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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관한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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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br />

이스라엘 <strong>사실</strong>정보<br />

이스라엘


2<br />

이스라엘 건국 60주년 개정판<br />

iic<br />

이스라엘 정보 센터<br />

그래픽 디자인: 초핏 짜히 (Tsofit Tsachi)<br />

통계자료: 중앙 통계청 (다른 기관이 명시된 경우 제외)<br />

인쇄: Keter Press


3<br />

이스라엘 예루살렘, 2008<br />

이 책은 이스라엘 재외공관이나 인터넷 (www.mfa.gov.il)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br />

목차<br />

역사 5<br />

국가 67<br />

국토 93<br />

국민 125<br />

보건과 사회 서비스 147<br />

교육 165<br />

과학과 기술 185<br />

경제 203<br />

문화 243<br />

세계 속의 이스라엘 323


5<br />

역사<br />

성서 시대 8<br />

제 2 성전시대 – 시온으로의 귀환 14<br />

외세의 지배 21<br />

이스라엘 국가 35<br />

평화 협상 49<br />

역사적 주요사건 57


7<br />

역사<br />

유대 민족의 발생지는 이스라엘 땅(에레츠 이스라엘)이다. 이 민족의 오랜 역사 중 상당 부<br />

분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그 중 2천 년의 역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곳에서<br />

이 민족의 문화적, 종교적, 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되었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 땅에서 강<br />

제로 쫓겨난 후에도 그들의 실제적 거주는 많은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br />

오랜 세월 동안에도 유대인들은 결코 이 땅과의 유대를 끊거나 잊지 않았다. 1948년에 이스<br />

라엘이 건국됨으로써 유대인들은 2천년 전 잃었던 독립을 되찾는다.<br />

זכור ימות עולם<br />

בינו שנות דור ודור...‏ ‏)דברים ל"ב ז'(‏<br />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신명기 32:7)<br />

이스라엘 지파의 중세 말 채색 지도 중 일부 – R. 벤-하임 제공


8<br />

성서 시대<br />

족장 시대<br />

유대민족 역사는 약 4천 년 전(기원전 17세기경)에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br />

과 손자 야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원전 2000~1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메소포타미아<br />

발굴 문헌은 성서에 나타난 그들의 유목 생활의 단면들을 확증해준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br />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여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민족을 형성하도록 부르<br />

심을 받은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만연해지자 야곱(이스라엘)과 그<br />

의 열 두 아들과 가족들은 이집트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그의 후손들은 노예로 전락하여 강<br />

제 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9<br />

모세 – 미켈란젤로 작, 로마 빈콜리 산 피에트로 성당<br />

이집트 탈출과 정착 시대<br />

이스라엘 민족은 4백 년의 노예 생활 만에 모세에 의해 해방된다. 성서의 이야기에 의하면<br />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세는 자기 민족을 출애굽 시켜 그 조상들에게 약속되었던 이스라엘<br />

땅으로 되돌아 간다(기원전 13~12세기경). 40년 간 시내 광야에서 방랑하게 되는 동안<br />

그들은 그곳에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되고 십계명을 포함하는 토라(모세오경)을 받게 되며,<br />

이것은 그들의 유일신 신앙에 형식과 내용을 부여하게 된다. 출애굽 사건(기원전<br />

1300년경)은 유대 민족의 기억에 지워질 수 없는 인상을 남겼고, 자유와 해방의 보편적인<br />

상징이 되었다. 해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Pesach), 오순절(Shavuot), 초막절(Succot)을<br />

지키며 그 당시의 사건들을 기념한다.<br />

그 후 2세기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땅 대부분을 정복하고 농부와 장인들이<br />

되었으며, 어느 정도 경제적 사회적 통합을 이루게 된다.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과 전쟁의<br />

때가 반복되는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사라고 불리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규합하게<br />

되는데 이들은 지도자적 자질뿐만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노련함을 바탕으로 선택되었다.<br />

그러나 지파 조직의 근본적인 약점은 블레셋 사람들(소아시아 출신으로 지중해 연안에<br />

정착한 해양 민족)의 위협 앞에서 부족들을 통합하며 상속을 통해 항구적인 지위를 계승할<br />

수 있는 통치자의 필요성을 대두시키게 된다.


10<br />

“여호와는 네게 복을 내리시고 너를 지키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를<br />

베푸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드시고 평화를 주시노라.” (민수기 6:24~26)<br />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기원전 7세기의 작은 은 두루마리. 제사장의 축복기도가 담겨 있다 •<br />

이스라엘 문화재청<br />

왕국 시대<br />

초대 왕 사울(기원전 1020년경)은 느슨한 지파 조직에서 그의 후계자 다윗의 통치 하에<br />

완전한 왕권국가가 수립되기까지의 기간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br />

다윗 왕(기원전 1004~965년경)은 팔레스타인 제패를 끝으로 군사 원정에 성공하고 주변<br />

왕국들과 우호 동맹을 조직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 지역의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br />

결과 그의 왕권은 이집트 국경 지대와 홍해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미치게 된다.<br />

대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12개 지파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고 수도 예루살렘과<br />

군주제가 국민 생활의 중심이 되게 했다. 성서에서 다윗은 시인이자 음악가로 묘사되고<br />

있으며,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시들이 시편(The Book of Psalms)에 등장한다.


11<br />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솔로몬(기원전 965~930년경)은 국력 신장에 더욱 힘썼다.<br />

솔로몬 왕은 여러 정략 결혼으로 더욱 공고해진 이웃나라 국왕들과의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br />

왕국의 평화를 지키고 그 당시 열강들과 대등한 지위를 다졌다. 그는 구리 광석과 금속<br />

기원전 8세기 예루살렘의 제1 성전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br />

히브리어 명문이 새겨진 엄지 손가락 크기의 상아 석류 • 이스라엘 박물관(예루살렘)<br />

예언자들: 신적인 계시 능력을 타고난 것으로 여겨진 종교적 현자이자 권능을 지닌 인물을<br />

말하며, 이들은 예루살렘 함락(기원전 586년) 이후 한 세기가 지날 때까지 왕국 시대 기간<br />

동안 예언활동을 했다. 종교, 윤리, 정치 문제에 대한 왕의 조언자 역할을 하거나 혹은<br />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가 최우선이라는 점에 입각해 왕의 비판자로 나설 때 이들 예언자들은<br />

정의의 요구에 따라 유대 민족의 삶의 도덕성에 대해 설득력 있는 논평을 내놓았다.<br />

예언자들의 계시 경험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산문과 시가 담긴 책에 기록되었으며,<br />

이 중 상당 부분이 성서에 편입되었다.<br />

예언자들이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가치를 근본적으로<br />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사야서(1:17)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br />

구절들, 즉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br />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등의 구절은 인류의 사회 정의 추구에 있어 지속적인<br />

자양분이 되어준다.<br />

제련 등 주요 사업을 육성하여 해외 교역을 확대하고 국내 경제발달을 촉진하는 한편<br />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기존 도시를 더욱 강화했다. 그의 업적<br />

중에서도 단연 최고봉은 유대인들의 국가적, 종교적 삶의 중심이 된 예루살렘 성전의<br />

건축이었다. 성서에 따르면 잠언(The Book of Proverbs)과 아가(Song of Songs)서는 솔로몬의


12<br />

작품으로 추정된다.<br />

분열 왕국 시대<br />

솔로몬 왕의 통치 말기는 그의 야심 찬 계획 때문에 커다란 고통을 겪은 민중의 불만으로<br />

얼룩졌다. 동시에 왕 자신의 지파에 대한 특혜 대우는 다른 지파들의 원망을 샀고, 결국<br />

왕권국가와 지파 분리주의자들 간의 반목의 골을 깊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솔로몬의<br />

사망(기원전 930년) 후 일어난 공공연한 반란으로 북쪽의 10개 지파가 이탈했고,<br />

이스라엘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이 중 유다 왕국은<br />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세력권 안에 세워졌다.<br />

사마리아를 수도로 둔 이스라엘 왕국은 19대 왕까지 200년 이상 지속되었고, 유다 왕국은<br />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다윗의 혈통을 이은 19명의 왕들에 의해 400년간 통치가<br />

이어졌다. 아시리아와 바벨론 제국의 확장으로 인해 먼저 이스라엘이, 그리고 뒤이어<br />

유다가 외세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 의해<br />

함락되고(기원전 722년) 그 주민들은 추방당하고 잊혀졌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br />

바빌로니아가 남유다 왕국을 점령하면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한 것은 물론 대부분의<br />

거주민들을 추방했다(기원전 586년).


13<br />

‘여로보암의 종 셰마에게” 하사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인장. 므깃도(Megiddo)에서<br />

발굴되었다 • 이스라엘 문화재청<br />

최초 유배 (기원전 586~538년)<br />

바벨론의 정복으로 제1 성전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유대민족과 이스라엘 땅의 연결고리까지<br />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 그들의 고국을 기억하리라<br />

맹세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br />

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br />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시편 137:5~6).<br />

제1 성전의 파괴(기원전 586년)에 이은 바벨론 유수는 유대인 이산(Jewish Diaspora)의<br />

시발점이 되었다. 바로 거기서부터 유대교는 이스라엘 땅 밖에서의 종교적 틀과 삶의<br />

바빌론 강변에서 – E. M. 릴리언 작


14<br />

방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며,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의 민족적 생존과 영적 정체성을<br />

확고히 하고, 하나의 민족으로서 유대민족의 미래를 보호할 수 있는 생명력을 불어넣었다.<br />

제 2 성전시대<br />

시온으로의 귀환<br />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기원전 538~142년)<br />

기원전 538년 바벨론 제국을 정복한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칙령에 따라 약 5만 명의<br />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1차 귀환에 나섰다. 이들을 이끈 이는 다윗의 후손


15<br />

스룹바벨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채 지나지 않아 율법 학자 에스라의 인도 하에 2차<br />

귀환이 이루어졌다. 그 후 4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페르시아(기원전 538~333년)와 뒤이은<br />

헬라(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시대)의 지배(기원전 332~142년) 하에서 다양한 수준의<br />

자치를 체험했다.<br />

에스라의 솔선수범적 지도 하에 이루어진 유대인들의 본국 귀환, 제 1 성전이 있던 터에 제<br />

2 성전의 건축, 예루살렘 성벽의 중건, 유대인의 종교적, 사법적 최고 기구인 크네세트<br />

하그돌라(최고 회의)의 설립은 제 2 성전시대의 개막을 의미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세력권<br />

안에서 유다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장로 회의에 지도력이 위임된 국가였다.<br />

대왕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 중 하나로, 페르세폴리스의 궁전<br />

벽에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br />

기원전 332년에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고대 세계의 일부가 된 이스라엘 땅은<br />

시리아에 본거지를 둔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 하에 유대 신정국( 神 政 國 )의 상태를<br />

유지했다. 그러나 유대 민족 전체에게 헬라 문화와 관습을 강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br />

유대교 행사를 금하고 성전을 모독하기에 이르자 유대인들은 그에 항거하여 들고 일어났다<br />

(기원전 166년).<br />

하스몬 왕조 (기원전 142~63년)


16<br />

처음에는 하스몬 왕조의 성직자 마타티아스, 그리고 뒤이어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의 주도<br />

하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했다(기원전 164년). 유대인들은 이<br />

사건들을 매년 수전절(Hannuka)에서 기념하고 있다.<br />

하스몬의 승리가 이어지자(기원전 147년) 셀레우코스는 유대(이스라엘 땅을 지칭하던<br />

당시의 명칭)의 자치권을 되돌려 주게 되었고, 셀레우코스 왕국의 몰락(기원전 129년)과<br />

함께 유대인들은 독립을 쟁취했다. 그 후 약 80년간 지속된 하스몬 왕조의 통치 하에 유대<br />

왕국은 솔로몬 시대의 영토에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영토를 탈환했다. 유대인의 지배<br />

하에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유대인들의 생활은 풍요로웠다.<br />

마사다: 예루살렘 함락에서 살아남은 약 1천 명에 이르는 유대인 남성, 여성, 아이들은 사해<br />

근처 마사다에 위치한 헤롯 왕의 산꼭대기 궁전을 점령하고 요새화했다. 이들은 로마군의<br />

계속된 함락 시도에 대항하며 이곳에서 3년을 버티었다. 마침내 로마군이 마사다를<br />

함락시켜 성벽을 뚫고 쳐들어왔을 때는 이미 이 유대인들과 그 가족들은 노예가 되는<br />

것보다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한 뒤였다.


17<br />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에 새겨져 있는 메노라(일곱 촛대)<br />

각 시대별 메노라<br />

황금 메노라(가지가 일곱 개 달린 촛대)는 고대 예루살렘에서 솔로몬 왕 성전의 예배의식<br />

때 사용된 주요 도구였다. 그 후 오랜 시대에 걸쳐 이것은 수많은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로<br />

유대 유산과 전통의 상징이 되어왔다.


18<br />

기원전 1세기 하스몬 왕조의 동전에 새겨진 메노라<br />

(이스라엘 문화재청)<br />

서기 1세기의 유물로,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구에서 발견된 두 개의 회반죽 조각에 새겨진<br />

메노라<br />

(이스라엘 탐사협회)<br />

5~6세기 여리고 유대 회당의 모자이크 바닥에 있는 메노라<br />

(이스라엘 문화재청)<br />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근처에 있는 베노 엘칸(Benno Elkan) 작의 메노라<br />

(이스라엘 공보부(이후 G.P.O.로 표기)/ F. 코헨)<br />

로마의 지배 (기원전 63 ~ 서기 313년)<br />

셀레우코스 왕조를 몰아내고 이 지역에 집권한 로마인들은 다메섹의 로마 총독의 지배 하에<br />

하스몬 왕 히르카누스 2세가 제한적인 왕권을 가지는 것을 승인했다. 유대인들은 새로운<br />

정권에 반대하여 향후 수년 간 잦은 반란을 일으켰다. 마타티아스 안티고누스가 하스몬<br />

왕조의 지난 영광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시도를 꾀했으나 그가 로마군에 패하고 사망하면서


19<br />

하스몬 왕조의 통치는 끝을 맺고(기원전 40년) 이 땅은 로마 제국의 한 주로 예속되었다.<br />

기원전 37년에 로마인들은 히르카누스 2세의 사위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다.<br />

내정에 대해서는 거의 제한 없는 자치권을 부여 받은 헤롯은 로마 제국의 동부에서 가장<br />

강력한 군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 로마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헤롯은 대규모 건축<br />

사업에 착수하여 가이샤랴와 세바스티아(사마리아)의 도시들과 헤로디움과 마사다의 요새<br />

등을 세웠다. 그는 또한 성전을 증축하여 그 시대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로 변모시켰다.<br />

헤롯 성전 – 제 2 성전시대 예루살렘 모형 중에서 • 이스라엘 박물관(예루살렘) 제공<br />

할라카: 할라카는 성서 시대 이후부터 전세계 유대인들의 삶의 지침이 되어온 법 체계이다.<br />

이것은 대인관계와 예배 의식에 있어 유대인들의 종교적 의무를 다루며, 출생과 결혼,<br />

경조사, 농업과 상업, 윤리와 신학 등 <strong>사실</strong>상 인간 행동의 모든 측면을 아우르고 있다.<br />

성서에 뿌리를 둔 할라카의 권위는 탈무드에 근거하고 있다. 탈무드는 유대 법률과 전승<br />

지식을 모은 책(400년경에 완성)으로, 유대교의 구전 율법을 최초로 글로 모은<br />

(210년경에 성문화됨)와 미쉬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담긴 를 통합한<br />

것이다. 할라카에 대한 효율적인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 1세기와 2세기부터 종교학자들에<br />

의해 간명하고 체계적인 요람 저술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성문법전 중 가장 권위 있는<br />

저서는 16세기 쯔파트 (사페드)에서 요셉 카로가 쓴 이다.<br />

그러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유대 백성들의 신임과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20<br />

헤롯왕의 사망(기원전 4년) 이후 10년이 지났을 때 유대는 로마의 직접 지배 하에 들어갔다.<br />

유대적 생활양식에 대한 로마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늘어난 유대인들의 분노는 산발적인<br />

폭력행위로 나타나다가 서기 66년에 전면적인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티투스가 이끈 우세한<br />

전투력의 로마군이 결국 승리를 차지했으며, 이들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잿더미로<br />

만들고(서기 70년) 유대인들의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를 함락시켰다(73년).<br />

예루살렘과 제 2 성전의 파괴는 유대 민족에게 큰 재앙과도 같았다. 당대의 유대 역사가<br />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의하면, 예루살렘과 그 외 다른 지역의 포위 공격 속에 유대인 수십<br />

만 명이 죽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노예로 팔려갔다.<br />

시몬 바르 코크바의 반란(서기 132년) 직후 짧은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마지막으로<br />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며 예루살렘과 유대를 탈환했다. 그러나 로마의 막강한 힘 앞에<br />

이어질 결과는 너무도 자명했다. 3년이 지난 후 예루살렘은 로마 관습에 따라 “황소의<br />

멍에로 갈아 엎어”졌으며, 유대는 팔레스티나, 예루살렘은 아엘리아 카피톨리나 라는<br />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br />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모두 불타버렸지만 유대민족과 유대교만은 로마와의 충돌 속에<br />

서도 살아남았다. 입법과 사법을 총괄하는 최고 기구 산헤드린(크네세트 하그돌라의 후신)이<br />

서기 70년에는 야브네에서, 후에는 티베리야에서 재소집 되었다. 국가와 성전의 통합된 체<br />

계 없이 존속된 소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점차 복구되는 한편 때때로 고향으로 돌아온 망


21<br />

명자들이 힘을 보탰다. 제도적 공동 생활이 복구되었고, 랍비들이 제사장의 자리를 대신하<br />

였으며, 유대 회당은 유대인 공동체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 점은 가버나움, 고라신, 바르<br />

암, 가믈라 등지에서 발견된 유대 회당의 유물들이 잘 입증해주고 있다. 할라카(유대 종교<br />

법)는 유대인들을 묶어주는 공통의 유대로 작용하며 대대로 계승되었다.<br />

예루살렘 함락 후 서기 70년에 로마인들이 발행한 동전. “IVDAEA CAPTA(포로가 된 유대)”<br />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이스라엘 문화재청<br />

2세기에 일어난 바르 코크바 혁명 3년째에 만들어진 4 드라크마 은화. “시몬/예루살렘의 자<br />

유를 위하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이스라엘 문화재청<br />

외세 지배<br />

비잔틴의 지배 (313~636년)


22<br />

4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313년)과 비잔틴 제국 창건에 이어 이스라엘 땅<br />

은 기독교 중심 국가가 되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의 기독교 성지에는 교회가 세워<br />

졌고 나라 도처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어느 정도 누렸던 자치권과 공<br />

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일년에 단 하루(Tisha B’av – 아브월 9일)<br />

성전 파괴를 애도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었다.<br />

614년에 페르시아 침공이 있자 유대인들은 해방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품고 이를 지원했다.<br />

유대인들은 이 같은 원조에 대한 보답으로 예루살렘 정부를 얻었고, 이 시기는 약 3년간 지<br />

속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비잔틴 군대가 예루살렘을 재탈환하여(629년) 다시 유대인 거주자<br />

들을 축출했다.<br />

성묘 교회 • I. 스툴만(Sztulman)<br />

빵과 물고기 기념 성당 바닥에 장식된 5세기 모자이크 무늬 • 이스라엘 문화재청<br />

아랍의 지배 (636~1099년)


23<br />

바위의 돔. 7세기에 움마야 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가 예루살렘 성전산(하람 알 샤리프)<br />

에 세운 사원 • I. 스툴만<br />

아랍이 이스라엘 땅을 정복한 것은 무하마드가 사망(632년)한 지 4년이 지난 때였고, 이들<br />

의 지배는 그 후 4세기가 넘게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다메섹에서, 그 후에는 바그다드와 이<br />

집트에서 여러 칼리프들이 이 지역을 통치했다. 지배 초기에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가<br />

재개되고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딤미(dhimmi, 보호 대상이 되는 비무슬림들)라는 관습적 지<br />

위가 주어졌다. 이로서 유대인들은 생명과 재산, 예배의 자유를 보장받는 대신 특별 인두세<br />

와 토지세를 납부해야 했다.<br />

그러나 그 후 비이슬람교도에게 가해진 각종 규제조치(717년)는 유대인들의 종교 의식, 법<br />

적 지위 및 공적 행동에 악영향을 미쳤다. 경작지에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많은 사람들이<br />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으나 그곳에서도 그들의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또한<br />

사회적, 경제적 차별이 심해짐에 따라 아예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11세기 말에 이<br />

르자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 사회는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고 조직적, 종교적 응집력도 약화


24<br />

되었다.<br />

십자군 시대 (1099~1291년)<br />

이후 200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한 것은 십자군 세력이었다.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br />

호소에 따라 이교도들에게서 성지를 되찾기 위해 유럽에서 진군해왔다. 1099년 7월, 5주간의<br />

포위공격 끝에 제 1차 원정군의 기사들과 그들이 이끌고 온 하층민 군대는 예루살렘을 점<br />

령하고 그곳에 거주하던 비기독교인들 대부분을 학살했다. 유대인들은 회당 안에 장벽을 쌓<br />

아 자신들의 거점을 방어하려 했지만 결국 불에 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 후 수십 년<br />

에 걸쳐 십자군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까지 세력을 넓혀갔는데, 조약과 협정을 사용하기도<br />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유혈 군사 정복을 통한 확장이었다. 십자군의 라틴 왕국은 주로 요<br />

새화된 도시와 성에만 국한된 소수 정복자들의 왕국이었다.<br />

예루살렘의 십자군 왕의 인장 • 이스라엘 문화재청<br />

십자군이 유럽에서 이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열자 성지 순례가 일반화된 것과 동시에<br />

고향 땅으로의 귀환을 시도하는 유대인들의 수도 늘어났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300명의<br />

랍비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무리를 지어 들어와 일부는 악고(아크레)에, 일부는 예루살렘에<br />

정착했다.


25<br />

십자군이 살라딘 휘하의 이슬람군에게 격파된(1187년) 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br />

있는 권리를 비롯해 어느 정도의 자유를 되찾았다. 살라딘의 죽음(1193년) 후 십자군이 다<br />

시 이 나라에 기반을 얻었지만 그들의 주둔지는 일련의 요새화된 성에 국한되었다.<br />

십자군이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은 이슬람 마믈루크 군대에게 최종적으로 패하면서(1291년)<br />

십자군의 이스라엘 지배는 종식되었다.<br />

마믈루크의 지배 (1291~1516년)<br />

마믈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 이스라엘 땅은 다메섹 관할 하의 고립 지역이 되었다. 악<br />

고, 욥바를 비롯한 여러 항구들은 새로운 성전( 聖 戰 )에 대비해 파괴되었고 육로와 해상 교역<br />

모두 중단되었다. 중세 말에 이르자 이 나라 도시들은 <strong>사실</strong>상 폐허가 되고 예루살렘의 대부<br />

분 지역이 버려진 바 되었으며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는 가난에 허덕였다. 마믈루크의 쇠퇴<br />

기는 정치적∙경제적 격변과 전염병, 메뚜기떼, 지진 강타 등으로 더욱 암울한 시기였다.<br />

오스만 제국의 지배 (1517~1917년)


26<br />

1517년에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이스라엘 땅은 네 구역으로 분할되었고, 행정적으로 다메섹<br />

에 포함되어 이스탄불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 시대 초기에는 약 1,000호의 유대인<br />

가구가 이 땅에 살았는데, 주로 예루살렘, 나블루스(세겜), 헤브론, 가자, 사페드(츠파트), 갈<br />

릴리 마을 등지에 거주했다. 이 유대인 공동체는 이스라엘 땅을 떠난 적이 없는 유대인 후<br />

손들과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br />

술레이만 대제가 죽을 때까지(1566년) 오스만 제국의 안정된 정부에 의해 상황이 개선되면<br />

서 유대인들의 이주가 활발해졌다. 새로 이주해온 이들 중 일부가 예루살렘에 정착하기도<br />

했지만 대부분은 사페드 지역으로 갔다. 16세기 중반에 이르자 사페드의 유대인 인구는 대<br />

략 1만 명으로 증가했고 이 도시는 활발한 지적 활동의 중심이자 직물생산의 중심지로 번<br />

창하였다.<br />

이 기간 동안 카발라(유대 신비주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법전화된 <br />

같은 유대법률에 대한 당대의 해석들이 사페드의 여러 학파들로부터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br />

는 유대인 사회로 퍼져 나갔다.<br />

오스만의 지배 체제가 점차 열악해지면서 이스라엘 땅은 크게 방치되었다. 18세기 말에는<br />

많은 토지가 부재 지주들의 소유 하에 궁핍한 소작 농민들에게 임차되었고 세금은 일관성<br />

없이 마구잡이로 부과되었다. 갈릴리의 대삼림과 카르멜 산맥은 벌목되고 농경지는 습지와


27<br />

사막에 침식되었다.<br />

근대기<br />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세의 후진성은 점차 사라지고 진보의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br />

양의 여러 열강이 교묘한 책략으로 세력을 다지고자 했는데, 주로 선교활동이 진입 수단이<br />

되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학자들이 성서 고고학 연구에 착수했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br />

오스트리아, 미국이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기선이 이 땅과 유럽 사이를 정기 운항<br />

하기 시작했고, 우편과 전신이 연결 설치되었으며 예루살렘과 욥바를 잇는 도로가 최초로<br />

건설되었다. 세 대륙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로서 이스라엘 땅의 재탄생은 수에즈 운하의<br />

개통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br />

그 결과 이곳 유대인들의 상황이 서서히 개선되었고 이들의 인구도 크게 증가했다. 19세기<br />

중반 유대인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예루살렘의 인구 과밀 상황으로 인해 성벽 바깥에<br />

최초로 교외 거주 지역을 건설했고(1860년), 향후 25년간 7개 지역을 추가로 건설하여 이<br />

신도시의 핵을 형성하였다. 1870년에 이르자 예루살렘 전체 인구의 과반수가 유대인이었다.<br />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농경지가 매입되고, 농촌 마을들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오랫동안 예<br />

배의식과 문학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히브리어도 다시 부활했다. 시온주의 운동이 태<br />

동할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br />

시온주의: 유대인들의 민족 해방 운동을 가리키는 시온주의는 예부터 예루살렘과 이스라엘<br />

땅과 동의어로 사용되던 “시온(Zion)”이라는 말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시온주의 사상<br />

—유대민족이 조상의 땅을 되찾는다—은 수세기에 걸친 디아스포라(유대인의 세계 각지로의<br />

이산) 상태에서 유대인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온 이스라엘 땅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깊은<br />

애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28<br />

동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과 박해에 대한 반발로, 그리고 서유럽 사회<br />

에서 차별대우를 종식시키거나 유대인을 지역사회에 통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형식<br />

적 해방에 대한 환멸이 갈수록 커지면서 정치적 시온주의가 대두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br />

테오도르 헤르쩰의 주도 아래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 1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시온주의<br />

기구가 설립되면서 공식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시온주의 운동의 프로그램은 관념적. 요<br />

소와 실천적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모두 유대인의 이스라엘 땅<br />

으로의 귀환을 촉진하고, 유대민족의 삶의 사회∙문화∙경제∙정치적 재건을 앞당기고, 유대인<br />

들의 역사적 고향 땅에 국제적으로 인정 받고 법적으로 보장되는 고국을 얻어 그곳에서 유<br />

대 민족이 박해로부터 벗어나 그들 고유의 삶과 정체성을 키워나갈 수 있게끔 하는 것을 목<br />

표로 했다<br />

테오도르 헤르쩰 • 중앙 시온주의 기록 보관소<br />

이주<br />

시온주의로 동기부여를 받고, 유대인들의 시온주의 이상에 대한 영국의 동조로 나타난 외무<br />

장관 밸푸어 경의 선언(1917년)에 고무되어 1919년에서 1939년 사이에 이스라엘 땅으로 들<br />

어오는 이주민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발전시키는데 있어 각기<br />

다른 측면에서 기여를 했다.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주로 러시아에서 건너온 3만 5천여<br />

명은 향후 수년간 공동체의 성격과 조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개척자들은 포괄적<br />

인 사회∙경제적 하부구조의 초석을 마련했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독특한 공동체적 조합


29<br />

형태의 농촌 거주집단인 키부츠(kibbutz)와 모샤브(moshav)를 설립했으며, 주택과 도로 건설<br />

을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br />

그 뒤를 이어 1924년과 1932년 사이에 주로 폴란드에서 온 약 6만 명의 이주민들은 도시<br />

생활을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주로 텔아비브, 하이파, 예루살렘에<br />

정착하여 중소기업과 건설회사, 경공업체를 설립하였다. 2차 세계대전 전에 마지막으로 약<br />

16만 5천 명의 유대인이 대규모로 들어왔는데, 이 이주는 1930년대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br />

권을 잡은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상당수가 전문가와 학자로 구성되어 있던 이 신규 이<br />

주민들은 중서부 유럽에서 온 최초의 대규모 유입 인원이었다. 이들의 학력과 기술, 경험은<br />

비즈니스 표준을 높이고 도시와 시골의 편의시설을 개선했으며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생활을<br />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br />

허버트 새뮤얼 경. 팔레스타인을 담당한 최초의 영국 고등 판무관<br />

행정


30<br />

영국의 위임통치 당국은 유대인과 아랍인 집단 사회에 각각의 내부문제를 직접 관리할 수<br />

있는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 권한을 활용하여 유대 공동체 이슈브(Yishuv)는 정당 대표성을<br />

바탕으로 자치 기구를 선출했다. 이 기구는 매년 모임을 가져 활동상황을 점검하고 여러 정<br />

책과 프로그램을 실행할 민족 평의회(Va’ad Leumi, 바아드 레우미)를 선출했다. 현지 자원과<br />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모금한 기금을 토대로 나라 전역에 걸친 교육, 종교, 보건, 사회 서<br />

비스망이 개발되고 유지되었다. 1922년에는 위임 통치령에 명기된 대로 ‘유대인 기구’가 구<br />

성되어 영국 당국과 외국 정부, 국제 조직들에 대하여 유대 민족을 대표하는 역할을 했다.<br />

경제 발전<br />

30년의 위임통치 기간 동안 농업은 확대되고 공장들이 세워졌으며 나라 전역에 새 도로가<br />

건설되었다. 또한 요르단 강의 물을 이용하여 전력을 생산했고, 사해의 광물 자원을 개발했<br />

다. 노동 총연맹인 히스타드룻(Histadrut)이 설립되어(1920년) 산업부문에 조합 소유의 기업<br />

체를 세우고 농촌지역에 대한 서비스를 판매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일자리<br />

를 제공했다.<br />

소돔 칼륨 공장의 염전• G.P.O./ Z. 클루거


31<br />

문화<br />

시간이 지나면서 문화적 생활양식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 사회만의 고<br />

유한 형태를 띠었다. 미술, 음악, 무용이 전문학교와 스튜디오의 설립과 함께 서서히 발전했<br />

다. 화랑과 연주회장은 각종 전시와 공연을 위한 장소를 제공해주었고, 심미안을 지닌 대중<br />

들이 이를 관람했다. 새로운 연극의 개막, 새로운 책의 출간, 지역 화가의 회고전 등이 있으<br />

면 언론은 즉시 분석기사를 내놓았고 대중들은 커피숍과 사교 모임에서 이들을 주제로 열띤<br />

토론을 벌였다.<br />

히브리어가 영어와 아랍어와 함께 이스라엘의 공식어로 인정되면서 각종 문건, 동전, 우표,<br />

라디오 방송 등에 사용되었다. 히브리어로 된 출판이 급증했고, 이스라엘은 히브리 문학 활<br />

동의 세계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다양한 장르의 극작품들이 열광적인 청중을 대상으로 문을<br />

열었고, 히브리어로 극본을 쓰는 작업이 최초로 시도되었다.<br />

유대의 민족적 부흥과 유대인 공동체의 국가 재건 노력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강한 반대에<br />

3개의 유대인 지하 조직: 영국의 위임통치 기간 중 3개의 지하조직이 활동을 했다. 그 중


32<br />

가장 대규모의 하가나(Haganah)는 유대인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자위 단체로서 유대인<br />

공동체에 의해 1920년에 창설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이 단체는 아랍의 공격에 대한 보<br />

복을 단행하고 유대인 이민에 대한 영국의 제재 조치에 대규모 시위와 사보타주로 대항했다.<br />

1931년에 조직된 에쩰(Etzel)은 하가나의 온건한 태도에 반대하며 아랍과 영국의 목표대상<br />

에 대항하는 독자적 행동을 취했다. 가장 규모가 작고 호전적인 단체 레히(Lehi)는 1940년<br />

에 조직되었다. 이 3개 조직은 1948년 6월 이스라엘 방위군이 설립되면서 해산했다.<br />

지하 방위 조직의 조직원이 라이플총을 숨기는 모습 (1947년) • 이스라엘 공보부/ H. 핀<br />

부딪쳤다. 이들의 적개심은 1920년, 1921년, 1929년, 1936~39년의 기간에 걸쳐 격렬한 폭동<br />

으로 분출되어 유대인들에 대해 이유 없는 공격이 가해졌다. 유대인 교통수단이 공격 당하<br />

고 들과 숲이 불탔으며 1929년에는 헤브론 학살이 일어났다. 시온주의자들이 초기에 취한,<br />

아랍인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이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는<br />

양극으로 치달으며 폭발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두 민족 운동의 상반되는 목표를 인식한 영<br />

국 측은 나라를 둘로 나눠 한쪽은 유대 국가로, 다른 한쪽은 아랍 국가로 정하되 둘을 하나<br />

의 경제 연합으로 묶을 것을 제안했다(1937년). 유대인 지도층은 이 분할 권유를 받아들였<br />

고, 이 제안의 여러 측면을 재공식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대인 기구에 영국 정부와의<br />

협상 권한을 위임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모든 분할 계획에 강경한 반대 자세를 취했다.<br />

아랍의 대규모 반 유대 폭동이 계속되자 영국은 유대인의 이주를 강력히 규제하는 백서를<br />

발행했다(1939년 5월). 이는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나치의 박해에 대한 피난처 제공을 부정<br />

하는 결과를 낳는데도 불구하고 시행된 조치였다.


33<br />

그 직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가 된 다비드 벤 구리온은<br />

이와 같이 선언했다.<br />

“우리는 백서가 발표되지 않은 것처럼 전쟁에 나가 싸울 것이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br />

처럼 백서와 싸울 것이다.”<br />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br />

제 2차 세계대전 동안(1939~45년) 나치 정권은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를 말살하려는 고의적<br />

계획을 치밀하게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150만 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600만에 달하<br />

는 유대인을 살해했다. 나치군이 유럽 전역을 휩쓸 때 유대인들은 무자비한 박해를 받고 고<br />

통과 굴욕을 당했으며 강제 거주 지구인 게토로 내몰렸다. 이곳에서 무장 저항을 시도했으<br />

나 돌아온 것은 더욱 거센 탄압뿐이었다. 유대인들은 게토에서 다시 수용소로 옮겨졌는데,<br />

소수의 운 좋은 이들은 강제 노동을 당했지만 대부분은 집단으로 총살 처형되거나 가스실에<br />

서 죽음을 맞았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부는 다른 나라로 탈출<br />

했고, 소수는 게릴라에 합류했으며, 일부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비유대인들의 도움으로<br />

숨을 수 있었다. 그 결과, 한때 세계에서 가장 대규모의 활기찬 유대인 공동체를 구성했던<br />

약 900만의 인구 중 3분의 1만이 살아남았으며, 그것도 전쟁 전에 유럽을 떠난 사람들을<br />

포함한 숫자이다.<br />

나치가 유대인에게 착용하게 한 노란 배지<br />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지원병들: 이스라엘 내 유대인 공동체에서 2만 6천 명이 넘는 남녀


34<br />

유대인들이 영국군에 자원 입대하여 육군, 공군, 해군병으로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들에 맞<br />

서 싸웠다. 국내의 유대인 기구와 해외의 시온주의 운동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전쟁에<br />

참가한 공을 인정받고자 오랜 기간 노력한 끝에 1944년 9월 영국군 내의 독립 부대로서 자<br />

체 깃발과 휘장을 가지는 유대인 여단이 조직되었다. 5,000명 정도의 남성으로 구성된 이<br />

여단은 이집트, 북부 이탈리아, 북서 유럽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1945년에 유럽에서 연합군<br />

이 승리를 거둔 뒤 이 부대원들 중 다수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시<br />

키기 위한 “불법 이주” 노력에 동참했다.<br />

영국군 병영 안의 유대인 신병들 • 이스라엘 공보부/ Z. 클루거<br />

전쟁 후 아랍의 반대가 있자 영국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정착할 수 있는 유대인의 수를<br />

더욱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자 유대인 공동체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구하기 위한 광범위<br />

한 “불법 이민” 활동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이에 맞섰다.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약 8만<br />

5천 명의 유대인들이 비밀리에, 대부분 위험한 경로를 통해 이스라엘 땅에 들어왔다. 난민<br />

들이 이 땅에 닿지 못하도록 차단하기 위해 영국이 해안을 봉쇄하고 국경 순찰대를 배치했<br />

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온 것이었다. 도중에 잡힌 사람들은 사이프러스 섬의 임시 수용소에<br />

억류되거나 유럽으로 돌려 보내졌다.<br />

독립으로 가는 길<br />

유대와 아랍 사회의 상충되는 요구를 중재할 수 없었던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br />

엔 총회의 의제로 상정할 것을 요청했다(1947년). 그리하여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


35<br />

1947년 11월 29일 텔아비브 내의 자발적 축하 행렬 • G.P.O./ H. 핀<br />

나라의 장래에 <strong>관한</strong> 제안서를 작성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투표를 통해 이스<br />

라엘을 각각 유대와 아랍의 두 국가로 나누자는 위원회의 권고안을 채택했다. 유대인 공동<br />

체는 이 계획을 수락했으나 아랍측은 거부했다.<br />

유엔의 투표가 있은 후, 아랍 국가들의 비정규적 지원군들의 원조를 받는 지역의 아랍 민병<br />

대는 유대인 사회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여 분할 결정을 좌절시키고 유대 국가 수립<br />

을 막고자 했다. 유대 방위 조직들은 여러 번의 후퇴 끝에 대부분의 공격군을 몰아내고 유<br />

대 국가로 할당된 지역 전체를 손에 넣었다.<br />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 통치가 종식되었을 때 이 지역의 유대인 인구는 약 65만 명<br />

에 달했고 이들은 정치, 사회, 경제적 기반을 제대로 갖춘 조직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br />

다. <strong>사실</strong>상, 모든 의미에서 하나의 나라였고, 이름만 없을 뿐 이미 하나의 국가였던 것이다.


36<br />

이스라엘<br />

1947년 분할 계획 (유엔 결의안 181)<br />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Transjordan-트랜스요르단/ Egypt-이집트/ Mediterranean Sea-지<br />

중해/ Haifa-하이파/ Tel Aviv-텔아비브/ Jaffa-욥바 / Jerusalem-예루살렘/ Beer Sheva-브에르셰<br />

바<br />

■ 유대국가<br />

■ 아랍국가<br />

□ 국제지역<br />

1949~1967년 휴전선<br />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Jordan-요르단/ Israel-이스라엘/ Egypt-이집트/ Mediterranean<br />

Sea-지중해/ Haifa-하이파/ Tel Aviv-Yafo-텔아비브-욥바/ Samaria-사마리아/ Judea-유대/<br />

Jerusalem-예루살렘/ Gaza-가자/ Beer Sheva-브에르셰바<br />

■ 이스라엘<br />

■ 요르단 통치령<br />

■ 이집트 정부 통치령<br />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이집트,<br />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의 정규군이 침공해 옴으로써 이스라엘은 선조의 땅에서 되<br />

찾은 주권을 지켜야만 했다.<br />

이스라엘 독립전쟁으로 알려진 이 싸움에서 새로이 구성되어 준비가 미흡했던 이스라엘 방<br />

위군(IDF)은 간헐적으로 일어난 격렬한 전투 속에 침략군을 격퇴하며 승리를 거뒀다. 이 전<br />

쟁은 약 15개월간 지속되었고 6,000명이 넘는 이스라엘인(당시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의<br />

1%에 가까운 수치)이 목숨을 잃었다.<br />

1949년 초 몇 달간 유엔의 중재 하에 이스라엘과 각 침략국(이스라엘과의 협상을 거부한<br />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간에 직접 협상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종전 상황을 반영한 휴전<br />

협정을 체결하였다. 협정에 따라 해안 평야와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 전체가 이스라엘의 통<br />

치권에 속하게 되었다. 유대와 사마리아(서안 지구)는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 지구


37<br />

는 이집트의 행정권 안에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구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는 요르<br />

단이, 서부 지역은 이스라엘이 관할하게 되었다.<br />

국가 건설<br />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은 그들 민족이 오랜 기간 힘겨운 투쟁으로 되찾은 국가의 건설을<br />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전체 유권자의 85%에 육박하는 이들이 참여한 총선(1949년 1월 25<br />

일)을 통해 제 1회 크네세트(의회)가 120석 규모로 개원하였다. 이스라엘을 국가의 위치에<br />

올려놓는 일에 주역이 된 두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다. 유대인 기구의 의장 다비드 벤 구리<br />

온이 초대 총리로 선택되었고, 세계 시온주의자 협회 회장 하임 와이즈만이 국회에서 초대


38<br />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5월 11일에는 이스라엘이 유엔의 59번째 공식 회원국으로<br />

가입했다.<br />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의 핵심이 되는 ‘이산민 되 모으기’라는 구상에 따라 나라의 문호가 활<br />

짝 열리면서 모든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들어올 수 있는 권리와 입국과 동시에 시민권을 획<br />

득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독립 후 처음 4개월 동안 대부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로<br />

구성된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 1951년 말까지 아랍 각지에서 피난<br />

온 30만여 명을 포함하여 총 68만 7천 명의 성인 남녀와 어린이들이 도착하면서 유대 인구<br />

가 배로 늘어났다.<br />

독립전쟁으로 야기된 경제적 부담과 급증하는 인구를 부양할 필요성에 따라 국내적인 긴축<br />

재정과 해외로부터의 재정적 원조가 불가피했다.<br />

미국 정부의 원조와 미국 은행들의 차관, 재외 거주 유대인들의 기부금, 전후 독일의 배상<br />

금 등이 모두 주택 건설, 농업의 기계화, 상선대와 국적 항공사의 설립, 광물 개발, 산업 발<br />

다비드 벤 구리온, 비전을 갖춘 인물 • 이스라엘 공보부/ K. 졸탄<br />

예후드 중앙 광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짐 궤짝 위에 앉아 있는 이주민 여성 • 이스라엘 공보


39<br />

부/ K. 졸탄<br />

전과 도로, 통신, 전력망 확대에 사용되었다.<br />

건국 10주년이 다가올 무렵에는 산업 생산량과 고용 인구 수가 2배로 늘고 산업 수출은 4<br />

배로 증가했다. 경작 면적이 크게 확대되어 육류와 곡물을 제외한 모든 기초 식품을 자급하<br />

게 되었으며, 대부분 황무지였던 약 5만 에이커의 부지를 녹지화하고 500 마일(800 km)에<br />

이르는 고속도로변에 나무를 심었다.<br />

유대인 공동체가 건국 이전부터 발전시켜온 교육 체계는 이제 아랍 지구까지 포괄하며 크게<br />

확대되었다. 5~14세 어린이 모두에게 무상 의무 교육이 실시되기 시작했다(1978년부터 의무<br />

교육은 16세, 무상 교육은 18세까지로 변경됨). 문화와 예술 활동이 꽃피면서 중동과 북아<br />

프리카, 서구의 요소가 혼합되었다. 이는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수대에 걸쳐<br />

거주했던 나라의 주요한 문화적 측면과 그들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비<br />

롯된 현상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10주년이 되자 이 나라 인구는 2백만을 넘어섰다.


