청구, 재단에 대한 감사청구 등 적극<br />

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한다.


자료 28. 각종 공문과 답변서<br />

2011년 10월 4일 총동문회장 조규호 회장이 무기한 단식투쟁을 선언하고 경원대<br />

학교 비전 타워 1층 우체국 앞 현관 등에서 일주일간의 단식투쟁을 진행한다. 또한<br />

심우기 사무총장은 1일 동조 단식투쟁을 한다. 7일간의 노숙투쟁 그리고 고낙준,<br />

김병조 재학생 등의 지지 농성투쟁에 재학생의 지지방문과 격려 글, 물과 성금 등<br />

이 답지하고 동문들의 응원지지 방문과 지역사회 인사들의 위로 방문 등이 쇄도한<br />

다. 비전 타워 현관 입구에서 진행한 투쟁에 학교 측 시설관리본부의 퇴거요청과<br />

시도가 있었으나 교수 등의 중재로 학교 측과 대화하여 퇴거요구 중단의 타협을 한<br />

다.<br />

10월 8일 비전 타워 입구에서 <strong>경원대학교</strong> 교명변경 관련 행정소송 기자회견을 연<br />

다. 참석자는 조규호, 심우기, 유성수, 김미라, 고낙준 재학생이다.<br />

자료 29. 교명 사수 단식투쟁과 농성 노숙투쟁 자료<br />

재학생 등은 축제의 와중에 <strong>경원대학교</strong> 교명 변경 반대에 관한 항의의 의미로 미<br />

술대학에서 조기와 <strong>경원대학교</strong> 관을 들고 행진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또한 총<br />

동문회는 단식농성을 중지하고 경원대역 앞에서 천막농성<br />

을 한다.<br />

자료 30. 재학생이 총장께 드리는 편지<br />

총동문회의 반대 외에도 개별 학과 동문회에서도 반대 입장 선언과 투쟁을 한다.<br />

도시계획과 동문회와 토목공학과, 조경학과 등이 성명과 교명변경 반대 입장을 공<br />

식적으로 내놓는다.<br />

자료 31. 학과 동문회 <strong>및</strong> 경원인 통합반대 성명서<br />

특히 토목공학과 동문회(회장 윤종남)에서는 회장의 사비를 들여 버스광고 반대<br />

시위와 유인물과 대자보 부착 등의 반대 항의시위를 진행하고 재학생들의 등하교시


간에 맞춰 현수막을 들고 일인시위를 진행한다. 이 때문에 몇 차례 학교 측 교직원<br />

들과 충돌하기도 한다.<br />

이후 이 일로 학교 측에 의해 명예훼손죄 <strong>및</strong> 기타 명목으로 고발 조치당하여 경<br />

찰서조사와 법원에 출두하여 재판을 받고 벌금형을 받는다. 9대 총동문회는 정기총<br />

회에서 이를 기리어 감사패를 증정한다. 또한 도시계획과의 찬조금에도 감사패를<br />

전달한다.<br />

자료 32. 윤종남토목공학과 총동문회장 버스광고시위와 각종 자료와 소송문과 벌<br />

금 통지서<br />

이외에도 영어영문학과 동문회에서도 지지와 찬조 등을 하고 위로방문 등의 연대<br />

활동이 있었다. 또한, 몇 차례에 걸친 저녁 촛불집회시위에는 퇴근 후 동참한 동문<br />

들과 성남지역의 여러 시민단체와 각 동문이 참석하여 반대 의견을 표해 주고 지지<br />

연대 발언 등을 해주었으며 성남 시장인 이재명 시장의 반대와 가수 김장훈 등이<br />

교명 변경 반대에 대한 지지의사를 표력 해주었다.<br />

3. 총동문회에 대한 분열 책동과 분열과정<br />

이 와중에 학교 측의 요구로 교내에 있던 총동문회실 폐쇄와 퇴거를 당하였고 학<br />

교의 지원이 끊기고 쫓겨나는 상황이 생긴다.<br />

동문회 내에서도 분열 책동이 있어 경원대 총동문회 정상화 대책회의란 임의단<br />

체<br />

가 구성되어 2011년 8월 22일 현 동문회에 총동문회를 해체<br />

하라는 내용증명을 발송하는 일이 발생한다.<br />

자료 33. 가칭 총동문회 정상화 대책회의 내용증명서<br />

자료 34. 총동문회 답변 내용증명서<br />

또한 조규호 회장에 관련된 근거 없는 음해와 심우기 사무총장, 안광림 부회장에


대한 비방 등이 난무한다. 이 와중에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동문회 공식 까페인 <strong>경원대학교</strong><br />