40<br />

1956년 시나이 분쟁<br />

건국 후 수년 동안 <strong>이스라엘에</strong> 그늘을 드리운 것은 심각한 안보 문제였다. 1949년의 휴전<br />

협정은 영구적인 평화에 이르는 길을 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위반 사례가 나타<br />

났다. 1951년 9월 1일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과는 상반되게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br />

라엘 행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가 금지되었으며 티란 해협의 봉쇄가 강화되었다. 인접 아<br />

랍 국가들의 테러 공격대가 살인과 방해 공작을 목적으로 <strong>이스라엘에</strong> 침투하는 사건이 날로<br />

증가했다. 시나이 반도는 점차 거대한 이집트 군사 기지로 변했다.<br />

1956년 시나이 분쟁<br />

■ 이스라엘<br />

■ 요르단 통치령<br />

■ 이스라엘이 점령했다가 반환한 지역<br />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Jordan-요르단/ Saudi Arabia-사우디 아라비아/ Egypt-이집트/<br />

Mediterranean Sea-지중해/ Red Sea-홍해/ Straits of Tiran-티란 해협/ Haifa-하이파/ Tel Aviv-<br />

Yafo-텔아비브-욥바/ Samaria-사마리아/ Judae-유대/ Jerusalem-예루살렘/ Beer Sheva-브에르<br />

셰바 / Sinai-시나이/ Eilat-에일랏<br />

1956년 10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3국 군사 동맹을 체결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생존<br />

에 긴박한 위협이 대두되었다. 8일 간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가자 지구와 시나<br />

이 반도를 점령했으며 수에즈 운하의 동쪽 10마일(16 km) 선상에서 정지하였다. 유엔이 이<br />

집트-이스라엘 국경선에 유엔 긴급군(UNEF)을 배치하기로 결의하고 이집트가 에일랏 만 자<br />

유 항행을 보장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몇 주 전에 점령했던 이 지역에서 단계적으로 철수


41<br />

(1956년 11월~1957년 3월)하는데 동의했다. 그 결과 티란 해협이 개방되어 페르시아만으로<br />

부터의 석유 수입과 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 발전이 가능해졌다.<br />

확립기<br />

이스라엘의 두 번째 10년(1958~68년) 동안 수출은 두 배로 늘고 국민총생산(GNP)은 매년<br />

약 10%씩 증가했다. 종이, 타이어, 라디오, 냉장고 등 기존에 수입하던 일부 품목들을 국내<br />

에서 생산하기 시작하는 한편 금속, 기계, 화학, 전자 등 신설 분야는 가장 급속한 성장을<br />

이루었다. 국산 식품의 국내 시장이 빠른 속도로 포화 상태에 가까워짐에 따라 농업 부문은<br />

수출용 청과물과 식품 가공업계에 공급할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늘어난 교역<br />

량을 소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하이파 항 외에 지중해 연안 아슈돗 (아스돗)에 두 번째 심해<br />

항을 건설했다.<br />

국립 수로의 콘크리트 파이프 단면(직경 108”) • 중앙 시온주의 기록 보관소 제공<br />

예루살렘에는 크네세트(의회)의 영구적인 근거지가 지어졌고, 히브리 대학과 하닷사 의료 센<br />

터의 부속 시설들이 독립 전쟁 후 사용할 수 없게 된 스코푸스 산에 있던 구 건물들을 대신<br />

해 새로운 부지에 건설되었다. 이와 동시에, 유대민족의 문화예술 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br />

전시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박물관이 설립되기도 했다.


42<br />

이스라엘은 미국, 영연방, 대다수의 서유럽 국가, 남미와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국가, 일부<br />

아시아 국가들과 긴밀한 공조관계를 맺으면서 대외 관계를 꾸준히 확대했다. 광범위한 국제<br />

협력 프로그램이 전개되어 수백 명의 이스라엘 의사와 엔지니어, 교사, 농업 경제학자, 관개<br />

전문가, 청소년 전문가가 여타 개발도상국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하우와 경험을 전해주었다.<br />

1965년에는 독일 연방 공화국과의 대사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는 나치 정권 동안(1933~45<br />

년) 유대인들에게 자행됐던 범죄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그때까지 지연되어온 조치였다.<br />

격렬한 반대와 사회적 논쟁 끝에 마침내 양국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졌다.<br />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 이스라엘 공보부/ J. 밀리<br />

아이히만 재판: 1960년 5월, 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말살 계획의 실무 책임자였<br />

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1950년에 제정된 나치와 나치 협력자 (처벌)법에 따라 재판을 받기<br />

위해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1961년 4월에 열린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인류와 유대 국민에<br />

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언도 받았다.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후<br />

아이히만은 1962년 5월 30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것은 이스라엘 법에 의해 사형이 집<br />

행된 유일한 사례였다.


43<br />

1967년 6일 전쟁<br />

이집트와 요르단 국경 지역에서 아랍 테러단체의 기습 증가와 북부 갈릴리의 농경 정착지에<br />

대한 시리아 포병대의 지속적인 폭격, 인근 아랍 국가들의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으로 인해<br />

이제 어느 정도 평온한 시기가 오리라는 희망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1967년 5월 이집트<br />

는 대규모 군대를 시나이 사막으로 이동시키고 1957년부터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유엔<br />

평화 유지군에게 철수를 명령했으며, 티란 해협을 다시 봉쇄하고 요르단과 군사 동맹을 체<br />

결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적대적인 아랍 군대들과 직면하게 되었다. 인접국<br />

들이 이 유대국가를 무너뜨릴 채비를 갖춤에 따라 이스라엘은 고유의 자위권을 발동하여<br />

1967년 6월 5일 남쪽의 이집트에 선제 공격을 가했으며, 뒤이어 동쪽의 요르단에 반격을<br />

가하고 북쪽의 골란 고원에서 보루를 구축하고 있던 시리아군을 패주시켰다.<br />

6일 전쟁 후의 휴전선, 1967년<br />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Jordan-요르단/ Saudi Arabia-사우디 아라비아/ Egypt-이집트/<br />

Red Sea-홍해/ Straits of Tiran-티란 해협/ Mediterranean Sea-지중해/ Haifa-하이파/ Tel Aviv-<br />

Yafo-텔아비브-욥바/ Jerusalem-예루살렘/ Beer Sheva-브에르셰바 Sinai-시나이/ Eilat-에일랏<br />

통곡의 벽 앞의 공수부대원• 이스라엘 공보부/ D. 루빙거


44<br />

6일 간의 전투가 끝날 무렵, 이전의 휴전선이 새롭게 변경되어 유대, 사마리아, 가자, 시나<br />

이 반도, 골란 고원이 이스라엘의 관할 하에 들어왔다. 그 결과 북부 지방의 마을들은 19년<br />

간 주기적으로 일어났던 시리아의 포격에서 해방되었으며,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라엘 행 선<br />

박은 티란 해협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49년 이래로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공동<br />

통치를 받으며 분리되어 있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통치권으로 재통합되었다.<br />

전쟁에서 전쟁으로<br />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의 외교적 과제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안 242호를 기초로<br />

자국의 군사적 성과를 영구적 평화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유엔의 결의안은 "이 지역 모든<br />

국가의 주권, 영토 보전, 정치적 독립과 안전하고 승인된 국경 내에서 군사적 위협과 행동<br />

으로부터 자유로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br />

1967년 8월의 카르툼 정상회담에서 공식화된 아랍의 입장은 "이스라엘과의 평화와 협상, 이<br />

스라엘에 대한 인정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1968년 9월에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제방을 따<br />

라 산발적이고 정적인 군사행동을 하는 ‘소모전’을 개시했고, 이는 전면적인 국지전으로 확<br />

대되어 양측에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교전 상태는 1970년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수에즈<br />

운하를 따라 새로 그어진 휴전선을 수락하면서 막을 내렸다.<br />

1973년 욤 키푸르 전쟁<br />

3년간 비교적 조용하던 국경지대의 평화는 유대력에서 가장 신성한 날인 욤 키푸르(속죄일)


45<br />

에 산산조각이 났다. 이날 이집트와 시리아는 <strong>이스라엘에</strong> 합동 기습 공격을 개시하여(1973<br />

년 10월 6일) 이집트군이 수에즈 운하를 건넜고 시리아 군대는 골란 고원에 침입했다. 이후<br />

3주 동안 이스라엘 방위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침략군을 격퇴했으며,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br />

집트 안으로 들어섰고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 내 20마일(32 km)까지 진격했다. 이스라엘과<br />

이집트,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 2년간 힘겹게 진행된 협상 결과 병력 철수 협정이 조인되<br />

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전쟁 중 점령한 일부 영토로부터 철군하였다.<br />

1982년 갈릴리 평화작전<br />

이스라엘은 북쪽 국경에 인접한 레바논과의 충돌을 결코 원치 않았다. 그러나 1970년에 팔<br />

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요르단에서 추방된 뒤 레바논 남부로 본거지를 옮기고 이스라엘<br />

북부지역(갈릴리)의 마을과 촌락에 지속적으로 테러 행위를 저질러 많은 사상자와 피해가<br />

생기게 되자 이스라엘 방위군은 국경선을 넘어 레바논으로 진격하였다(1982년). “갈릴리 평<br />

테러리즘: <strong>이스라엘에</strong> 대한 아랍과 팔레스타인의 테러행위는 이스라엘 건립 이전부터 시작<br />

해 그 후로도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 1967년 6일 전쟁(이 전쟁으로 이곳 영토에 이스라엘군<br />

이 주둔하게 됨)에 앞서 20년간 수천 건의 테러 공격이 발생하여 이스라엘 시민들이 죽거나<br />

부상을 입었다. 1964년에 PLO가 설립되면서 이 단체가 테러전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46<br />

1970년대와 80년대에 PLO 산하의 여러 테러 조직들은 이스라엘 국내외에서 수많은 테러<br />

화작전”은 PLO의 조직적이고 군사적인 하부기반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는 결과를<br />

가져왔다. 이스라엘은 갈릴리 지역민들을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향후 18년간<br />

북쪽 국경에 인접한 레바논 남부에 작은 안전 완충지대를 유지했다.<br />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카터 미국 대통령, 베긴 이스라엘 총리 • 이스라엘 공보부/ Y.사르<br />

International Boundary - 국제 국경/ Ceasefire Line – 휴전선/<br />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Jordan-요르단/ Saudi Arabia-사우디 아라비아/ Egypt-이집트/<br />

Red Sea-홍해/ Mediterranean Sea-지중해/ Haifa-하이파/ Tel Aviv-Yafo-텔아비브-욥바/<br />

Jerusalem-예루살렘/ Beer Sheva-브에르셰바 / Eilat-에일랏/ Sinai-시나이<br />

이집트와 요르단과의 평화


47<br />

전쟁에서 평화로<br />

1977년 의회 선거 결과 거의 30년에 가까운 노동당 집권이 끝을 맺고 리쿠드 당(우파와 중<br />

도파의 연합 정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신임 총리 메나헴 베긴은 이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br />

를 위해 힘쓰겠다는 모든 전임 총리들의 공약을 되풀이하며 아랍의 지도자들이 협상 테이블<br />

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br />

이스라엘의 평화 호소에 아랍이 거부를 표시하던 순환의 고리는 1977년 11월 안와르 사다<br />

트 이집트 대통령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마침내 깨지고, 그 후 미국의 중재 하에 이집트와<br />

이스라엘의 협상이 이어졌다. 1978년 9월에 이루어진 이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팔레스타인<br />

공격을 감행했다. 그 중 가장 악명 높은 공격의 예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br />

수 11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br />

1993년 테러행위를 중단하겠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약속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br />

협상의 근간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테러 공격은 끝나지 않았고 2000년 9월 이후에는 더욱<br />

강화되어 이스라엘 시민 1천여 명의 목숨을 빼앗고 수 천명의 부상자를 낳았다.<br />

인들의 자치에 대한 상세한 제안을 비롯하여 중동 지역 전반의 평화를 위한 틀을 포함하는<br />

내용이었다.<br />

1979년 3월 2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워싱턴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양국간의 30<br />

년에 걸친 전쟁 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조약 내용에 따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br />

수했으며 기존의 휴전선과 휴전 협정을 상호 인정된 국제 국경으로 전환하였다.<br />

1991년 마드리드 평화회의 이후 요르단과 이스라엘 간에 진행된 3년간의 회담은 1994년 7<br />

월 요르단 하심 왕국의 후세인 국왕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의 선언으로 정점을 맞


48<br />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 이스라엘 공보부/ Y. 사르<br />

이하며 46년간 계속된 두 나라 간의 전쟁 상태를 종식시켰다. 요르단-이스라엘 평화협정은<br />

1994년 10월 26일 아라바 국경지역(이스라엘의 에일랏과 요르단의 아카바 근처)에서 빌 클<br />

린턴 미 대통령의 주재 하에 서명이 완료되었다.<br />

국내 문제<br />

1980년대와 90년대에 이스라엘은 1백만 명이 넘는 새로운 이민자들을 흡수했다. 이들은 주<br />

로 구 소련과 동유럽, 에티오피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다수의 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들과<br />

수많은 신규 소비자들의 유입으로 이스라엘의 경제 팽창이 가속화되었다.<br />

1984년의 의회 선거로 집권한 내각은 노동당(좌파/중립)과 리쿠드당(우파/중립)이라는 양대<br />

정당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1988년에는 리쿠드당이 주도하는 연립정당이 정권을 잡<br />

았고, 1992년에는 노동당과 중도 좌파 군소 정당들의 연립정부가 그 뒤를 이었다. 1995년에<br />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암살된 뒤 1996년에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었다. 총리 선출을 위한 직<br />

접 선거로 베냐민 네타냐후가 당선되어 리쿠드당 중심의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그로부터 3<br />

년도 채 안돼 네타냐후 정부는 퇴진했다. 1999년 하나의 이스라엘 당(좌파/중도)의 대표 에<br />

후드 바락이 총리로 선출되어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으나 2000년 12월에 사임했다. 리쿠


49<br />

드당 총수 아리엘 샤론은 2001년 초부터 뇌졸중으로 쓰러진 2006년 초까지 총리직을 지냈<br />

다. 샤론 총리가 2005년 11월에 출범시킨 카디마당의 수장 에후드 올메르트가 샤론의 뒤를<br />

이어 총리 자리에 올랐다.<br />

모든 내각은 각각 고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평화 달성과 경제 발전, 이민자 통합을 위해<br />

노력을 경주했다.<br />

매년 이스라엘은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암살일을 기리는 특별 추도식을 거행한다. 1995년<br />

11월 4일 라빈 총리가 유대 극우주의자에게 암살된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깊은 애도에 빠졌<br />

다.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그는 전장에서 자리를 이동하여 이스라엘을 평화의 길로 이끈 인<br />

물이었다.


50<br />

평화 협상<br />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이 조인된 후 중동의 평화 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이스라<br />

엘과 여러 국가들은 다양한 구상을 제안했다. 이러한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이뤄 1991년<br />

10월 미국과 구소련의 중재 하에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의 대표들이<br />

한 자리에 모인 마드리드 평화회의가 열렸다. 이 같은 정식 절차에 이어 당사자들 간의 양<br />

자간 협상과 지역 문제를 다루는 다자간 협상이 뒤따랐다.<br />

양자간 협상<br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수개월 간 오슬로에서 진행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br />

(PLO) 협상 대표들의 집중적인 막후접촉에 이어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의 팔레스타인<br />

인들의 자치에 대한 합의내용을 개괄한 원칙 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 DOP)이 공식화


51<br />

되었다. 1993년 9월 13일에 이루어진 조인에 앞서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과 이츠하크<br />

라빈 총리 간에 서신 교환이 있었다. 이 서신에서 PLO는 테러 사용을 포기하고 자체 규약<br />

에서 이스라엘의 존재할 권리를 부정하는 조항을 무효화할 것을 약속했으며, 수십 년간 지<br />

속된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그에 대한 답으로 이스라엘은<br />

PLO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 기구로 인정했다.<br />

원칙 선언은 5년의 팔레스타인 자치 잠정기간에 대해 양측이 합의한 제반 원칙들과 이스라<br />

엘-팔레스타인 협상의 여러 단계의 기본 틀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가자 지구와 여리고 지역<br />

내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합의내용이 1994년 5월에 이행되었으며, 그로부터 3개월 뒤에<br />

는 서안 지구의 교육 및 문화, 보건, 사회 복지, 직접 과세, 관광 분야에 대한 권한과 책임<br />

이양이 이루어졌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명한 원칙 선언과 기타 합의문들은 1995년<br />

9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잠정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완성을 보았다.<br />

잠정 협정은 선거로 선출된 자치 기구인 팔레스타인 의회(1996년 1월에 선출)를 통해 팔레<br />

스타인의 자치를 확대하고 서안 지구에서 이스라엘 방위군(IDF)을 지속적으로 재배치한다는<br />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협정은 또한 최종 지위 협정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br />

계를 관장하는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잠정 협정에 따라 서안 지구는 다음과 같이 세 지역으<br />

로 나누어졌다.


52<br />

A 지역 – 서안 지구의 주요 도시들로 구성. 팔레스타인 의회가 이 지역의 민정과 내부 안보,<br />

공공 질서를 전적으로 관리한다. (헤브론시는 잠정 협정에 명시된 특별 합의 대상이었다. 헤<br />

브론 내 방위군 재배치에 <strong>관한</strong> 협안은 1997년 1월에 조인되었다.)<br />

B 지역 – 서안 지구의 작은 시와 마을들로 구성. 팔레스타인 의회가 민정(A 지역과 동일)과<br />

공공 질서 유지의 책임을 담당하는 한편 이스라엘은 자국 시민들의 안전과 테러 퇴치에 최<br />

우선적인 안보 책임을 계속 유지했다.<br />

C 지역 – 서안 지구 중 유대인 거주지 전체, <strong>이스라엘에</strong>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 거주민<br />

이 거의 없는 지역들로 구성. 영토와 관련한 민정 책임(지역 계획, 구획, 유적 등)을 비롯해<br />

보안과 공공 질서를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관리한다. 팔레스타인 의회는 이를 제외하고 팔레<br />

스타인 인구의 나머지 모든 민정 분야에 <strong>관한</strong> 책임을 맡는다.<br />

잠정 협정에 명시되어 있는 추가적인 방위군 재배치 단계의 이행을 위한 일정은 양측에 의<br />

해 여러 번에 걸쳐 개정되었다. 그 중에서도 1998년 10월의 와이 리버 협정이 특히 주목할<br />

만하다. 이같이 합의된 개정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2000년 3월에 추가 재배치(FRD) 절차 중<br />

1, 2단계를 완료했다. 이러한 재배치의 결과 서안 지구 중 18% 이상이 A 지역으로, 21% 이


53<br />

상이 B 지역으로 지정되었고, 서안 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인구의 98%가 팔레스타인<br />

의 자체 관할 하에 생활했다.<br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간 항구적 타협안의 성격을 결정짓기 위한 양측의 최종 지<br />

위 협상은 예정했던 대로 1996년 5월에 시작되었다. 1996년에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서 하<br />

마스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자행된 자살폭탄 테러는 평화 협상 과정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의<br />

관점을 어둡게 했다. 이후 3년간 중단되었던 최종 지위 협상은 1999년 9월 샤름 엘 셰이크<br />

협정 후에야 재개되었다. 협상에서 다룰 사안들에는 난민, 정착촌, 안보 문제, 국경, 예루살<br />

렘 등이 있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바락과 팔레스타인<br />

자치정부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는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협<br />

상을 재개했다. 이 회담은 아라파트 수반이 관대한 제안을 수락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아<br />

무런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러나 추후 협상을 위한 합의된 원칙을 밝힌 3자 성<br />

명서는 발표되었다.<br />

2000년 9월 팔레스타인은 무차별적 테러행위와 폭력 운동을 개시하여 양쪽 모두에 많은 인<br />

명 손실과 고통을 야기했다. 폭력적인 대립을 종식시키고 평화 협상을 재개하려는 수많은<br />

노력은 팔레스타인의 끊이지 않는 테러행위로 인해 좌절되었다.


54<br />

이스라엘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2002년 6월 24일 연설에서 팔레스타인의 테러 중단<br />

을 위해 제시한 비전을 받아들였고, 모든 사안과 평화에 대한 최종 합의안이 그 뒤를 이었<br />

다.<br />

2003년 5월 25일에 이스라엘은 로드맵을 수용하였고, 이스라엘이 그 실행에 필수적이라고<br />

여기는 의견과 이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이 함께 수반되었다. 그러나 아<br />

직까지 팔레스타인은 테러행위와 선동을 무조건적으로 중단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로드<br />

맵의 첫 단계에 따른 의무사항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대 테러 방지 조치의 일<br />

환으로 보안장벽을 건설했다.<br />

2005년 8월 이스라엘은 5년간 계속된 팔레스타인의 테러로 인한 평화 협상 과정의 답보 상<br />

태를 타개해보고자 사마리아 북부(서안 지구)의 정착지 4곳과 가자 지구에서 군대를 철수시<br />

켰다. 그러나 하마스 정부의 선출 후 팔레스타인의 테러행위는 계속되었으며, 가자 지구에<br />

서 네게브 북부지역을 겨냥한 카삼 미사일 공격과 이스라엘 군인 납치 등의 도발에 이스라<br />

엘은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br />

이스라엘과 시리아: 마드리드 협정의 틀을 토대로 이스라엘과 시리아 대표단의 회담이 워싱<br />

턴에서 시작되었고, 이따금씩 미국 고위급 관료의 참석 하에 양국의 대사급 회담이 열렸다.


55<br />

1995년 12월과 1996년 1월 두 차례의 시리아-이스라엘 평화 회담은 안보와 기타 핵심 사안<br />

들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매우 상세하고 범위 면에서도 포괄적인 이 회담은 향후<br />

의 논의와 검토를 위해 개념적 합의와 접근의 주요 영역들을 확인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br />

간의 협상은 3년 이상 답보 상태를 보인 후 2000년 1월 미국 셰퍼즈타운에서 재개되었다.<br />

그러나 이 협상은 돌파구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2000년 3월 제네바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하<br />

페즈 아사드 대통령이 가진 회담도 협상 재개로는 이어지지 못했다.<br />

시리아는 이란과 함께 헤즈볼라나 그 밖의 여러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와 같이 가장 폭력적<br />

이고 위험한 테러 조직들을 지원하고 있다.<br />

이스라엘과 레바논: 2000년 5월 23일 이스라엘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안 425호를 이<br />

행하겠다는 정부의 결정에 따라 레바논 남부의 안보지대에서 모든 군대의 철수를 완료했다.<br />

그러나 불행히도 레바논은 결의안 425호와 결의안 1559호(헤즈볼라 해체와 레바논 남부지<br />

역에 레바논 군대 배치를 요구하는 내용)를 아직까지 충실히 따르지 않고 있다. 2006년 7월


56<br />

12일에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군인 2명을 납치하고 이스라엘 북부 도시들을 폭격한 후 또다<br />

시 공격이 이어졌다. 이에 이스라엘은 레바논 남부에 보루를 구축하고 있던 헤즈볼라 테러<br />

주둔군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 테러 주둔지는 이란과 시<br />

리아가 공급한 수만 개의 대형 로켓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수백 만 이스라엘 시민들을 공격<br />

목표로 삼았다. 후에 2차 레바논 전쟁으로 알려진 뒤이은 충돌에서 4천 개가 넘는 로켓포가<br />

이스라엘 내 민간인들을 표적으로 발사되어 44명의 민간인 사상자와 광범위한 민간 기반시<br />

설과 재산 피해를 냈다. 또한 이 전투에서 군사 작전 중 119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사망했다.<br />

이 전투는 2006년 8월 11일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결의안 1701호를 채택하면서 끝을 맺<br />

었다. 이 결의안은 납치 군인들의 무조건적 석방을 요구하고, 레바논과 UNIFIL(레바논 주둔<br />

유엔 임시군)이 함께 레바논 남부 전역에 군을 배치하고 레바논 정부 이외의 레바논 민병<br />

단체에 무기 공급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57<br />

불개입 계획(Disengagement Plan)을 발표한 아리엘 샤론 총리(2003년 12월) • 이스라엘 공<br />

보부/ 모셰 밀너<br />

다자간 협상<br />

중동지역의 핵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자간 협상은 평화 협상<br />

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이며, 중동 국가들간 관계 정상화를 촉진하기 위한 신뢰<br />

구축 방안으로 작용한다. 36개 국가와 국제 단체들이 참가한 가운데 1992년 1월에 모스크바<br />

다자간 중동 회담이 개최된 후 이곳에 파견된 대표단들은 5개의 실무 그룹으로 나누어 지<br />

역 내 공동 관심분야(환경, 군축 및 지역 안보, 난민, 수자원, 경제 개발)를 구체적으로 다<br />

루었다. 이 실무 그룹들은 중동 내 여러 장소에서 이따금씩 회담을 개최하고 있다.<br />

미국과 러시아의 주재 하에 핵심 대표단의 대표들로 구성된 운영 위원회는 다자간 협상을<br />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2000년 9월 팔레스타인의 폭력 사태 이후 다자 회담의 대부분<br />

의 활동이 동결되었다.


58<br />

역사적 주요사건<br />

기원전<br />

기원전 17~6세기 – 성서 시대<br />

17세기경<br />

아브라함, 이삭, 야곱—유대 민족의 조상들이 이스라엘 땅에 정착<br />

기근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로 이주<br />

13세기경<br />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뒤 40년간 사막에서 방<br />

랑생활을 함<br />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포함한 모세 오경을 받음


59<br />

13~12세기<br />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정착<br />

1020년경<br />

유대 왕국이 수립되고 사울이 초대 왕이 됨<br />

1000년경<br />

예루살렘이 다윗 왕국의 수도가 됨<br />

960년경<br />

유대 민족의 국가적, 정신적 중심이 되는 제 1성전이 솔로몬 왕에<br />

의해 예루살렘에 건축됨<br />

930년경<br />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br />

722~720 아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이 함락되고 10개 지파는 흩어짐(사라진<br />

10지파)<br />

586 바빌론에 의해 유다가 정복당함<br />

예루살렘과 제 1성전이 파괴되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추방당함<br />

그림: 노암 나다브<br />

제 2 성전시대<br />

538~142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br />

538~515 바벨론으로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귀환하고 성전이 재건됨<br />

332 이스라엘 땅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고 그리스의 지배가 시작<br />

됨<br />

166~160 마카비(하스몬가)가 유대교 행사 금지와 성전 모독에 항거하여 반<br />

란을 일으킴<br />

142~129 하스몬가의 통치 하에 유대인의 자치권 획득<br />

129~63 하스몬 왕조의 지배 하에 유대인 독립<br />

63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 점령


60<br />

기원전 63~서기 313년<br />

기원전 63~4<br />

로마의 지배<br />

로마의 분봉왕 헤롯이 이스라엘 땅을 통치<br />

예루살렘 성전이 개조됨<br />

기원후(CE) – 서력 기원<br />

20~33년경<br />

나사렛 예수의 사역<br />

66 유대인 로마에 항거<br />

70 예루살렘과 제 2성전의 파괴<br />

73 마사다에서 유대인 최후 항전<br />

132~135 바르 코크바가 로마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킴<br />

210년경<br />

유대교 구전 율법(미쉬나)의 성문화 완료<br />

313~636 비잔틴 지배<br />

390년경<br />

미쉬나의 주해서(예루살렘 탈무드) 완성<br />

614 페르시아의 침공<br />

636~1099 아랍 지배<br />

691 칼리프 압둘 말리크가 예루살렘의 제 1, 2 성전이 있던 자리에<br />

바위의 돔 사원 건설<br />

1099~1291 십자군의 통치(예루살렘 라틴 왕국)<br />

1291~1516 마믈루크 지배<br />

1517~1917 오스만 제국 지배


61<br />

1564 유대 법전(슐한 아루크) 편찬<br />

1860 예루살렘 구도시 외곽에 최초의 교외 거주지 건설<br />

1882~1903 제 1차 알리야(대규모 이민)가 주로 러시아에서 온 유대인들로 이<br />

루어짐<br />

1897 테오도르 헤르쩰이 스위스 바젤에서 제 1차 시온주의 총회 개최<br />

시온주의 기구 설립<br />

1904~14 제 2차 알리야 (주로 러시아와 폴란드로부터)<br />

1909 최초의 키부츠인 드가니아와 최초의 근대 유대인 도시 텔아비브가<br />

건설됨<br />

1917 영국의 정복으로 400년간의 오스만 제국 지배가 종식됨<br />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 경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조국”<br />

건설을 지지한다고 선언<br />

1918~48 영국의 통치<br />

1919~23 제 3차 알리야 (주로 러시아로부터)<br />

1920 히스타드룻 (노동 총연맹)와 하가나(유대인 자위 조직) 창설<br />

유대 공동체(이슈브)가 정책 실행을 위해 바아드 레우미(민족 평의<br />

회)를 설립<br />

1921 최초의 모샤브(촌락 공동체) 나할랄 설립<br />

1922 대영제국이 국제연맹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에 대한 위<br />

임 통치권을 받고, 통치령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땅에 트랜스요르<br />

단을 세움. 나머지 4분의 1이 유대 민족의 본거지가 됨.<br />

위임 통치 당국에 대하여 유대인 공동체를 대표하는 유대인 기구


62<br />

가 설립됨<br />

1924 최초의 공과 대학 테크니온이 하이파에 설립됨<br />

1924~32 제 4차 알리야 (주로 폴란드로부터)<br />

1925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이 스코푸스산에 세워짐<br />

1929 헤브론에서 아랍 폭도들이 유대인 학살<br />

1931 유대인 지하 조직 에쩰 창설<br />

1933~39 제 5차 알리야 (주로 독일에서)<br />

1936~39 아랍 테러리스트들의 반 유대 폭동<br />

1939 영국 백서로 유대인의 이민이 엄격히 제한됨<br />

1939~45 제 2차 세계대전: 유럽 내 유대인 대학살<br />

1940~41 지하 운동 조직 레히 창설<br />

하가나의 타격부대인 팔마흐가 구성됨<br />

1944 영국군 내에 유대인 여단 조직<br />

1947 유엔이 <strong>이스라엘에</strong> 각각 아랍과 유대 국가를 건립할 것을 제안<br />

1948 이스라엘 건국<br />

1948 영국의 위임 통치 종료(5월 14일)


63<br />

이스라엘 건국 선포(5월 14일)<br />

아랍 5개국 이스라엘 침공(5월 15일)<br />

이스라엘 방위군(IDF) 조직<br />

독립 전쟁(1948년 5월 ~ 1949년 7월)<br />

1949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과 휴전 협정 조인<br />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통치권으로 양분됨<br />

초대 크네세트(의회) 선출<br />

이스라엘이 유엔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br />

1948~52 유럽과 여러 아랍국가에서 대규모 이민<br />

1956 시나이 분쟁<br />

1961~62 아돌프 아이히만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으로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재<br />

판 후 사형에 처해짐<br />

1964 국립 수로가 완공되어 북쪽의 갈릴리 호수에서 비가 적은 남부로<br />

물 수송<br />

1967 6일 전쟁, 예루살렘 재통합<br />

1968~70 <strong>이스라엘에</strong> 대한 이집트의 소모전<br />

1973 욤 키푸르 전쟁<br />

1975 이스라엘이 유럽 공동 시장의 준회원국이 됨<br />

1977 의회 총선에 이어 리쿠드당이 내각을 구성, 30년간의 노동당 집권


64<br />

종료<br />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예루살렘 방문<br />

1978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중동지역의 포괄적 평화를 위한 기본 틀과<br />

팔레스타인의 자치에 대한 제안을 포함<br />

1979 이스라엘과 이집트 평화 조약 조인<br />

메나헴 베긴 총리와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br />

1981 이스라엘 공군이 이라크 원자로를 가동 직전에 폭격<br />

1982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3단계 철수 완료<br />

갈릴리 평화작전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테러리스트들을<br />

레바논에서 축출함<br />

1984 총선 후 거국 연립내각(리쿠드당과 노동당) 구성<br />

모세 작전, 에티오피아에서 유대인 이주<br />

1985 미국과 자유 무역 협정 조인<br />

1987 이스라엘 관할 지역에서 광범위한 폭력행위(인티파다) 시작<br />

1988 리쿠드 내각이 총선에서 승리<br />

1989 이스라엘이 4개조 평화안 제안<br />

구소련에서 유대인의 대규모 이민 시작<br />

1991 걸프전 동안 이라크가 스커드 미사일로 이스라엘 공격<br />

마드리드에서 중동 평화회의 개최<br />

솔로몬 작전, 에티오피아에서 공수 작전으로 유대인 구출


65<br />

1992 중국, 인도와 외교 관계 수립<br />

노동당 총수 이츠하크 라빈이 이끄는 새로운 내각 출범<br />

199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 기구가 된 PLO가 팔레스타인<br />

의 잠정 자치 합의에 대한 원칙 선언에 조인(오슬로 협정)<br />

1994 가자 지구와 여리고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이행<br />

교황청과 전면적 외교관계 수립<br />

모로코와 튀니지에 사무국 설치<br />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협정 조인<br />

이츠하크 라빈 총리, 시몬 페레스 장관,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 노<br />

벨 평화상 수상<br />

1995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 이행<br />

팔레스타인 의회 선출<br />

평화 집회에서 이츠하크 라빈 총리 암살<br />

시몬 페레스 총리직 승계


66<br />

1996 <strong>이스라엘에</strong> 대한 아랍 원리주의자들의 테러 확대<br />

분노의 포도 작전,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 지역 공격에 대한<br />

보복 공격<br />

오만과 카타르에 무역대표사무소 설치<br />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어 리쿠드당 중심의 연정 내각<br />

구성<br />

텔아비브에 오만의 무역대표사무소 개설<br />

1997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헤브론 의정서 서명<br />

1998 이스라엘 건국 50주년<br />

이스라엘과 PLO가 잠정 협정의 이행 촉진을 위해 와이 리버 협정<br />

에 서명<br />

1999 에후드 바락 (좌파 "하나의 이스라엘" 당)가 총리로 선출되어 연립<br />

내각 구성<br />

이스라엘과 PLO가 샤름 엘 셰이크 협정에 조인<br />

2000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문<br />

레바논 남부 안보지대에서 이스라엘 군대 철수<br />

이스라엘이 유엔 서유럽 및 기타 그룹에 가입<br />

폭력행위 재개(제 2차 인티파다)<br />

바라크 총리 사임<br />

2001 아리엘 샤론(리쿠드당)이 총리로 당선, 광범위한 연립내각 구성<br />

샤름 엘 셰이크 진상조사 위원회 보고서(미첼 보고서) 발행


67<br />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안보 실행 작업안(테넷 휴전안) 발의<br />

레카밤 제에비 이스라엘 관광성 장관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br />

에게 암살됨<br />

2002 팔레스타인의 대규모 테러 공격에 맞서 방패 작전 개시<br />

서안지구 테러리스트들의 이스라엘 시민 살해를 막기 위해 테러<br />

방지용 보안 장벽 건설을 시작<br />

샤론 총리가 의회를 해산시키면서 2003년 1월 28일에 새로 선거<br />

를 실시할 것을 주장<br />

2003 아리엘 샤론 총리에 의해 중도 우파 연립 내각 구성<br />

이스라엘이 로드맵을 수용<br />

2005 이스라엘은 불개입 계획을 이행하여 가자 지구의 이스라엘군 주둔<br />

을 종식시킴<br />

2006 샤론 총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에후드 올메르트가 총리 대행<br />

이 됨<br />

3월 28일 총선 후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가 카디마당 주도의 새로<br />

운 내각을 구성<br />

이스라엘은 자국 군인 납치사건 후 가자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테<br />

러리스트들을 상대로 군사 작전 실시<br />

헤즈볼라의 미사일 공격과 이스라엘 군인 2명 납치사건에 이어


68<br />

제 2차 레바논 전쟁이 발발,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레바논 남<br />

부에서 헤즈볼라의 테러에 대해 군사 작전을 실시<br />

2007 시몬 페레스가 의회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br />

하마스의 가자 지구 무력 장악 후 이스라엘이 가자를 “적지<br />

(hostile territory)”로 선포<br />

국가<br />

국가 71<br />

정치 구조 74<br />

대통령직 75<br />

입법부: 크네세트 77


69<br />

행정부: 정부 79<br />

사법부 83<br />

지방 정부 87<br />

이스라엘 방위군(IDF) 89<br />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는 다비드 벤 구리온 • 이스라엘 공보부


70<br />

국가<br />

1948년 5월 14일 국내 유대인 공동체와 해외 시온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민족 평의회 의원<br />

들이 서명한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은 바로 이 국가의 신념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재탄생의<br />

역사적 필연성, 성서의 예언자들이 내다본 것처럼 자유, 정의, 평화의 토대 위에 세워진 유<br />

대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틀, 지역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인접 아랍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br />

를 맺자는 촉구 등이 이 선언 안에 포함되어 있다.


71<br />

ותשועה ברב יועץ<br />

‏)מלשי י"א י"ד )<br />

…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잠언 11:14)<br />

...


72<br />

국가<br />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 땅)은 유대 민족의 고향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의 정신적, 종교적,<br />

정치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국가를 이루었고, 민족적으로 보편<br />

적으로 의미 있는 문화적 가치를 창조했으며, 전세계에 영원불변의 성경을 제공해주었다.<br />

… 유대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그 고토의 땅에 다시 정착하고자 힘썼다. … 그들은 사막<br />

을 일구고 히브리어를 부활시켰으며, 촌락과 도시를 건설하고 번영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냈<br />

다. 동시에 공동체의 경제와 문화를 스스로 관리하며, 평화를 사랑하지만 스스로를 방어하<br />

는 법도 잘 알고 있다…


73<br />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이주에 대해 문을 활짝 열 것이며…모든 주민의 이익을 위해 국가<br />

발전을 촉진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내다보았듯이 자유와 정의, 평화의 토대 위<br />

에 설 것이며, 종교, 인종, 성별에 관계 없이 모든 거주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권리의 완전한<br />

형평성을 보증할 것이며, 종교, 양심, 언어, 교육, 문화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며, 모든 종교<br />

의 성지를 지킬 것이며,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을 충실히 따를 것이다.<br />

우리는 모든 이웃 국가들과 그 국민들에게 평화와 우호관계를 제안하며 손을 내밀고, 자신<br />

들의 땅에 정착한 주권을 지닌 유대 민족과 협력과 상부상조의 유대를 구축할 것을 그들에<br />

게 호소한다.<br />

(이스라엘 건국 선언 중에서)


74<br />

I. 스툴만<br />

이스라엘 국기는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쓰는 쇼울(탈리트) 디자인을 바탕으로 푸른색의 다<br />

윗의 방패(다윗의 별)가 그려져 있다.<br />

이스라엘의 공식 문장은 가지가 달린 촛대(메노라)로, 그 형태의 기원은 고대로부터 알려진<br />

식물인 모리아의 일곱 가지라고 전해진다. 양쪽으로 난 올리브나무 가지들은 평화를 갈망하<br />

는 이스라엘의 바람을 의미한다.<br />

하티크바 – 이스라엘 국가


75<br />

가슴 깊은 곳에서<br />

동방을 향하여<br />

시온을 바라보면서<br />

유대의 영혼이 동경하는 한<br />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br />

2천 년을 간직해온 희망<br />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br />

우리의 땅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br />

정치 구조


76<br />

이스라엘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이루어진 의회 민주주의 국가이다. 기관으로는 대통령<br />

직, 크네세트(의회), 정부(내각), 사법부가 있다. 이스라엘의 정치 체계는 권력분산의 원칙을<br />

바탕으로 하고 있어, 행정부(정부)는 입법부(크네세트)의 신임을 받아야 하며 사법부의 독립<br />

은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br />

국가 원수<br />

대통령<br />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br />

의장 총리 법원<br />

의회 정부 검찰총장<br />

상임 위원회<br />

정부 부서<br />

시장과 시의회장<br />

국가감사관과 행정감찰관<br />

지방 의회<br />

유권자<br />

이스라엘의 역대 대통령


77<br />

하임 와이즈만(1949~52) 시온주의 지도자, 저명한 과학자<br />

이츠하크 벤쯔비(1952~63) 유대인 기구 의장, 사학자<br />

잘만 샤자르(1963~73) 정치가, 학자, 역사가, 작가, 시인<br />

에프라임 카찌르(1973~78) 저명한 생화학자<br />

이츠하크 나본(1978~83) 정치가, 교육자, 작가<br />

하임 헤르쪼그(1983~93) 검사, 육군 대장, 외교관, 작가<br />

에제르 와이즈만(1993~2000) 공군장성, 정치가, 사업가<br />

모셰 카짜브(2000~2007) 사회 지도자, 정치가<br />

시몬 페레스(2007~) 원로 정치인, 전직 총리, 노벨 평화상 수상자<br />

대통령직<br />

히브리어 나시(대통령)는 고대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 민족의 최고 입법 및 사법 기관이었던<br />

산헤드린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오래된 직함이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이며, 대통령직은 정당<br />

정치를 초월한 국민 통합을 상징한다. 대통령은 개인적 위상과 일생 동안의 국가에 대한 공<br />

헌도를 기준으로 선정된 후보 가운데 의회에서 단순 다수결 방식으로 선출한다. 개정 법률<br />

(1998)은 선출된 대통령의 임기를 단임 7년으로 규정하고 있다.<br />

대부분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대통령의 임무는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대통령은 새로 구성된<br />

크네세트의 첫 회기 개회, 의회 의원 한 사람에게 새 내각을 구성하도록 요청, 해외 외교관<br />

들의 신임장 접수, 의회에서 채택된 조약과 법률에 서명, 해당 기관의 추천에 따라 해외 주<br />

재 이스라엘 외교 사절단, 판사, 이스라엘 은행 총재 임명, 법무부 장관의 권고에 따라 죄수


78<br />

의 사면과 같은 직무를 담당한다. 대통령은 또한 사회 전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br />

시민들의 호소를 듣고 지역 단체의 위상을 높이고 사회 운동을 강화하는 등 공공 행사와 비<br />

공식적 업무도 수행한다.<br />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 • 이스라엘 공보부/ A. 오하욘


79<br />

입법부: 크네세트<br />

크네세트(이스라엘의 단원제 의회)는 이스라엘의 입법 기관이다. 크네세트라는 명칭과 120<br />

명의 고정 의원수는 크네세트 하그돌라(최고 회의)에서 유래된 것이다. 크네세트 하그돌라는<br />

기원전 5세기에 에즈라와 느헤미아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소집된 유대인 대표 평의회이다.<br />

새로운 크네세트는 그 구성을 확정 짓는 총선 후에 활동을 시작한다. 첫 회기에서 크네세트<br />

의원들은 직무에 충실할 것을 선언하고, 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한다. 크네세트의 구성 주기<br />

는 보통 4년이지만, 임기 중이라도 자체 해산하거나 총리에 의해 해산될 수 있다. 선거 후<br />

새 의회가 공식적으로 구성될 때까지는 퇴임하는 의회가 모든 권한을 지닌다.<br />

크네세트는 본회의에서 15개의 상임 위원회를 통해 임무를 수행한다. 본회의에서는 정부 정<br />

예루살렘: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 관광성


80<br />

책과 활동 및 정부나 의회 의원 개인이 제출한 법안을 두고 전체 토론을 실시한다. 토론은<br />

히브리어로 진행되지만 의원들은 아랍어도 사용할 수 있으며, 두 언어 모두 공식언어이다.<br />

동시 통역도 활용 가능하다.<br />

정규 공공 법안이 법률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크네세트에서 3차에 걸친 독회를 통과해야 한<br />

다(사적 법안은 4회의 독회를 거침). 법안은 첫 독회에서 본회에 회부되어 그 내용에 <strong>관한</strong><br />

간략한 토론이 진행되고, 그 후 필요할 경우 해당 의회 위원회에 회부되어 세부 토론과 초<br />

안 수정이 이루어진다. 해당 위원회의 작업이 끝나면 법안을 본회에 다시 상정하여 2차 독<br />

회를 가지는데, 이때 유보권이 있는 위원회 의원들이 본회에 유보 의사를 밝힐 수 있다. 대<br />

체토론 후 각각의 법안 조항을 표결에 부치고, 법안을 다시 위원회에 회부할 필요가 없으면<br />

곧바로 3차 독회가 열리고 법안 전체에 대해 최종 투표가 실시된다. 법안이 통과되면 의장<br />

이 이에 서명하고, 대통령, 총리, 의회 의장, 이 법의 실행을 담당하는 관계 장관의 서명과<br />

함께 후에 관보로 고시된다. 끝으로 법무 장관이 국가 인장을 찍고 나면 이 법안은 정식 법<br />

이 된다.


81<br />

행정부: 정부<br />

이스라엘의 행정 당국은 정부(내각)이며, 안보 문제를 포함해 국내외 여러 업무를 관장한다.<br />

정부의 정책결정 권한은 매우 광범위하여 법적으로 다른 기관에 위임되는 경우를 제외한 모<br />

든 사안에 대해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다.<br />

내각은 업무 및 정책 결정 과정을 자체적으로 결정한다. 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가 열<br />

리지만 필요 시 추가적으로도 소집될 수 있다. 장관 회의를 통해 업무를 진행할 수도 있다.<br />

정부 구성: 지금까지 자체적으로 단일 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의회 좌석을 얻은 정당<br />

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정부가 여러 당의 연립 내각으로 구성되었다.<br />

대통령은 자문을 거친 후 국회의원 한 사람에게 내각 구성의 책임을 부여한다. 이것이 확정<br />

되려면 선임된 의원이 정부구성 책임을 받은 지 28일 내에 의회의 승인을 받기 위한 장관<br />

이스라엘의 역대 총리<br />

다비드 벤 구리온 (1948~54)<br />

모셰 샤레트 (1954~55)<br />

다비드 벤 구리온 (1955~63)<br />

레비 에슈콜 (1963~69)<br />

골다 메이어 (1969~74)<br />

이츠하크 라빈 (1974~77)<br />

메나헴 베긴 (1977~83)<br />

이츠하크 샤미르 (1986~92)<br />

이츠하크 라빈 (1992~95)<br />

시몬 페레스 (1995~96)<br />

베냐민 네타냐후 (1996~99)<br />

에후드 바락 (1999~2001)


82<br />

아리엘 샤론 (2001~2006)<br />

에후드 올메르트 (2006~)<br />

명단을 정부 가이드라인 개요서와 함께 제출해야 한다. 모든 장관은 이스라엘 시민권자이자<br />

이스라엘 거주자여야 하며, 의회 의원이어야 한다.<br />

이스라엘 외무부 • T. 그리피스<br />

승인을 받고 나면 장관들은 총리 직권 하에 각자 의무를 수행할 책임과 각자의 행동에 대해<br />

의회에 정당성을 입증할 책임을 진다. 대부분의 장관은 직위를 부여 받고 각 부의 장관이<br />

되며, 부서를 배정 받지 않은 무임소 장관들은 특별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을 수 있다. 총리<br />

가 특정 부서를 맡아 장관직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br />

장관들은 총리와 내각의 승인을 받아 자체 부서의 차관을 임명할 수 있다. 단, 내정자는 반<br />

드시 의회 의원이어야 한다.<br />

의회와 마찬가지로 내각도 대개 4년을 임기로 하나 총리의 사임이나 자격박탈, 서거, 의회<br />

의 불신임 등의 사유로 임기가 단축될 수 있다.<br />

총리가 서거나 자격박탈, 사임, 탄핵 등으로 더 이상 총리직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 내각


83<br />

은 구성원 중 한 명(반드시 의회 의원이어야 함)을 총리 서리로 임명한다. 불신임 투표가 가<br />

결된 경우, 내각과 총리는 새로운 내각이 구성될 때까지 임무를 유지한다.<br />

선거<br />

이스라엘의 선거는 보통, 국민, 직접, 평등, 비밀, 비례 선거이다. 전국이 단일 선거권이며<br />

18세 이상 국민이면 누구나 투표권을 가진다. 선거일에 유권자들은 의회에서 그들을 대표할<br />

정당에 표를 던진다.<br />

선거일은 국경일이며, 선거 당일 자신의 투표구에 있지 못한 유권자들에게는 무료 교통편의<br />

가 제공되고, 군인, 병원에 입원중인 환자, 죄수, 상선 선원, 공식 업무로 해외 체류중인 이<br />

스라엘 국민에게도 투표소가 제공된다.<br />

중앙 선거 관리 위원회는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고 의회 의석을 가지고 있는 각 정당의 대표<br />

들로 구성되며, 선거 관리의 책임을 담당한다. 지방선거위원회는 임기 막바지인 의회의 3개<br />

검찰 총장<br />

검찰 총장은 정부의 법률 서비스를 지휘하며, 모든 주요 형사, 민사, 행정 사건에 대해 국가<br />

를 대변하는 독점적 권한을 가진다. 정부는 법원이 다른 판결을 내리지 않는 한 검찰총장이<br />

불법이라는 견해를 낸 모든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br />

임명은 정부가 하지만 검찰총장은 정치 체계와는 독립적으로 직무를 수행한다.


84<br />

이상 정당 대표들로 구성된 지역투표위원회가 제 기능을 수행하도록 감독하는 일을 맡는다.<br />

지금까지 각 선거에서 전체 등록 유권자의 77~90%가 자신들의 표를 행사했으며, 이는 국가<br />

및 지역 정치에 대한 대다수 이스라엘 국민의 깊은 관심을 잘 나타내준다.<br />

의회 선거는 개인이 아니라 정당에 대한 투표를 토대로 한다. 크네세트에 출마하는 다수의<br />

정당은 다양한 전망과 소신을 반영하고 있다.


85<br />

사법부<br />

사법부의 독립은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법관은 대법원 판사, 법조계 인사, 공직자들로 구성<br />

된 지명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한다. 법관은 종신직이며 70세가 정년이다.<br />

국법<br />

1948년 독립을 이룬 직후 이스라엘은 독립 선언에 제시된 원칙에 어긋나지 않고 의회가 제<br />

정하는 법과 상충되지 않는 한 건국 이전에 보편화된 법률이 계속 유효하다고 명기한 법률<br />

과 행정법령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법 체계에는 오스만 제국법(1917년까지 시<br />

행), 영국 보통법의 상당 부분을 결합시킨 대영제국의 위임 통치법, 유대교 율법적 요소 및<br />

그 외 여러 체계적 측면의 잔재가 남아있다.<br />

그러나 법 체계의 주된 특징은 1948년부터 발전해온 독립된 제정법과 판례법이 크게 한 덩<br />

어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건국 이후 크네세트는 삶의 모든 측면과 관련된 일련의 기본<br />

공중에서 바라본 대법원 건물 • 이스라엘 공보부/ A. 오하욘


86<br />

사법 제도<br />

특별 법원<br />

(판사 1명)<br />

종교 법원<br />

(판사 1~3명)<br />

치안판사 법원<br />

(판사 1명)<br />

지방 법원<br />

(판사 1~3명)<br />

대법원<br />

(1, 3, 5나 그<br />

이상의 홀수명<br />

의 판사)<br />

사법권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교통, 노동, 청소년, 군대 및 시 지역 법원.<br />

행정 심판소.<br />

개별 종교 공동체의 사법 기관들에 귀속된 개인 신상 관련 문제들(결혼, 이<br />

혼, 양육비, 후견, 입양)을 관할. 유대 랍비 법원, 이슬람 샤리아 법원, 드루<br />

즈 종교 법원, 이스라엘 내 공식 기독교 공동체 10곳의 교회 법원.<br />

민사범 및 경미한 형사범. 민사 및 형사 사건 관할.<br />

치안판사 재판의 항소 관할. 중요도가 큰 민사 및 형사 사건의 제 1심 관<br />

할.<br />

전국의 최종 항소 관할. 사법 정의를 위해 개입할 필요가 있을 시 사안을<br />

해결할 권리, 불법으로 구류 및 수감된 사람을 방면할 권한이 있다. 고등법<br />

원으로서 모든 정부 단체나 산하기관에 대한 청원서를 심리하며, 대법원의<br />

판결이 1심이자 최종심이다.


87<br />

법을 제정할 권한을 위임 받았고, 후에 이 법률들이 모여 헌법이 구성되었다. 여러 기본법<br />

이 통과되어 대통령, 의회, 내각, 사법부, 이스라엘 방위군, 감사원장, 직업의 자유와 인간의<br />

존엄성 및 자유(개인의 삶, 신체, 존엄성의 침해 문제를 다룸)와 같은 정치체제의 기본적 특<br />

징들이 윤곽을 갖추게 되었다.<br />

일반 법률에 대한 기본법의 규범적 우위는 1995년 대법원이 기본법을 침해하는 의회의 법<br />

률제정을 심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면서 확정이 되었다.<br />

수년에 걸쳐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 평등 등의 기본 인권을 이스라엘 법체<br />

계의 근본적 가치로서 보호하는 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여러 가지 판례법이 발달했다. 대법<br />

원은 고등법원으로서 모든 정부단체나 산하기관에 대해 시정을 호소하며 개인이 제출한 청<br />

원서를 심리하기도 한다.


88<br />

국가 감사원: 공적 책임을 보장하기 위해 법으로 설립된(1949년) 감사원은 공무행정의 적<br />

법성, 규칙성, 경제성, 능률, 효율성, 도덕성에 대한 대외적 감사와 보고를 수행한다. 1971년<br />

부터는 국가 감사원장이 행정 감찰관의 직무도 맡아 감사 대상이 되는 국가 및 공공 단체에<br />

대한 국민의 불편사항을 접수한다. 국가 감사원장은 7년 임기이며, 의회의 무기명 투표로<br />

선출되고, 의회만이 감사원장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국가 감사의 범위는 전 정부부처<br />

와 국가 기관, 국방 조직의 지부, 지방 자치단체, 공기업 등의 활동이다. 또한 법에 따라 국<br />

가 감사원장은 의회 내 여러 정당의 재무 상태와 이들의 선거 계좌를 조사할 수 있는 권한<br />

을 가지고 있으며, 부정행위가 발견될 시에는 금전적 제재를 가한다.<br />

이스라엘 경찰<br />

세계 각지의 경찰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경찰의 업무도 범죄와 싸우고 당국의 법 집행을<br />

지원하며, 교통법규를 집행하고, 국민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 예방조치에 <strong>관한</strong> 지침을 제공<br />

하는 일이다.<br />

경찰의 주력 기동부대인 국경 경찰은 주로 국내의 안보문제를 처리하며 특별 대테러 부대를<br />

보유하고 있다. 테러사건의 빈발과 위협에 대해 우려한 시민들은 그들이 지역사회 보호에<br />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자원제의 민간 경비대가 창설되어<br />

(1974년) 지휘 센터, 무장 정찰대, 훈련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주변지역 보안 부대를 운영하<br />

고 있다.


89<br />

지방 정부<br />

지방 정부는 교육, 문화, 보건, 사회복지, 도로관리, 공원, 상수도, 공중위생 등의 서비스를<br />

제공한다. 각 지방 당국은 내무부의 승인을 받은, 국가법을 보완해주는 조례에 따라 직무를<br />

수행한다. 일부 당국은 특별 법원을 운영하며 지방 조례 위반자들을 심리한다. 지방 정부의<br />

재원은 국가 예산에서 할당되는 금액과 지방세에서 조달한다. 지방 정부마다 연간 보고서를<br />

작성하는 감사관이 있다.<br />

법으로 승인된 지방정부는 세 종류가 있다. 지방 시의회는 인구 2만 이상의 도심지역에 기<br />

본 틀을 제공한다. 지방 군 의회는 인구 2천에서 2만 사이의 도시를 관리하며, 지역의회는<br />

일정 구역 내에 같은 집단으로 묶인 몇몇 마을을 책임진다.<br />

각 지방 정부의 관리 주체는 시장이나 의장, 그리고 의회이다. 의회 의원의 수는 관할지역<br />

의 인구를 기준으로 내무부가 결정한다. 현재는 지방 시의회 73개, 지방 군 의회 124개, 지<br />

역의회 54개가 있다. 지방 시의회와 지방 군 의회는 모두 중심 기구인 지방정부연합 아래<br />

자발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지방정부연합은 중앙 정부에 대해 지방 정부들을 대표하며, 의<br />


90<br />

내 관련 법률을 검토하고 업무 협약과 법률 문제와 같은 사안에 대해 지침을 제공한다. 국<br />

제 시의회 연합과 제휴를 맺은 이 기구는 세계 각지의 유사 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br />

며 자매결연 도시 프로그램과 국제 대표단 교환을 추진한다.<br />

지방 선거<br />

지방정부 선거는 5년마다 무기명 투표로 진행된다. 이스라엘 국적 여부와 관계없이 17세 이<br />

상의 영주권자는 누구나 투표할 수 있고, 선거 출마 가능 연령은 21세 이상이다. 지방 시의<br />

회와 지방 군 의회 선거에서는 후보의 정당명부에 대해 투표를 하며, 의회 의석 수는 각 명<br />

부 별로 득표한 비율에 따라 주어진다. 시장들과 지방 군 의회의 의장들은 직접선거로 선출<br />

된다.<br />

지역의회 선거에서는 각 마을의 최다 득표 후보자가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된다. 지역 의회<br />

의 의장은 의원들 가운데서 선출된다.<br />

지방선거 자금은 지방정부 내에서 각 당파나 명부가 국민으로부터 위임 받은 수를 기준으로<br />

정부 지출금에서 지원을 받는다.


91<br />

이스라엘 방위군(IDF)<br />

1948년에 창설된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6 차례의 주요 전쟁에서 국가를 지키는 일을 감<br />

당한 전세계에서 전장에 가장 많이 나서본 군대 중 하나이다. IDF의 안보 목표는 이스라엘<br />

의 주권과 영토를 보호하고, 모든 적을 저지하고,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모든 형태의 테러행<br />

위를 억제하는 것이다. 주요 임무로는 평화 준비를 강화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의 조율<br />

하에 서안 지구의 전반적인 안보를 확립하며, 국내외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앞장서고 전쟁<br />

발발을 막을 수 있는 억제력을 유지하는 것 등이 있다.<br />

이러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IDF의 전략적 차원의 공식 입장은 방어이지만 전<br />

술에서는 공격을 기조로 한다. 이스라엘의 영토가 크지 않음을 고려할 때 IDF는 필요하다고<br />

여겨질 경우 반드시 먼저 기선을 잡아야 하고, 공격을 받았을 때는 재빨리 전장을 적의 영<br />

토로 전환해야 한다. IDF는 항상 적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첨단 무기 체계를 배치하<br />

여 질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무기들의 상당수는 특수 목적에 따라 국내에서 개발<br />

및 제조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IDF의 핵심 자원은 우수한 자질을 갖춘 군인들이다.<br />

방어를 준비하면서 IDF는 조기 경보 능력을 갖춘 소규모 상비군(징집병과 직업군인으로 구


92<br />

성)과 정규 공군 및 해군을 배치한다. 이스라엘 군의 대다수는 예비군으로, 이들은 훈련과<br />

복무를 위해 정기적으로 소집되고, 전쟁이나 위기 시에는 전국 각지에서 소속 부대로 긴급<br />

동원된다.<br />

IDF의 3개 하부 조직(육군, 공군, 해군)은 국방장관 직권 하에 있는 중장 계급의 참모 총장<br />

이 이끄는 합동 사령부의 지휘 하에 움직인다. 참모 총장은 총리와 국방장관의 추천으로 정<br />

부가 임명하며, 임기는 3년이고 대개 1년씩 추가로 연장된다.<br />

남녀 군인 전원은 함께 협력하며 기술자, 통신 및 정보 특기병, 전투 교관, 지도 제작자, 행<br />

정 및 보급 대원, 컴퓨터 기술자, 의사, 변호사 등으로 근무한다. 전투 부대에서 복무하는<br />

여성의 수도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이다.<br />

IDF의 복무기간<br />

의무 복무: 자격요건에 맞는 모든 남녀는 18세에 징집된다.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간 복무


93<br />

한다. 고등 교육기관에서 수학하는 자격을 갖춘 학생들은 징집유예를 받을 수도 있다. 새로<br />

이민 온 사람들은 입국 당시의 연령과 신분에 따라 징병이 연기되거나 복무기간이 단축될<br />

졸업을 자축하는 공군 조종 사관학교 생도들 • 이스라엘 공보부/ A. 벤게르숌<br />

IDF는 소속 군인들의 문화 및 사회적 요구에 빠르게 부응하여 개인 지원 서비스뿐 아니라<br />

오락과 교육 활동을 제공하고 있다. 교육과정을 마치지 못한 신병들에게는 교육 수준을 높<br />

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직업 장교들에게는 복무 기간 동안 IDF의 지원금으로 공부하<br />

도록 장려한다. 새로 이민 온 군인들에게는 히브리어 지도 및 기타 프로그램을 제공해 사회<br />

통합과정을 촉진한다.<br />

창설 초기부터 국가 건설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IDF는 민간인들에게 추가 보충 교육


94<br />

수 있다.<br />

예비군 복무: 의무 복무를 마친 군인들은 예비군으로 등록되고 최대 51세까지 복무할 수 있<br />

다.<br />

직업 군인 복무: 의무 복무를 마친 군인 중 현재 IDF의 필요에 부합하는 이들은 직업 장교<br />

나 하사관이 될 수 있다. 직업 군인들은 IDF의 지휘 및 행정의 중추 역할을 한다. 사관학교<br />

나 조종사 학교 또는 특수 군 기술학교 졸업생들은 일정 기간 직업 군인으로 복무해야 한다.<br />

을 제공하고 일반 국민 가운데 신규 이민자들의 흡수에도 기여하고 있다. 국가적 위기나 위<br />

급상황에는 즉각 적절한 조치로 대응하고, 훈련된 인력을 투입하여 필수 업무직 결원을 보<br />

충하거나 특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다.


국토<br />

95


우주선 제미니 11호에서 본 중동 • 미 항공우주국(NASA) 사진 S66 54893<br />

96


97<br />

국토<br />

이스라엘은 지중해 남동쪽 해안선에 접해있는, 국토 면적이 작고 폭이 좁으며 반 건조한 국<br />

가이다. 약 3500년 이전에 역사에 등장했으며, 이때 유대 민족이 유목 생활을 접고 이 땅에<br />

정착하므로 국가가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 중 몇 가<br />

지만 들어보면, 먼저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 땅)이 있고, 원래 예루살렘에 있는 언덕의<br />

이름으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게 된 명칭인 시온이 있다. 팔레스타인은 필리<br />

스티아에서 유래된 말로 로마인들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약속의 땅, 성지 등의 이름도 있다.<br />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단순히 하아레츠, 즉 땅이라고 부른다.<br />

오늘날 <strong>이스라엘에</strong>는 700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으며, 그 중 약 540만은 유대인, 140만은<br />

아랍인이다. 종교적 측면에서 세속적 측면, 현대성에서 전통성, 도시에서 농촌, 공동사회에<br />

서 개인에 이르는 광범위한 생활양식은 이스라엘의 특징을 잘 나타내준다.


98<br />

ארץ זבת חלב ודבש...‏ ‏)שמות ג"‏ ח "(<br />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출애굽기 3:8)<br />

지형<br />

좁은 면적: 짧은 거리<br />

이스라엘의 총면적은 22,145 평방 킬로이고, 그 중 육지 면적은 21,671 평방 킬로이다. 이<br />

스라엘 국토의 길이는 약 470 km, 폭은 가장 넓은 지점이 약 135 km이다. 이스라엘은 북쪽<br />

으로는 레바논, 북동쪽으로는 시리아, 동쪽으로는 요르단, 남서쪽으로는 이집트, 서쪽으로는<br />

지중해와 연접해있다.<br />

산지와 평원, 비옥한 토지, 그리고 사막이 몇 분 간격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서쪽의 지<br />

중해에서 동쪽의 사해에 이르는 국토의 폭은 차로 약 90분만에 횡단할 수 있다. 북쪽 끝에<br />

위치한 메툴라에서 최남단의 에일랏까지 이동하는 데는 6시간 정도가 걸린다.<br />

지리적 특징<br />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4개 지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즉, 북쪽에서 남쪽으로 병행하면서<br />

뻗어 있는 3개의 좁고 긴 지역들과 남쪽 절반을 차지하는 넓은 건조지역으로 나뉘어진다.<br />

지중해와 나란히 뻗어있는 해안 평지는 모래 해안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륙으로 최대 40<br />

km까지 펼쳐진 비옥한 농지가 인접해있다.


99<br />

북쪽에는 넓은 모래 사장이 펼쳐진 가운데 이따금씩 들쭉날쭉한 백악과 사암 절벽이 솟아있<br />

다. 해안 평지에는 7백만 이스라엘 국민의 절반 이상이 살고 있으며 주요 도시 중심지와 심<br />

해 항구, 대부분의 국내 산업시설, 농업 및 관광 시설 상당수가 자리잡고 있다.<br />

국토의 세로 길이를 따라 몇 개의 산맥이 뻗어있다. 북동쪽에는 먼 옛날 화산폭발로 형성된<br />

현무암으로 덮인 골란 고원의 풍경이 훌라 계곡을 내려다보며 가파른 절벽처럼 솟아있다.<br />

대부분 부드러운 석회암과 백운석으로 이루어진 갈릴리 언덕은 해발 500~1,200m 높이로<br />

솟아있다. 사계절 내내 흐르는 작은 시내와 비교적 풍부한 강우량 덕에 이 지대는 일년 내<br />

내 푸르름을 유지한다. 갈릴리와 골란에 거주하는 상당수 주민들은 농업, 관광 관련 사업,<br />

경공업에 종사한다.<br />

갈릴리 산지와 사마리아 산지를 가르는 이스르엘 계곡은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br />

대로서 많은 농업 공동체(키부츠와 모샤브)에 의해 경작되고 있다. 사마리아와 유대(서안 지<br />

구)의 완만한 굴곡 언덕들은 바위로 된 언덕 꼭대기와 오래된 은록색 올리브나무 숲이 점재<br />

해 있는 비옥한 계곡들로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다. 고대 농부들이 맨 처음 개발한 계단식으<br />

로 된 언덕 경사면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룬다. 인구는 주로 작은 도시들과 큰 마을들에<br />

집중되어 있다.


100<br />

이스라엘 국토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네게브는 인구 밀도가 낮으며, 이곳 사람들은 농업<br />

과 산업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네게브는 낮은 사암 고지와 광<br />

야로 특징 지워지는 불모지이며, 겨울비가 올 때 종종 돌발 홍수가 일어나는 큰 협곡과 와<br />

디가 많다. 계속해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벌거벗은 바위산 꼭대기와 분화구, 바위로 뒤덮<br />

인 고원 지대가 나오는데, 이곳은 기후가 더 건조하고 산도 더 높이 솟아있다. 3개의 침식<br />

분화구 중 가장 큰 것은 지름이 약 8km이고 길이는 35km이다. 지각 속으로 깊게 패여 있<br />

는 이 분화구들은 다양한 색상과 암석형태를 보여준다. 홍해에 접한 에일랏과 가까이 위치<br />

한 네게브의 가장 끝에는 회색과 적색 화강암의 뾰족한 봉우리들 사이로 말라붙은 협곡과<br />

가파른 절벽이 들어서 있으며, 다양한 색채의 사암 지층들이 햇빛에 빛나고 있다.<br />

킨네렛 호수(갈릴리 바다)는 갈릴리 고지와 골란 고원 사이에 해수면보다 212m 아래에 자<br />

리잡고 있으며 폭 8km에 길이는 21km이다. 킨네렛은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가장 큰 호수로, 주요


101<br />

알바트로스<br />

킨네렛 마을에서 바라본 호수와 골란 고원의 모습 • 관광성<br />

저수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호숫가를 따라 농업 공동체와 양식장, 관광 시설이 들어서있을<br />

뿐만 아니라 중요한 역사 및 종교 유적지들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br />

이스라엘 동부를 따라 세로로 길게 뻗어있는 요르단 계곡과 아라바는 수백만 년 전에 지각<br />

을 분열시켰던 시리아-아프리카 지구대의 일부이다. 이곳의 북쪽 지역은 매우 비옥하고 남<br />

쪽은 반건조 지역이다. 농업, 어업, 경공업, 관광업이 이 지역의 주요 수입원이다.<br />

지구대를 관통하며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요르단 강은 300km에 이르는 경로에서 700m 이<br />

상의 낙차를 이루며 경사져있다. 헤르몬 산의 개울들이 흘러가서 이룬 이 강은 비옥한 훌라<br />

계곡을 통과하여 킨네렛 호수로 흘러 들어가고, 계속해서 요르단 계곡으로 굽이쳐 들어가<br />

사해에 이른다. 겨울 우기 동안은 강물이 불어나지만 평소에는 비교적 좁고 얕다.


102<br />

요르단 강 • 알바트로스<br />

이스라엘의 사바나 지대인 아라바는 사해 남쪽에서부터 홍해로 나가는 출구인 에일랏 만까<br />

지 뻗어있다. 연간 평균 강우량이 25mm가 채 못되고 여름철 기온이 40℃까지 치솟는 기후<br />

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고도의 농경 기술을 이용하여 주로 수출용의 철이 이른 과일과 채소<br />

를 기르고 있다. 아라바의 남쪽 끝에는 깊고 푸른 바다와 산호초, 이국적인 해양 생물로 유<br />

명한 아열대의 에일랏 만이 있다.<br />

기후<br />

이스라엘의 기후는 온대에서 열대에 걸쳐있고 일조량이 풍부하다. 두 계절이 뚜렷이 나타나<br />

는데, 하나는 11월에서 5월까지의 겨울 우기이고, 다른 하나는 나머지 6개월간 계속되는 건<br />

조한 여름철이다. 강우량은 북부와 중부 지방이 비교적 많고, 네게브 북부는 그보다 훨씬<br />

적으며 남부지역은 극히 미량에 불과하다. 기후 조건은 지역별로 크게 차이를 보인다. 해안<br />

지역은 습한 여름과 포근한 겨울, 고지대(예루살렘 포함)는 건조한 여름과 다소 추운 겨울,<br />

요르단 계곡은 덥고 건조한 여름과 쾌적한 겨울, 네게브는 일년 내내 반 사막 기후를 특징<br />

으로 한다. 날씨는 고지대의 간헐적인 겨울 폭설에서 봄, 가을에 주기적으로 나타나 기온을


103<br />

급상승시키는 숨막힐 듯 덥고 건조한 바람에 이르기까지 양극을 보인다.<br />

알바트로스<br />

사해: 해수면보다 400m 정도 아래에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역인 사해는 요르단 계<br />

곡의 남쪽 끝에 위치해있다. 세계에서 염도와 농도가 가장 높은 이곳의 물은 식용 및 공업<br />

용 소금뿐 아니라 칼륨, 마그네슘, 브롬이 풍부하다. 사해의 자연적 수량 감소는 최근 몇 년<br />

간 가속화되었다. 상당히 높은 증발율로 해마다 해수면이 1.6m씩 낮아지고, 이스라엘과 요<br />

르단이 물 수요로 인해 시행한 용수공급 사업은 사해로 흘러 들어오는 물을 75% 감소시켰<br />

다. 그 결과 사해의 해수면은 1960년 이래로 약 10.6m 낮아졌다. 운하와 수로관 시스템을<br />

통해 사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려는 사업이 현재 진행 중이며, 이 공사는 사해를 원래 규모와<br />

해수면 높이로 복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104<br />

물<br />

사막지대 언저리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늘 물 부족에 시달려왔다. 네게브 및 기타 지역에서<br />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 중에는 빗물을 모아 저장하고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기 위해<br />

고안된 다양한 시설들이 있다. 이는 수천 년 전 이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이미 그때부터<br />

물 관리에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br />

재생 가능한 수자원의 연간 총량은 약 17억 입방 미터이며, 이 중 약 65%는 관개에, 나머<br />

지는 도시와 산업용으로 사용된다. 이스라엘의 수원은 요르단 강과 킨네렛 호수 및 기타 소<br />

규모 하천계로 이루어져있다. 고갈과 염분화를 막기 위해 조절된 양만큼 끌어오는 천연 샘<br />

과 지하수도 활용되고 있다.<br />

모든 담수원을 최대한도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하수 재생, 인공 강우, 염수의 담수화, 해<br />

수 담수화를 통해 한계 수자원을 활용하는 여러 방법을 개발 중에 있다.<br />

가용 수자원의 지역적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담수원 중 대부분이 하나의 통합<br />

배관망으로 합쳐져 있다. 그 중 중추가 되는 국립 수로는 1964년 완공되었으며, 북부와 중<br />

부지역에서 물을 끌어와 거대한 파이프와 도수관, 취수로, 저수지, 지하 수로, 댐, 양수장으<br />

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통해 남쪽의 반 건조 지역으로 나르는 역할을 한다.


105<br />

골란 고원의 폭포 • 알바트로스<br />

자연<br />

식물상과 동물상<br />

이스라엘의 동식물은 그 수가 풍부하고 종류도 다양한데, 이는 3개 대륙의 접점에 놓인 지<br />

리적 위치도 어느 정도 원인이 된다. 대략 2,600종으로 확인된 식물은 북부의 산지 경사면


106<br />

에서 나는 고산식물 종부터 남부 아라바의 사하라 식물까지 폭넓게 분포한다. 이스라엘은<br />

파피루스와 같은 식물의 최 북단 서식지이고 선명한 적산호색 모란 등의 최남단 서식지이다.<br />

대부분 켈메스 참나무로 구성된 천연 삼림지는 갈릴리와 카르멜산(갈멜산) 및 기타 고지대<br />

의 일부를 뒤덮고 있다. 봄철에는 주로 반일화와 가시 있는 로뎀이 분홍, 흰색, 노랑의 배색<br />

으로 곳곳에 피어난다.<br />

인동초는 관목 위로 뻗어나가고, 커다란 플라타너스는 갈릴리의 시냇가를 따라 그늘을 제공<br />

해준다.<br />

네게브의 산악 지방의 육중한 피스타치오 나무는 메마른 계곡을 따라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br />

내고, 대추야자는 지하수가 충분한 곳이면 어디든지 자라고 있다.<br />

시클라멘 • 이스라엘 공보부/ A. 오하욘<br />

펠리컨 • 알바트로스<br />

이스라엘의 야생화들 가운데는 붓꽃, 백합, 튤립, 히아신스 등 많은 재배종의 화초들이 있다.<br />

10~11월에 첫 비가 내린 직후면 전국이 초록빛 융단으로 뒤덮이고 여름 건기가 다시 돌아<br />

올 때까지 그 상태가 지속된다. 분홍과 흰색의 시클라멘과 빨강, 흰색, 보라색의 아네모네는<br />

12월에서 3월까지 꽃이 피고, 파란 루핀과 노란 금잔화는 그보다 조금 뒤에 핀다. 크로커스,<br />

해총 등 상당수의 자생식물은 지중식물로서 구근이나 덩이줄기에 영양분을 저장하고 여름이<br />

끝날 무렵 꽃을 피운다. 이 같은 꽃밭 위로는 화려한 빛깔과 무늬를 뽐내는 135종 가량의


107<br />

나비가 날아다닌다.<br />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볼 수 있는 조류는 500종이 넘는다. 직박구리와 같은 몇몇 종은 국내에 사는<br />

텃새이고, 물닭과 찌르레기 등은 이스라엘의 양어지와 농경지가 제공하는 먹이를 실컷 먹으<br />

며 겨울을 난다. 수백만 마리의 새가 매년 두 번씩 국토를 가로질러 이동함으로써 새를 관<br />

찰할 수 있는 멋진 기회를 제공한다. 벌매, 펠리컨을 비롯한 여러 크고 작은 철새들이 3월<br />

과 10월에 이스라엘의 하늘을 채운다. 독수리, 새매, 매와 같은 몇몇 맹금류와 휘파람새, 상<br />

모솔새 등의 작은 명금류는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둥지를 튼다.<br />

우아한 영양은 고지 위를 배회하고, 여우, 살쾡이 및 기타 포유동물들은 삼림 지대에 서식<br />

하며, 웅장한 뿔을 가진 누비아 야생염소는 사막의 바위산을 뛰어다닌다. 또한 카멜레온, 뱀,<br />

아가마 도마뱀을 포함해 100종의 토착 파충류가 있다.<br />

간 하슐로샤 자연보호구역 • 알바트로스


108<br />

자연 보호<br />

자연환경 보전을 위해 자연과 야생생물의 보호에 대한 엄격한 법률이 제정되어 가장 흔한<br />

길가의 꽃을 꺾는 행위조차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자연 보호를 촉진할 책임을 맡고 있<br />

는 이스라엘 국립공원관리국(INPA)은 풍경과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INPA<br />

의 감독 하에 전국적으로 150개 이상의 자연보호구역과 65개 국립공원이 설립되었고, 그


109<br />

규모는 거의 1,000평방 킬로에 달한다. 자연보호구역 중 약 20곳은 방문자 센터, 도로, 하이<br />

킹 코스를 갖추고 일반 대중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되어 매년 2백만이 넘는 방문객을 유<br />

치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중요 지역 중 하나인 카르멜산(갈멜산)은 유네스코의 인간과 생물<br />

권 프로그램에 따라 생물권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br />

참나무, 종려나무, 영양, 야생염소, 표범, 독수리 등 수백 종의 동식물이 보호대상이 되고 있<br />

유대민족기금(JNF, 케렌 카예메트)은 이스라엘 땅의 개발, 개간, 조림 사업을 수행하고<br />

유대인 농업 공동체들을 위한 땅을 구입할 목적으로 1901년 창립되었다. 이스라엘이 독립을<br />

쟁취한 1948년 무렵 유대민족기금은 전세계 유대인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으로 24만 에이커<br />

가량의 토지를 매입했는데, 땅의 대부분은 수세기 동안의 방치로 인해 복구과정을 거쳐야<br />

했다. JNF는 또한 바위 산허리 곳곳에 약 45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br />

오늘날 약 30만 에이커에 달하는 숲과 삼림지에서 자라는 2억 그루가 넘는 나무는 이스라<br />

엘 시민들에게 야외 휴양과 자연 감상을 위한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JNF는 조림과<br />

삼림 보존 활동을 지속하는 한편 공원과 휴양지 개발, 새로운 공동체 기반시설 마련 및 다<br />

양한 집수 사업까지 실시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환경 보전 노력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110<br />

누비아 야생염소 • M.F.A.<br />

으며, 여러 멸종 위기종을 보전하기 위해 특별 구조활동이 개시되었다. 새들의 안전한 둥지<br />

터를 비롯해 늑대, 하이에나, 여우를 위한 급식소가 세워졌다. 지중해 해안에서 바다거북의<br />

알을 정기적으로 수집하여 부란기에서 부화시킨 뒤 새끼 거북은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br />

매년 5백만 마리가 넘는 새들이 거쳐가는 이스라엘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류 관찰 중심지<br />

이자 국제적 연구 및 협력의 중심지가 되었다.<br />

새의 이동경로를 주의 깊게 관찰하면 조류와 항공기 충돌사고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된다.<br />

“새에게는 국경이 없다”는 표어 아래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개설한 인터넷 사이트<br />

(http://www.birds.org.il)는 교육 및 연구 사업을 통해 전세계 어린이들을 이어주고 있다.<br />

전통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인해 성서시대에 존재하다가 그 후 해당 지역에서 사라지거나<br />

멸종 위기에 놓인 동식물들을 보호하고 다시 들여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스라엘<br />

의 중심부에 위치한 자연보호구역 네오트 크두밈(성서 식물원)은 성서에 언급된 현존하는<br />

식물종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고대 이스라엘 땅의 여러 지역의 토<br />

착 식물들로 대규모 식물원을 조성했다. 아라바와 카르멜산(갈멜산)에 설립된 하이바르 야생<br />

생물 구역은 예전에 이곳의 구릉과 사막을 거닐던 동물 종들을 원래의 자연 서식지로 되돌<br />

려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사육하고 있는 동물에는 타조, 페르시아 다마사슴, 오릭스,


111<br />

야생 당나귀, 소말리 야생 당나귀 등이 있다.<br />

학교와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가이드 견학, 간행물, 안내 캠페인을 통해 자연 보호에 대한 인<br />

식을 높이는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이스라엘 내 가장 큰 환경단체인 자연보호협회(SPNI)는<br />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생태계와 환경 파괴에 반대하는 수십 건의 캠페인을 이끌었다. 이 단<br />

체의 교육 복지 프로그램에는 현장 학교 10곳, 조류 관찰 센터 4곳, 도시 자연 센터 5곳,<br />

지부 10곳 등이 있다.<br />

카르멜산(갈멜산) 자연보호구역 • 알바트로스<br />

환경 보호<br />

급격한 인구 증가와 농업과 산업의 지속적 팽창은 환경 악화의 원인이 되었다. 그 피해는<br />

특히 이스라엘 인구의 절반 이상과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몰려있는 해안 지역에서 두드러지


112<br />

게 나타났다. 이스라엘은 지중해와 홍해 연안의 환경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주로 지중해 실<br />

천 계획의 기본 틀에 따라 조사, 입법, 시행, 해안 정화작업, 국제적 협력으로 구성된 다방<br />

면적 사업계획을 채택했다.<br />

물 부족과 집약적 개발이라는 상황 하에서 수질 악화는 극히 중요한 문제이다. 지하수 오염<br />

의 주된 원인은 화학 비료와 살충제, 해수 침투, 생활 및 산업 폐수이다. 폐수가 환경과 공<br />

중 보건에 미치는 영향을 저지하고 농업 용수원을 추가로 개발하기 위해 폐수 처리가 우선<br />

과제가 되어왔다. 최근 승인된 수자원 관리 계획안은 해수와 염수의 담수화, 재사용 목적의<br />

폐수 처리 개선, 효율적인 물 생산 및 물 보존 등을 명기하고 있다. 오염된 개울을 생태학<br />

적, 휴양적 가치가 있는 담수자원으로 전환한다는 목표 하에 개울의 복구 사업이 시작되었<br />

다. 음용수의 수질은 엄격히 관리되고 있다.<br />

대기의 수준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에너지 제품, 교통, 산업 등인데, 이 세 요인 모두 최근<br />

몇 년간 급격히 증가했다. 에너지 제품에 저유황 연료를 사용함에 따라 아황산가스 농도가<br />

상당 수준 감소했지만, 차량 증가와 관련된 오염물질 배출은 크게 증가했다. 이 문제를 완<br />

화하기 위해 무연 휘발유, 촉매 변환 장치, 저유황 디젤유 등이 도입되었다. 전국적인 감시<br />

시스템은 국내 곳곳의 대기 수준에 대해 최신 정보를 제공해준다. 이스라엘은 또한 오존 감


113<br />

소와 기후 변화에 대한 국제적 결의안을 준수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br />

인구, 생활수준, 소비의 급격한 상승은 고형 폐기물을 연간 약 4~5%정도로 크게 증가시키<br />

는 결과를 낳았다. 국내의 불법 쓰레기 처리장은 최근 몇 년간 대부분 폐쇄되었고, 환경적<br />

으로 안전한 매립지로 대체되었다. 방출량 감소, 재활용, 매립, 소각 등으로 이루어질 통합<br />

적 고형 폐기물 관리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의 재활용 규정은 저폐기물 및 무<br />

폐기물 기술로의 전환을 촉진할 것으로 보인다.<br />

유해물질의 “전주기에 걸친” 관리는 물질의 생산, 사용, 처분, 처리 등 모든 측면에 대한 허<br />

가, 규제, 감독을 바탕으로 한다. 법률의 시행, 사고시 통합적 비상 대응을 위한 국가 긴급<br />

계획을 실행, 유해 폐기물 처리장 개선 및 개량을 통해 건강과 환경에 대한 잠재적 위험을<br />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br />

환경법의 시행은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환경 교육과 더불어 최우선 사항으로 여겨진다.