총동문회 다음 까페지기 운영자의 변절로 까페 글에 많은 동문이 교명반대의견을<br />

써주었으나 찬성의견만을 게시하며 총동문회 입장과 다른 행보를 하여 동문간의 혼<br />

란과 분열을 더욱 책동하였다. 대다수 많은 동문은 반대의견들이 게시되었던 카페<br />

의 글을 보지 못하게 되고 카페 자체를 양도해 주지 않아 결국 카페가 사실상 사장<br />

되게 되었다. 또한, 가장 앞장서서 교명을 지키고 모교를 지켜내야 했던 동문 출신<br />

교직원 등도 학교 측에 부합하여 앞장서서 자신들의 모교인 학교 <strong>통폐합</strong>과 교명 변<br />

경에 앞장선다. 교수 협의회와 <strong>경원대학교</strong> 교직원노조등에서도 의견문과 반대 성명<br />

을 내고 대자보로 붙인 것 이외에 당시 대다수 교수의 어떠한 조직적이고 집단적<br />

반대의사 표시나 호응과 대응이 없었다.<br />

총동문회 내에서도 교명의 절충안인 가천경원 또는 경원가천 등의 요구가 있었으<br />

나 기본적으로 학교 측에서는 어떠한 타협안도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으며 결국 모<br />

든 대화가 차단된 채 일방적으로 열린 재단 이사회<br />

과반 찬성으로 학교 교명<br />

을 변경한다.<br />

겨울방학과 기말시험 기간을 거치며 급격히 교명 변경 반대와 <strong>통폐합</strong>의 관심과<br />

저항동력이 떨어지게 되었고, 이후 당시 반대 투쟁의 주체들에 대한 손해 배상 이<br />

야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이후 학교는 <strong>통폐합</strong> 절차에 따라 학과 <strong>통폐합</strong> <strong>및</strong> 폐과 등<br />

을 단행하게 되고 이에 해당되는 개별 학과들의 투쟁이 있었으나 연대하지 못하여<br />

모두 폐과된다.<br />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동문회와는 별개로 분리되어 나간 일부 경원대 출신 동문들과 전문<br />

대 동문, 가천의과학대 동문이 모여 2011년 8월 26일 가천대 총동문회를 별도로<br />

발족하였다.<br />

이어 교육과학기술부는 2012년 1월 30일 학교법인 가천학원의 정관을 변경인가<br />

함으로써 대학의 명칭은 <strong>경원대학교</strong>에서 가천대학교로 최종 변경되기에 이른다.<br />

자료 35. 정관변경인가서


4. 총동문회의 재정비와 새로운 출발<br />

일명 가천대학교 총동문회의 발기인들 중 일부는 이미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동문회에서<br />

제명당한 인물들로 그 조직의 정당성에 대하여 현재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동문회에서는 정<br />

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br />

결국 학교에서 쫓겨난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동문회는 2012년 10월 25일 사무국을 정비<br />

하여 성남시 수진리 고개에 총동문회 사무실을 마련하여 동문회 임원들을 다시 보<br />

충하고 재정비하고 동문회를 추스른다. 또한 총동문회는 별도의 홈페이지를 구축하<br />

고 인터넷 SNS 보강 작업 <strong>및</strong> 총동문회 홍보에 더욱 치중하여 온라인 활동을 강화<br />

하는 한편 지역 언론과의 유대를 바탕으로 오프라인의 홍보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br />

있다. 각 동아리와 학과별 동문회와의 유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정기총회 등 공<br />

식적인 행사를 더욱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으며 가을 정기산행은 모든 동문회들이<br />

모인 연합 산행을 실시하는 등 10만 경원 동문들의 명실상부한 공식적인 총동문회<br />

로서의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br />

이런 혼란의 사태는 사학재단이 가지고 있는 병폐로서 학교의 구성원이 재단과<br />

학생과 교수와 동문들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재단의 비민주적인 습성과 조직에 충성<br />

함으로서 개인적 사익을 추구하던 구시대적인 사고에서 기인했으며 학교법인의 사<br />

유화를 막지 못하는 사학법의 허술한 법적 토대가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br />

떠한 학교라도 권력에 사유화된 10명도 안 되는 이들에 의해 학교의 운명이 바뀔<br />

수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현행 사학법의 문제점과 허술함을 경원대 <strong>통폐합</strong>의 과정<br />

속에서 여실히 들어나게 되었다. 현재의 사학법은 일부 소수 독점 가족 족벌경영<br />

등이 가능한 구조로 유지되어 계속적으로 비민주적이거나 독선적 운영을 가능케 하<br />

여 현재도 여러 사립학원에서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는바, 조속히 사학법이 개정되<br />

어 비민주적 운영 작태가 대학에서 사라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br />

이제까지 첨부자료를 통해 증명된 현 주소는 현재까지 11대에 걸쳐 총동문회의<br />

활동이 이어지고 있는 <strong>경원대학교</strong> 총동문회가 2017년 1월 현재 우리 동문들에게<br />

있어 유일하고 정통성이 확보된 총동문회임 증명하고 있으며 이 백서를 통해 다시<br />

한번 선언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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