114<br />

폐기물 오염방지 관리위원과 동물복지 관리위원들에게 관련법 위반사례를 보고할 권한이 부<br />

여됨에 따라 일반 국민도 환경법 시행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환경 개선 촉진을 위해 경제<br />

적 수단이 사용되는 경우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환경오염 예방에 투자하는 산업체에게 재<br />

정 보조금을 지원하는 형태와 오염 기업들에게 세금과 환경 부담금을 부과하는 방식이 모두<br />

사용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의 원칙에 따라 경제 모든 부문에서 자원 절약과 오염 방지를<br />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15<br />

기반시설<br />

통신: 이스라엘은 세계의 주요 상업, 금융, 학문적 데이터와 연결되어 있고, 수중 광섬유 통<br />

신선과 위성 연결장치에 의해 국제 통신 시스템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다. 국민 1인당 기준<br />

으로 전화선, 컴퓨터, 인터넷 사용자 측면에서 세계 상위를 기록한다.<br />

이스라엘은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전화망을 디지털화한 국가 중 하나이며, 그 결과 가입자<br />

들에게 최첨단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또한 세계적으로 무선전화 보급률이 가<br />

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br />

우편 서비스는 이스라엘 전역에서 운영되고 해외 대다수 국가와 연결되어 있다. 우표국은<br />

지금까지 1,500종이 넘는 우표를 발행했다. 이스라엘의 여러 유명 미술가들이 제작에 참여<br />

한 ‘전화카드’ 중 일부는 이미 작품의 위치에 올라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br />

도로: 지역간 거리가 짧은 국가에서는 자동차, 버스, 트럭이 주요 교통수단이 된다. 최근 몇<br />

년 동안 가장 외진 지역까지도 교통 이용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급격한 차량 증가에 발맞<br />

위성 중계국, 하엘라 골짜기 • 알바트로스<br />

추기 위해 도로망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개선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다차선 간선도로로<br />

이스라엘 최초의 유료 도로인 트랜스 이스라엘 하이웨이(6번 도로)는 남부 브에르셰바에서


116<br />

북부의 나하리야까지 이어지는 300km의 계획된 길이를 대부분 완공했다. 이 도로는 인구<br />

밀집 지역을 우회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교통체증을 완화하고 국내 대부분 지역까지 단시간<br />

안에 갈 수 있게 해준다.<br />

아얄론 인터체인지 • 알바트로스<br />

철도: 이스라엘 철도는 텔아비브, 예루살렘, 하이파, 나하리야, 브에르세바, 디모나 간에 여<br />

객 서비스를 운영한다. 화물 서비스는 더욱 남쪽으로 운영하여 아슈도드(아스돗)항구, 아슈<br />

켈론(아스글론)시, 디모나 남쪽의 광물 채석장까지 연결된다. 최근 몇 해 동안 철도 화물 및<br />

여객 서비스 사용이 모두 증가했다. 도로 교통량 증가로 야기된 각종 문제를 경감시키기 위<br />

해 기존 선로를 개량해 활용하는 고속철도 서비스를 텔아비브와 하이파 지역에 설립하여 버<br />

스 지선과 유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금 사용중인 낡은 객차의 상당수를 냉난방 장치를<br />

단 현대식 객차로 교체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며, 최첨단 기계식 보선장비도 가동되고 있다.<br />

예루살렘에는 도시 경철도 시스템이 공사 중이다.<br />

항구: 야포(욥바), 가이사랴, 아코(아크레)의 옛 항구들은 하이파, 아슈도드, 에일랏 지역의


117<br />

국제선 선박이 들어오는 현대식 심해항 3곳으로 바뀌었다. 하이파 항은 이용객으로 붐비는<br />

여객 터미널일 뿐만 아니라 지중해에서 가장 큰 컨테이너항 중 하나이다. 아슈도드 항은 주<br />

로 물품 선적에 이용되고, 홍해의 에일랏 항은 남반구와 극동지방과 이스라엘을 연결해준다.<br />

또한 아슈켈론의 유조선 항구는 연료 선적분을 받는다. 하데라에서는 화물선에서 직통으로<br />

인근 발전소에 석탄을 공급하는 출하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br />

지리적 입지로 인해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오가는 승객과 상품의 경유국가가 될 가능성이<br />

있음을 인식한 항만철도공사는 향후 운송 수요에 부합하기 위한 장기적 종합계획을 입안했<br />

다. 이 기관은 여러 우선사항 중에서도 특히 현대적 철도 시스템 개발, 육지와 해상교통 운<br />

영 전 단계에 최첨단 장비 설치, 모든 서비스의 관리감독을 위한 컴퓨터 네트워크 시스템의<br />

도입 등에 역점을 두고 있다.<br />

공항: 벤구리온 국제공항(자동차로 텔아비브에서 25분, 예루살렘에서 50분 거리)은 이스라<br />

엘 최대의 중심 공항이다. 입출국 승객 수가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 하에 대대적 확장공사를


118<br />

실시했고 최신식 터미널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 유럽에서 오는 전세기와 국내선의 경우에는<br />

남부에서는 에일랏 공항, 중부와 북부에서는 각각 텔아비브와 로시 피나 인근의 소규모 공<br />

항들을 이용한다.<br />

텔아비브: 수잔 델랄 무용연극 센터, 네베 체데크 지구 • 관광성<br />

수대에 걸친 건축: 이스라엘의 도시 건축은 매우 다양한 양식이 공존하고 있다. 지난 세기<br />

의 건물과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명 건축가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견고한 건축물, 건국 초<br />

기 새로운 이주민들에게 주거를 제공하기 위해 급하게 지어진 아파트 단지에서부터 철저하<br />

게 계획된 주거 지구, 콘크리트와 유리로 된 고층 오피스 빌딩과 현대식 고급 호텔에 이르<br />

기까지 여러 가지 건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119<br />

도시 생활<br />

이스라엘 인구의 약 92%가 도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오랜 옛날부터 알려져 온 예루살렘,<br />

사페드, 브에르셰바, 티베리아, 악코 등지에 여러 현대적 마을과 도시가 옛 것과 새것을 한<br />

데 융합시키며 건설되었다.<br />

하이파 268,250 메툴라 1,500<br />

하데라 75,300 키리얏 슈모나 22,000<br />

네타냐 169,400 사페드 27,300<br />

헤르쩰리야 83,000 티베리아스 39,900<br />

라아나나 70,500 카르미엘 43,500<br />

크파르 사바 79,800 나사렛 63,800<br />

브네이 브라크 142,300 예루살렘 730,000<br />

페타 티크바 176,200 키리얏 갓 47,800<br />

라마트 간 127,400 브에르셰바 184,500<br />

텔아비브-욥바 371,400 에일랏 44,500<br />

바트 얌 130,400<br />

리숀 레찌온 217,400<br />

홀론 165,800<br />

레호봇 101,900<br />

로드 66,600<br />

아슈도드 196,900<br />

아슈켈론 105,100


120<br />

레호봇, 하데라, 페타 티크바, 리숀 레찌욘 등지는 건국 이전에 농업 촌락으로 시작해서 점<br />

차 대규모 인구 중심지로 바뀌었다. 카르미엘, 키리얏 갓과 같은 개발 도시들은 건국 초기<br />

에 전국적으로 인구를 고루 분포시키고 인구분포가 낮던 기존의 지역에 산업과 서비스업을<br />

끌어와 농촌과 도시 경제를 긴밀히 연결하는 동시에 대규모 이민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 증<br />

가에 발맞추기 위해 건설되었다.<br />

유대 산지에 자리잡고 있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정부 소재지이며, 3천여 년 전<br />

다윗 왕이 자신 왕국의 수도로 정한 이래로 유대인들의 역사적, 정신적, 민족적 중심지가<br />

되고 있다. 종교와 전통, 성지와 예배당으로 신성시 되는 이 도시는 전세계 유대교, 기독교,<br />

이슬람교 신자들의 경외의 대상이다.<br />

1860년까지 예루살렘은 유대, 이슬람, 아르메니아, 기독교 지구 등 4 지구로 이루어진 성곽<br />

도시였다. 그 당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성 밖에 새로운 거주지역을<br />

건설함으로써 현대 예루살렘의 토대를 형성했다. 30년에 걸친 영국의 위임통치 기간<br />

감람산에서 본 도시 전경 • I. 스툴만


121<br />

(1918~48) 동안 예루살렘은 오스만 제국 시절(1517~1917)의 소외 받던 지방 도시에서 점차<br />

번성한 대도시로 변모했고, 새로 형성된 다수의 주거 지역은 각각 그곳에 사는 특정 집단의<br />

성향을 반영했다. 새로이 건국된 <strong>이스라엘에</strong> 대한 아랍의 공격 이후 예루살렘 시는 이스라<br />

엘과 요르단의 통치령으로 나뉘었고(1949), 그로부터 19년간 두 지역은 콘크리트 벽과 철조<br />

망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1967년의 6일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다시 통합되었다.<br />

오늘날 이스라엘의 최대 도시 예루살렘에는 73만이 넘는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고대나 현<br />

대나 예루살렘은 거주민들의 다양한 문화와 민족성, 엄격한 종교적 생활양식과 비종교적 생<br />

활양식이 혼재 된 다양성의 도시이다. 또한 도시의 연속성과 활력을 입증하는, 정성 들여<br />

재건한 사적지와 아름답게 조경한 녹지, 현대적 상업지구, 공업 단지, 발전하는 근교지역을<br />

갖춘, 과거를 보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도시이다.<br />

지중해 연안의 현대적 도시 텔아비브-욥바는 이스라엘 문화생활의 중추인 동시에 상업 및<br />

금융의 중심지이다. 산업 기관과 증권 거래소, 주요 신문사, 무역 센터, 출판사 대부분이 이<br />

곳에 본사를 두고 있다. 현대 들어 최초로 전 주민이 유대인으로 구성된 도시였던 텔아비브


122<br />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거주지 중 하나인 야포(욥바)의 교외 거주지로 1909년에 건<br />

설되었다. 1934년 텔아비브는 자치 도시의 지위를 얻었고, 1950년에는 구 욥바를 흡수하여<br />

새로운 지자체가 되면서 텔아비브-욥바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대 항구 욥바의 인근 지역은<br />

미술관, 레스토랑, 나이트클럽을 갖춘 예술인 마을과 관광 중심지로 개발되었다. 1930년대에<br />

서 50년대에 지어진 모더니즘 양식의 건물들이 대규모로 모여있는 텔아비브의 “화이트 시<br />

티”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br />

지중해에 연접한 하이파는 해안선에서부터 카르멜산(갈멜산) 비탈 위로 올라가 있는 도시이<br />

다. 하이파는 지형학상 3개 단계로 건설되어 있다. 바다 매립지를 일부 포함하는 도시 하부<br />

는 항만시설이 있는 상업 중심지이고, 중앙 부분은 오래된 주택지이며, 가장 윗부분에는 가<br />

로수가 줄지어선 도로와 공원, 소나무 숲을 갖추고 급속하게 팽창하는 현대적 거주지가 있<br />

고 그 아래로 드넓은 만의 해안 위에 공업 단지와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인다. 주요 심해항인<br />

하이파는 국제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이며, 북부 이스라엘의 행정 중심지의 역할도 겸하고<br />

있다.<br />

알바트로스


123<br />

갈릴리 산맥 위에 높이 자리잡은 사페드(츠파트)는 예술가 지구와 수백 년 된 유대회당들이<br />

있는 유명한 피서지이자 관광명소이다. 16세기에 사페드는 전세계적으로 유대교의 가장 중<br />

요한 학문적, 창조적 중심지였다. 이곳은 종교적 율법과 교훈을 세운 랍비와 학자, 신비주의<br />

자들의 집결지였으며, 이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실한 유대교 신자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br />

다.<br />

킨네렛 호수(갈릴리 호)의 호반에 있는 티베리야는 치유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오늘날 이<br />

도시는 사람들로 붐비는 호반의 관광 중심지로, 옛 유적지와 현대적 주택과 호텔들이 조화<br />

를 이루고 있다. 1세기에 건설되어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이곳은 유대 학문의<br />

중심지이자 유명한 랍비 학교의 소재지가 되었다.<br />

알바트로스<br />

네게브 북부의 브에르셰바는 사해와 에일랏으로 가는 길의 교차점에 위치해있다. 이곳은 약<br />

3,500년 전 민족의 조상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터 위에 지어진 신도시이다. ‘네게브


124<br />

의 수도’로 불리는 브에르셰바는 행정 및 경제 중심지로서 이스라엘 남부 전역을 담당하는<br />

지방정부 사무실과 보건, 교육, 문화 기관이 들어서 있다.<br />

이스라엘 최남단 도시 에일랏은 홍해와 인도양으로의 출구이다. 솔로몬 왕 시대의 항구 터<br />

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곳의 현대적 항구는 아프리카와 극동지역과의 교역물량을 처<br />

리한다. 따뜻한 겨울과 화려한 수중 장관, 잘 정비된 해수욕장, 수상 스포츠, 고급 호텔, 그<br />

리고 직항 전세기를 통해 유럽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장점에 힘입어 에일랏은 일년 내내<br />

번화한 관광지가 되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1994) 관광산업 부양<br />

을 목적으로 인접한 아카바시와 공동 개발 사업을 개시했다.<br />

알바트로스


125<br />

농촌 생활<br />

이스라엘 인구의 약 8%는 시골지역과 촌락, 그리고 20세기 초반에 개발된 고유의 협동 공<br />

동체인 키부츠와 모샤브에 거주하고 있다.<br />

다양한 크기의 촌락에는 주로 아랍인과 드루즈인들(이스라엘 인구의 1.7%를 차지)이 거주한<br />

다. 토지와 주택은 개인 소유이고, 농부들은 개별적으로 농작물을 재배하고 판매한다. 아랍<br />

인구 내의 소수민족으로 전통적으로 유목생활을 하는 베두윈 아랍인들(17만 명으로 추정)은<br />

현재 도시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것은 전통 사회에서 한곳에 정착한 현대적 생활양식으<br />

로의 이행을 나타낸다.<br />

알바트로스<br />

알바트로스<br />

키부츠는 자급자족 형태의 사회 및 경제 단위로서 이 공동체 내에서는 구성원들이 함께 결<br />

정을 내리며 재산과 생산수단은 공동의 소유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인구의 1.7%가 267개의


126<br />

키부츠에서 생활하고 있다. 구성원들은 키부츠 경제의 다양한 분야의 일을 할당 받는다. 키<br />

부츠는 과거 이스라엘 농업의 중추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산업, 관광업, 서비스업으로 점차<br />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키부츠 중 상당수는 전통적인 공동체 방식을 수정하며 다양한 사유<br />

화 단계에 와 있다.<br />

모샤브는 가정 단위로 각자의 농장과 가족을 관리하는 농촌 취락이다. 과거에는 구매와 판<br />

매에까지 협력 체계가 확장되었지만 오늘날의 모샤브 농민들은 경제적으로 좀 더 독립적인<br />

노선을 취한다. 441개의 모샤브와 모샤브 쉬투피는 인구의 약 3.4%를 구성하며 이스라엘 농<br />

업 생산물의 상당량을 공급하고 있다.<br />

이슈브 케힐라티(공동체 정착촌)는 새로운 형태의 농촌 취락으로, 현존하는 107개 공동체<br />

각각이 수백 가구로 이루어져 있다. 각 가정의 경제 생활이 완전히 독립적이고 가족 구성원<br />

대부분이 공동체 밖에서 일하지만 공동체 생활에서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도는 매우 높다.<br />

이슈브의 중앙관리 기관은 각 가정의 가장들로 구성된 총회이며, 총회의 연례회의에서 공동<br />

체 예산을 설정 및 승인한다. 관리 감독 위원회들과 더불어 많은 실무그룹에서 교육, 문화,<br />

청소년, 재정 등의 분야를 담당하여 처리한다. 유급직의 총무가 선출 기관의 결정에 따라


127<br />

공동체의 일상적 업무를 운영한다. 새로운 회원은 공동체의 승인이 있을 때만 가입할 수 있<br />

다.


128<br />

국민<br />

유대인 사회 128<br />

소수민족 공동체 138<br />

종교적 자유 142


129


130<br />

이스라엘 박물관(예루살렘) 제공<br />

국민<br />

이스라엘은 여러 인종, 종교, 문화, 사회적 배경을 가진 매우 다양한 인구가 살고 있는 나라<br />

이다. 과거의 뿌리를 지닌 이 새로운 사회는 지금도 여전히 통합되며 진화하고 있다. 710만<br />

인구 중 75.8%가 유대인, 19.9%가 아랍인(대부분 무슬림)이고 나머지 4.3%는 드루즈인, 체<br />

르케스인과 종교상으로 분류되지 않은 그 외 민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스라엘 사회는 역<br />

사가 비교적 짧으나 사회적 종교적 참여, 정치 이념, 풍부한 경제 자원, 문화적 창의성을 특<br />

징으로 하며 이 모든 요소가 지속적인 사회발전에 동력을 제공한다.<br />

הנה מה טוב ומה נעים שבת אחים גם יחד ‏)תהלים קל"ג א "(<br />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131<br />

유대인 사회<br />

고향으로 돌아가는 머나먼 여정<br />

2천여 년 전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된 후 그들은 주로 유럽, 북아프리<br />

카, 중동 등지의 타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가깝던 멀던 수세기에 걸쳐 이들<br />

은 그 땅에서 다수의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를 세웠고, 그 속에서 오랜 기간 성장과 번영을<br />

이루었다. 때로는 가혹한 차별과 잔인한 학살을 경험했고, 전체적이거나 부분적인 추방을<br />

겪기도 했다. 매번 박해와 폭력을 당할 때마다 “이산민 되 모으기”라는 구상에 대한 그들의<br />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고, 개인과 단체들은 조상의 땅으로 되돌아가리라는 의지를 다졌다. 19<br />

세기 말에 태동한 시온주의 운동은 이 구상을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전환시켰고, 이스라엘<br />

이 건국되면서 이것은 법으로 옮겨져 고국에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모든 유대인에게 시민권<br />

을 부여했다.


132<br />

새로운 사회의 구성<br />

현대 이스라엘 유대인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기초는 대부분 영국의 통치 기간<br />

(1917~48)에 형성되었다.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 공동체는 시온주의로부터 사상적 동기를 부<br />

여 받아 주권은 없었지만 권한을 행사하는 사회적 정치적 조직을 발전시켰고, 모든 계층은<br />

통합과 성장을 향해 움직여갔다. 자발적 참여는 정치적 뼈대였고, 평등주의는 사회를 묶어<br />

주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br />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고 뒤이어 대규모 이민으로 건국 초기 4년 동안(1948~52) 이스라엘의<br />

유대인 인구가 65만에서 130만 가량으로 배가됨에 따라 이스라엘의 사회 구조와 체제에도<br />

변화가 일어났다. 그 결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정착한 스파라디(스페<br />

인, 포르투갈계 유대인) 공동체와 노련한 아슈케나지(중앙∙동유럽계 유대인) 정착민들, 홀로<br />

코스트 생존자들로 이루어진 주류 집단과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 갓 이주해<br />

온 유대인들로 구성된 대규모 소수집단이 그것이다.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인구의 대부분은<br />

뚜렷한 사상적 확신과 개척 정신, 민주적 생활양식에 전념한 반면 수세기 동안 아랍 땅에<br />

살았던 유대인들 중 다수는 가부장적 사회 조직을 고수했고 이스라엘 사회와 빠르게 발전하<br />

는 경제에 통합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br />

텔아비브: 해수욕장의 행사 • 관광성


133<br />

1950년대 후반에 양 집단은 <strong>사실</strong>상 사회적, 문화적 상호작용이 전혀 없이 공존하고 있었고,<br />

북아프리카와 중동 출신 유대인들은 반정부 시위를 통해 불만과 소외감을 표시했다. 이는<br />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르러 정치적 참여 확대와 보상 차원의 자원 배분, 주류 이스라엘인<br />

들과의 격차를 좁히기 위한 소수계 우대정책에 대한 요구로 구체화되었다. 이 시기 동안 이<br />

스라엘 사회는 다양한 인구로 인해 야기된 긴장뿐 아니라 경제적 독립을 달성해야 하고 국<br />

경 너머 아랍인들의 무력 도발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하는 문제에도 직면해 있었다. 그럼에<br />

도, 종교와 역사적 기억, 유대인 사회 내의 민족적 결속이라는 공통 분모는 이 사회가 직면<br />

한 도전 과제들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입증했다.<br />

지속적인 이민자 수용<br />

지난 수년간 이스라엘은 열악한 지역이나 서방 자유국가에서 온 많고 적은 새로운 이민자들<br />

을 꾸준히 받아들여왔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대규모 이민은 수년 동안 이스라엘로 이주할<br />

권리를 얻기 위해 노력했던 구 소련의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로 이루어졌다. 1970<br />

년대에는 10만 명 가량이 입국한 반면 1989년 이래로 100만 명이 넘는 이들이 <strong>이스라엘에</strong><br />

“솔로몬 작전”으로 아디스 아바바에서 입국한 에티오피아 이민자 • 이스라엘 공보부/ Ts. 이<br />

스라엘리


134<br />

정착했다. 이중에는 교육수준이 높은 전문가와 저명한 과학자, 유명 미술가와 음악가들도<br />

다수 있었으며, 이들의 전문기술과 재능은 이스라엘의 경제적, 과학적, 학문적, 문화적 삶에<br />

크게 기여하고 있다.<br />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두 차례의 대대적 공수작전으로 에티오피아 유대인 공동체가 이스<br />

라엘에 도착했다. 일반적으로 이 공동체는 솔로몬 왕 시대 때부터 그곳에 정착해 있었던 것<br />

으로 여겨지고 있다. 5만 명의 이들 이민자가 아프리카의 농업 환경에서 서구 산업사회로<br />

전환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젊은 층의 적응하고자 하는 열의는 오랜 기간 고립되어<br />

있던 이 유대인 공동체의 사회적 흡수를 앞당길 것이다.<br />

종교적 다양성<br />

성서 시대부터 유대인들은 종교적 요소와 민족적 요소를 함께 통합하며 유일신 신앙인 유대<br />

교를 믿는 민족이었다. 18세기에는 전세계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동유럽에 거주했는데, 이곳<br />

에서 그들은 강제 거주지구에 고립되어 주변 사회와 거의 소통하지 못했다. 이들은 한정된<br />

공동체 내에서 여러 가지 일을 자체적으로 꾸려나갔고, 수세기에 걸쳐 종교학자들이 발전시<br />

켜 성문화한 유대 법(할라카)를 충실히 따랐다.<br />

예루살렘: 초 정통파 지역의 하시디즘 유대인들 • 관광성


135


136<br />

I. 스툴만, U. 나혼 유대 미술 박물관 제공<br />

19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해방과 민족주의 사조는 교육, 문화, 철학, 신학에 대해 좀 더 자유<br />

로운 접근하도록 해주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몇몇 유대인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중<br />

일부는 진보적 신앙노선을 전개했고 일부는 국가적,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지지했다. 그 결<br />

과 다수에 속하는 많은 유대인들이 정통주의 신앙과 그에 따른 생활양식에서 벗어났고, 일<br />

부는 일반 사회에 완전히 통합되고자 노력했다.<br />

오늘날 이스라엘의 유대인 사회는 유대교 신앙을 엄격히 지키는 유대인과 그렇지 않는 유대<br />

인들로 이루어져 있고, 초 정통파에서부터 스스로를 비종교적이라 여기는 이들까지 다양한<br />

범위에 걸쳐있다. 그러나 이들 간의 차이가 분명하지는 않다. 정통 신앙이 유대 종교법과<br />

관례를 준수하는 정도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유대인 중 20%는 모든 종교적 율법<br />

을 지키고 있고, 60%는 개인의 선택이나 소수민족적 전통에 따라 종교법 일정부분을 따르<br />

며, 20%는 <strong>사실</strong>상 종교법을 준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로 간주되기 때<br />

문에 샤바트(안식일, 토요일)와 모든 유대 명절은 국경일로 제정되어 있으며, 정도에 차이가<br />

있지만 유대인 인구 전체가 이날들을 기념하고 지킨다.<br />

종교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는 다른 지표로는 자녀에게 종교 교육을 시키는 학부모의 비율


137<br />

이나 총선에서 종교적 정당에 표를 던지는 유권자의 비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br />

대교 비 종교인이 자녀들을 종교인 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하고 많은 정통파 시민들이 비종교<br />

적 정당에 투표하고 있으므로 이런 통계자료의 의미는 확실치 않다.<br />

기본적으로 다수를 이루는 쪽은 현대적 생활양식을 표명하며, 종교법을 존중하고 실천하는<br />

정도가 다양한 이들이다. 이 주류집단 중 많은 이들이 수정된 전통적 생활방식을 따르고 있<br />

고 일부는 진보적 종교 추세에 합류한다.<br />

스파라디와 아슈케나지 양쪽 내부에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보수적인 소수집단이 있는데 이스<br />

라엘의 국민생활에 참여하면서도 유대 종교법으로 규정된 종교적 생활방식을 고수한다. 이<br />

들은 현대적 유대국가를 이스라엘 땅 내 메시아의 도래와 유대민족의 구원으로 향하는 첫<br />

단계로 여긴다.<br />

그에 반해 일부 초 정통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 안의 유대인 주권은 메시아가 도래한 후<br />

에만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유대 종교법을 엄격히 지키는 이들은 독립된 지역에 거주하<br />

며 자체 학교를 운영하고, 전통 복장을 하고 남녀의 역할을 뚜렷이 구분하며 엄격히 제한된


138<br />

생활양식을 고수한다.<br />

유대인 내부의 역학관계<br />

종교와 국가 간의 뚜렷한 구분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유대 종교적 정체성을 어느 선까<br />

지 표명해야 하는가가 공동체간의 핵심 문제가 되고 있다. 정통주의 그룹 사회는 개인적 차<br />

원을 넘어서는 범위로 종교 법령을 확대하고 그것에 대해 독점적 관할권을 가지려 하는 반<br />

면 비 종교인 집단은 이를 종교적 강압이자 이스라엘의 민주주의 본질에 대한 침해로 간주<br />

한다. 현재 진행중인 한 문제의 핵심은 어떤 사람을 유대인으로 규정하는데 필요한 요소가<br />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정통파 측은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거나 엄격히 유대법에 따라<br />

개종한 사람을 유대인으로 정하는 방식을 주장한다. 반면 비 종교인 측은 주로 유대교에 대<br />

한 개인적 일체감이라는 일반적 기준을 근거로 하는 정의를 지지한다. 이러한 이해 상충은<br />

종교와 국가 간의 경계를 규정하는 법적 수단을 찾아 나서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포괄적인<br />

해결방안을 찾을 때까지는 이스라엘의 독립일 전야에 합의되었던 현상 유지 안이라 알려진<br />

한 구두 협정이 권한을 지닌다. 이 협정은 종교적 상황에 주요한 변화를 주지 말 것을 명시<br />

하고 있다.<br />

키부츠 사회<br />

키부츠는 평등과 공동의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독특한 사회 및 경제 체제로, 20세기 초 이


139<br />

스라엘 개척기에 탄생하여 항구적인 농촌 생활방식으로 발전했다. 수년에 걸쳐 키부츠는 먼<br />

저 농업을 위주로 성공적인 경제를 확립했고 뒤이어 산업과 서비스업으로 영역을 확대했으<br />

며, 국가 수립과 건설에 대한 그 구성원들의 기여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br />

키부츠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서 건국 초기 동안까지는 정착과 이주, 국방에서 중추적 기<br />

능을 담당했으나, 이 같은 책임을 정부가 맡게 되면서 키부츠와 이스라엘 주류사회 간의 상<br />

호작용이 줄어들었다. 사회 및 제도적 발전을 선두에서 이끌던 중심적 역할이 축소되었고,<br />

1970년대 이후에는 초창기 시절 과잉 대표성을 가져왔던 키부츠의 정치적 세력도 약화되었<br />

다. 그러나 국민생산에서 키부츠가 차지하는 비중은 인구 비율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을 꾸<br />

준히 유지하고 있다.<br />

키부츠: 대추야자 과수원의 청년 노동자 •<br />

키부츠: 축사와 젖을 짜는 청년들 • 관광성


140<br />

최근 몇 십 년간 키부츠는 좀 더 자기 반성적인 태도를 취하여 개인적 성취와 경제적 성장<br />

에 역점을 두었다. 많은 키부츠 공동체에서 외부 노동자 고용에 대한 금기가 약화됨에 따라<br />

‘우리가 직접 한다’는 노동관도 좀 더 유연해졌으며, 비회원인 유급 노동자들이 고용되는 수<br />

도 점차 늘고 있다. 이와 동시에 키부츠 회원들 중 키부츠 외부에서 일하는 이들의 수도 늘<br />

고 있으며 이들의 급여는 키부츠 수입을 증가시키고 있다.<br />

오늘날의 키부츠는 3대가 이룬 성과이다. 최초 창립자들은 확고한 신념과 명확한 사상을 바<br />

탕으로 독특한 생활방식을 지닌 사회를 구성했다. 새로운 사회구조가 생성된 상황에서 태어<br />

난 그들의 자녀 세대는 열심히 일하여 공동체의 경제, 사회, 행정적 기초를 굳건히 했다. 제<br />

대로 정착된 사회 속에 성장한 현 세대는 현대적 생활이 던지는 도전과제들을 해결하기 위<br />

해 힘쓰고 있다. 지금은 개인과 키부츠 공동체 간의 관계와 상호 책임의 향후 성격과 최근<br />

의 기술과 통신의 발전상황이 키부츠 사회에 가져올 결과에 대해 많은 토론이 이루어지고<br />

있다.<br />

일각에서는 키부츠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신념과 가치에서 크게 벗<br />

어나는 길로 향하고 있다는 우려를 보인다. 그에 반해 다른 일각에서는 이처럼 타협하고 적<br />

응하는 능력이야말로 키부츠가 존립하는데 필요한 열쇠라고 믿고 있다.


141<br />

소수민족 공동체<br />

이스라엘 인구의 약 24%에 해당하는 170만 가량의 인구는 비유대인들이다. 아랍계 이스라<br />

엘 국민으로 규정하고는 있지만 이들은 서로 다른 다수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로<br />

아랍어를 사용하고 각기 뚜렷한 특징을 보유하고 있다.<br />

무슬림 아랍인: 대부분이 수니파로서 거의 백만 명에 육박하며 주로 소도시와 촌락에 거주<br />

하며, 그 중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 북부에 분포해 있다.<br />

베두윈 아랍인: 역시 무슬림들인 베두윈 아랍인들(약 17만 명으로 추산)은 30여 개 부족으<br />

로 나뉘어 있고, 대다수가 남부지방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고 있다. 원래 유목민이었던 베<br />

두윈 족은 현재 부족사회 체계에서 항구적 정착사회로의 변화를 겪고 있으며, 점차 이스라<br />

엘의 노동력에 진입하고 있다.<br />

기독교 아랍인: 11만 7천 명 정도의 기독교 아랍인들은 주로 나사렛, 슈파르암, 하이파 등의<br />

도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명목상으로는 많은 교파가 있지만 이들 중 다수는 그리스 가톨<br />

릭, 그리스 정교회, 로마 가톨릭에 속한다.<br />

예루살렘 구도시: 무슬림 지구 안의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와 슈크(시장) • 관광성


142<br />

광막한 아라바 일대의 베두윈족 • 관광성<br />

드루즈인: 아랍어를 구사하는 11만 7천 명 가량의 드루즈인들은 이스라엘 북부의 22개 촌<br />

락에 거주하며 독립적인 문화, 사회, 종교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외부인들은 드루즈교에<br />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지만 이 종교의 원리에 대해 한 가지 알려진 것은 타키야(taqiyya)라<br />

는 개념이다. 타키야는 그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국가의 정부에 대해 전적으로 충성할 것<br />

을 요구한다.<br />

체르케스인: 북부의 두 촌락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3천 명 가량의 체르케스인은 아랍 혈통<br />

이나 대규모 무슬림 공동체와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수니파 무슬림들이<br />

다. 이들은 독특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편, 유대 사회나 무슬림 공동체에 동화되지<br />

않은 채 이스라엘의 경제적 국가적 일에 참여한다.<br />

아랍 공동체 생활<br />

아랍인들의 이스라엘 내외로의 이주는 그 당시의 경제 상황에 따라 변동폭이 컸다. 19세기<br />

후반 유대인 이주로 경제 성장이 활기를 띠자 많은 아랍인들이 고용 기회와 높은 임금,<br />

베이트 얀 마을의 드루즈 노인들 • 관광성


143<br />

관광성<br />

아랍 문화회관 • 예루살렘 재단 제공/ M. 라우버<br />

더 좋은 생활여건에 이끌려 이 지역으로 유입되었다<br />

이스라엘 내 대부분의 아랍 인구는 나사렛시를 비롯한 갈릴리의 자급자족형 도시와 촌락,<br />

하데라와 페타 티크바 사이의 중부 지역, 네게브, 그리고 예루살렘, 아코(아크레), 하이파,<br />

로드, 라믈레, 야포(욥바)와 같은 다 인종 도시 중심지에 거주하고 있다.<br />

이스라엘의 아랍 공동체는 주로 중산층 사회 안의 노동자 계층, 고도로 집중화된 국가 안의<br />

정치적 주변 집단,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다수 안의 소수 아랍어 사용 인구를 형성하고 있다.<br />

본질적으로 동화되지 않는 이 공동체의 독특한 정체성을 촉진하는 요소로는 이스라엘의 두<br />

번째 공식언어인 아랍어의 사용, 개별적인 아랍/드루즈 학교 시스템, 아랍어 언론과 문학,<br />

극장, 그리고 이슬람, 드루즈, 기독교 종파 별로 개인의 신분법상 지위문제를 판결하는 독립<br />

된 법정을 유지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br />

옛 풍습이 여전히 일상의 일부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부족적, 가부장적 권위가 점차 약화되


144<br />

다원주의와 분리주의: 이스라엘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다언어 사회로서 비공식적 격<br />

리의 정도가 상당히 크다. 공식 정책으로 격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사회 내의 각기<br />

다른 여러 영역들은 서로 분리되어 그들만의 강한 문화적, 종교적, 사상적, 민족적 정체성을<br />

유지하고 있다.<br />

그러나 상당히 높은 사회 균열 정도와 얼마간의 경제 불균형, 종종 과열되는 정치생활에도<br />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회는 비교적 균형이 잡혀있고 안정적이다. 내재적인 사회불안 가능성<br />

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집단 간에 사회적 갈등이 적은 것은 엄격한 법적, 시민적 평등을<br />

대표하는 사법 및 정치 체계 덕이라 할 수 있다.<br />

따라서 이스라엘은 용광로식(melting-pot) 융화 사회가 아니라 다양한 인구집단이 민주주의<br />

국가라는 틀 안에 공존하면서 형성한 모자이크식 사회이다.<br />

고 의무 교육의 효과와 이스라엘의 민주적 과정에 대한 참여가 늘어남에 따라 전통적인 시<br />

각과 생활양식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고 있다. 이와 동시에 여성의 동등한 권리 및 일부다처<br />

와 미성년 결혼 금지를 명기한 법률로 인해 이스라엘 내 아랍계 여성의 지위도 크게 신장되<br />

었다.<br />

아랍 지역의 정치적 참여는 총선과 지방 선거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아랍계 시민들은 해당<br />

지방자치체의 정치 및 행정 사무를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그들이 선출한 크네세트(이스라엘<br />

의회) 내 대표들을 통해 아랍계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그들이 뽑은 의원들은 정치권에서<br />

소수민족 집단의 지위와 국민적 혜택을 증진시키는 활동을 할 수 있다.<br />

이스라엘 건국(1948) 이래로, 아랍세계(<strong>이스라엘에</strong> 잦은 공격을 가한 주체)와의 가족, 종교,<br />

문화적 관계에의 고려와 이중 충성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 아랍계 시민들은 이스라엘 방위군


145<br />

(IDF) 병역 의무를 면제 받아왔다. 대신 자원 입대는 장려되며, 매년 일부 젊은이들이 군 복<br />

아랍-유대인 유치원에서, 예루살렘 YMCA • 예루살렘 재단 제공/ S. 사벨라<br />

무를 선택하고 있다. 1957년부터 해당 공동체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드루즈인과 체르케스인<br />

남성들에게 IDF 병역 의무가 부과된 한편, 직업 군인으로 자원 입대하는 베두윈 족의 수도<br />

꾸준히 늘고 있다.<br />

아랍-유대인의 역학관계<br />

이스라엘 인구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아랍계 시민은 서로 대립하는 유대와 팔레스타<br />

인 세계의 가장자리에 존재한다. 그러나 문화와 정체성 면에서 여전히 아랍 민족의 한 부분<br />

으로 남아있고 이스라엘을 유대 국가로 보기를 거부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이스라엘<br />

과 묶어서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 아랍 인구는 히브리어를 제 2의 언어로, 이스라엘<br />

문화를 그들 삶의 또 하나의 단층으로 수용했다. 동시에 이들은 국민 생활에의 참여와 국가<br />

경제에 통합되는 수준을 높이고 그들의 도시와 촌락에 더 큰 혜택을 가져오기 위해 애쓰고<br />

있다.<br />

이스라엘 아랍인과 유대인 집단 간의 관계 발전을 저해한 요인은 뿌리 깊은 종교와 가치관,<br />

정치적 신념의 차이였다. 그러나 자체적으로 분리된 두 공동체로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br />

오랜 시간에 걸쳐 이들은 서로를 수용하면서 상대 공동체의 고유성과 이상을 인정하기에 이<br />

르렀다.


146<br />

종교적 자유<br />

이스라엘 건국 선언(1948)은 모든 이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법적으로나 실제로<br />

나 모든 종교 공동체는 각자의 신앙을 실천하고 절기일과 매주 휴일을 지키며 내부 문제를<br />

관장할 자유가 있다. 각기 자체적 종교 위원회와 법정을 보유하며, 이 기관들은 법으로 승<br />

인되어 있고 관할 범위는 모든 종교관련 문제와 결혼이나 이혼과 같은 개인의 지위 문제를<br />

포괄한다. 또한 각기 고유의 예배당이 있으며,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전통적 예배의식과<br />

특수한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다.


147<br />

유대교 회당: 정통주의 유대교 예배에는 민얀(10명의 성인 남성 정족수)이 필요하다. 기도는<br />

매일 세 번씩 이루어진다. 남자와 여자는 보통 따로 착석하며 머리는 가린다. 랍비나 선창<br />

자, 회중 한 사람이 예배를 진행한다. 랍비는 성직자나 신과의 중개자가 아니라 일종의 스<br />

승이다. 회당의 중심은 신성한 법궤로, 예루살렘의 성전산을 향해있는 이 법궤에는 토라(모<br />

세 오경) 두루마리가 담겨있다. 매주 분량을 미리 정해 토라를 연중 주기적으로 읽는다. 예<br />

배는 특히 샤바트(토요일, 유대교 안식일)와 유대명절에 특별하게 치러진다.<br />

모스크(이슬람 사원): 이슬람교에서는 하루에 다섯 차례 기도를 하고, 남자와 여자는 따로<br />

예배를 본다. 신발은 벗어야 하고 세정식을 거행하는 경우도 있다. 무슬림들은 사우디 아라<br />

비아의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는데, 그 방향은 모스크 벽면에 있는 미흐라브(벽감)로 표시된<br />

다. 예배의식은 이맘이라는 이슬람 예배 지도자가 거행한다. 전통적 이슬람 안식일인 금요<br />

일에는 대개 대중 설교가 있다.<br />

교회: 기독교 예배의 형식과 횟수는 종파에 따라 다양하지만, 모두 일요일을 성일로 지키고<br />

특별 예배를 갖는다. 목사가 예배를 이끌며, 남자와 여자는 함께 예배를 본다. 예배식에는<br />

종종 음악과 성가대의 노래가 사용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다.


148<br />

성지<br />

성지와 성소는 각 종교별로 해당 당국이 관할하며, 방문과 예배의 자유는 법으로 보장되어<br />

있다. 주요 성지는 다음과 같다.<br />

유대교: 제 2성전시대의 성전산 벽의 마지막 남은 자취인 예루살렘 코텔(서쪽 벽), 베들레헴<br />

인근의 라헬의 무덤, 헤브론 막벨라 동굴에 있는 조상들의 무덤, 티베리아스에 있는 마이모<br />

니데스(람밤)의 무덤과 메론산에 있는 랍비 시몬 바르 요하이의 무덤.<br />

I. 스툴만<br />

이슬람교: 예루살렘 내 바위의 돔과 알-아크사 사원을 비롯한 성전 산의 하람 알 샤리프 복<br />

합 건축물, 헤브론에 있는 조상들의 무덤, 아코에 위치한 엘-자자르 사원.<br />

기독교: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길, 최후의 만찬 방, 성묘교회 및 기타 예수의 수난과 십<br />

자가 처형 관련 유적지, 베들레헴의 그리스도 탄생 교회, 나사렛의 수태고지 교회, 갈릴리<br />

호(킨네렛 호수) 근처에 있는 팔복산과 타브가, 가버나움.<br />

드루즈교: 갈릴리의 히틴의 뿔(Horns of Hittin) 근처에 있는 네비 슈에이브(모세의 장인 이드<br />

로의 무덤).<br />

바하이교 (19세기 중엽 페르시아에서 창설된 독립적인 세계 종교): 하이파 소재 바하이 월<br />

드 센터인 바브 사원, 악코 인근에 있는 바하이교 창시자 바하올라의 사원.


149<br />

예루살렘: 바위의 돔 • 관광성<br />

팔복산: 교회 외관, 전통적인 산상 수훈 성지 • 관광성<br />

하이파: 바하이교 바브의 사원과 정원 • 관광성


150<br />

보건과 사회 서비스<br />

보건 서비스 150<br />

의학 연구 155<br />

국경을 초월한 나눔 157<br />

사회 서비스 158


151<br />

사회 보험 161<br />

자원봉사 162


152<br />

보건과 사회 서비스<br />

이스라엘의 수준 높은 보건 서비스와 최고의 의료자원과 연구, 현대적 병원시설, 인구 대비<br />

의사와 전문의의 높은 비율은 낮은 유아 사망률(정상출산 1,000건당 4.7건)과 높은 평균수<br />

명(여성 82.2세, 남성 78.5세)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아부터 노인까지 모든 이들을 위한 건<br />

강관리가 법으로 보장되어 있으며, 국가의 보건관련 지출도 다른 선진국의 지출에 필적하는<br />

수준이다.


153<br />

כל ישראל ערבין זה בזה ‏)שבועות ל"ט:‏ א'(‏<br />

온 이스라엘은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부오트 39a)<br />

보건 서비스<br />

예방, 진단, 치료를 위한 의료 서비스망을 비롯한 보건 시스템은 유대인 공동체와 1918년부<br />

터 1948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의해 건국 이전 시기에 그 토대<br />

가 마련되었다.<br />

따라서 이스라엘이 건국될 무렵에는 이미 잘 발달된 의료 기반시설이 역할을 다하고 있었고,<br />

예방접종은 통상적 절차였으며, 환경 여건 개선을 위한 체계가 가동되고 있었다. 그러나 건<br />

국 초기에는 전후 유럽과 아랍 국가에서 온 수십만 피난민들의 보건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br />

보건 서비스국이 앞서 해결한 일부 문제들에 다시 착수해야 했다. 이 같은 과제를 해결하기<br />

위한 방법으로 광범위한 보건 교육 및 예방 의학 사업과 특별 서비스 제공을 수반하는 국가


154<br />

차원의 집중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br />

오랜 전통: 19세기 당시 오스만 제국의 낙후되고 방치된 지역이었던 <strong>이스라엘에</strong>는 이질, 말<br />

라리아, 발진티푸스, 트라코마와 같은 질병들이 만연했다. 예루살렘 구도시의 유대인 인구에<br />

게 보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들이 설립한 여러 진료소들은 치료비<br />

를 낼 형편이 못 되는 이들에게 무료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실천한<br />

그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진료소들이 확대되어 비쿠르 홀림<br />

(1843년 설립), 미스가브 라다크(1888년 설립), 샤아레 쩨데크(1902년 설립) 병원이 되었다.


155<br />

샤아레 쩨데크 병원 제공<br />

이 병원들은 현대적 의료 기술과 함께 최첨단 서비스를 제공하며 지금까지도 운영되고 있다.<br />

의과대, 간호대, 약학대와 현대식 병원 두 곳을 갖춘 예루살렘 소재의 히브리대학 하다사<br />

메디컬 센터는 1913년 미국의 하다사 여성 시온주의 조직이 예루살렘에 파견한 간호사 두<br />

명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br />

이스라엘 시민들은 병원, 외래환자 진료실, 예방의학 및 갱생 시설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의<br />

료 네트워크 서비스를 제공 받고 있다. 병원 치료에는 체외 수정, MRI 스캔, 복잡한 뇌 수술<br />

부터 골수 및 장기 이식에 이르는 고도로 발달된 절차와 전문기술이 수반된다.<br />

임신중인 여성과 신생아기부터 영유아기까지 아동들을 위한 모자보건센터는 산전검사, 정신


156<br />

및 신체 장애의 조기 발견, 예방접종, 소아과 정기검진, 보건 교육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br />

행정과 구조<br />

모든 보건 서비스는 보건부의 책임 하에 관리된다. 보건부는 법안 마련과 그 실행 여부 감<br />

독, 전국적 의료 기준 관리, 식품 및 의약품 품질 기준을 유지, 의료인력 면허 관리, 의학<br />

연구 촉진, 보건 서비스 평가, 병원 설립 계획과 건설 감독을 담당한다. 보건부는 또한 환경<br />

및 예방 의학에 대한 공중보건 기구의 역할도 수행한다.<br />

보건 인력<br />

이스라엘 내 약 3만 2천 명의 의사와 9천 명의 치과의사, 6천 명의 약사는 종합병원과 지역<br />

진료소의 구성원이나 개업의로서 전문직 종사자로 일하고 있다. 국내 5만 4천 명의 간호사


157<br />

중 약 72%는 정규 간호사이고 나머지는 간호 조무사이다.<br />

의료 전문직에 대한 훈련은 의과대학 4곳과 치과 대학 2곳, 약학대학 2곳, 학위를 수여하는<br />

7곳을 포함하는 간호학교 15곳에서 제공된다. 물리치료사, 직업치료사, 영양학자, X선 및 실<br />

험 기사 양성 과정도 여러 기관에서 제공하고 있다.<br />

건강 보험<br />

국민보험법은 모든 이스라엘 거주자들을 위해서 입원을 포함하는 일련의 규격화된 의료 서<br />

비스를 규정하고 있다. 포괄적인 4가지 건강보험 제도에 의해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으<br />

며, 이 제도는 연령이나 건강 상태와 무관하게 모든 신청자들을 받아들이도록 되어있다.<br />

주요 재원은 국립보험협회가 매달 징수하는 소득의 최고 4.8%에 해당하는 건강보험세와 고<br />

마겐 다비드 아돔: 이스라엘의 응급 의료서비스 단체인 마겐 다비드 아돔(다윗의 붉은 별)은<br />

응급치료 시설 네트워크와 전국적 헌혈 사업, 혈액 은행, 응급처치 교육과정, 이동식 중환자<br />

실을 포함하는 공공 구급차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이 기관은 1만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의<br />

도움으로 운영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고등학생들이다. 자원봉사자들은 전국에 있는 109<br />

개 치료소에서 활동하고 있다.<br />

용직원의 보험료 중 고용주 부담비용에서 나온다. 보험 제도는 연령과 집에서 보건시설까지<br />

의 거리 및 기타 보건부에서 정한 기준에 따라 계산한 가중 평균 보험가입자수에 따라 상환<br />

된다.<br />

건강 문제<br />

이스라엘의 건강 문제는 서구사회에 주로 나타나는 문제들과 유사하다. 심장질환과 암이 사<br />

망 원인의 2/3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이 질병들에 대한 연구가 국가적 우선과제가 되었다.<br />

이에 더해 고령화 인구를 위한 의료 서비스, 환경 변화로 야기되는 문제들, 현대적 생활양


158<br />

식으로 발생하는 질병, 교통 및 직업 사고 등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건강에 해<br />

로운 것으로 판명된 흡연, 과식 등의 습관을 중지하고 운동 부족을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br />

일반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보건 교육 프로그램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근로자와 운전<br />

자들을 대상으로 발생 가능한 위험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는 캠페인도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br />

다.<br />

건강 관광: 이스라엘은 전세계의 류머티즘, 건선, 천식과 같은 만성 질환 환자들에게 유명한<br />

관광지이다. 티베리아 온천의 특수 치료나 미네랄이 풍부한 사해수, 네게브 사막의 현대적<br />

도시 아라드의 건조한 기후 등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고 있다.<br />

알바트로스<br />

의학 연구<br />

이스라엘의 잘 발전된 의학 및 대체의학 연구와 생명공학 능력 기반은 광범위한 과학적 탐<br />

구를 촉진하고 있다.<br />

의과 대학, 여러 정부 기관과 연구소를 비롯해 제약, 생명공학, 식품 가공, 의료기기 산업계<br />

기업들의 연구 개발 부서들이 여러 연구를 실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수준 높은 연구설비<br />

는 세계적으로 인정 받고 있으며, 해외 주요 의학 및 과학 연구센터들과 상호주의에 입각해


159<br />

정기적으로 교류를 갖는다. 이스라엘은 또한 다양한 의학관련 주제에 대한 국제 회의를 빈<br />

번히 주최하고 있다.<br />

샤아레 쩨데크 병원 제공<br />

의학 기술<br />

정교한 기술은 현대적 진단 및 치료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이다. 의학연구 기<br />

관과 업계간의 긴밀한 협력은 특수 의료기기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진보를 이끌어냈다. 특<br />

히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제작한 CAT 스캐너와 고도의 초소형컴퓨터 기반 장치들은 결정적 상황에<br />

서 정확한 진단과 효과적 치료에 필수적인 기기들로서 전세계로 수출되고 있다.<br />

이스라엘은 전산 감시 체계를 비롯해 생명을 구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여러 장치들을 포함하<br />

는 다양한 전자 의료장비와 레이저 수술 기구의 개발과 사용에도 앞장섰다.


160<br />

국경을 초월한 나눔<br />

이스라엘의 병원들은 적절한 치료는 이념과 정치적 국경이라는 장애물을 초월하는 인류의<br />

보편적 권리라는 신념에 따라 그들의 전문 기술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문을 활짝 열고 있다.<br />

지난 수년간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은 나라들까지 포함해 세계 곳곳의 환자들<br />

이 전문적 치료를 받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다수 지역에서 이스라엘의<br />

의사와 간호사들은 선진국에서는 <strong>사실</strong>상 근절된 질병들을 치료하는 일을 지원하고, 일부 세


161<br />

계보건기구의 지원을 받는 교류 프로그램에 참가한 해당 지역 의료 인력에게 그들의 기술을<br />

전수하고 있다. 이스라엘 의료팀은 재해 지역의 구호 활동에도 참가하고 있다.<br />

이스라엘 방위군(IDF) 수색구조 팀의 활동 모습(터키 지진 발생 후) • 이스라엘 공보부/ Y.<br />

사르<br />

사회 서비스<br />

이스라엘의 포괄적 복지 체계는 국가 및 지역사회 차원의 광범위한 서비스를 규정해놓은 법<br />

률을 기반으로 한다. 노인 복지, 홀 부모, 아동, 청소년 지원 프로그램, 약물 남용 예방과 치<br />

료, 신규 이민자들에 대한 지원 등이 사회 서비스 시행 부문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br />

교정 사업은 보호관찰 체계, 중퇴자들을 위한 교정 프로그램, 문제를 겪는 청소년들을 위한


162<br />

거주 및 관찰 서비스 등을 아우른다. 맹인 및 신체 장애자들에게는 보호 작업장과 직업 상<br />

담 등의 재활 서비스를 제공한다. 발달 장애인들은 다양한 거주 및 공동체 기반 프로그램을<br />

통해 보살핌을 받고 있다.<br />

행정<br />

사회복지법(1958)에 의하면 지방자치체와 지역 당국들은 사회 서비스를 담당하는 부서를 운<br />

영해야 하며 이러한 부서 예산 중 75%는 노동사회부에서 나오도록 되어있다. 입양, 보호관<br />

찰 체계, 발달 장애인들을 위한 거주시설과 같은 전국적인 서비스의 재정 지원과 운영은 노<br />

동사회부에서 담당한다. 이 부처는 정책을 결정하고 법령을 발의하며, 사회 서비스 운영을<br />

위한 법규를 제정하고 공공 및 민간 조직이 제공하는 사회 서비스를 감독한다.<br />

사회 서비스 인력<br />

대다수 대학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 대학원은 이론 연구와 현장 실습을 결합하여 준 석사와<br />

석사과정 교육을 제공한다. 국영 프로그램들은 보육 인력과 사회복지 보조요원 교육과 사회<br />

복지 전문가들을 위한 현직 연수를 실시한다. 지역 사회 복지사들은 사회복지국, 지역사회<br />

센터, 이민자 통합 시설, 모자 보건 센터, 학교, 공장, 병원을 비롯한 다양한 환경에서 종사


163<br />

하고 있다.<br />

노년층<br />

노년층을 위한 복지 서비스는 이스라엘의 보건 및 사회 서비스 능력의 핵심 요소가 되어왔<br />

다. 건국 이후 총인구는 5배 증가한 반면 노인 인구(65세 이상) 수는 10배나 증가함에 따라<br />

현재 이스라엘 거주 인구 7백만 중 10%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증가하게<br />

된 가장 큰 원인은 1950년대와 90년대에 절정을 이룬 대규모 이민이다. 1989년 이래로 1백<br />

만이 넘는 이민자가 주로 구 소련 연방 국가에서 들어왔는데, 이들 중 12% 이상이 65세 이<br />

상의 고령자들이었다. 대다수가 나이로 인해 히브리어를 배우거나 노동력에 흡수되거나 확<br />

고한 경제 기반을 다질 시간이나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 결과, 장애인이 약 13%를 차지<br />

하는 이스라엘 노인 인구 중 다수는 가족과 지역사회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다.<br />

노동사회부의 후원 아래 계획 및 감독되는 복지 서비스가 지역 당국의 사회복지 부서들을<br />

통해 실행되고 있다. 가정에서 노년층의 자립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역사회 기반<br />

서비스에는 사회복지사에 의한 필요사항 평가, 노인 부양가정 지원, 노인 클럽, 가정급식 서<br />

비스, 보호시설, 주간보호, 의료 기기, 교통 등이 포함된다. 가족이나 충분한 수입이 없는 이


164<br />

들과 같은 고위험 집단을 위한 서비스에 특히 역점을 두고 있다.<br />

사회 보험<br />

국민보험법(1954)은 국민들에게 광범위한 혜택을 보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혜택은 노동사회


165<br />

부 산하에서 운영되는 자치단체인 국립보험협회(NII)에 의해 제공된다. 활동 자금은 정부 예<br />

산 할당금에 고용주, 고용인, 자영업자들의 의무 분담금을 더해 충당한다. NII는 정부의 생활<br />

보조금 정책을 실행하고, 소득이 정해진 최저수준 이하인 가정과 개인에게는 추가 지원을<br />

제공한다. 종합 육아 수당은 특히 자녀를 넷 이상 둔 가정의 가계 소득을 늘려준다. 국민보<br />

험법의 한 수정 조항은 가정이나 거주시설에서 매일 도움의 손길에 의존해 생활하는 노인들<br />

에게 장기적 보살핌을 제공한다. NII는 국민 건강보험 프로그램도 관리하고 있다.<br />

I. 스툴만<br />

자원봉사<br />

이스라엘 성인 인구 중 약 20%가 보건사회 서비스를 보완해주는 278개의 공공 자원봉사<br />

단체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기관들은 병원과 응급치료 보조단체에서 민<br />

간 경비대와 자원 구조대까지 다양한 범위에 걸쳐있다. 약물남용과 배우자 및 아동 폭행,


166<br />

교통안전, 환경 보존과 같은 주요 사회문제를 다루는 단체들도 있고, 다른 한편에는 여성의<br />

지위, 이민자와 소비자 권리, 군인 복지 등에 노력을 집중하는 단체들도 있다.<br />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해외 자원봉사자들이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br />

고 있으며, 이는 주로 단기 과정으로 진행된다. 매년 여름마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고<br />

고학 발굴작업에 참여하거나 키부츠에서 일하거나 사회 서비스에 일손을 거든다. 독일의 청<br />

년 자원봉사자들 중에는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노인과 환자들을 돌보는 활동을 나치 정권이 유대인<br />

들에게 범한 전쟁 범죄에 대한 속죄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br />

지금의 자원봉사단 구성은 이전 세대와는 많이 다르다. 이스라엘 여성들은 대부분 직업을<br />

가지고 있어 자원봉사에 전념할 수 있는 자유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나 길어진 수명 덕에<br />

많은 남녀 퇴직자들이 응급 의료 지원 분야(마겐 다비드 아돔)나 환경 단체 등에서 봉사할<br />

수 있는 시간이 생겨났다. 대학생들은 주로 불우한 환경의 아동과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봉<br />

사활동을 하고 있다(이러한 활동으로 부분 장학금을 받기도 한다). 이스라엘 내 자원봉사 활<br />

동을 조율하는 기관은 공립 비영리 단체로 총리실로부터 재정을 지원 받고 국제 자원봉사<br />

기관들과 제휴하고 있는 국립 자원봉사 협의회이다. 이따금씩 다양한 목적의 기금 모금을<br />

위해 전국적인 텔레비전 방송을 내보내는 것과 같은 자원봉사 단체들의 캠페인은 이스라엘<br />

인들의 삶에서 통상적으로 수용되는 특징이다.


167


168<br />

교육<br />

도전과제 168


169<br />

취학 전 교육 170<br />

학교 시스템 171<br />

행정과 구조 172<br />

중등 교육 174<br />

고등 교육 176<br />

종합대학 179<br />

단과대학 182<br />

성인 교육 183<br />

예루살렘 재단 제공/ S. 사벨라


170<br />

교육<br />

교육<br />

이스라엘의 교육은 귀중한 유산이다. 교육은 과거 세대들의 전통에 이어 여전히 필수적 가<br />

치로 존재하며 미래에 대한 해답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교육 시스템은 어린 세대


171<br />

들이 다양한 인종, 종교, 문화, 정치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이고 다<br />

원론적인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밑바탕<br />

에는 유대적 가치, 나라 사랑, 자유와 관용의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 교육 시스템은 수준 높<br />

은 지식을 전하고자 하며, 특히 국가의 지속적 발전에 필수적인 과학과 기술 능력에 역점을<br />

두고 있다.<br />

אין העולם מתקים אלא בשל הבל פיהן של תינוקות של בית רבן ‏)שבת קי"ט:‏ ב'(‏<br />

학교에 있는 어린 아이의 숨결에 온 세상이 달려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바트, 119b)<br />

도전과제<br />

이스라엘이 건국될 당시(1948)에는 이미 완전히 기능하는 교육 체계가 존재했다. 건국 이전<br />

유대인 사회가 개발하고 운영한 이 교육 체계에는 19세기 말에 일상 언어로 부활한 히브리


172<br />

어가 교수 언어로 사용되었다.<br />

그러나 건국 직후부터 이 교육 체계는 70개 이상의 국가에서 부모와 함께 혹은 혼자 건너<br />

온 대규모 이주 아동들을 통합시킴으로써 유대 민족의 역사적 조국이라는 이스라엘의 존재<br />

이유를 충족시켜야 하는 엄청난 과제에 직면했다. 1950년대에 주로 전후 유럽과 아랍 각국<br />

에서 온 대규모 이민에 이어 1960년대에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유대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br />

1970년대에는 최초로 소비에트 연방에서 제법 큰 규모의 유대인 이주가 이루어졌고, 소규모<br />

집단의 이주도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에 들어선 후에는 1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이<br />

구 소련에서 이스라엘로 들어왔으며, 아직까지도 매년 수만 명의 이민자들이 입국하고 있다.<br />

1984년과 1991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집단 이동으로 에티오피아의 유대인 집단 거의 대부<br />

분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 지난 수년에 걸쳐 미대륙과 서유럽 다른 국가들에서도 많은 유<br />

대인들이 건너와 <strong>이스라엘에</strong> 정착했다.<br />

당장 긴급한 교실과 교사의 수요를 맞추는 것 외에도 여러 문화적 배경을 가진 아이들을 학<br />

교 구성원으로 흡수하기 위해 특별한 수단과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새로운 이주 학생들의<br />

필요에 따라 마련된 프로그램에는 적절한 교과과정 지원 준비와 이민 학생들이 출신 국가에<br />

서 배우지 않았던 히브리어, 유대 역사와 같은 과목들을 접하게 하는 단기 강좌 등이 있다.<br />

교사들이 이민 학생들에게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특별 과정이 개설되었고, 이민자<br />

교사들에게는 재교육 과정을 제공함으로써 교육 시스템 내 고용을 촉진했다.


173<br />

이와 함께 교육부는 현대적 교수법에 맞게 교육 수준을 끌어올리는 과정을 현재 진행 중에<br />

있다. 구체적으로 성 평등의 실천, 교사의 지위 개선, 인문학 교육과정의 확대, 과학 및 기<br />

술 교육 장려 등이 이에 해당한다. 교육부 정책의 핵심적 요소는 모든 아동에게 평등한 교<br />

육적 기회를 제공하고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는 학생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br />

GDP 비율로 나타낸 교육 부문 지출<br />

취학 전 교육<br />

이스라엘의 교육은 매우 이른 나이에 시작된다. 이는 아동들에게 한발 앞선 기회를 확대적<br />

으로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사회화와 언어 발달에 역점을 둔다.


174<br />

많은 2세 아동들과 대다수의 3~4세 아동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취학 전 교육을 받는다. 대<br />

부분의 프로그램은 지방 당국의 후원을 받으며, 일부는 탁아소 내에 개설되어 여성 단체들<br />

이 운영하고, 일부는 사립 시설이다. 교육부는 낙후된 지역의 취학 전 교육을 위해 특별 자<br />

원을 할당한다.<br />

5세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치원은 무상 의무 교육과정이다. 교육 내용은 언어와 숫자<br />

개념을 포함하는 기초 능력을 지도하여 인지 및 창의적 능력을 기르고 사회적 능력을 촉진<br />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든 유치원의 교육 과정은 향후 학습을 위해 탄탄하고 균형 잡힌<br />

기초를 쌓을 수 있도록 교육부가 지침을 제시하고 감독한다.<br />

예루살렘 재단 제공/ H. 마조르<br />

예루살렘 바이블 랜드 박물관 제공<br />

학교 시스템<br />

취학은 6세에서 18세까지 의무 무상 교육으로 이루어진다. 정규 교육은 초등학교(1~6학년)<br />

에서 시작해 중학교(7~9학년)와 고등학교(10~12학년) 과정으로 이어진다. 초등학교를 마친<br />

학생 중 약 9%는 기숙 학교에 입학한다.


175<br />

이스라엘 사회의 다문화적 성격은 교육 시스템의 틀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에 따라 학교는<br />

4개 그룹으로 구분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 학교, 유대 학문, 전통, 규율을 강<br />

조하는 공립 종교 학교, 아랍어로 수업을 진행하고 아랍과 드루즈의 역사, 종교, 문화를 중<br />

점적으로 지도하는 아랍 및 드루즈 학교, 다양한 종교적, 국제적 지원 하에 운영되는 사립<br />

학교가 있다.<br />

최근 몇 해 동안은 자녀의 교육의 진로 방향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특정<br />

집단의 부모와 교육자들의 철학과 신념을 반영한 새로운 학교들이 설립되었다.<br />

사립 초정통파 학교 • 이스라엘 공보부/ A. 벤 궤르솜<br />

아랍 학교 • 예루살렘 재단 제공/ S. 사벨라<br />

교과 과정<br />

수업일 중 대부분은 필수 이론 학습으로 채워진다. 다뤄지는 과목은 교육 시스템 전체에 동<br />

일하지만, 각 학교는 교육부가 제공한 광범위한 학습 단위와 교재 중에서 자체 교직원과 학<br />

생들의 필요에 가장 적합한 것을 고를 수 있다. 사회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를 높이는 것을<br />

목표로 매년 국가적으로 중요한 특별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이러한 주제에는 민주주의


176<br />

적 가치, 히브리어, 이민, 예루살렘, 평화, 산업 등이 포함된다.<br />

특수 교육<br />

학급에서 상위 3% 내에 속하고 자격 시험에 통과한 영재들은 정규 특수 학교나 방과후 과<br />

정 등의 심화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영재 교실은 해당 학생들과 학습내용의 수준에서 뚜렷<br />

한 특징을 보이며, 지식과 이해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학과에서 배운 개념을 적용<br />

하는 데도 역점을 둔다. 이러한 프로그램에 속하는 아동들은 독립적으로 새로운 자료를 연<br />

구하고 다루는 법을 배운다.<br />

신체, 정신, 학습 장애가 있는 아동들은 각자 장애의 특성에 따라 적절한 학습환경에 배치<br />

되며, 이 같은 특수교육은 궁극적으로 이들이 공동체의 사회적, 직업적 생활에 최대한 통합<br />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일부는 특수한 환경에서 보살핌을 받는 반면<br />

일부는 일반 학교에 다니게 된다. 일반학교에서는 필요시설이 완비된 그룹에 배정 받을 수<br />

도 있고 일반 교실에 배정 받되 보충 지도를 받을 수도 있다.


177<br />

장애아들의 복지는 가족과 다양한 지역사회 지원 그룹을 비롯해 보건관리 인력, 심리학자,<br />

사회복지사, 특수교육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맡는다. 법에 의해 설립되고 교육부 장<br />

관이 지명하는 한 위원회가 특수교육 프로그램과 시설에 참가하기에 적합한지 장애아들의<br />

자격을 심사한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3세에서 21세까지 무상으로 제공된다.<br />

행정과 구조<br />

교육부는 학교 교과과정, 교육 기준, 교직원 감독, 학교 건물의 증축 등을 담당한다. 지방<br />

자치 당국은 시설과 공급물품의 입수와 학교 시설 관리의 책임을 맡는다. 유치원과 초등학<br />

교의 교직원은 교육부 공무원인 반면 상급 학교의 교직원은 지방 당국에서 고용한다. 지방<br />

당국은 학교 인구의 규모에 따라 교육부로부터 재정을 지원 받는다. 정부와 지방당국은 교<br />

육 재정의 80%를 제공하고 나머지는 그 외 자금원에서 조달된다.<br />

중등 교육<br />

교육 텔레비전 방송(ETV): 교육부의 한 부서인 교육 텔레비전은 학교 강의에서 사용하는 학<br />

교 교육 프로그램과 전체 인구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작 및 방송한다. ETV는 또한 대학


178<br />

과 교사 세미나의 교육 전문가들과 협력하여 새로운 교수법을 개발하기도 한다. 평생 교육<br />

을 제공하는 일에 힘쓰는 ETV는 미취학 아동을 위한 계발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오락<br />

프로그램, 성인을 위한 교육 과정,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뉴스 방송 등을 통해 모든<br />

연령의 인구에게 적합하게 프로그램을 맞춤 제작하고 있다.<br />

17세 인구 중 대학입학시험 응시생 비율<br />

중등 학교 대부분은 대학 입시 응시 자격과 고등 교육으로 이어지는 과학과 인문학 분야의<br />

교과과정을 제공한다.<br />

특정 중등 학교들은 대학입시 응시자격과 직업교육 자격증, 또는 둘 중 하나를 얻을 수 있<br />

는 특화된 교과과정을 제공한다. 공업기술학교들은 세 가지 단계로 기술자와 실무기사들을<br />

교육한다. 일부는 고등 교육 과정을 준비하고, 일부는 직업교육 자격증을 목표로 하며, 일부<br />

는 실용 기술을 얻기 위해 공부한다. 일반적으로 학내 거주 시설을 갖춘 농업 학교들은 농<br />

업 경제학 관련 과목들로 기초 학습을 보충한다. 군사예비학교는 미래의 직업 군인과 이스<br />

라엘 방위군에 필요한 특정 분야의 기술자들을 교육한다. 주로 기숙학교이고 남녀 학생들에<br />

게 별도의 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예시바 고등학교는 비종교적 교과과정에 더해 집중적인 종<br />

교 학습과정을 제공하고 전통의 준수와 유대교적 삶의 방식을 장려한다. 종합 학교는 부기,<br />

기계학, 전자공학, 호텔업, 그래픽 디자인 등에 이르는 다양한 직업 관련 교육을 제공한다.


179<br />

위에 언급된 학교 중 어느 한곳에도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은 견습과정 법에 따라 승인된 직<br />

업 학교에서 한 가지 직종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견습 프로그램은 산업통상노동부가<br />

직업 네트워크에 가입된 학교에 제공하는 것이다. 3~4년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이 프로그램<br />

은 2년간 교실에서 수업을 받은 뒤 1~2년간은 일주일에 3일은 공부하고 나머지 날에는 학<br />

생들이 선택한 직업에 종사하도록 되어 있다. 직업 분야는 미용, 요리부터 기계정비, 워드<br />

프로세싱까지 다양하다.<br />

중학교 기술 수업 • 이스라엘 공보부/ A. 오하욘<br />

고등 교육<br />

고등 교육은 이스라엘의 경제 및 사회 발전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이 건국되


180<br />

기 거의 사반세기 전에 이스라엘 기술 연구소인 테크니온이 공학자와 건축가를 양성하기 위<br />

해 1924년 하이파에서 문을 열었고,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이 이스라엘 내 청년들의 고등교<br />

육의 중심지로써, 또 해외의 유대인 학생과 학자들을 끌어오기 위한 목적으로 1925년에 설<br />

립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성취했을 때 이 두 대학의 재학생 수는 총 1,600명 정<br />

도였다. 그러나 2004~2005년에는 이스라엘의 여러 고등 교육 기관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br />

수가 약 26만 2천 명에 이르렀다. 이 중 37%는 종합대학에, 44%는 단과대학에 다니고 있고,<br />

19%는 개방 대학의 여러 과정에 참가하고 있다.<br />

학문적, 행정적으로 전적인 자유를 부여 받은 이스라엘의 고등교육 기관들은 학문적 기준에<br />

부합하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신규 이민자들과 필수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한 학<br />

생들은 특별 예비 프로그램에 등록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입학 신청<br />

자격이 주어진다.<br />

고등교육 협의회<br />

고등교육 기관들은 고등교육 협의회의 관리 하에 운영된다. 이 협의회는 교육부 장관이 지<br />

휘하고, 대학교수, 지역사회 대표, 학생 대표로 구성된다. 협의회는 학교 인가를 내고, 학위<br />

수여를 승인하며, 고등교육과 과학 연구의 발전과 재정 지원에 대해 정부에 조언하는 역할<br />

을 한다.


181<br />

다른 분야의 선임 교수 4명과 기업이나 산업 부문의 공인 2명으로 구성된 기획보조금 위원<br />

회는 재정 문제와 관련해 정부와 고등교육 기관들을 연결하는 중개 기구로서 양측에 예산안<br />

을 제출하고 승인된 예산을 할당하는 일을 담당한다. 공적 자금이 고등교육 예산의 70%를<br />

충당하고, 20%는 등록금에서, 나머지는 다양한 민간 영역에서 재원을 얻는다.<br />

학생<br />

이스라엘 학생들은 남녀별로 각각 3년과 2년의 의무 군복무를 마친 뒤 21세가 넘어서 학업<br />

을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60년대 초반까지는 주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고등교육<br />

을 받은 반면 최근 들어서는 커리어 중심으로 변화하여 많은 학생들이 현재 제공되고 있는<br />

이스라엘 공보부/ M. 밀너<br />

광범위한 전문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br />

현재 이스라엘의 20~24세 인구 중 절반이 훨씬 넘는 이들이 중등 후 교육기관이나 고등 교<br />

육기관에 재학 중이다.


182


183<br />

종합대학<br />

테크니온 – 이스라엘 기술 연구소 (1924년 설립, 하이파 소재): 테크니온은 이스라엘의 공학<br />

자, 건축가, 도시 계획가의 상당수를 배출했다. 최근 몇 십 년간 의학과 생명과학 학부가 추<br />

가로 개설되었다. 테크니온은 과학과 공학 분야의 기초 및 응용 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br />

이스라엘의 산업 발전을 앞당기고 있다.<br />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1925년 설립): 히브리 대학은 미술사에서 동물학에 이르는 거의<br />

모든 학문 분야를 망라하는 학부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도 이곳에 있다.<br />

창립 이래로 히브리 대학의 과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발전의 전 단계에 적극적으로 참<br />

여해왔고, 이 학교의 유대학부는 전세계의 가장 유수한 학과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br />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1934년 설립, 레호봇 소재): 원래 시에프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창립<br />

된 와이즈만 연구소는 1949년 확장되면서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자 저명한 화학자인 하임<br />

와이즈만 박사의 이름을 따왔다. 오늘날 이 연구소는 물리학, 화학, 수학, 생명과학 연구분<br />

야의 대학원 과정이 널리 인정 받고 있다. 이곳 연구자들은 산업 발전과 새로운 과학 기반<br />

사업체 창립을 촉진하기 위해 고안된 각종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다. 이 연구소에는 고등<br />

학교에서 사용할 교과과정을 준비하는 과학 교수법 학과도 있다.<br />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제공


184<br />

바르-일란 대학교 (1955년 설립, 라마트 간 소재): 바르일란 대학은 독특한 통합적 접근방식<br />

을 구현하여 유대 전통분야의 심화학습 프로그램과 사회과학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학문<br />

분야의 일반 교양 교육을 결합시켰다. 전통과 현대 기술을 결합한 이 학교는 물리학, 의약<br />

화학, 수학, 경제학, 전략학, 발달 심리학, 음악학, 성서, 탈무드, 유대법 등 많은 연구소를<br />

보유하고 있다.<br />

텔아비브 대학교 (1956년 설립): 텔아비브 대학은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텔<br />

아비브 지역의 종합대학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존에 있던 3개 학교를 통합하여 설립되<br />

었다. 오늘날 이곳은 이스라엘 최대의 대학으로 광범위한 학과과정을 제공하며 기초 학문과<br />

응용 학문 연구 양쪽에 상당한 역점을 두고 있다. 텔아비브 대학에는 전략학, 보건 시스템<br />

관리, 기술 예측, 에너지학에 주력하는 전문 연구소들이 들어서 있다.<br />

관광성


185<br />

하이파 대학교 (1963년 설립): 이스라엘 북부지역의 고등교육 중심지 역할을 하는 하이파<br />

대학은 학제간 연구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학부간 센터와 연구소 및 전반적인 건축 계획<br />

이 이러한 학문적 접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이 대학에는 이스라엘의 유대인과<br />

아랍인 간의 이해와 협력 증진에 매진하는 연구센터와 사회적, 경제적 실체로서 키부츠를<br />

연구하는 학과 과정도 있다.<br />

네게브 벤구리온 대학교 (1967년 설립, 브에르셰바 소재): 벤구리온 대학은 남부 이스라엘<br />

지역민들에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막 지역의 사회적, 과학적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br />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건조 지역 연구에 크게 공헌했으며 의과대학은 국내의 지역사회 중<br />

심 의학에서 선도적 역할을 했다. 스데 보케르 키부츠에 위치한 대학 캠퍼스에는 이스라엘<br />

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의 생애와 시대의 역사적, 정치적 특징을 연구하는 센터가 있<br />

다.<br />

개방 대학교 (1974년 설립): 영국의 대학 형태를 본떠서 설립한 개방 대학은 주로 자습용<br />

교재와 안내서를 토대로 해서 체계적으로 구성된 과제물과 정기적 개인지도로 부족한 부분<br />

을 보완하고 기말 시험을 실시하는 탄력적인 방식을 활용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게<br />

하는, 종래와 전혀 다른 독특한 고등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186<br />

단과대학<br />

지방 단과대학들도 학과 과정을 제공한다. 많은 단과대학이 종합대학의 후원 하에 운영되며,<br />

따라서 학생들은 거주지 근처에서 학위 공부를 시작하여 종합대학의 주 캠퍼스에서 과정을<br />

마칠 수 있다.<br />

일부 전문 학교들은 미술, 음악, 무용, 패션, 간호, 재활치료, 교직, 스포츠 등 다양한 학과과<br />

정을 제공한다. 학위를 수여하는 몇몇 사립 단과대학들은 경영학, 법학, 컴퓨터학, 경제학<br />

및 관련 분야와 같은 수요가 많은 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추가 과정을 개<br />

설해 놓고 있어 기술, 농업에서 마케팅, 호텔업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수료증이나 직업과<br />

정 학위증서를 딸 수도 있다.


187<br />

성인 교육<br />

교육부와 공공 및 사립 기관들이 후원하는 광범위한 교육과정은 히브리어 학습과 기초적 교<br />

육기술 향상에서 가족의 복지 증진과 전반적 지식 확대에 이르는 개인들의 다양한 학습 욕<br />

구를 해소해주고 있다. 노동부는 여러 분야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직업 교육 및 재교육 과정<br />

을 제공하고 있으며, 여러 소도시와 대도시에서 이용 가능하다.<br />

특별히 개발된 ―울판(ulpan)‖ 방식을 활용하는 다양한 수준의 히브리어 강의는 이민자들을<br />

비롯한 여러 인구 집단의 이스라엘 주류 사회로의 통합을 돕는다. 성인 인구의 교육 및 문<br />

화적 불균형을 줄이기 위해 마련된 보상교육은 성인 학습자 사회에 맞춤 형식으로 구성된다.<br />

주간과 야간 강의를 모두 갖춘 직업 교육 과정은 노동부와 산업기업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br />

센터와 기술 및 전문 교육 기관에서 이용 가능하다. 전국에 분포한 ‗대중 대학‘들은 이론 과<br />

목과 예술 분야에서 수백 개의 성인 교육 강좌와 워크숍을 제공한다. 이민자들을 위한 특별<br />

라디오 방송으로 ―방송 대학‖ 프로그램이 있다.


188


189<br />

과학과 기술<br />

시초 188<br />

전문 인력 190<br />

연구와 개발 (R&D) 191


I. 스툴만<br />

190


191<br />

과학과 기술<br />

과학과 기술<br />

이스라엘은 다른 여러 작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과학과 기술<br />

정책을 뚜렷이 규정하고 있다. 과학 분야에서는 우수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최고의 연구<br />

거점 확립을 촉진하는 한편 광범위한 과학 분야 전반에 걸쳐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자 노력<br />

한다. 기술 분야에서는 제한된 영역에 집중하여 높은 성과를 내고자 힘쓰고 있다.<br />

이스라엘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과학 및 기술 연구에 종사하는 인구와 연구개발 투자액<br />

비율은 전세계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br />

המחקר המדעי והישגיו אינם עוד עניין אינטלקטואלי בלבד...‏ אלא גורם מרכזי...‏<br />

בחיי עם תרבותי ...<br />

‏)דוד בן גוריון,‏ תשכ"ב )<br />

과학적 연구와 그 성취는 더 이상 단순히 추상적인 지적 탐구 작업이 아니라......모든 문명<br />

민족 의 삶에서......중심적인 요소이다...... (다비드 벤구리온, 1962)<br />

시초


192<br />

이스라엘의 과학 연구의 역사는 유대 민족이 조국으로 귀환한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부분을<br />

차지한다. 정치적 시온주의의 창시자로 이스라엘 땅에 현대적 유대 국가를 설립하자는 개념<br />

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테오도르 헤르쩰(1860~1904)은 이스라엘 땅을 단지 유대 민족의 물<br />

리적 고향만이 아니라 주요한 정신적, 문화적, 과학적 중심지로 보았다.<br />

프루타롬(FRUTAROM) 사의 연구실, 1946 • 이스라엘 공보부/ H. 핀<br />

질병이 만연한 불모지였던 그 당시의 이 땅을 현대적 국가로 변모시키려는 열망은 뒤이어<br />

나타난 과학적 탐구와 기술 발전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였다. 농업 연구의 시작은 19세기 말<br />

엽 미크베 이스라엘 학교가 창설(1870)되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에 텔아비브<br />

에 설립된 농업 시험장은 후에 농업연구기구(ARO)가 되었고, 이곳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농<br />

업 연구 및 개발을 담당하는 핵심 기관이다. 의학 및 공중 보건 연구는 제 1차 세계대전에<br />

앞서 히브리 보건소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1920년대 중반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 미<br />

생물 연구소와 생화학과, 세균학과, 위생학과가 설립되면서 이 분야 연구에 큰 힘이 실렸다.<br />

이러한 연구들이 기반이 되어 오늘날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가장 우수한 의학 연구 기관인 하다사<br />

메디컬 센터가 탄생할 수 있었다. 산업 연구는 1930년대에 사해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앞장<br />

섰으며, 기초 과학과 기술 분야의 진보는 히브리 대학(1925년 설립)과 이스라엘 기술 연구<br />

소 테크니온(1924년 하이파에 설립), 그리고 후에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1949년)로 바뀐 다


193<br />

니엘 시에프 연구 센터(1934년 레호봇에 설립)에서 시작되었다.<br />

이스라엘의 과학과 기술 기반시설은 1948년 건국 당시부터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초기<br />

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에 연구가 집중되었고, 이를 토대로 영리 지향적 산업들이<br />

점차 발전해 나갔다.<br />

전문 인력


194<br />

이스라엘이 보유한 대규모 우수 인력이 주로 과학과 기술적 성취의 책임을 맡고 있다. 구<br />

소련에서 온 수십만 이주민 중 다수의 고도로 훈련된 과학자, 공학자, 기술자들이 점차 노<br />

동시장에 진입함에 따라 숙련된 인력 비율이 극적으로 상승했으며, 이들은 향후 이스라엘의<br />

과학 및 기술적 성취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br />

I. 스툴만<br />

연구와 개발 (R&D)


195<br />

이스라엘의 연구 개발은 주로 7개 종합대학, 수십 개의 정부 및 공공 연구 기관, 수백 개의<br />

민간 및 군사 기업체에서 실시되고 있다. 의료 센터와 전기통신, 전력 생산, 수자원 관리 등<br />

분야의 여러 공공 기업체 또한 주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br />

정부와 공공 단체들은 연구 개발의 주요 자금원으로서 이스라엘 내 연구 개발 활동 중 절반<br />

이 훨씬 넘는 곳에 재정 지원을 해준다. 민간 연구 개발 목적의 이러한 자금 중 상당부분이<br />

주로 산업 및 농업 부문의 경제 발전을 위해 할당되는데, 이는 여타 국가들과 비교해볼 때<br />

전체 총액 중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40% 이상이 지식을 진보시키는데 사용되는데 이것<br />

은 국가나, 양국간이나, 정부의 연구 자금을 통하거나, 고등교육 협의회가 관리하는 일반대<br />

학 기금에서 나온 개별 대학 할당액을 통해 조달된다. 나머지는 다양한 보건 및 사회복지<br />

분야에 제공된다.<br />

I. 스툴만<br />

I. 스툴만<br />

이스라엘의 발표 가능한 연구 전체 중 80% 이상이—또한 거의 대부분의 기초적 연구와 기<br />

초 연구 교육이—대학 내에서 이루어진다. 법적 독립 기구인 이스라엘 과학 재단(ISF)은 경


196<br />

쟁력 있는 기초 연구의 주된 재원이다. 약 1천 명의 개인 연구자들이 ISF로부터 보조금을<br />

받고 있으며, 이는 대학 기금과 필적하는 수준이다. 또한 ISF는 특별 프로그램에도 자금을<br />

지원하고 있는데,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거대강입자가속기(LHC)의 ATLAS 검출기<br />

를 건설하는데 이스라엘이 참여하는 것이나 일련의 혁신적인 ‗의사-연구자‘ 보조금을 통해<br />

임상 연구의 질을 높이는 경우가 그 예이다.<br />

어느 한 기관이 처리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큰 연구 사업을 지원하고 조율해야 할 경우에는<br />

TELEM이 그 역할을 맡는다. TELEM은 산업통상노동부와 과학부의 수석 과학자들과 이스라<br />

엘 학술원 원장, 고등교육 협의회와 재무부 및 기타 기관의 대표들로 구성된 자발적 포럼이<br />

다. TELEM은 이스라엘이 유럽연합의 프레임워크 프로그램(FP)에 참가할 때나 유럽 싱크로<br />

트론 방사설비(ESRF)에의 회원 가입, 이스라엘의 인터넷 II 사업 등을 주도했고 필요한 경<br />

우에는 자금을 지원했다.<br />

이스라엘의 여러 대학이 취득한 다수의 특허는 대학과 산업계 간의 관계의 효율성을 보여주<br />

는 하나의 척도이다.<br />

대학의 연구 개발


197<br />

전세계 많은 대학이 그러하듯 이스라엘 대학의 연구자들도 과학 지식 향상을 주요 목표로<br />

삼고 있다. 모든 과학 분야를 아우르는 이스라엘인들의 저서와 학회지 논문들은 대학 부문<br />

의 성과를 보여주는 주된 통로이다. 이스라엘은 전세계 과학 관련 간행물 중 엄청나게 큰<br />

비중(약 1%)을 출판하고 있고, 특히 화학과 컴퓨터 과학과 같은 여러 분야에서 세계 과학계<br />

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br />

노동력의 규모를 기준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에 비해 자연과학과 공학, 농업, 의<br />

학 분야의 출판 저자 수가 훨씬 많고, 국내 출판물 중에는 이스라엘 과학자들과 다른 국가<br />

의 과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경우가 매우 많다.<br />

이스라엘 과학을 국제 과학계에 통합시키기 위해 박사 후 연구직을 맡거나 해외에서 안식년<br />

을 보내고 해외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장려되며, 광범위한 교환 프로그램과 공동 프로<br />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제공<br />

젝트가 연구소, 대학, 정부 차원에서 해외의 해당 기관들과 함께 관리된다. 이스라엘은 또한<br />

국제 학술대회의 주요 중심지로서 매년 이 같은 모임을 개최하고 있다.


198<br />

여러 대학들은 과학 연구 활동과 함께 이스라엘의 기술 발전에 중요하고도 혁신적인 역할을<br />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는 전세계에서 최초로 자체 연구의 상업적<br />

이용을 위해서 조직을 세운 곳 중 하나이다(1958년). 지금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학이 이와<br />

유사한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 대학 캠퍼스 인근에 과학을 기반으로 한 공업 단지들이 설립<br />

되면서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대학들은 또한 그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특정 제품<br />

의 상업화를 위해 분사기업을 창업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및 외국의 사업체들과<br />

제휴하는 경우가 많다.<br />

대학 내 학제간 연구와 실험 연구소들은 이스라엘 산업에 절대적으로 중대한 다양한 과학<br />

및 기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고, 응용 연구개발의 국가적 핵심 분야로서 건설, 교통, 교육<br />

등을 다루고 있다. 이에 더해 많은 교수진들이 기술, 행정, 재정, 관리 차원에서 산업계에<br />

자문 역할을 하고 있다.


199<br />

의학 연구 개발<br />

이스라엘은 이론과 실제 모두에서 생명공학 혁명에 크게 기여했으며, 생체공학 능력과 더불<br />

어 의학 및 대체의학 연구의 선진 기반시설을 발전시켰다. 생명공학, 생물의학, 임상 연구는<br />

전체 과학 간행물의 절반을 넘는 비중을 차지한다. 국내 산업 부문은 방대한 지식 기반을<br />

활용하기 위해 의학 분야의 활동을 늘렸다.<br />

CT 스캔 • 샤아레 쩨데크 병원 제공<br />

이스라엘 과학자들은 인간 성장 호르몬과 바이러스 감염 억제에 효과적인 단백질군인 인터<br />

페론 생산 방법을 개발했다. 다발성 경화증 치료에 효과가 있는 의약품 코팍손도 기초적 연<br />

구에서 산업용 생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개발되었다. 유전 공학은<br />

기타 미생물학 관련 제품들과 함께 단일 클론 항체를 기반으로 한 광범위한 진단 키트를 생<br />

산 가능케 했다. 컴퓨터 단층촬영(CT) 스캐너, 자기공명 화상법(MRI) 시스템, 초음파 스캐너,<br />

핵의학 카메라, 수술용 레이저 등 진단 및 치료용의 정교한 의료 기기들이 개발되어 세계시<br />

장에서 팔리고 있다. 그 밖의 혁신적 성과로는 서서히 방출되며 치석 축적을 방지하는<br />

액체 폴리머, 양성 및 악성 전립선 비대증을 감소시키는 장치, 보툴리누스를 이용한 사시( 斜


200<br />

視 ) 교정, 내복 가능한 캡슐에 넣어 위장 질환 진단에 사용되는 초미니 카메라 등이 있다.<br />

산업 연구 개발<br />

산업 부문의 경우, 민간 연구 개발 지출 규모와 산업 연구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와 공학자<br />

의 수가 지난 20년 간 큰 폭으로 증가했다.<br />

전자공학에 상당히 집중된 이스라엘의 산업 연구 개발은 주로 소수의 대기업들이 주도하고<br />

있다. 이러한 연구 개발 집중 기업들은 지난 수년 간 산업 고용 및 수출에 주된 역할을 해<br />

왔다.<br />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아울러 이 같은 기업들의 성장을 육성하는 것이 이스라엘 산업 전략의<br />

핵심이다. 정부는 연구개발 촉진법의 틀 안에서 산업 부문의 연구 개발을 육성한다. 이 법<br />

은 산업통상노동부의 수석과학자실이 실행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 기관은 2000년에 약<br />

1,200개의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다. 연구 개발 관련 제품은 산업 수출품 전체의 절반<br />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다이아몬드 제외).<br />

전자공학: 1960년대까지는 주로 소비재에 국한되어 있던 전자공학은 군과 민간 양측으로 더


201<br />

욱 정교한 기술 발전을 이루었다. 통신 분야의 연구 개발 기반 응용기술에는 영상, 언어, 데<br />

이터의 디지털화, 처리, 전송, 개선 등이 있다. 고성능 전화교환 장치에서 음성 사서함 시스<br />

템, 전화선 이중 연결장치, 다수의 인터넷 응용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제품이 있다.<br />

광학, 전기광학, 레이저: 광학과 전기광학, 레이저는 산업 분야로 급격한 발전을 이뤄왔다.<br />

이스라엘은 섬유 광학, 인쇄회로기판의 전기광학 검사 시스템, 열 영상 나이트 비전 시스템,<br />

전기 광학 기반의 로봇 제조 시스템 분야에서 세계 선두 주자이다.<br />

컴퓨터 기반 설비: 주로 소프트웨어와 주변기기 분야가 집중적으로 개발 및 생산되었다. 인<br />

쇄와 출판업에서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생산한 컴퓨터 그래픽과 컴퓨터 기반 영상 시스템이 국내와<br />

해외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컴퓨터를 이용한 다양한 교육 시스템이 학교 활동의 질을<br />

높이고 있으며, 이러한 제품 중 상당수는 수출용으로 개발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소프트웨<br />

어 제품 중 일부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용으로 기획되었지만 대부분은 컴퓨터 워크스테이션과<br />

같은 소형 또는 중형 컴퓨터용으로 개발되었다. 시각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스크린 상의 텍<br />

스트와 그래픽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터치패드가 3개 달린 컴퓨터 마우스도 <strong>이스라엘에</strong><br />

서 개발된 것이다.


202<br />

로봇 공학: 1970년대 말에 연구가 시작된 로봇 공학은 이제 다이아몬드 연마, 용접, 포장,<br />

건축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고안된 로봇을 생산하고 있다. 인공 지능을 로봇에<br />

응용하는 기술에 <strong>관한</strong> 연구가 현재 진행 중이다.<br />

항공학: 국방 수요와 연관된 항공학은 기술적 발전을 이루게 되면서 민간에까지 파급효과를<br />

가져왔다.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제조된 최초의 민간 항공기 아라바에 이어 웨스트윈드 비즈니스 제<br />

트기가 생산되었다. 국내에서 기획 및 제작한 인공위성이 생산되었고, 이스라엘 항공우주산<br />

업(IAI)이 이스라엘 우주국(ISA)과 협력 하에 이 위성을 발사했다. 이스라엘은 또한 디스플레<br />

이 시스템, 항공 컴퓨터, 계측 시스템, 모의 비행장치 등 여러 관련 아이템을 개발, 제조, 수<br />

출하고 있으며, 원격 조작 기구의 기술과 생산에서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다.<br />

일란 라몬 대령 (사진 오른쪽 끝), 이스라엘 최초의 우주 비행사로 우주선 컬럼비아호 탑승<br />

중 미국인 동료 6명과 함께 실종됨 • 미 항공우주국(NASA) 사진 MSFC-0300309<br />

농업 연구 개발<br />

농업 부문은 농민과 연구자들 간의 협력으로 시행되는 연구 개발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br />

있다. 연구 결과는 현장으로의 시험용 확장 서비스를 통해 신속히 전달되며, 문제가 발견되<br />

면 직접 과학자들에게 전달되어 해결책을 강구한다. 농업 연구 개발은 주로 농업부의 농업<br />


203<br />

구기구(ARO)가 수행한다. 이스라엘 내 대부분의 농업 연구 기관들은 유엔 식량농업기구<br />

(FAO)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다른 여러 국가와 지속적으로 정보를 교류한다.<br />

이스라엘 젖소의 평균 우유 생산량은 세계 최고이다. 볼카니 연구소가 수행한 과학적 품종<br />

개량과 유전자 검사를 통해 젖소 두당 평균 산유량이 1970년에 6,300리터에서 현재 1만 리<br />

터 이상으로 증가했다. 혈통이 우수한 소에서 정자와 난자를 채취함으로써 국내 소의 품질<br />

을 개선함과 동시에 이 분야의 진보된 기술을 다른 여러 나라와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br />

이스라엘 농업 전문가들은 점적식 관개, 농업 생명공학, 토양 태양살균 법, 산업 폐수를 지<br />

속적으로 농업에 사용하는 일 등에 앞장서왔다. 이러한 기술발전은 유전자 조작 종자와 바<br />

이오 살충제부터 광분해성 플라스틱, 전산화된 관개/시비 시스템에 이르는 시장성 높은 다<br />

양한 제품에 적용되었다.<br />

부족한 물과 거친 땅, 제한적 노동력을 최적으로 활용함에 따라 농업 방식에 혁신적 변화를<br />

가져왔다. 물 절약 기술에 대한 연구는 물의 흐름을 식물의 뿌리 쪽으로 곧장 향하게 하는<br />

볼카니 농업 연구센터의 과학자 • 이스라엘 공보부/ A. 오하욘


204<br />

점적식 기법과 같은 컴퓨터 제어형 관개 시스템의 발전을 촉진시켜 전세계 농민들에게 도움<br />

을 주고 있다. 물을 전자-자기 처리하여 동물 보건, 작물 수확량을 개선하는 것과 관련한 연<br />

구도 유망한 결과를 얻었다.<br />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설계 및 제작한 컴퓨터는 매일매일의 농업 활동을 조율하는데 광범위하게 사<br />

용되고 있다. 관련 환경적 요소들을 감시하면서 비료 주입을 관리하고, 검증을 거친 최저<br />

비용/최고 산출량 비율로 혼합한 사료를 가축에게 공급하고, 가금류에게 온도와 습도가 조<br />

절된 환경을 제공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경작, 파종, 식목, 수확, 수집, 분류, 포<br />

장 과정을 위한 다양한 혁신 장비도 개발, 제조, 사용되었다.<br />

농업은 일반적인 과학 연구와 연구 개발로부터도 혜택을 얻었다. 그 예가 자동식 식물 조직<br />

배양, 생물학적 살충제, 병해 저항성 종자, 생물학적 시비 등이다.<br />

에너지 연구 개발<br />

태양, 열, 풍력 에너지와 같은 대체 에너지원의 폭넓은 개발은 기존 에너지원이 부족한 이<br />

스라엘의 상황에 따른 긍정적 성과물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모든 수준에서 태양 에너지


205<br />

분야를 선도하는 일류 국가가 되었고, 국민 일인당 가정 내 태양열 온수기 사용률이 세계적<br />

으로 가장 높다. 응집된 햇빛을 수집하는 새로운 고효율 집광판이 개발됨에 따라 산업 부문<br />

에서도 태양 에너지의 사용이 증가할 전망이다.<br />

풍력 에너지 동력화 기술의 발전은 신축성 있고 팽창 가능한 회전자가 달린 풍력 터빈의 생<br />

산으로 나타났다. 일정 수준의 염분과 유기물 조성을 갖춘 연못 물을 활용하여 태양 에너지<br />

를 흡수하고 저장하는 기술도 개발되었다. 땅에서 열을 뽑아내 증기로 전환하여 터빈에 동<br />

력을 공급할 수 있는 지열 발전소는 현재 시험 단계에 있다. 테크니온의 과학자 팀이 개발<br />

한 한 프로젝트는 건조한 공기와 물(바닷물이나 염수까지도 가능)을 이용하여 1천 미터 높<br />

이의 굴뚝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기술이다.<br />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의 거울 광장 •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제공


206


207<br />

경제<br />

과제와 성과 207<br />

주요 개혁 210<br />

‗경제 기적‘ 214<br />

국내 경제 상황 216<br />

경제 정세 221<br />

여러 경제 부문 229


I. 스툴만<br />

208


209<br />

경제<br />

수년 간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수준의 GDP 성장률을 기록했던 이스라엘은 거의 모든 영역<br />

에서 경제활동이 뚜렷한 부진을 보인 2년간의 침체기를 겪은 후 현재는 2003년부터 시작된<br />

경기 회복세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모든 경제적 매개변수에 의하면 이러한 경향은 2007<br />

년에도 계속되었다. 2006년과 2007년에 이스라엘의 국내 총생산(GDP)은 급격한 성장세를<br />

지속하였으며, 2006년에는 일시적으로 0.7%의 GNP 손실을 야기한 제2차 레바논 전쟁에도<br />

불구하고 GDP 5.1%의 성장을 기록했다. 기업 부문이 신속한 회복과 빠른 성장세의 지속을<br />

다시 한번 주도했으며, 이 부문은 규모가 6.4% 확대되며 2006년 일인당 GDP 20,138달러를<br />

기록했다.<br />

עובד אדמתו ישבע לחם...‏ ‏)משלי י"ב:‏ י"א )


210<br />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잠언 12:11)<br />

2006~2007년에 이스라엘은 주요 거시경제 목표를 꾸준히 달성했다. 구체적 목표 내용은 때<br />

로 마이너스까지 기록하는 매우 낮은 인플레이션률, 매우 낮은 예산 적자, 공공 지출의 제<br />

한적 증가였다. 이와 동시에 지속적으로 해외 투자를 유치하는 한편 급격한 수출 성장과 사<br />

상 처음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이러한 추세는 2007년 상반기에도 계속되었고, 그 해<br />

전체 전망도 인플레이션 없는 지속적 경제 성장과 낮은 예산 적자, 전 부문의 경제적 안정<br />

등이었다. 7백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이스라엘은 특히 농업과 농업기술, 관개, 태양 에너지,<br />

여러 첨단 산업계와 신생업체들의 놀라운 성과에 대해 지난 수년 간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br />

다. 심지어 전통 산업에서도 집중적인 연구 개발을 기반으로 하는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단<br />

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통신, 생명공학, 의약품, 나노 기술 등 첨<br />

단 기술의 땅이기도 하다.<br />

지난 30년에 걸쳐 미국, 유럽연합, 몇몇 남미 국가들과 맺은 자유무역협정은 이스라엘이 상<br />

품과 서비스 수출을 확대하고—2006년 6백억 달러 이상—다국적 기업에 참가하여 성장 가<br />

속화에 기여하는 과정을 촉진했다.


211<br />

과제와 성과<br />

최근의 성과<br />

• 2000년도는 이스라엘 경제사에서 제로 인플레이션과 무역수지 적자의 현저한 감소를 모<br />

두 이룬 최초의 해이다. 특히 무역수지 적자는 2005년에 이르러 7억 달러까지 떨어졌고<br />

2006년에는 흑자 추세로 돌아서 9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br />

• 이스라엘은 10년 만에 120만에 육박하는 이민자들을 흡수하면서 민간 노동력을 1990년<br />

165만에서 2006년 280만으로 증가시켰다.<br />

• 인플레이션을 해결했다. 1984년에 연간 인플레율 445%에서 1989년에는 21%, 2000년에<br />

는 0%로 떨어졌고, 2005년에 2.4%로 올랐지만 2006년에는 제로를 넘어서서 -0.1%를 기록<br />

했다.<br />

• 외환 부채를 제거했다. 1985년에는 외채가 GDP의 1.6배였고 1995년에도 여전히 GDP의<br />

25%를 차지했지만 2001년 3% 미만으로 줄고 2003년에는 제로로 떨어졌다. 이 시점부터<br />

이스라엘은 채권국이 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해외에 진 부채보다 세계 경제가 <strong>이스라엘에</strong><br />

진 부채가 훨씬 커졌다).<br />

• 외국인 투자가 꾸준히 증가하여 GDP 성장을 촉진하고 수출 성장을 가속화했는데 수출<br />

규모는 1987년 1억 7500만 달러에서 1997년 58억 달러, 2005년 107억 달러, 2006년 252억<br />

달러로 증가했다.<br />

• 산업 수출은 지난 20년간 6배 가까이 증가했다. 1985년 60억 달러에서 2005년 356억 달<br />

러로 증가했고 2006년에는 381억 달러를 기록했다.


212<br />

역사적 도전과제<br />

이스라엘의 가장 두드러진 경제적 성과는 다음과 같이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는 도전과제들<br />

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이뤄낸 놀라운 발전 속도이다.<br />

• 국가 안보 유지: 이스라엘은 현재 GDP의 약 8%를 국방비로 지출한다(1970년대에는<br />

25% 이상, 1980년에는 23% 지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도 이스라엘은 강력한 전쟁 억제<br />

능력을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br />

• 대규모 이민자 수용: ―이산민 되 모으기‖는 <strong>사실</strong>상 이스라엘이라는 유대 국가의 존재 이<br />

유이다. 건국 이래로 이스라엘은 3백만 명이 넘는 이민자들을 흡수했고, 이는 1948년 독립<br />

을 달성할 당시 국내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의 5배가 넘는 수치이다. 대부분 전후 유럽과<br />

아랍 각국에서 건너온 70만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건국 초기 4년 동안에만 이스라<br />

엘 인구는 2배 넘게 증가했다.<br />

1990년 이래로 120만 이민자들(구 소련에서만 94만 명)의 물결이 또 한번 밀려와 이들을<br />

물리적, 사회적으로 통합시키는데 엄청난 지출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앞선 이민 대열보다<br />

이들 신규 이민자들은 훨씬 빠른 시간 안에 통합되어 GDP 성장을 가속화하는데 기여했다.<br />

물론 이들도 일시적으로는 실업률을 높여 1992년에 최고 11.2%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br />

수치는 서서히 줄어들어 2006년 말에는 7.6%로 떨어졌다.


213<br />

• 현대적 경제 기반시설의 확립: 기본적인 도로, 교통, 항만 시설, 물, 전기, 통신 네트워크<br />

는 1948년에도 존재했지만 이것들은 적합한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고, 따라서 개발과 확장을<br />

위해 엄청난 지출을 요했다. 통신과 교통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경제의<br />

신속한 성장은 대부분 불가능했을 것이다.<br />

• 높은 수준의 공공 서비스 제공(보건, 교육, 복지 등): 이스라엘은 자국민의 복지(사회 내<br />

약자계층에 더욱 특별한 관심을 기울임)를 보장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어 이러한 책임을<br />

달성하기 위해 투입하는 자원의 비율이 꾸준히 늘고 있다. 비록 최근의 긴급 경제 정책으로<br />

인해 불가피하게 이 부문의 예산이 삭감되기는 했지만 2006년과 2007년 정부 예산은 다시<br />

예산 삭감에 대한 조정을 시작할 것임을 확실히 했다.


214<br />

주요 개혁<br />

외환 자유화<br />

이스라엘 뉴세켈(NIS)은 현재 모든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유로이 거래되는 ―경화‖이다. 이는<br />

비교적 최근에 바뀐 현상으로 이전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다른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br />

로 자국 경제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불가피하게 수십 년간 통화 규제 정책을 실시했다.<br />

건국 초기 이스라엘은 수출에 비해 훨씬 큰 수입 규모가 주요 원인이 된 심각한 외화 부족<br />

을 겪었다. 이 같은 상황으로 인해 외화 ―배급제‖—식품, 연료, 방산 장비와 같이 매우 기본<br />

적인 필수품목에만 외화를 할당하는 것—가 시행되었다. 생산 기계와 원자재는 나중에야 이<br />

목록에 추가되었고, 그 후 해외 여행자들에게는 일인당 10달러만 반출이 허용되었다.<br />

1950년대 후반에 이르자 여러 ―사치성‖ 상품의 수입이 허용되었고 이스라엘인들은 해외여<br />

행 시 일인당 100달러를 반출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수입 제한이 더욱 완화되었<br />

고, 1970년대에는 완전히 자유화되었다(수입 제한이라는 부담을 엄청난 관세의 ―만리장성‖으<br />

로 전환). 그러나 이러한 관세 부담도 유럽연합과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덕에 크게 낮아


215<br />

졌으며, 1980년대에는 해외여행 시 개인의 외화 반출 한도가 500달러에서 3,000달러로 점진<br />

적으로 상승했다. 외국은행 계좌 보유와 투자도 최초로 허용되면서 선례를 따랐고, 1990년<br />

대 하반기에는 외화 규제의 마지막 보루까지 제거되었다.<br />

환율<br />

외환 규제를 완전히 철폐한 후 현재 세켈의 환율은 국제 금융시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br />

과거에는 늘 이런 식으로 결정되지는 않았다. 2차 대전 후의 다른 모든 국가와 마찬가지로<br />

이스라엘의 환율도 과거에는 고정환율제를 택했고, 정부 결정에 따라 때때로 변동(평가 절<br />

하)되었다.<br />

1948년 이스라엘 리라는 영국화폐 1파운드(당시 4 USD) 가치와 같았고, 1949년에는 파운드<br />

와 함께 2.80달러로 평가절하되었다. 그때 이후 이스라엘 통화는 여러 차례 평가절하되었다<br />

(예: 1954년에 달러당 1.80리라, 1962년 달러당 3리라, 1971년 달러당 4.20리라, 1974년 달러<br />

당 6리라로 절하). 이것은 경제 정책에 따라 수출과 수입의 격차를 줄이고 앞선 평가절하<br />

후 축적된 인플레 율을 대외 무역으로 상쇄하기 위한 조치였다.<br />

1975년 이스라엘은 OECD 내 변화 추세를 따라 ―느린 평가절하‖(매달 최대 2%까지 평가절<br />

하 허용) 정책을 시작했다. 이러한 제도는 외환 자유화의 첫 걸음을 떼기 전까지 2년간 지


216<br />

속되었다. 자유화 시작 이후 환율은 매일 시장 변동폭에 맞춰 이스라엘 은행이 결정했다.<br />

1980년에 10리라가 1세켈로 전환되었고, 1985년에는 1,000세켈이 1 이스라엘 뉴세켈(NIS)<br />

이 되었다. 2007년 7월 NIS 환율은 평균 0.24달러를 기록했다.<br />

국가 예산의 긴축<br />

건국 이후 첫 10~20년 동안 주로 정부에 의해 주도된 경제 성장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이스<br />

라엘을 GDP에 비해 국가 예산이 큰 나라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시켰다. 심지어 예산이<br />

GDP를 넘어서는 경우까지 있었지만, 1980년에는 95%로 줄어들었고, 계속해서 1990년에<br />

64%, 2005년 49%, 2006년에는 40% 전후로 떨어졌다. 또한, 건국 초기에는 ―개발‖(즉, 투자)<br />

목적에 대해서만 예산 적자(세수와 국내 대출로 재정 처리되지 않는 부분)가 허용되었던 반<br />

면, 이후에는 국방비 부담이 증가됨에 따라 ―일반적‖ 예산 적자가 당연한 것이 되었다.<br />

1990년대에는 이러한 예산적자를 축소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GDP 대비 예산적자 비율을 서<br />

구 선진국 수준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실제로 이 정책은 성공을 거두어 적자 비<br />

율이 90년대 초반 기록의 25% 수준으로 떨어졌다. 2001년에는 큰 폭으로 상승하기도 했지<br />

만 다시 하락세를 보여 2003년 6%, 2004년 5%, 2005년 3.2%, 2006년 1.8%로 줄어들었다.


217<br />

이스라엘 정부가 2003년에 착수한 경제 개혁 프로그램은 예산(세금도 포함) 규모를 더욱 축<br />

소하며 꾸준히 국가 경제를 능률화하고 있다.<br />

민영화<br />

정부가 여전히 경제 정책을 주도해야 하는 상황에는 변함이 없지만 1990년대 이후 경제에<br />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줄이고자 했던 정부의 정책은 성공을 거뒀다. 그 예로 정부는 생필품<br />

가격을 유지하는 보조금을 거의 없애고 해외 투자와 수출 촉진을 담당하는 주체들의 권리를<br />

축소하는 것 외에도 수백 개 공기업의 소유권을 민간에 이전하는 대대적인 민영화 작업을<br />

개시했다.<br />

이 정책이 시행된 초기 10년 동안은 다수의 소규모 사업체가 민영화되었는데 지난 2~3년간<br />

그 과정이 점차 확대되어 여러 은행을 비롯해 엘 알 이스라엘 항공, 찜(선사), 베젴 (통신<br />

회사) 등 대형 기업들을 매각해 3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석유 업계가 이 의제의 다음<br />

차례에 올라있다. 정부는 또한 공공 서비스의 일부도 민간 부문으로 이전할 계획을 가지고<br />

있다.


218<br />

‘경제 기적’<br />

이스라엘 경제는 건국 초기 25년 동안 연간 약 10%에 근접하는 놀라운 평균 GDP 성장률<br />

을 달성했다. 이는 대규모 이민 물결을 흡수하고, 거의 밑바닥부터 현대적 기반시설과 경제<br />

를 건설하고, 4번의 전쟁을 치르며 국가 안보를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일궈낸 성과이다. 이<br />

스라엘의 이 같은 경제성장은 ‗경제 기적‘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이런 기적을 이룰 수 있었<br />

던 것은 수년에 걸쳐 상당 규모의 유입 자본을 융통성 있게 사용하는—특히 생산 수단에 대<br />

한 대규모 투자—동시에 이민자들을 신속히 흡수하고 생산 체제에 성공적으로 편입시킨 덕<br />

이 컸다.<br />

그러나 이어지는 1973년에서 79년까지 6년 동안 성장률은 하락세로 돌아서(대부분 선진국<br />

에서도 1973/4년과 1979/80년 석유 파동의 여파로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연평균 3.8%를<br />

기록했다. 1980년대에는 더욱 감소하여 3.1%에 머물렀다. 그러다 1990년대에는 연평균<br />

GDP 성장률 5%를 넘어섰고(2000년에는 7.7%까지 상승), 2005년에 다시 5.2%, 그리고<br />

2006년에도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다.<br />

일인당 GDP는 1990년대 동안 60% 이상 증가하여 2005년에 18,700달러, 2006년 20,138.


219<br />

I. 스툴만<br />

달러에 가까운 연간 수치를 기록했다<br />

2006년 이스라엘의 경제 성장률은 타 선진국들의 성장률에 비해 비교적 높게 나타났다.<br />

2006년 OECD 30개국의 평균 GDP 성장률은 총 3.2%를 기록했고, 이는 이스라엘의 성장률<br />

보다 1.9% 낮은 수치이다.


220<br />

국내 경제 상황<br />

경상수지<br />

여타 국가적 과제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동시에 고도 성장의 기적을 달성한 이스라엘은 그<br />

대가로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역 적자라는 고질적 문제를 겪어야 했다. 높은 수준의<br />

수입과 그보다 훨씬 소규모인 수출 간의 연간 차액은 해외 자원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보<br />

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역대 이스라엘 정부의—최근에 마침내 달성된—기본적인 정책<br />

목표는 ―경제적 독립,‖ 즉 수출이 모든 수입의 비용을 충당하여 적자가 사라지는 수준을 달<br />

성하는 것이었다.<br />

이스라엘 건국 후 처음 48년 동안 이러한 무역 적자는 계속 증가하여 1949년의 2억 2200<br />

만 달러에서 1996년 101억 달러로 45배(현재 통화 기준) 껑충 뛰어올랐다. 그러나 상대적<br />

기준으로 볼 때 무역 적자는 이 기간 동안 꾸준히 감소했으며, 이는 적자 문제가 점진적으<br />

로 해결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구체적으로, 1950년에는 수출이 수입 비용의 14%만을 충<br />

당한 데 비해 1960년에는 이 비율이 51%를 기록했고, 1996년에는 79%까지 상승했다. 이<br />

시점부터 실질 적자는 하락세로 돌아서기 시작하여 2001년에 47억 달러, 2005년에는 단 7<br />

억 달러로 감소했으며, 따라서 상품과 서비스 수출이 모든 수입 비용을 충당하고도 잉여 자<br />

금이 남는 수준이 되었다.


221<br />

경상수지: 1949~2005 (단위: 현재 US 백만 달러)<br />

연도 수입 수출 적자<br />

상품과 서비스를 포함한 경상 계정


222<br />

지난 59년 동안 이스라엘의 연간 무역 적자를 모두 합하면 약 1760억 달러(US)에 달했다.<br />

이 누적 적자 중 2/3 가까이는 이민자들이 들여온 자금이나 외국 연금, 해외 유대인 모금<br />

단체들이 보건, 교육, 사회 서비스 기관에 보낸 기부금, 외국 정부들, 특히 미국의 보조금<br />

등의 일방적인 유입금으로 조달되었다. 나머지는 개인, 은행, 외국 정부로부터의 차관으로<br />

순 대외 채무: 1954~2005 (단위: 현재 US 백만 달러)<br />

연도<br />

순 대외채무 총액<br />

조달되었으며, 이스라엘은 건국 초기부터 이 부채를 계속 상환해오고 있다.<br />

바로 이 때문에 1985년까지 매년 대외 채무가 증가했지만, 85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상환액<br />

이 차입 액을 넘어섰다. 이러한 긍정적 추세가 몇 년간 계속되다가 1995년에 순 대외 채무<br />

가 208억 달러라는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지난 10년간 채무는 다시 크게 줄어들어 제로


223<br />

수준으로 떨어졌고, 2002년부터는 점차 플러스로 전환되어 채권국이 됨으로써 이스라엘의<br />

해외 채무보다 ―세계 경제‖에 대한 채권이 더 커지게 되었다(2006년 310억 달러 이상의 채<br />

권 보유).<br />

대외 무역<br />

작은 경제규모와 비교적 제한된 국내 시장을 가진 이스라엘의 성장은 수출 확대에 크게 의<br />

존한다. 따라서 국가의 창조적 자원 대부분이 산업 수출을 확립하는데 투입되었다. 이 같은<br />

투자 금액은 1950년에 1300만 달러, 55년에 5200만 달러, 75년에 14억 달러, 85년 56억 달<br />

러, 2000년에는 308억 달러, 그리고 2006년에는 2005년에 비해 7.5% 증가한 394억 달러를<br />

기록하며 56년 동안 거의 3천 배 가량 상승했다.<br />

최근 몇 년간 전체 상품 수입의 85% 이상이 생산투입요소와 연료였고, 2006년에 그 규모는<br />

472억 달러에 달했다. 이들 상품 중 54%가 유럽에서 수입되었고, 17%는 북남미, 16%는 아<br />

시아, 나머지 13%는 그 외 국가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같은 해 366억 달러에 달하는 이스<br />

라엘 수출 상품 중 33%는 유럽으로, 40%는 미국, 19%는 아시아, 나머지 8%는 그 외 국가<br />

로 수출되었다. 199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대미 산업 수출은 미국으로부터의<br />

수입을 넘어섰고, 2000년부터는 다이아몬드 수출을 제외하더라도 대미 수출 흑자를 기록하<br />

고 있다.<br />

이스라엘의 수출 경쟁력은 관세 무역 일반 협정(GATT)에 가입하고, 유럽 공동체와 공산품<br />

자유 무역 지역으로(1975년), 미국과는 완전 자유 무역 지역으로(1985년) 결정되면서 더욱<br />

강화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상품은 유럽연합(EU)과 미국에 모두 면세로 들어갈 수 있게<br />

되었다. 이스라엘 국내 생산자들은 자국 시장보다 거의 110배나 넓은 시장을 겨냥할 수 있<br />

게 되었고, 무관세로 유럽에 상품을 수출하기를 희망하는 투자자들을 이스라엘로 끌어들일<br />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투자자들은 미국과 유럽으로의 무관세 상품 수출이 가능<br />

한 산업 특구에서 요르단과 이집트 기업들과 합작 사업체를 설립했다.


224<br />

성공의 기회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스라엘 국내 기업들은 국제 통상 영역 중 자사만의 특화<br />

된 틈새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힘썼다. 외국 산업체들과의 합작 기업 설립<br />

에서는 국내의 혁신 기술과 외국의 대량 생산 및 시장 침투력을 함께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br />

다. 합작 사업은 전자,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인쇄, 컴퓨터 그래픽 등의 분야에서 이루어졌<br />

다. 이러한 합작 사업 중 다수는 사업 자금 조달에 있어 다음과 같은 6개의 양국 개발 연구<br />

협력 재단과 같은 제도를 통해 지원을 받고 있다. 관련 정부가 후원하는 이러한 재단은 미<br />

국과의 BIRD, 캐나다와의 CIIRDF, 싱가포르와의 SIIRD, 영국과의 BRITECH, 한국과의<br />

KORIL-RDF, 호주 빅토리아와의 VISTECH 등이다.<br />

상품의 수출과 수입 (다이아몬드 제외)


225<br />

■ 수입 ■ 수출<br />

경제 정세<br />

인플레이션 억제<br />

건국 시점부터 2000년까지 이스라엘 경제는 물가 상승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br />

연계 메커니즘 덕에 개인들이 그 결과에 따른 심각한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모든 금융 수<br />

행과 급료, 임대료, 저축 계좌, 생명보험 증권, 소득세 등을 좀 더 안정적인 가치(외국 통화<br />

나 소비자 물가 지수 등)와 연계시킴으로써 인플레이션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그 결<br />

과 이스라엘인들은 연간 인플레 율이 한 자리 수든(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후반), 두<br />

자리 수든(1970년대), 세 자리 수든(1980년대 상반기) 관계없이 그들의 생활 수준을 여전히<br />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스라엘 경제는 분명 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겪었으며(예: 투자 성향<br />

감소), 이는 대부분 이 같은 연동제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인플레이션 악화 상황은 1980<br />

년대 중반에 절정에 달했다.<br />

인플레이션이 1983년의 191%에서 1984년 445%로 치솟고 1985년에 위협적으로 네 자리<br />

수를 향해가던 그 해 여름, 리쿠드당의 이츠하크 모다이 재무부 장관과 함께 노동당의 시몬<br />

페레스가 이끄는 국민통합 정부는 노조 총연맹 히스타드룻과 기업 공동 위원회와의 협력 하<br />

에 급진적인 긴급 안정화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그 결과 인플레 율이 1985년 185%로, 1989<br />

년에는 21%까지 떨어졌다. 이후 하락세를 계속하여 1997년에 7%를 그리고 2000년에는 사<br />

상 처음으로 0%를 기록했다. 2003년에는 최초로 실질 물가 하락이 이루어졌고 인플레이션<br />

은 마이너스대로 떨어져 -1.9%를 기록했다. 2005년 인플레 율은 2.4%였고, 2006년에는 다시


226<br />

-0.1%로 내려갔다.<br />

세켈: 이스라엘의 통화 단위인 세켈 (2007 년 7 월 기준으로 1 세켈=0.24 달러)은 기원전<br />

2 천 년에 이미 금과 은을 지불수단으로 사용할 때 무게를 재는 단위로 알려져 있었다.<br />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에서 땅과 “그 땅 안에 있는<br />

동굴”을 사기 위해 흥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br />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br />

장사하겠노라. 땅 주인 에프론이 대답하기를,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아브라함이<br />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br />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창세기 23:13, 15-17)<br />

공공 부문<br />

높은 수준의 공공 지출과 특히 그 결과 초래되는 대규모 정부 예산 적자는 항상 이스라엘의<br />

인플레이션률이 높아진 주된 원인이었다. 예산 자금을 대기 위해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모<br />

든 자원(국내외 자금원, 국채, 직간접 세)도 지출액을 충당하기에 역부족이었고, 정부는 반복<br />

적으로 통화팽창에 의한 자금 조달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공공 부문이 이처럼 무거운 부담<br />

을 지게 된 주요 원인은 막대한 국방비 지출과 국내외 부채 상황에 드는 비용이었다. 이 두<br />

가지 세목은 지난 3~4년의 기간에 와서야 정부 예산의 2/3에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227<br />

경제적 생존력을 얻기 위해서도 인플레이션 억제와 국제수지 적자의 감소, 빠른 경제성장률<br />

유지가 필요했고, 이 세 가지를 달성하려면 최근 몇 년간의 높은 공공 지출을 삭감해야만<br />

했다. GDP 대비 높은 공공 지출 비율은 25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 1980년과 2006년<br />

(당시 정부 예산은 약 600억 달러) 사이에 GDP의 95%에서 49%로 떨어졌다. 2006년에는<br />

국제 수지 흑자가 발생했고, 예산 적자는 GDP의 0.9%로 감소했다.<br />

여전히 정부가 민간의 경제 사업을 촉진하는 역할을 맡고는 있지만, 민영화를 통해 사업체<br />

경영에 대한 실질적 개입을 줄이려는 정부 정책은 성공을 거뒀으며, 2005년 민영화를 통해<br />

거의 30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br />

조세 제도<br />

이스라엘의 막대한 공공 지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무거운 과세가 필요했으므로 이스<br />

라엘 국민은 수년 동안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조세 부담을 져야 했다. 건국 후 첫<br />

10년간 세금은 GNP의 12.5% 정도였으나 1960년대에는 그 비율이 25%에 달했고, 1970년<br />

대와 80년대에는 30~40% 사이를 오갔다. 1990년대에는 평균 40% 미만이었고 2000년에는<br />

40.3%를 기록했다. 2003년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총 세금 부담은 GDP의 39.3%로 감소


228<br />

했고, 2006년에는 더욱 떨어져 38%를 기록했다. 이는 OECD 국가들의 2004년 평균치인<br />

37.4%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br />

간접세는 주로 15.5%의 부가가치세(VAT)로 구성된다. 이에 더해 자동차, 연료, 담배에 대해<br />

구매세가 부과된다. 유럽연합과 미국에서 수입된 물품은 면세인 반면 그 외 국가에서 들어<br />

온 수입품에 대해서는 관세가 적용된다.<br />

소득과 재산에 대한 직접세는 1950년대 말까지 모든 조세 수입의 25% 이하를 차지했으나<br />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 1/3 수준으로, 1980년대 초에는 절반 가까이로 상승했고 1986년에<br />

45%를 기록했다. 이후 직접세 비중은 줄어들어 1995년에는 39%로 떨어졌고 2006년에는<br />

39~43% 사이의 변동폭을 보였다.<br />

최근 몇 년간 이스라엘은 세계 경제와의 더욱 확고한 통합을 위해 조세 제도에 추가적 변화<br />

를 도입했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수입품에 대한 관세와 구매 세를 꾸준히 줄이고 있고, 법<br />

인세율도 2007년 말까지 단계적으로 30%로 내렸으며 2010년까지 25%로 추가 인하할 계획<br />

이다. 한계 소득세율 역시 2010년까지 44%를 목표로 점진적으로 줄여나가고 있다.<br />

민간 소비와 저축


229<br />

민간 소비는 1950년부터 거의 쉴새 없이 계속 증가했다. 1960년 이래 연간 평균 성장률은<br />

6%를 기록했다 (1994년 일인당 9.6%에서 2000년 6.6%, 2006년에는 4.9%로 떨어지기는 했<br />

다).<br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 저축은 꾸준히 상당 수준을 유지했다. 1950년대 말까지 민간 가처<br />

분 소득 대비 평균 민간 저축률은 29%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960년대 초에 21%로<br />

하락했으나 1972년에 다시 38%로 증가했고 1981년에도 같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후 그 비<br />

율은 거의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06년에 28.8%로 떨어졌다.<br />

I. 스툴만


230<br />

투자<br />

높은 저축률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에 의해 행해진 대규모 투자(일반적으로 국<br />

가 경제의 모든 활용 가능한 자원의 20~30%)를 지탱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따라서 필요<br />

자금의 상당 부분을 해외로부터의 공공 및 민간 자금 유입분과 정부를 중심으로 한 공공 부<br />

문의 직접 개입으로 조달해야 했다. 지난 10년 동안의 전체 투자는 1995년과 2000년 사이<br />

에 170억 달러에서 228억 달러로 증가했다가 3년 연속 하락세를 보인 후 다시 상승하여<br />

2005년에 221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 중 49%에 해당하는 108억 달러는 해외 비이스라엘계<br />

외국인들이 투자한 것이었다).<br />

2006년 초에는 <strong>이스라엘에</strong> 투자 경험이 전무한 외국인들의 투자가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br />

이는 이스라엘 경제에 대한 관심과 신뢰가 높아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2006년 해외<br />

비이스라엘계 외국인 투자는 243억 8600만 달러에 달했으며 이러한 증가세는 2007년에도<br />

계속되었다.<br />

정부의 사업과 진흥 정책으로 국내와 해외 모두에서 민간 투자가 많이 이루어졌다. 이것은<br />

수년에 걸쳐 자본 투자 촉진법의 다양한 법률안에 반영되었다. 정부는 이 법률을 통해 (이<br />

자율이 감면된) 장기 보조 대출, 총 투자액 비율에 따른 직접 보조금, 연구 개발 자금 지원<br />

등으로 투자자들을 유치했다.<br />

같은 목적으로 조세 감면과 세금 환급 또한 제공되었고, 이러한 혜택은 인구 분산, 수출 촉<br />

진 등과 같은 경제 정책을 이행하는데 있어 특정 투자가 기여한 비중에 따라 할당되었다.


231<br />

히스타드룻 – 노동 총연맹 히스타드룻는 이스라엘 노동자들을 대표하고 조합원들에게 직장<br />

을 제공할 산업체를 설립하기 위해 여러 직종 별 노동조합의 연맹으로 1920년에 창설되었<br />

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기관은 이스라엘 최대 규모의 고용기관 중 하나가 되었고 국가 발<br />

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br />

오늘날 70만 명의 조합원을 보유한 새로운 히스타드룻는 국내 노동 조직과 관련된 78개 노<br />

동조합을 결속시켜 단체 협약에 조인하고 그 실행을 감시하는 일을 맡고 있다. 식품, 섬유,<br />

호텔 및 관광 산업, 정부 및 공공 부문 노동자, 사무원, 실무 기술자, 간호사, 연금 수령자<br />

등 이스라엘 경제의 대다수 고용 분야를 대표한다. 공학자, 의사, 학자, 교사, 언론인 등 일<br />

부 직업은 독립적인 노조들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br />

하도급 자나 개인적 계약을 통해 고용되는 근로자의 수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히스타드룻의<br />

영향력이 예전만큼 강하지는 않다.<br />

이러한 지원이 1980년대 GDP 성장을 능가한 자본(생산 능력) 축적의 이유가 되었다고 볼<br />

수도 있다. 이 같은 잉여 생산 능력은 1990년대에 몇몇 부문에서 급진적 도약을 촉진했다.<br />

임금과 근로 조건<br />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임금은 아직까지 국내 최대 고용주이며 그 임금률이 모든 경제 부문에 강력한<br />

영향력을 갖는 정부와 히스타드룻(노동 총연맹), 민간 부문 고용주 단체 간에 실시되는 3자<br />

협상을 통해 주로 결정된다. 합의된 협약들은 다양한 경제 부문의 임금 체계의 기본 틀을<br />

구성하며, 때로는 내용을 변경하여 물가인상에 따른 보상으로 생계비 수당의 자동 지급을<br />

규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임금 조건은 상당히 고정적인 편이고, 특히 하위 부문에서 더욱<br />

그러하다. 노동력이 부족한 시기에는 노동자 수요가 심한 부문에서 임금이 탄력적으로 상승<br />

하지만, 이스라엘 내 실업 파동 시에는 임금이 크게 줄지 않았다. 2006년 6월 기준 월 평균


232<br />

임금은 NIS 7,759 (약 1,843달러)였다.<br />

다양한 경제 부문의 근로 조건은 노사가 협상한 근로 협약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최소한<br />

의 요건은 법으로 정해져 있으며, 그 내용은 주당 최대 근무시간 47시간(기업 부문의 2006<br />

년 실질 평균은 주당 40시간 이하), 최저 임금(2006년 NIS 3,585-약 780달러-이고, 2008년<br />

초에 NIS 3,785로 오를 예정), 초과근무 수당, 퇴직급여, 유급 휴가 및 병가 등이다.


233<br />

여러 경제 부문<br />

산업<br />

오늘날 이스라엘은 여러 전통 영역을 포함 대부분의 제조업이 집약적이고 정교한 연구 개발<br />

과 첨단 공정과 수단, 조직을 기반으로 갖춘 선진 산업 국가이다. 이것은 신속하고 집중적<br />

인 발전의 결과이다.<br />

지금의 역동적이고 매우 다각적인 산업 부문은 원래 농기구 제조와 농산품 가공을 위해 19<br />

세기 말부터 설립된 소규모 작업장에서부터 발전한 것이다. 초기에 이들 작업장이 현대적<br />

공장으로 변모하게 된 데는 두 가지 동인이 있었다. 1930년대에 독일에서 기업가와 숙련 기<br />

술자들이 이주해온 것이 첫 번째 동인이었고, 2차 세계대전(1939~45) 중 이 지역 연합군들<br />

이 다양한 생필품, 특히 의복과 통조림 식품을 필요로 했고, 지역에서 필요한 상품들이 전<br />

쟁으로 인해 유럽에서 수입되지 못함에 따라 점차 늘어난 산업 제품 수요가 또 다른 동인이<br />

되었다.<br />

1970년대까지는 식품 가공, 섬유와 패션, 가구, 비료, 살충제, 의약품, 화학제품, 고무, 플라


234<br />

스틱, 금속 제품 등의 전통 산업이 국내 산업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기간 동안은<br />

농업 개발, 식품 생산 및 가공, 기반시설 구축, 많은 비 숙련 이민 노동자들에게 신속히 일<br />

자리를 제공하는 것 등에 대부분의 자원이 투입되었다.<br />

산업화의 다음 단계는 국방에 필요한 무기의 개발 및 제조에 집중되었다. 이는 건국 초기의<br />

이스라엘을 위협한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가속화되었다. 항공 및 군수 산업에 대한 대규모<br />

투자는 새로운 기술을 창출했고, 이러한 기술은 의료용 기기, 전자공학, 컴퓨터 소프트웨어<br />

및 하드웨어, 정보통신 등과 같은 이스라엘만의 독자적 첨단 산업의 기반이 되었다. 1980년<br />

대에는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던 이스라엘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와 인텔, 마이크로소프트,<br />

IBM 등 여러 다국적 기업의 개발 센터를 열었다. 1990년대에는 구 소련 연방에서 과학자,<br />

공학자, 기술자, 의료인 등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들이 이주해 옴으로써 이스라엘 산업을 지<br />

금의 정교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수출 상품의 진용을 갖출 수 있었다.<br />

천연 자원과 원자재가 부족한 이스라엘의 한 가지 강점은 고급 노동력과 과학 연구소, 연구<br />

개발 센터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산업은 대부분 자국 고유의 과학적 창의력과 기술 혁신을<br />

기반으로 한 제품 개발을 통해 생산된 고부가가치 제품에 집중되어 있다.


235<br />

1990년대 초반 산업 고용 인력의 수가 정체 혹은 감소했던 대다수 선진국과 달리 이스라엘<br />

의 산업 고용인력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06년 이스라엘의 산업 성장률은 선진국 중에<br />

서 한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br />

지난 20년간 산업 생산은 의료 전자기기, 농업 기술, 정보통신, 정밀 화학, 컴퓨터 하드웨어<br />

및 소프트웨어, 다이아몬드 세공 분야에서 국제적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다. 2005년 제조업<br />

계의 고용인력 수는 41만 3천 명에 달했다(이 중 고학력 근로자의 비율이 미국과 네덜란드<br />

다음으로 높았다). 2004년 기준으로 1만 3천 개의 산업설비가 존재했고, 여기서 생산된 580<br />

억 달러 이상의 생산품 중 절반 이상을 수출했다.


236<br />

경제 부문별 주요 지표 (2006년)<br />

(단위: %)<br />

부문 GNP 노동력 수출 투자


237<br />

출처: 중앙 통계청<br />

첨단 산업<br />

이스라엘 산업 중 가장 빠른 성장률(최근 몇 년간 연평균 8%)을 보이는 부문은 첨단 산업<br />

분야이다. 기술과 자본이 집약된 첨단 부문은 정교한 생산 기술과 더불어 연구개발에 대한<br />

상당한 투자를 요하는데, 이 부문에 이스라엘 GDP의 4.4%가 소요되어 단연 세계 최고 수<br />

준을 기록하고 있다. UN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러한 이스라엘 연구 개발 수준은 세계 10위<br />

권 안에 들어간다. 이 모든 요소에 대한 기여가 성공할 수 있는 원천은 기초 연구 개발과<br />

벤처 자본의 대부분을 제공하는 학계 연구소들이다.<br />

첨단 산업 성장이 가지는 중요성은 1965년에 산업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7%에 불과<br />

했던 첨단 산업이 1985년에 58%로, 2000년에는 70% 안팎으로 증가했다는 점에서 찾아볼<br />

수 있을 것이다.


238<br />

첨단 기술 제품 중 거의 80%가 수출되는 반면 낮은 기술의 재래식 기업들은 생산품의 40%<br />

가까이만을 수출하고 있다. 첨단 제품 수출은 1991년 30억 달러에서 2000년에 123억 달러<br />

로 4배 증가했고, 2006년에는 290억 달러(추가로 첨단 기술 서비스 수출도 59억 달러 기록)<br />

로 뛰어올랐다. 2001~2년의 경제 침체 후에 첨단 산업은 2003년에 이미 플러스 성장을 보<br />

이며 가장 먼저 불황을 떨쳐냈다. 2006년에 하이텍의 주 분야가 되는 정보통신기술 생산은<br />

240억 달러에 이르렀다. 기업부문 GDP의 17%를 차지하는 정보통신기술 분야는 고용 인력<br />

이 18만 5천 명을 기록했고, 이 분야의 민간 연구 개발 지출은 33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수<br />

출 규모는 160억 달러에 육박했다.<br />

공공 연구 개발 예산의 90% 이상(2006년 기준 70억 달러)을 첨단 산업 부문에 할당하고 있<br />

으며, 이 중 대부분은 합작 투자 자본의 경로로 전달된다.<br />

최근 몇 년간 이스라엘 정부는 성공적인 신생 기업들에게 제공한 융자의 상환금 외에도 이<br />

러한 펀드의 해당 지분에서 상당한 배당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스라엘은 앞서 언급한 6개<br />

의 양국간 재단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 벨기에,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웨덴, 독일,<br />

네덜란드,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홍콩, 인도, 터키, 중국과 연구 개발 프로젝트 공동<br />

투자를 위한 협약도 체결한 상태이다.<br />

정보기술(인터넷, 전자 상거래 등)의 시대는 이스라엘 경제, 그 중에서도 특히 첨단 산업 부<br />

문을 이 분야의 세계적 발전의 선두에 위치시켰다.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여러 이스라엘 기<br />

업들은 최고 대기업들에 의해 수십억 달러에 인수되었다. 이스라엘은 비범하고 혁신적인 재


239<br />

능과 고도의 숙련 인력의 활용 가능성으로 인해 신생 기업의 수가 매우 많다. 월 스트리트<br />

와 유럽 증권 거래소에 상장된 이스라엘 기업의 수가 늘고 있는 현상은 국내 첨단 산업이<br />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명백히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이다.<br />

이스라엘의 다이아몬드 산업<br />

이스라엘은 다이아몬드 생산과 거래에 있어 세계적 중심지이다. 그 주된 원인은 이스라엘<br />

다이아몬드 산업이 다이아몬드의 각만큼이나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br />

엘 다이아몬드는 믿음과 신뢰의 대명사이며, 미 분쟁 원산지와 진품임이 보증된다.<br />

또한 이스라엘 다이아몬드 산업은 최첨단 기술과 장인 정신 양쪽에서 모두 세계 최고를 자<br />

랑하며, 원석에서 완성품을 얻는 생산량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의 대규모 생산<br />

재고와 원석과 가공품의 면세 수입은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이스라엘 다이<br />

아몬드 거래소(IDE)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다이아몬드 거래 시장으로, 운영상의 온갖 기능과<br />

다이아몬드 구매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이 한 곳에 완비하고 있다.<br />

2006년에 다이아몬드 수출액은 130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최대 구매국은 미국(63%)이었고


240<br />

홍콩(14%)과 스위스(11%)가 그 뒤를 이었다. 이스라엘은 보석 세팅에 사용되는 소형 가공<br />

원석의 전세계 산출량의 대부분을 생산한다. 또한 온갖 크기와 형태의 다이아몬드 가공 시<br />

장에서도 40%의 점유율을 차지하여 생산과 유통 양면에서 다이아몬드 가공의 세계적 중심<br />

지가 되고 있다.<br />

농업<br />

이스라엘 농업 부문은 천연자원, 특히 물과 경지의 부족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br />

집중적인 생산 시스템을 특징으로 한다. 지속적인 농업 생산량 증가는 연구자, 농민, 농업<br />

관련 업계 간의 긴밀한 협력에 기인한 것이다. 이들은 함께 모든 농업 영역에 대해 새로운<br />

방식을 개발하고 적용한다. 그 결과, 국토의 반 이상이 사막 지대인 국가에 현대적 농업이<br />

정착하게 되었다.


241<br />

이스라엘 농부와 과학자들은 어려운 환경과 제한된 수자원에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이들<br />

의 경험은 특히 개발 도상 국들과 연관된다. 이스라엘의 성공은 농업의 번영 발전에 온 힘<br />

을 쏟아 부으며 땅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그 기능에 달려있음을 전세<br />

계에 증명해 보인 농부와 과학자들의 결의와 창의력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 연구 개발과 산<br />

업계 간의 긴밀한 협력은 농업기술 해법—특히 수자원 해법—을 세계적으로 수출하는 시장<br />

지향적인 기업 농업의 발달을 가져왔다.<br />

이스라엘의 농업은 악조건에 맞서 오랜 기간 힘겹게 투쟁하고 농경지와 부족한 용수(현대적<br />

인 담수화 공장에서 얻은 물까지 포함. 이 기술 노하우는 수출 성공사례이다)를 최대한으로<br />

활용하여 얻어낸 성공일화라 할 수 있다. 19세기 말 유대인들이 그들의 역사적인 조국의 땅<br />

에 다시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주로 이념적인 이유로—가장 먼저 힘을 쏟은 부분은<br />

불모지를 비옥한 땅으로 가꾸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농업이 지금처럼 성공한 비결은 바로<br />

농민들과 정부 지원을 받는 연구자들 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이다. 이들은 함께 협력하여 기<br />

술 진흥, 새로운 관개 기술, 혁신적 농업 기계 장비를 비롯해 농업 전 분야의 정교한 기법<br />

들을 개발하고 적용한다.<br />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쟁취한 이래 총 경작지는 2.6배 증가하여 약 110만 에이커에<br />

이르렀다. 1980년대 중반까지 관개 농지는 약 60만 에이커로 8배 증가했다. 그러나 집중적<br />

인 도시화와 용수 부족이 심화됨에 따라 지금은 50만 에이커 미만으로 줄었다. 지난 반세기<br />

동안 농업 정착촌의 수는 400에서 750개로 증가했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인구의 비중은


242<br />

12%에서 5% 미만으로 감소했다.<br />

오늘날 이스라엘 식량의 대부분은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곡물, 지방 종자, 육류, 커피,<br />

코코아, 설탕 등은 수입하여 보완하고 있다. 수입량 전체는 농산물 수출로 충분히 상쇄되고<br />

도 남는다. 농장 생산물은 주로 유제품과 가금류이다. 이에 더해 다양한 꽃과 과일, 채소도<br />

국내에서 재배되고 있는데, 특히 농민들에게 유럽시장에서 상품을 먼저 내놓을 수 있는 이<br />

점을 주는 따뜻한 지역에서 주로 생산한다. 겨울철 동안 이스라엘은 유럽의 온실 역할을 하<br />

며 멜론, 토마토, 오이, 고추, 딸기, 키위, 망고, 아보카도, 다양한 감귤류, 줄기가 긴 장미와<br />

스프레이 카네이션을 수출한다.<br />

농업 생산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과 2006년 사이에 11%에서 1.5%로 감소했<br />

고, 농산품 수출 비중은 전체 수출의 60%에서 2% 미만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연간 수출액<br />

은 1950년의 2천만 달러에서 2006년 10억 달러로 절대적으로 증가했으며, 이는 특히 혁신<br />

농법의 광범위한 도입과 현대적 관개 및 물 처리 기술, 수출 중심의 농작 덕에 가능해진 것<br />

이다.


243<br />

건설<br />

건국 초기에 주택 건축은 전체 건설 물량의 84%를 차지했다. 그 후 기반시설 건설이 증가<br />

하면서 주택 건설은 70~75% 사이를 오르내리다가 1991년에 새로운 이주민들의 수요를 맞<br />

추기 위해 86%로 다시 껑충 뛰어올랐다. 그 결과 1991년 건설 부문의 생산량도 급격히 증<br />

가했으며, 이 해는 아파트 건설 착수 건도 사상 최고치인 83,500건을 기록했다. 이후 연간<br />

수치는 꾸준히 하락하여 2004년에는 29,000건을 기록했다. 신규 아파트 완공 수의 최고 기<br />

록은 1992년의 70,100건이었고, 2005년에는 31,700건으로 감소했다. 한때 이스라엘 경제의<br />

선도적 분야이자 경제활동의 지표가 되었던 건설 부문은 2006년 GDP의 5%만을 차지하며<br />

1950년에 비해 30% 하락한 수치를 나타냈다.<br />

초기에는 전체 건설의 대부분이 정부의 주도와 투자로 이루어졌지만 1958년과 89년 사이에<br />

정부의 투자 비율은 67%에서 16%로 점진적으로 감소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그 비중이<br />

일시적으로 증가했는데, 그 이유는 수십만 이민자들의 갑작스러운 유입으로 생긴 급격한<br />

수요 증가를 민간 부문이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지난 몇 년간 이스라엘 부동산에 대한 해<br />

외 수요와 더불어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상승은 국내에서 값비싼 아파트의 가격 상승과 저가<br />

형 아파트의 가격 하락이 동시에 일어나는 다소 새로운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244<br />

이스라엘 기업들은 금속 구조물과 조립식 자재 및 부품—문, 창문, 위생설비, 배관 부품, 붙<br />

박이 설치물과 부속품 등—의 설계 및 제조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이들 제<br />

품은 세계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세계 곳곳의 주요 건설 현장에서 찾아볼<br />

수 있다.<br />

운송과 통신<br />

운송과 통신 부문은 가계를 비롯해 다른 모든 경제부문을 뒷받침하는 기반 산업이기 때문에<br />

그 중요도는 국내 경제의 수치상으로 나타나는 작은 비중을 훨씬 넘어선다. 이것은 생산 부<br />

문이기보다는 서비스 부문이며, 다른 모든 현대적 경제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생산 분야보<br />

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이 부문 중 항공업이(관광업의 비슷한 성장 덕<br />

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으며, 통신 부문의 성장은 이보다도 한층 더 빠르게 이루어지<br />

고 있다.<br />

운송과 통신 부문은 2006년 GDP의 7%, 상품 및 서비스 수출의 약 8%를 차지했으며, 국내


245<br />

노동인력의 5%를 고용하고 있다. 이 부문 생산량의 36%는 육로 운송이, 20%는 선박과 항<br />

공, 39%는 통신, 나머지는 다양한 서비스 분야가 점유하고 있다.<br />

1950년대 초반 이후 수송 선단의 총 톤수는 10배 이상 증가했으며, 현재 항공기 이용 승객<br />

의 수는 100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동안 도로 길이는 2배로 늘었으며, 버스 차량<br />

수는 3배 이상, 트럭의 수는 10배로 증가했다.<br />

관광<br />

이스라엘의 지리적 다양성과 고고학 및 종교 유적지, 그리고 지중해와 킨네렛 호수(갈릴리<br />

호), 홍해, 사해의 연중 햇빛이 비치는 온화한 날씨와 현대적 휴양시설은 관광객들을 끌어들<br />

이는 원천이 된다. 2000년에는 사상 최고 수치인 241만 명의 관광객이 이스라엘을 찾았다<br />

(1950년 3만 3천, 1960년 11만 8천, 1970년 44만 1천, 1980년 118만, 1990년 134만 명). 정<br />

치 상황으로 인해 2001년에는 그 수가 120만으로 줄었으나 2006년에는 다시 184만 명<br />

으로 증가했고, 2007년 말에는 약 23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관광객 중 57% 가<br />

구 욥바: 돌 골목과 관광객 • 관광성<br />

량은 유럽인들이었고, 32%는 북 남미에서, 8%는 아시아에서 온 이들이었다.


246<br />

관광업은 2006년에 28억 달러의 외화 수입을 올리며 총 수출 수입의 5%, 서비스 수출의<br />

16.8%를 차지했다.<br />

관광 산업은 GNP의 3%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85%의 외화 부가가치를 지니고 있고(국내 수<br />

출업계 중 부가가치 부문의 선두), 약 8만 명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관광업은 이스라엘<br />

경제 성장 계획의 중요한 요소로서, 향후 그 거대한 잠재력이 적극적으로 개발될 예정이다.<br />

예루살렘: 나할라트 시바 지구 거리의 재즈 밴드 • 관광성


247


248<br />

문화<br />

연극과 극단 246<br />

연예 오락 251<br />

영화 253<br />

음악 258<br />

무용 267<br />

문학 273<br />

시각 예술 287<br />

박물관 299<br />

고고학 304<br />

대중매체 309<br />

스포츠 311<br />

이스라엘과 국제사회의 문화적 유대 321


249


ג:‏<br />

250<br />

문화<br />

이스라엘은 오래되고도 새로운 국가로서 국토는 작지만 문화적으로는 활발하고 다양한 인구<br />

로 구성되어 있다. 4천 년의 유대 유산, 한 세기가 넘는 시온주의, 그리고 반세기가 넘는 근<br />

대 국가의 역사는 이미 고유한 정체성을 창조해낸 하나의 문화에 기여하는 동시에 각기 다<br />

른 70개 공동체의 독특한 특성을 고스란히 보존했다. 다수의 이민자가 포함된 이스라엘 사<br />

회의 창조적 표현은 전통과 혁신을 융합하고 이스라엘만의 개별주의와 보편주의 사이에서<br />

하나의 진로를 찾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다양한 문화와 사회의 영향을 흡수했<br />

다. 문화적 정체성을 향한 끝없는 모색은 창조력을 통해 광범위한 예술 형태로 표현되어 수<br />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일상적 삶의 일부로 수용하며 누리고 있다.<br />

כי לא על לחם לבדו יחיה האדם...‏ ‏)דברים ח'‏ '(<br />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신명기 8:3)<br />

...<br />

그림: 노암 나다브<br />

연극과 극단


251<br />

히브리 연극은 문학과는 달리 고대 히브리 문화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 전까<br />

지 동유럽 유대인 사회에서 크게 유행한 이디쉬극에서 출발한 것도 아니었다. 히브리 극은<br />

1917년 모스크바 소재의 하비마(무대)라는 히브리 극단의 창단으로 시작되었다. 이 극단은<br />

러시아 감독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지도 아래 있었고, 한나 로비나(1892~1980)라는<br />

배우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후에 '히브리 극의 영부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931년<br />

에 하비마 극단은 텔아비브에 영구적 근거지를 설립했다.<br />

이스라엘의 연극은 현대와 고전, 토착성과 외래성, 실험과 전통 등의 서로 다른 여러 요소<br />

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양한 배경을 지닌 극작가와 배우, 감독, 제작자들이 외국적 요소와<br />

국내 요소를 혼합하여 차츰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특징을 지닌 연극을 창조해냈다. 이스라엘<br />

연극계는 상당히 활발한데 전문 레퍼토리와 다수의 극장들 그리고 수십 개의 지방 아마추어<br />

극단들이 전국에서 대규모의 열성적 관객들을 대상으로 공연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이스라<br />

엘의 여러 극단은 동서 유럽과 미국 순회 공연을 가졌고, 에든버러 페스티벌, 베를린 페스<br />

예루살렘 칸 극장 제공


252<br />

티벌 등 국제적 축제 행사에 참가했으며, 유럽, 미국 및 기타 지역의 주요 연극 행사에도<br />

등장했다. 다수의 세미 프로 및 아마추어 그룹들이 영어와 러시아어로 공연을 펼치고 있다.<br />

유명 극작가로는 고( 故 ) 하녹 레빈, 여호슈아 소볼, 힐렐 미텔푼크트, 고( 故 ) 에프라임 키숀<br />

등이 있으며 이들 중 몇몇은 국제적으로도 인정 받고 있다. 대형 전문 극단들은 4대 주요<br />

도시에 위치해 있다.<br />

하비마 극단: 이스라엘 국립 극단으로서 텔아비브의 3개의 공연홀로 이루어진 복합건물(총<br />

1,520석)에 자리잡고 있다. 연간 3만 명이 넘는 예약 관객들에 힘입어 평균 객석 점유율이<br />

약 90%에 이른다. 극단 레퍼토리는 유대 관련 주제의 전통극, 현대 히브리 극작가들의 작<br />

품, 세계적 고전과 드라마, 코미디의 번안물 등이 있으며, 때때로 국제적으로 이름난 연출자<br />

들을 작품에 참가하기도 한다.<br />

카메리 극단: 1970년 이후 텔아비브 시립 극단으로 자리잡은 카메리 극단은 이스라엘인들의<br />

삶을 <strong>사실</strong>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무대에 올린 최초의 극단이다. 중요한 이스라엘 고유 드라<br />

마 시리즈와 주요 고전 및 현대적 히트작의 개작물 등의 생생한 레퍼토리로 히브리 연극의<br />

발전에 꾸준히 기여하고 있다. 4개의 공연 홀을 보유한 새로운 최신식 복합건물에 자리잡고


253<br />

있으며, 텔아비브 공연예술센터와 인접해있다. 이타이 티란이 햄릿 왕자 역을 맡아 공연한<br />

카메리 극단의 햄릿은 국내와 해외 모두에서 대대적인 호평을 이끌어냈다. 수상에 빛나는<br />

이 연출작은 케네디 공연예술 센터의 워싱턴 페스티벌에서 셰익스피어 작품 중 하나로 공연<br />

되었다.<br />

하이파 시립 극단: 고전과 현대극을 망라한 해외 연극과 이스라엘 작품을 공연하는 레퍼토<br />

리 극단이다.<br />

브에르셰바 극단: 현대극과 오리지널 작품, 번안된 고전 및 해외 현대극을 공연하는 레퍼토<br />

리 극단이다.<br />

베이트 레이신 극단: 텔아비브에 소재한 이 극단은 이스라엘 작품과 번안된 해외 현대극을<br />

공연하는 레퍼토리 극단이다.<br />

아랍 극단: 성인 대상의 전문 아랍어 극단으로, 여러 아랍국가의 오리지널 작품과 번안된<br />

현대극을 상연한다.<br />

베이트 하게펜 극단: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아랍어 극단으로, 오리지널 작<br />

품과 현대극, 해외작 등을 상연한다.


254<br />

칸 극단: 예루살렘에 있는 유일한 레퍼토리 극단으로, 수백 년 된 터키 식 호텔을 개조한<br />

건물에 자리잡은 독특한 공연장에서 현대극과 고전극을 함께 공연한다.<br />

게셰르 극단: 구 소련 연방에서 이주해온 신규 이민자들에게 예술적 표현 수단을 제공하기<br />

위해 1991년에 설립되었으며, 초기에는 수준 높은 러시아어 작품들을 선보였다. 공연 작들<br />

이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찬사를 얻은 뒤 지금은 히브리어 연극을 올리며 주류 이스라엘 연<br />

극계로 진입했다. 이 극단은 또한 전세계 유명 페스티벌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해 공연을 펼<br />

쳤다.<br />

클리파 극단: 무용가이자 연출가인 이디트 헤르만과 배우이자 음악가인 드미트리 티울파노<br />

프(러시아)가 1995년에 창립한 극단이다. 이곳의 배우들은 연극, 무용, 디자인, 음악과 같은<br />

예술 영역을 함께 엮어서 보여준다. 작품 대부분이 무언극인 이 극단은 일년에 2~4개의 신<br />

작을 선보인다. 대다수 작품이 제한된 기간 동안 공연되며, 일부는 특별한 장소에서 단 한<br />

번만 공연되기도 한다.<br />

어린이 청소년 극단: 이 극단은 전국의 학교와 문화 센터에서 서로 다른 3개 연령 집단을<br />

위한 연극을 상연한다. 드라마 및 연극 수업을 지도하거나 학교의 특별 워크숍에 지도 강사<br />

를 파견하기도 한다.<br />

아코 페스티벌: 비주류 연극 페스티벌로서, 이곳에서 새롭고 실험적인 이스라엘 작품이 초<br />

연<br />

된다. 실내 공연들의 경합과 야외 및 거리 공연, 해외 초청 공연 등으로 이루어진다.


255<br />

어린이 연극 페스티벌: 하이파에서 개최되는 페스티벌로, 아동용 신작을 공연하고 경합을<br />

개최하며, 해외 초청 공연도 상연한다.<br />

기차 극단: 1981년에 예루살렘에 창립된 인형 극단이다. 이 극단은 어린 아동들을 위하여<br />

완전한 공연에서 다채로운 이야기 극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과 가족 전체를 위한 길거리 페<br />

스티벌을 제공한다. 또한 매년 국제 인형극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br />

연기, 연출, 관련 무대 직종에 대한 교육 과정은 텔아비브 대학,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 베<br />

이트-쯔비 공연예술 학교(라마트 간), 니산 나티브 연기 스튜디오(텔아비브와 예루살렘), 키<br />

부츠 세미나의 드라마 스쿨에서 제공하고 있다.<br />

F. 스클라<br />

예루살렘 국제 인형극 페스티벌 포스터 • 나본 아트 제공<br />

연예 오락


256<br />

‗대중‘ 오락이라는 개념은 1940년대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히즈바트론, 마타테, 바짤 야로크<br />

등의 극단과 함께 처음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이것이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 다양한 군부<br />

대 소속 공연단들이 생겨나면서부터였다. 군복무 중에 커리어를 시작한 이스라엘 유명 연예<br />

인으로는 하임 토폴, 시 헤이만, 미리 알로니, 도리트 루베니, 야르데나 아라지 등이 있다.<br />

이 시기에 이스라엘 코미디 그룹 하가샤시 하히베르가 유명세를 떨쳤고, 후에 이스라엘의<br />

클래식 코미디가 된 작품들을 수십 년간 공연하며 마침내 이스라엘 예술 부문의 평생 공로<br />

상을 수상했다.<br />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대중 오락의 주요 통로이기는 하지만, 코미디언과 가수, 음악가, 밴드,<br />

그룹들이 펼치는 라이브 공연도 전국 각지에서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br />

리타 • 이스라엘 공보부/ A. 벤게르숌<br />

부카라 앙상블 • Y. 로에프 게르숌<br />

일부 가수들은 스타의 지위에 올랐으며, 그 예로는 아릭 아인슈타인, 슐로모 아르치, 마티<br />

카스피, 리타, 다나 인터내셔널, 코린 알랄, 하바 알베르슈타인, 샬롬 하노크, 예후디트 라비<br />

츠 등이 있다. 티팩스, 마시나, 아트라프, 에트닉스, 프렌즈 오브 나타샤, 베이트 하부보트<br />

등의 그룹도 스타로서 인기를 끌었다. 두두 피셔, 고( 故 ) 오프라 하자, 라미 클라인슈타인,


257<br />

아비브 게펜, 다비드 브로자, 노아(아히노암 니니)와 같은 일부 아티스트들은 해외에서도 유<br />

명세를 떨쳤다. 1998년에 이스라엘 성전환 가수 다나 인터내셔널은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br />

서 우승하면서 세계적 스타가 되었다. 그녀의 노래 ―디바‖는 그 후 최고의 유로비전 노래<br />

중 14위로 선정되었다. 최근 그녀는 자신의 11번째 앨범 ―하콜 제 레토바(다 잘될 거야)‖를<br />

발표했다.<br />

―레미제라블‖과 ―사운드 오브 뮤직‖ 등 히브리어로 번안된 대형 뮤지컬들이 재공연되어 열<br />

광적 환호를 받았다.<br />

이스라엘 전국민 사이에서 갈수록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지중해 뮤지컬 장르가 있다. 이<br />

것은 주로 아랍과 그리스 지역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장르이며, 보아즈 샤라비, 예후다 폴<br />

리케르, 사리트 하다드, 아비후 메디나, 마르갈리트 짜아나니, 제하바 벤, 오페르 레비와 같<br />

은 가수들이 공연을 펼친다. 신인 가수로는 에얄 골란, 아미르 베나윤, 미리 메시카 등이 있<br />

다.<br />

엘리 야츠판과 아디 아슈케나지와 같은 새로운 세대의 단독 연기 코미디언들도 상당한 팬<br />

층을 거느리기 시작했다.<br />

영화


258<br />

이스라엘 영화산업은 1950년대에 시작된 이래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24번 언덕은 대답하<br />

지 않는다‖나 ―그들은 열 명이었다‖와 같은 이스라엘인들이 제작 및 연출한 최초의 작품들<br />

은 당시 이스라엘 문학처럼 영웅물의 틀에 주조한 것 같은 성격을 띠었다. 일부 최근작들은<br />

이스라엘인들의 과거 경험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영화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br />

과 그 자녀들(길라 알마고르의 ―아비야의 여름‖과 그 속편 ―도밈 나무 아래서‖), 새로운 이<br />

민자들의 힘겨운 생활(하나 아줄라이와 슈무엘 하스파리 연출의 ―슈후르,‖ 레오니드 고리베<br />

츠 연출의 ―레몬을 곁들인 커피‖)과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다. 또 다른 작품들은 현재 이스<br />

라엘 사회현실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아랍의 대결을 다루기도 하고(우리 바르바슈의<br />

―장벽을 넘어‖), 보편적이면서도 다소 동떨어지고 쾌락주의적인 사회의 맥락을 배경으로 하<br />

기도 한다(―사이렌의 노래.‖ ―아그파가 본 세상,‖ ―텔아비브 스토리‖).<br />

말레 텔레비전 영화 예술 학교 제공<br />

지난 5년 동안에도 이스라엘 영화는 새로운 도약을 일궈냈다. 요세프(요시) 세다르의 ―캠프<br />

파이어‖는 아버지의 죽음 후 가족의 원동력을 되살리려고 애쓰는 80년대 예루살렘의 독실<br />

한 시온주의자 가족에 <strong>관한</strong> 이야기이며, 니르 베르그만의 영화제 수상작 ―부러진 날개‖ 역<br />

시 가족을 잃은 이후의 문제들과 그것을 받아들여야 함의 필요성을 다루고 있다. ―세상의 끝<br />

에서 좌회전하라‖는 광야의 이민자 마을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이문화( 異 文 化 ) 간의 우


259<br />

정을 그렸으며, ―아비바, 내 사랑‖은 이스라엘, 상하이, 도쿄에서 10개의 상을 수상한 작품이<br />

다.<br />

또 한 사람 주목할 만한 유명 감독으로 에이탄 폭스가 있다. 폭스의 영화로는 아랍-이스라<br />

엘 분쟁을 배경으로 텔아비브의 현대적 도시 생활을 탐구한 ―버블‖과 이스라엘 방위군 내<br />

동성애적 사랑과 욕망을 그린 ―요시와 야거,‖ ―물 위의 산책‖ 등이 있다. 폭스는 또한 낡고<br />

도 고상한 텔아비브 지역에 사는 환멸에 빠진 이스라엘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인 유명 TV<br />

시리즈 ―플로렌틴‖(1997)을 연출하기도 했다.<br />

2007년에 이스라엘 영화는 해외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상을 수상했다. 요세프 세다르<br />

는 제 1차 레바논 전쟁에 <strong>관한</strong> 영화 ―뷰포트‖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그 외 11개의<br />

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로스 앤젤레스에서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가 선정한 오스카 시<br />

상식의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부문의 해외 후보작 5편에 들기도 했다. 드로르 샤울 감독의<br />

―달콤한 진흙‖은 선댄스 영화제의 월드시네마 극영화 부문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휴가를<br />

떠난 초정통파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다비드 볼라크의 ―나의 아버지, 나의 주인‖은 트리베<br />

카 영화제에서 외국 영화 중 최우수상을 받았고, 소설가 에트가르 케레트와 쉬라 게펜이 연


260<br />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 부문 후보에 오른 ―뷰포트‖의 포스터<br />

• ―뷰포트‖ 제작사 제공


261<br />

말레 텔레비전 영화 예술 학교 제공<br />

출한 ―젤리피시‖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 카메라상을 수상했다. 또 다른 깜짝 수상작으로는<br />

에란 콜리린의 영화 ―악단의 방문‖이 있는데, 한 이집트 경찰 밴드가 이스라엘을 방문했다<br />

가 멤버들이 길을 잃고 이스라엘의 예상치 못한 색다른 측면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br />

영화는 칸에서 국제평론가상, 청소년상,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상 등 3개의 상을<br />

수상했다. 이스라엘 여배우 하나 라슬로는 이스라엘 감독 아모스 기타이의 영화 ―자유 지<br />

대‖에서 맡은 역할로 2005년 제 58회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여<br />

러 영화와 감독들이 최근 몇 년간 국제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받았다<br />

해외에서 성공을 거두는 이스라엘 영화가 많아지고 국내 로케이션 촬영으로 달러를 벌어들<br />

이는 외국 영화와 합작 영화들이 늘어남에 따라 영화 수출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산업통<br />

상노동부 산하 기관인 이스라엘 필름 센터는 국내외 제작사들의 이스라엘 내 영화작업을 진<br />

흥하고, 전문 중개기관 조율에서부터 재정적 인센티브 제공에 이르는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br />

하고 있다.<br />

.예루살렘 시네마테크에서 개최되는 이스라엘 필름 페스티벌과 같은 대규모 행사와 하이파,


262<br />

슈데롯에서 열리는 이와 유사한 행사들, 그리고 해외의 이스라엘 영화제들은 모두 이스라엘<br />

영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br />

최근에 개조한 예루살렘 시네마테크는 수천 편의 영화 필름과 연구 도서관, 감상 홀, 전시<br />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대사관이나 문화 단체, 시민 단체들과의 협력 하에 주<br />

제별로 주기를 정해 정기 상영을 실시하며, 각본가와 감독, 배우들이 함께 참석한다. 1984년<br />

부터는 매년 비경쟁 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이 축제를 통해 우수한 영화와 비디오 작품<br />

다수가 국내에 소개되었다. 성인들에게 제공하는 교육 과정은 참석률이 매우 높으며, 예루<br />

살렘의 어린 학생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은 대중 매체에 대한 비판적 분석 능력을 키워준<br />

다. 텔아비브와 북부 도시 로시 피나에는 시네마테크의 지부가 자리하고 있다. 예술극장의<br />

영화들도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는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으며, 레브 체인은 전국에 걸쳐 친밀한<br />

환경에서 영화를 제공하고 있다.<br />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 있는 스필버그 필름 아르카이브는 유대인 및 이스라엘인들의 생활<br />

과 더불어 유대교를 주제로 한 영화 관련 자료를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이<br />

다. 중앙 시온주의 기록보관소와 함께 히브리 대학이 운영하는 이 자료보관소의 주요 활동<br />

은 유대 영화를 수집, 보존, 분류하고, 전국의 연구자, 영화 및 TV 극작가, 제작자들이 이<br />

자료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263<br />

음악<br />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열정적 아마추어들과 소수의 훈련 받은 전문 음악인들이 교향악단과<br />

합창단, 심지어 오페라단까지 구성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함에 따라 음악은 이스라엘 땅의<br />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적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문적 수준의<br />

음악 활동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수백 명의 음악 교사와<br />

학생, 작곡가, 연주가, 가수, 그리고 수천 명의 음악 애호가들이 유럽의 나치주의의 위협을<br />

피해 이스라엘로 들어온 덕분이다.<br />

폴란드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브로니슬라프 후베르만의 주도로 창단된 팔레스타인 필하모<br />

닉 오케스트라(현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36년 텔아비브에서 아르투로 토스카<br />

니니의 지휘로 첫 연주회를 가졌다. 얼마 안가 이 관현악단은 이스라엘 음악생활의 중심이<br />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제공


264<br />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적으로 뛰어난 오케스트라의 반열에 올랐다. 그 직후에는 한<br />

라디오 오케스트라(현 예루살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창단되었는데, 이들의 연주 중계 방송<br />

은 수만 명의 청취자들을 끌어들였다.<br />

이후 이스라엘 챔버 오케스트라, 브에르셰바 신포니에타와 하이파, 네타냐, 홀론, 라마트 간,<br />

리숀 레찌욘 지역의 오케스트라들, 그리고 전국의 키부츠 회원들로 단원을 구성한 이스라엘<br />

키부츠 오케스트라 등이 추가로 창설되었다.<br />

1980년대 초에 뉴 이스라엘 오페라는 매우 전문적 수준의 공연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몇 년<br />

앞서 최초의 상설 오페라단이 해체된 뒤 다소 식어가던 대중들의 오페라 작품에 대한 열정<br />

을 되살렸다.<br />

1990년대 초반에 이스라엘의 음악 생활은 구 소련 연방에서 1백만이 넘는 유대인이 대거<br />

유입되면서 일대 전환을 맞았다. 이 이주민 중에는 연주가, 가수, 음악 교사 등 전문 음악인<br />

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새로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챔버 오케스트라, 소규모 앙상블이 창<br />

단되고, 전국의 학교, 음악학교, 지역센터의 교육 체계에 재능과 음악적 활력이 활발히 투입<br />

된 데서 이들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265<br />

역시 1930년대에 시작된 실내악의 전통에는 국제적인 찬사를 받은 여러 앙상블과 합창단이<br />

있으며, 이들은 1990년대의 이민 이후 그 범위와 종류를 확장해 나갔다. 두각을 나타낸 단<br />

체로는 레호봇 카메라타, IDF 교육부대 챔버 오케스트라, 라마트 하샤론 카슈타니오트 카메<br />

라타 등이 있다. 많은 대도시와 소도시들이 자체 합창단을 후원하고 있고, 합창음악을 중점<br />

적으로 소개하는 예루살렘 예배의식 음악, 아부 고쉬 교회의 성악, 찜리야 페스티벌 등도<br />

있다.<br />

독주회부터 광범위한 고전 작품을 연주하는 교향악단에 이르는 음악 공연은 가이샤라와 벳<br />

스안에 있는 재건된 로마 원형 경기장과 같은 역사적 장소와 두 개의 대형 콘서트 홀, 즉<br />

텔아비브의 만 오디토리움과 예루살렘의 국제 컨벤션 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좀 더 규모가<br />

작은 공연장으로는 예루살렘 시어터 콤플렉스, 텔아비브의 새로운 공연예술센터, 텔아비브<br />

와 이스라엘 박물관, 그리고 전국의 소도시와 키부츠에 위치한 문화센터 등이 있다. 이스라<br />

엘의 음악회 단골 관객들은 열정적이고 적극적이며, 관객들의 이러한 특징은 유명 초청 음<br />

악인과 세계적인 이스라엘 독주자들에게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br />

는 이스라엘인 연주자로는 핀카스 주커만, 슐로모 민츠, 다니엘 바렌보임, 이츠하크 펄만 등<br />

이 있으며, 이들은 매년 이스라엘 음악계에 참여하고 있다.


266<br />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개최되는 세계적 수준의 음악 행사에는 국제 하프 콘테스트, 아르투르 루빈스<br />

타인 피아노 경연대회가 있다. 엔 게브 키부츠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과 크파르 블룸 키<br />

부츠의 실내악 페스티벌, 에일랏의 홍해 재즈 페스티벌과 같은 지역 음악제들이 안목 높은<br />

청중들을 끌어들이는 한편, 전세계에서 온 단체들이 음악, 연극, 무용을 공연하는 이스라엘<br />

페스티벌은 매년 봄마다 3주간 예루살렘을 문화 도시로 만들어준다.<br />

이스라엘 특유의 음악은 1940년대 중반에 전문적 작곡이 시작되면서 발전해왔다. 러시아와<br />

프랑스의 전통음악, 독일 낭만파와 후기 낭만파의 영향, 그 후 유럽 작곡가들의 강렬한 작<br />

품들이 모두 이스라엘 음악에 각자의 흔적을 남겼지만, 전통적인 동양적 멜로디와 고대 기<br />

도문 영창을 통합시킨 이른바 ‗지중해‘ 양식의 새로운 현대적 이스라엘의 표현방식이 점차<br />

구체적 모습을 드러냈다.<br />

모두 유럽 태생의 이스라엘 제 1세대 작곡가들은 이스라엘로 이주한 뒤 새로운 작풍의 곡<br />

을 쓰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았다. 폴 벤-하임은 확장된 음조를 활용해 신구와 동서를 조화<br />

시킨 후기 표현주의 양식을 만들어냈고, 오에돈 파르토스는 출처가 확실한 민속을 융화하는<br />

과정에서 중요한 작곡 기법을 발견했다. 알렉산더 우리아 보스코비치는 대중적인 표현 양식


267<br />

을 작곡에 사용했고, 요세프 탈은 <strong>이스라엘에</strong> 전자음악 작곡의 기초를 세웠으며, 모르데카<br />

이 세테르는 예멘의 멜로디와 리듬을 자신의 작품에 통합시키는데 집중했다.<br />

대다수가 직간접적으로 1세대 작곡가들의 제자였던 2세대 작곡가들은 히브리어의 자음과<br />

어조, 유대 예배식과 전통과의 연관성, 동구권으로의 통합과 히브리어를 결합시킨 음악적<br />

표현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최근에 활동하는 3세대 작곡가들은 동서의 전통을 결합<br />

시키고 일부 대중음악 장르의 혁신성을 끌어안으면서, 민족적 특징을 지운 국제적 작곡법에<br />

참여하고 음악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극복하고, (예후다 폴리케르의 음악에 나타난 것처럼)<br />

음악 내부의 장벽을 깨부수려는 열망을 표출하고 있다.<br />

재능 있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많은 음악학교에 입학하거나 수백 명의 개인 강사에게 교습<br />

을 받으며 음악 교육을 시작한다. 이 중 다수는 국내의 청소년 오케스트라에 입단하여 경험<br />

을 쌓기도 한다.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 있는 음악과 무용 학교의 학위과정에서는 더욱 심<br />

화된 학습을 제공한다. 성악가와 연주가, 실내악단을 위한 마스터 클래스는 예루살렘 음악<br />

센터와 여러 학교에서 이스라엘을 방문한 국제적 음악가들이 종종 지도를 맡는다.<br />

고등교육 기관에서의 음악 교육과 연구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음


268<br />

악학 강좌가 설립되면서 1960년대 초에 그 막이 열렸다. 이후 텔아비브 대학과 바르 일란<br />

대학에도 음악학과가 추가로 신설되었다. 2개의 전공 과정이 제공되었는데, 유대 음악, 그리<br />

고 동구/세파르디 사회의 음악에 특히 중점을 둔 이스라엘의 다양한 소수민족 집단의 음악<br />

이 그것이다.<br />

초창기 개척자들은 <strong>이스라엘에</strong> 건너올 때 그들의 노래도 함께 가지고 들어와 원래 가사를<br />

히브리어로 번안하거나 간직해온 선율에 새로운 히브리 가사를 붙였다. 그 후 계속된 이민<br />

행렬이 들여온 음악 양식의 요소들을 멜로디에 통합시켜 수천 개의 곡들이 작곡되었다. 아<br />

랍과 예멘의 전통음악에서 현대적 록과 팝 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지닌 멜로<br />

디에 때로는 성서나 전통적 텍스트를, 때로는 이스라엘 시인과 작사가들의 현대적 시구를<br />

붙여 완성하였다.<br />

전형적인 히브리 노래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스라엘인들은 다양한 주제와<br />

스타일 하에 히브리어로 쓰여진 노래들과 쉬르 히브리(‗히브리 노래‘)를 구분하고 있다. 히<br />

브리 노래의 노랫말은 이스라엘의 소리와 가치, 감정을 전달하며, 멜로디는 슬라브권의 영<br />

향이 강하게 묻어난다.<br />

이 노래들은 지난 세기 동안 유대민족의 국가적 삶에 일어난 커다란 역사적 사건과 함께하


269<br />

며 이스라엘의 꿈과 고통, 희망을 기록해왔다. 이들은 모든 민요가 그러하듯 보편적인 정서<br />

를 표현하는 동시에 국가와 국토에 대한 사랑과 같은 이스라엘의 정서도 뚜렷이 표현하고<br />

있다. 이는 국민 누구나 다 아는 노래이며, 이스라엘 문화 유산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br />

있다.<br />

이스라엘인들은 건국 이전의 노래부터 최근 만들어진 노래까지 자국 노래들을 즐겨 부른다.<br />

공공 홀과 가정에서, 키부츠의 공동식당과 지역사회 센터에서, 산책을 하면서 또는 모닥불<br />

주위에서 종종 노래 지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피아노, 아코디언, 기타의 반주에 맞춰서<br />

노래를 부른다. 이러한 노래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초기 개척시대와 독립을 위한 투쟁, 전쟁<br />

의 승리, 먼저 간 친구, 또 다시 찾아오는 희망과 사랑의 순간에 대한 향수와 애국심이 불<br />

러일으킨 일체감을 맛볼 수 있다.<br />

현대 음악<br />

이스라엘의 현대음악은 매우 다양하고 때로는 극히 대담하다. 가령 힙합 밴드 하다그 나하<br />

지금까지의 노래<br />

눈물과 웃음<br />

그들의 목소리, 시대의 스타들.<br />

태양과 바다<br />

빵, 세계,<br />

씁쓸함과 달콤함<br />

그리고 존재했던 그 모든<br />

우리가 떠나 보내야 했던 것들<br />

지금 그 노래 안에 살고 있네<br />

작사: 나탄 요나탄<br />

평화의 노래<br />

태양이 떠올라<br />

아침 햇살을 비추게 하자,<br />

가장 순수한 기도도<br />

우리를 되돌려 보내지 않으리니.<br />

촛불이 꺼져버리고


270<br />

먼지 속에 묻혀버린 이,<br />

쓰라린 눈물도 그를 깨우지 못하고<br />

그를 다시 데려오지 못하리.<br />

그 누구도 우리를<br />

어두운 죽음의 심연에서 되돌리지 않을 것이니,<br />

여기서는 승리의 환호도<br />

찬양의 노래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br />

후렴:<br />

그러니 평화의 노래만을 부르자,<br />

기도를 속삭이지 말고.<br />

평화의 노래를 부르자<br />

큰 함성과 함께.<br />

태양이 꽃 사이를<br />

관통하게 하자,<br />

뒤돌아보지 말고<br />

떠난 이에게서 벗어나자.<br />

희망으로 눈을 뜨자,<br />

총을 겨냥하지 말고.<br />

사랑의 노래를 부르자,<br />

전쟁의 노래가 아닌.<br />

그날이 올 거라 말하지 말고,<br />

그날을 쟁취하자,<br />

이것은 꿈이 아니니까,<br />

그리고 모든 도시의 광장에서,<br />

평화만을 소리치자.<br />

작사: 야코브 로트블리트/ 작곡: 야이르 로젠블룸<br />

시는 음악을 이용해 정치적 냉소를 표현한다. 그들의 가장 유명한 히트곡 중 하나인 ―시라<br />

트 하스티커(영어로 ―스티커 송‖)는 이스라엘 소설가 다비드 그로스만과 함께 가사작업을<br />

했다. 이 곡의 가사는 이스라엘의 자동차에 붙이는 광고 스티커들에서 볼 수 있는 슬로건들


271<br />

을 합쳐놓은 것이다. 대립되는 정치적 슬로건들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정력적이고 아이러<br />

니컬하며 때로는 부조리한 이스라엘인의 삶의 초상을 표현하고 있다.<br />

이단 레이칼 프로젝트와 같은 앙상블들은 에티오피아의 음악적 유산에 중동의 영혼과 예배<br />

식의 영향을 접목시켰다. 티팩스, 마시나, 크니시야트 하세켈 등의 밴드와 솔로 아티스트 에<br />

후드 바나이, 슐로모 아르치, 사리트 하다드 등은 모두 이스라엘 주류 음악계의 베테랑들임<br />

에도 지금까지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br />

이스라엘 대중음악계의 신인들 중 다수는 TV 프로그램 코카브 놀라드(스타 탄생)를 통해 등<br />

장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의 음악 쇼 ‗아메리칸 아이돌‘의 이스라엘 버전이라고 할 수 있<br />

다. 니네트 타옙, 하렐 모얄, 예후다 사도 등이 이 인기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커<br />

리어를 시작한 대표주자이다. 2007년 우승자는 보아즈 마우다였으며, 그의 음악에서는 예멘<br />

계 이스라엘 가정의 전통을 찾아볼 수 있다.


272<br />

무용<br />

키부츠 현대 무용단 제공<br />

유대인들의 공동체적, 종교적 삶에서 춤은 성서 시대부터 기쁨과 슬픔의 표현으로 여겨졌으<br />

며, 오늘날에는 종교, 국가, 지역사회, 가정의 축하의식에서 빠질 수 없는 일부가 되고 있다.<br />

현대 무용은 두 가지 경로로 발전해왔다. 첫째는 초기 정착민들이 조상의 고국을 재건하는<br />

과정에 함께한 민속 무용이 발전한 형태이고, 둘째는 전문 안무가가 창작하고 훈련된 무용<br />

수가 공연하는 무대 작품으로 이어진 예술 무용의 구축이다.<br />

예술의 한 형태로서의 무용은 1920년대에 유럽의 문화적 중심지에서 새로 이주해온 무용<br />

교사들과 애호가들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건국 후에는 다양한 지향점과 스타일을 기<br />

반으로 한 여러 무용 단체들에 의해 매우 전문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273<br />

텔아비브에 자리잡고 있는 십여 개의 주요 전문 무용단이 국내 전역과 해외에서 다양한 레<br />

퍼토리를 선보이고 있다.<br />

이스라엘 발레단: 이스라엘 발레단은 예술 감독 베르타 얌폴스키와 힐렐 마르크만이 세운<br />

고전 무용 스튜디오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스라엘 유일의 전문 고전 발레단인 이 단체는 얌<br />

폴스키가 창작한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현대적 작품과 조지 발란신을 비롯한 해외 안무가<br />

들의 발레 작품을 공연하고 있다.<br />

키부츠 현대 무용단 (KCDC): 레바논 국경 근처 갈릴리에 있는 가톤 키부츠 멤버 예후디트<br />

아르논이 1970년에 창단한 무용단이다. 아르논은 젊은 아마추어 무용가 집단을 이스라엘 최<br />

고의 무용단 중 하나로 바꿔놓았으며, 이들은 꾸준히 국제적 찬사를 얻고 있다. 오늘날<br />

KCDC는 이 무용단의 예술감독이자 안무가인 라미 베르와 동일시되고 있다.<br />

키부츠 현대 무용단 제공<br />

밧셰바 무용단: 1964년에 마사 그레이엄과 밧셰바 드 로칠드 남작 부인이 창단한 밧셰바 무<br />

용단은 초기에는 그레이엄의 무용기법을 기반으로 했으나 항상 발레 훈련에 큰 역점을 두었<br />

다. 40년이 넘게 활동해온 이 무용단은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이스라엘 문화의 국제 사절


274<br />

이며, 무용수부터 기술 스텝까지 65명의 단원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오하드 나하린이 예술<br />

감독을 맡고 있으며, 샤론 에얄이 상주 안무가로 일하고 있다.<br />

이스라엘의 많은 무용단들이 그러하듯 밧셰바 역시 교육 아젠다를 가지고 있고, 무용을 이<br />

스라엘 사회 전 영역에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역사회 봉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br />

다. 무용단 측에 따르면 밧셰바의 작품은 표현주의적이고 역동적, 혁신적, 감정적, 심미적이<br />

며, 이 모든 특성이 이스라엘의 국가적 에너지를 반영하고 있다.<br />

베르티고: 노아 베르트하임과 아디 샤알이라는 두 무용수가 1992년에 설립하여 성공적인 행<br />

보를 보이고 있는 현대적 무용단으로, 이미 그 작품활동에 대해 국제적으로 서너 개의 상을<br />

수상했다. 레퍼토리의 대부분이 베르트하임의 오리지널 안무와 기타 아티스트들과의 혁신적<br />

인 무용 프로젝트를 담고 있다. 1997년에 설립된 예루살렘의 이 무용 학교는 아마추어와 전<br />

문가들을 위한 고전 발레, 현대 무용, 즉흥 무용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br />

인발 핀토 무용단: 이 무용단의 안무가이자 기획가인 인발 핀토는 국제 무용계의 떠오르는<br />

스타 중 한 사람이다. 전 밧셰바 무용단 단원이었던 그녀는 1990년에 안무를 시작한 후 수<br />

많은 무용상을 수상했다. 핀토는 공동 예술감독 아브샬롬 폴라크와 함께 다수의 무용 작품


275<br />

을 창작했다. 그 중 세계적인 유명작 는 국내외에서 수백 차례 공연되었다.<br />

이스라엘의 현대 무용계는 수많은 소규모 단체와 독립 안무가들로 인해 한층 더 발전을 이<br />

루었으며, 이들의 활동은 전세계 무용 애호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안무가<br />

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야스민 고더는 2001년 뉴욕에서 베시 어워드 안무상을 수상했고 이<br />

스라엘에서도 여러 상을 휩쓸었다. 고더의 무용 언어는 여성의 인체를 바탕으로 하며, 그녀<br />

의 작품 는 전세계에서 공연되었다. 또 다른 떠오르는 스타로는 에마<br />

누엘 가트와 레나나 라즈가 있다.<br />

새롭게 보수된 텔아비브의 네베 쩨데크 지구에 있는 수잔 델랄 무용 연극 센터는 1989년에<br />

문을 연 이래 국내 무용 활동의 구심점이 되어왔다. 역시 텔아비브에 위치한 이스라엘 무용<br />

도서관과 이스라엘 무용 자료보관소는 학문과 연구 센터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무용 관련<br />

서적과 이스라엘 무용 연감을 발간하고 있다. 무용 교육은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 있는 루<br />

빈 음악무용 아카데미의 무용학과와 텔아비브와 브에르셰바에 위치한 바트-도르 스튜디오,<br />

기바타임에 있는 셀마 옐린 학교를 비롯해 전국의 여러 무용 학교와 워크숍에서 제공하고<br />

있다.<br />

동작 교육 분야에서 이스라엘이 기여한 바는 전세계에서 교육되고 있는 모셰 펠덴크라이스


276<br />

요법과 춤과 동작을 문서에 기록하는 방법으로 가장 유명한 3가지 중 하나인 에슈콜 바크<br />

만 동작 기보법 등이 있다.<br />

민속 무용<br />

이스라엘 민속 무용은 세계 각지에서 흘러 들어온 비유대적 민속무용과 유대 민속무용이 혼<br />

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여타 국가에서는 민속 무용이 지방의 옛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육성<br />

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민속 무용은 1940년 이래로 역사적, 현대적 원천과 성서적 의미 및<br />

현대적 무용 스타일을 기반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예술 형태이다.<br />

초기 개척자들은 출신 지방의 고유 춤을 함께 들여왔고, 이 춤들은 새로운 환경에 맞게 변<br />

형되었다. 그 중 루마니아의 민속춤 호라는 이스라엘 땅에 구축된 새로운 삶을 정형화시켰<br />

다. 이 춤의 닫힌 원 형태는 모든 참가자들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고, 단순한 동작으로<br />

모두가 참여할 수 있게 했으며, 서로 연결된 팔 동작은 새로운 이념을 상징했다.<br />

이후 무용에 대한 열정이 널리 퍼져감에 따라 북미 재즈와 남미 리듬에서부터 지중해 연안<br />

국가들의 전형적인 리듬에 이르는 춤의 요소들을 비롯해 아랍 민속춤 데브카의 특징까지 포<br />

괄하여 이스라엘 대중 음악에 맞춰 추는 다양한 특징의 민속춤 장르가 탄생하게 되었다.


277<br />

민속 무용은 개인적 참여와 무대 공연 모두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민속 무용에 대한 대중<br />

의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전문적인 무용 지도자가 등장했고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오락적 수<br />

단으로서 무용 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88년부터 3일간의 국제 민속 무용 페<br />

스티벌이 중부 갈릴리의 도시 카르미엘에서 매년 열리고 있으며, 국내 및 세계 각지의 무용<br />

단들이 이 행사에 참가한다.<br />

이스라엘 민속무용과 나란히 발전하는 동시에 영향을 준 것은 다양한 소수민족 집단의 전통<br />

무용으로서, 이들은 ‗이산민 되 모으기‘와 이스라엘 사회의 다원적 특성을 모두 반영한다.<br />

이러한 민속무용들은 예멘, 쿠르디스탄, 북아프리카, 인도, 그루지야, 부카라, 에티오피아의<br />

춤을 전문으로 하는 여러 민속 무용단과 아랍, 드루즈, 체르케스 무용을 공연하는 앙상블들<br />

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278<br />

문학<br />

이스라엘 땅의 현대적 히브리어 산문은 이주민 작가들에 의해 처음으로 쓰여졌다. 비록 그<br />

들의 뿌리는 동유럽 유대인 사회의 세계와 전통에 있었지만 그 작품들은 ―건설하고 그로 인<br />

해 건설된다‖는 시온주의 모토처럼 그들이 들어온 이스라엘 땅에서의 창조적 성취를 주로<br />

다루었다. 히브리 산문을 20세기 안으로 끌어들인 요세프 하임 브레너(1881~1921)와 슈무<br />

엘 요세프 아그논(1888~1970)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현대적 히브리 문학의 아버지로 여겨<br />

지고 있다.<br />

현실을 포착하려고 시도한 브레너는 히브리 구어의 랍비식 어투와 중세 풍의 형식을 선호하<br />

였으며, 새로운 관용어를 만들고 극적인 구문론을 차용하여 생생한 회화적 효과를 냈다. 브<br />

레너의 작품의 중심에는 자신이 태어난 유럽 국가와는 전혀 다른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발<br />

판을 마련하려는 개척자들의 육체적 투쟁과 그보다 결코 더 쉽지 않은 이스라엘 땅에서 유<br />

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에 대해 작가가 느끼는 동질감이 자리잡고 있다.


279<br />

히브리어 자모<br />

히브리 도서 주간에는 전국의 광장과 공원들이 인파로 북적대는 도서 시장으로 변한다 • 알<br />

바트로스


280<br />

아그논은 그의 작품에 좀 더 현대적인 형식의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쪽을 선택했다. 유대 전<br />

통에 익숙한 그의 지식과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 문학의 영향이 더해져 현대사회의 주요<br />

정신적 문제와 전통적 생활방식의 붕괴, 믿음의 상실과 그에 따른 정체성의 상실을 다룬 소<br />

설의 한 형태가 탄생했다. 정통파 유대교도이자 직관과 심리학적 통찰을 지닌 작가였던 아<br />

그논은 인간 정신의 어둡고 불합리한 측면에 대한 흥미와 믿음이 있는 유대인과 믿음이 없<br />

는 유대인들의 내적 불확실성에 대한 일체감을 표현했다. 작품의 많은 부분이 전쟁과. 홀로<br />

코스트의 영향을 받은 아그논이 묘사한 현실은 비극적이고 때로는 기괴한 분위기를 발산했<br />

으며, 독실한 유대교도들의 세계가 그들의 온갖 열정과 긴장과 함께 드러나 있다. 1966년에<br />

아그논은 (넬리 작스와 함께) 노벨 문학상을 공동 수상했다<br />

1940년대와 50년대에 작품을 펴내기 시작한 종종 ‗독립전쟁 세대‘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태<br />

생 작가들은 전임자들과는 다른 사고방식과 문화적 배경을 작품에 담았는데, 그 주된 원인<br />

은 그들의 모국어가 히브리어이고 그들의 삶의 경험이 전적으로 이스라엘 땅에 뿌리를 두고<br />

있다는 점이었다. S. 이자르, 모셰 샤미르, 하노크 바르토브, 하임 구리, 비냐민 타무즈 같은<br />

작가들은 사회와 국가에 대한 현신과 개인주의 사이에서 극도로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고,<br />

국내와 해외의 영향을 한데 섞어 주로 과장된 형식으로 하나의 사회적 <strong>사실</strong>주의 모델을 제<br />

시했다.<br />

1960년대 초반, A.B. 여호슈아, 아모스 오즈, 요람 카니우크, 야콥 샤브타이 등의 영향력 있<br />

는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히브리 산문 작법을 탐구하면서 관념적 패턴에서 벗어나 개인적<br />

세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후 20년간은 이야기 형식과 심리적 <strong>사실</strong>주의, 우화, 상징주의<br />

등의 다양한 산문 작법,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치 및 사회적 관습에 대한 고찰과 회의주의를.


281<br />

이용한 실험이 현대적 글쓰기에 주로 등장했다<br />

스튜디오 라미 & 재키 제공<br />

1980년대와 90년대는 출판 서적의 수가 극적으로 증가하며 문학 활동이 집중적으로 이루어


282<br />

진 시기였다. 그와 동시에 몇몇 이스라엘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특히 눈에<br />

띄는 이들로 오즈, 여호슈아, 카니우크, 아하론 아펠펠트, 다비드 샤하르, 다비드 그로스만,<br />

메이르 샬레브 등이 있다. 3세대에 걸친 동시대 작가들이 쓴 이 시기 산문의 특징은 문학이<br />

독자들로 하여금 각자 개인으로서나 환경의 일부로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br />

라는 믿음이었다. 이들 작가 중 많은 이들은 이스라엘의 현대적 삶의 정치적, 도덕적 딜레<br />

마도 다루었는데, 특히 오즈, 그로스만, 샬레브 등이 대표적이다.<br />

유럽에서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와<br />

참여를 통합하는 관점 내에서만 논의될 수 있는 근본적 질문들을 다루기 위한 새로운 표현<br />

방식이 형성되었다(아펠펠트, 그로스만, 여호슈아 케나즈, 알렉산더 세네드와 요나트 세네드,<br />

나바 세멜 등). 이주민 가정 내에 들이닥친 홀로코스트의 여파를 바라보는 어린 소년 모미<br />

크의 관점으로 부분적으로 설명되는 그로스만의 이 아마도 가장 잘 알<br />

려진 예가 될 것이다.<br />

이전에 다루어지지 않았던 주제들도 소개되었다. 아랍인 촌락 환경(아랍계 기독교인 작가<br />

안톤 샤마스와 이스라엘 아랍인 언론인이자 작가인 사예드 카슈아), 의도적으로 현대사회와<br />

단절된 생활을 하는 초정통파 유대교도들의 세계(요슬 비르슈타인), 예루살렘의 하시드 법정<br />

속의 삶의 방식(하임 베르), 세속적 이념들이 붕괴되고 종교적 근본주의가 힘을 얻는 시기에<br />

살아가는 비신앙인의 존재를 다루려는 시도(이츠하크 오르파즈-아우에르바크) 등이 그 예이<br />

다. 스스로가 스파라디로서의 배경을 가진 몇몇 이스라엘 작가들이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중<br />

요한 주제는 아랍 국가 출신의 소외된 신규 이민자 사회의 위치이다(사미 미카엘, 알베르트<br />

수이사, 단 베나야 세리). 그밖에 민족적 삶의 대다수 영역에서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해야<br />

하는 사회의 맥락 안에서 본 민주주의와 정당성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작가들도<br />

있다(이츠하크 벤-네르, 카니우크, 그로스만, 오즈).<br />

주요 여성 작가들 중에도 주목을 끈 이들이 많다. 이들은 일반적인 주제뿐만 아니라 유대<br />

전통 속의 그들의 위치와 시온주의 운동에서 그들의 역할을 자각하고 있는 여성들의 세계도


283<br />

2년마다 열리는 예루살렘 도서 전시회 • Y. 로에프<br />

다루었다(아말리아 카하나-카르몬, 하나 바트-샤하르, 슐라밋 하레벤, 슐라밋 라피드, 루스<br />

알모그, 사비온 리브레히트, 바티야 구르). 라피드와 구르는 탐정소설 장르도 시도하여 이스<br />

라엘과 해외 번역본 모두에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br />

J. 말콤<br />

최근 들어 이스라엘인의 경험에 크게 집중하는 경향을 거부하고 보다 보편적인 추세—주로<br />

동떨어지고 매우 비현실적이며 특이한 성격—를 반영하는 젊은 세대 작가들이 등장했다. 이<br />

러한 작가들 중 일부(예후디트 카찌르, 에트가르 케레트, 오를리 카스텔-블룸, 가디 타웁, 이<br />

리트 리노르, 미라 마겐)는 거의 숭배자에 가까운 팬들을 거느리고 있고, 이들의 신간은 국


284<br />

내에서나 또 일부의 경우에는 해외에서까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점하고 있다. 최근<br />

몇 년 사이에 케레트는 여러 단편집을 내며 유럽 독자들이 선호하는 작가로 확실히 자리매<br />

김했으며, 그의 작품 는 유명 문학상들을 수상했다.<br />

풍부한 히브리어 문학에 더해 산문과 시 양쪽에서 아랍어, 영어, 불어 등 다른 언어로 된<br />

상당한 양의 작품도 출판되고 있다. 구 소련 연방에서 1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이주해온<br />

이래로 이스라엘은 러시아 본국을 제외하고 러시아어 문학 창작의 최대 중심지가 되었다.<br />

지난 몇 년 동안 이스라엘 출판사들은 전자 출판 분야에 대거 뛰어들었다. 광범위한 주제를<br />

아우르고 있는 이스라엘 프로그램들은 세계적으로 판매되고 있다.<br />

아동 문학<br />

국내 고유 작품과 여러 언어로 된 고전의 번역본을 포함하는 아동 문학은 다양한 주제와 산<br />

문 양식을 포괄하며, 어린이용 작품에서 언어에 대한 보다 직접적이고 정교한 접근과 지적<br />

인 내용을 추구하는 세계적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285<br />

스튜디오 라미 & 재키 제공<br />

지난 수년 간 다양한 연령집단을 위한 방대한 양의 아동 문학이 생산되었다. 이들 아동 도<br />

서는 훌륭하게 디자인된 삽화로 차별화되고, 표현이 풍부하고 생생한 언어의 사용과 심리학<br />

적 감수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어 어린 독자들이 적극적인 방식으로 글 속의 내용에 동화될<br />

수 있다.<br />

열린 탐구를 자극하고 독립적 사고를 촉진하는 것이 현대 아동 문학의 기본적인 요소가 되<br />

어 왔다. 사회적, 국가적인 의미를 가진 주제들도 여전히 중요하지만 지금은 더욱 진실되고<br />

개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최근의 몇몇 책들은 다양화된 이스라엘 사회의 스테레오타입<br />

을 없애려는 목표를 가지고 세계 여러 곳에서 온 유대인 이민을 다루는가 하면 또 어떤 책<br />

들은 지난 세기에 걸쳐 이스라엘 땅에서의 유대인의 삶을 재건한 것을 비롯해 국가의 발전


286<br />

에 기여한 유명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내용과 전기를 싣고 있다.<br />

1960년대 후반부터 아동 문학은 어린이들의 세계를 폭넓게 그리기 시작했는데, 죽음, 이혼,<br />

홀 부모 가정, 장애, 사춘기, 그리고 가정과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한 노력 등의<br />

주제가 주로 다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상상의 세계를 다룬 책과 이야기들도 많이 쓰여지면<br />

서 어린 독자들에게 순수한 환상과 오락, 현실도피를 제공했다.<br />

이스라엘 자원봉사자 협회 제공<br />

이스라엘은 또한 성인뿐 아니라 아동용 책을 쓰는 수상 작가의 수가 이례적으로 많다. 그<br />

중 대표적인 작가가 다비드 그로스만(―지그재그 아이,‖ ―벽 위를 걷는 이타마르‖)과 에트가르<br />

케레트(―서커스를 따라가는 아빠‖)이다. 이러한 작품 중 상당수는 성인 소설과 아동 소설의<br />

경계를 흐리게 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아동 서적들은 또한 전세계에서 다양한 언어로 번<br />

역 출판되고 있다.


287<br />

시( 詩 )<br />

성서시대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씌어진 히브리 시는 외부의 영향과 내부의 전통을 구현하<br />

고 있다. 종교적, 민족적 주제를 포괄한 과거의 시는 현대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개인적<br />

경험이라는 주제 또한 담고 있다. 전통적인 시적 표현에서 본격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한 때<br />

는 유럽에서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주고 유대인의 삶을 종교로부터 분리하자는 운<br />

동이 일어난 유대 계몽주의 시기(1781~1881)와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 민족의 삶을 재건할<br />

것을 주장한 시온주의 운동이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였다. 이 시기에 등장<br />

한 주요 시인들은 그들 스스로 20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온 하임 나흐만 비알릭<br />

(1873~1934)과 사울 체르니코프스키(1875~1943)이다.<br />

유대 민족의 문예부흥에 대한 자신의 애착을 반영하고 동유럽에서의 유대인 삶의 가능성을<br />

부정하는 비알릭의 작품에는 유대 역사의 여러 장을 되풀이하는 긴 서사시와 사랑과 자연을<br />

다룬 순수 서정시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종종 ‗국민 시인‘ 또는 ‗히브리 르네상스 시인‘으<br />

로 일컬어지는 비알릭은 이전 작가들의 압도적인 성서적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 언어를<br />

만들어내는 한편, 풍부하고 학구적이지만 동시에 현대적인 어법을 통해 고전적 구조와 명료<br />

한 표현방식을 유지했다. 일부 아주 어린 아동들을 대상으로 쓰여지기도 한 그의 시들은 여<br />

러 세대에 걸쳐 이스라엘 학생들에 의해 암송되고 있다.


288<br />

서정시와 극적 서사시, 연가, 풍자시를 쓴 체르니코프스키는 자연과 미에 대한 고양된 의식<br />

뿐 아니라 개인적 긍지와 위엄의 기상을 주입함으로써 유대 사회를 교정하고자 했다. 랍비<br />

히브리어에 대한 호감을 표현한 그의 언어 감각은 성서의 영향과 새로 등장한 대화 양식을<br />

통합했던 비알릭의 언어와는 전혀 달랐다. 비알릭과 체르니코프스키 두 사람 모두 고대 유<br />

대 시( 詩 )의 현대적 장르로의 변천 과정을 대표하는 이들이다.<br />

아브라함 슐론스키와 나탄 알터만, 레아 골드버그, 우리 쯔비 그린버그는 그 다음 시인 세<br />

대의 선두 주자들로서 국가 수립 이전의 몇 년과 건국 초기 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


289<br />

라피 에트가 작 포스터 • 작가의 승인 하에 수록<br />

슐론스키는 자신의 작품과 다수의 고전시(특히 러시아 작품) 번역 작업에서 혁신적 언어와<br />

풍부한 심상을 활용했다. 정치적 논평으로 주목 받는 알터만의 작품은 유대 사회의 모든 발<br />

전 단계와 함께했으며, 풍부한 언어와 다양한 시적 형식, 음조와 운, 수사와 은유를 특징으<br />

로 한다. 골드버그는 도시, 자연,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 접촉, 배려를 노래하며 시에서 서정<br />

성의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강렬한 심상과 힘있는 문체를 사용하여 절망과 분노의 시를 쓴<br />

그린버그는 민족주의적 주제와 홀로코스트의 여파를 주로 다루었다. 이들 시인은 최초로 일<br />

상 언어의 리듬을 히브리 시에 도입했다. 그들은 옛 관용어를 되살리고 새로운 관용어를 만


290<br />

들어냈고, 고대 언어에 새로운 탄력성과 풍요로움을 부여했다.<br />

독일의 표현주의와 러시아의 미래주의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 시기의 시는 고전<br />

적 구조와 규칙적 운율을 가진 선율적 경향을 추구했다. 이 시들은 시인의 출생 국가의 인<br />

상 및 풍경과 새 조국의 새로운 광경을 웅장한 문체로 그린 동시에 ‗그곳‘의 추억과 ‗이곳‘<br />

에 뿌리를 내리려는 욕망을 담아 레아 골드버그가 쓴 것처럼 ―두 조국을 가진 고통‖을 표현<br />

했다. 이러한 시들 중 상당수는 노래가 붙여져 이스라엘의 국민적 전승의 핵심적인 부분이<br />

되었다.<br />

히브리권 최초의 주요 여류 시인은 라헬 블루스타인(1890~1931)으로, 간단히 줄여 ―라헬‖로<br />

많이 알려져 있다. 라헬의 작품은 히브리 여성시와 이러한 시에 대한 대중의 기대의 규범적<br />

토대를 세웠다.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서정적이고 간결하며 정서적이고 지적 가식이<br />

없는 개인적 양식은 그녀의 동시대 시인들과 달리아 라비코비치, 마야 베제라노 등 이후 등<br />

장한 시인들의 작품 대다수에서 볼 수 있듯이 폭넓게 확산되었다.<br />

1950년대 중반에는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하는 새로운 시인들이 등장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br />

로 예후다 아미카이, 나탄 자크, 단 파기스, T. 카르미, 다비드 아비단 등이 있다. 억제된 표


291<br />

현, 집단적 경험으로부터의 전반적 후퇴, 현실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 표명, 일상 회화적 양<br />

식을 추구한 이 집단은 주된 시적 영향을 푸쉬킨과 쉴러에서 현대 영미권의 시로 전환시켰<br />

다. 널리 번역된 아미카이의 작품적 특징은 일상 언어의 사용과 반어법, 형이상학적 은유이<br />

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동시대 젊은 시인들이 쓴 대다수의 작품의 특징이 되기도 했는데,<br />

이들 젊은 세대는 관념시의 종말을 선언하며 알터만과 쉴론스키의 고전적 구조와 규칙적 운<br />

율의 전통과 완전히 결별했다. 짜흐의 작품은 일상적 구어체 히브리에서 거의 예배의식에<br />

가까운 음악적 언어의 혁신적 특질을 이끌어내고 있다.<br />

눈을 뜰 때<br />

산 위에 쌓인 눈<br />

산꼭대기의 신전 위에<br />

예루살렘의 위에.<br />

내려와주오 오 예루살렘<br />

내려와 내 아이를 내게 돌려주오.<br />

오라 오 베들레헴<br />

와서 내 아이를 내게 돌려주오.<br />

높은 산이여 오라<br />

바람이여 오라<br />

항구의 홍수여 오라<br />

와서 내 아이를 내게 돌려주오.<br />

그리고 너도, 오 굽은 파피루스여,<br />

개울의 여린 줄기여,<br />

가느다란 사막의 덤불이여,<br />

내 아이를 내게 돌려주오<br />

그때 영혼이 육체로 돌아올지니<br />

눈을 뜰 때.<br />

달리아 라비코비치<br />

번역: 하나 블로크, 하나 크론펠드<br />

오늘날의 히브리 시 분야는 20대의 작가들이 중년 시인들과 나란히 활동하는, 여러 세대로<br />

구성된 다성적 체계를 보인다. 중견 세대의 대표주자는 메이르 비젤티어인데, 그의 산문체


292<br />

적이고 속어적, 직설적 시어는 모든 낭만주의를 거부하고, 텔아비브의 인상을 현실의 상징<br />

으로 격상시킨다. 또한, 야이르 호로비츠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고<br />

있는 자의 조용한 슬픔을 절제된 시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요나 봘라크는 원형적, 종교적<br />

주제와 프로이트의 상징, 때로 야수적인 관능, 율동적 반복, 길게 연속되는 연상 등을 이용<br />

하여 구어체의 풍자적 어조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 외 주요 현대 시인으로는 아셰르 레이크,<br />

아리에 시반, 로니 소마크, 모셰 도르 등이 있다.<br />

가장 최근 세대의 시는 개인주의와 혼란을 주된 특징으로 하며, 구어적 어구와 운을 맞추지<br />

않은 자유로운 음조로 쓴 짧은 시를 추구한다. 이러한 작품의 예는 트란실바니아 태생의 시<br />

인 아기 미숄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시는 다수의 충성스러운 독자층을 보<br />

유하고 있으며, 모든 시대를 아우른 시집 중 일부는 인구가 훨씬 많은 서구 국가들의 수준<br />

에 맞먹는 부수가 출판되었다.<br />

시각 예술<br />

20세기 초부터 이스라엘의 시각 예술은 동서의 만남을 비롯해 이스라엘 자체와 국가의 발<br />

전, 여러 도시의 특성, 해외 예술 중심지에서 퍼져 나온 양식적 추세로부터 영향을 받은 창


293<br />

조적 태도를 보여왔다. 이스라엘의 다양한 풍경은 회화, 조각, 사진 및 기타 미술 형식에서<br />

중심 소재가 되고 있다. 언덕의 계단 모양의 단과 산등성이는 특별한 선과 형태의 역학을<br />

만들어내고, 네게브의 구릉지대와 널리 퍼져있는 회 녹색 초목과 선명하고 밝은 빛은 이스<br />

라엘 특유의 색채 효과를 자아내며, 바다와 모래는 표면에 영향을 미친다. 전체적으로, 지역<br />

의 풍경과 관심사, 정치는 이스라엘 미술의 중추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고유성을 이끌어낸<br />

다.<br />

국내에서의 조직적인 미술 활동은 1906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이 해에 보리스 샤츠 교수<br />

(1867~1932)가 불가리아에서 입국하여 1905년 시온주의 총회에서 재능 있는 유대인 젊은이<br />

들이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미술을 공부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승인한 계획에 따라 베짤렐 미술 공예<br />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1910년이 되자 베짤렐 학교는 32개 학과와 500개의 학생 소모임, 그<br />

리고 유대 사회 전체에 그 작품에 대한 준비된 시장을 갖추게 되었다.<br />

예루살렘 베짤렐 미술 디자인 아카데미 제공<br />

화가와 조각가들 외에도 이스라엘의 미술계에는 다수의 재능 있는 공예가들(도예가, 금은<br />

세공인, 직물 공예가, 서예가, 유리 공예가 등)이 있으며, 이 중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유대<br />

의식에 사용된 물건들의 현대적 해석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294<br />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는 계층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 사이에 미술에 대한 열의가 폭넓게 퍼져 있<br />

다. 이스라엘인들은 전시회를—국내의 여러 박물관과 사설 화랑에서 열리는 화가 일인의 회<br />

고전부터 종합적인 단체 전시회까지—관람하고, 사페드와 욥바의 예술가 지구나 엔 호드의<br />

예술인 마을을 자주 방문하고, 국내 미술가들의 작품을 구입함으로써 미술 활동을 촉진 및<br />

지원하고 있다.<br />

회화<br />

유럽의 기법과 중동의 영향을 융합하여 ‗독창적인 유대 미술‘을 창조한다는 목표를 세운 베<br />

짤렐 아카데미의 첫 출범 당시의 예술적 지향점은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비전과 연결된<br />

과거에 대한 낭만화된 인식을 동구 유대인 공동체들과 지방의 베두윈족으로부터 유래된 이<br />

미지들로 묘사한 성서의 장면을 담은 회화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활동한 화가로는 슈무엘<br />

히르젠버그(1865~1908)와 에프라임 릴리엔(1874~1925), 아벨 판(1883~1963) 등이 있다.<br />

예루살렘 베짤렐 미술 디자인 아카데미 제공


295<br />

예루살렘을 향하여, 모르데카이 아르돈 그림 •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M. 아르돈 박사의<br />

승인 하에 수록<br />

예루살렘 구도시의 다윗 성채에서 열린 최초의 대규모 미술 전시회(1921)는 대부분 베짤렐<br />

출신 화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베짤렐의 시대 착오적이고 민족적-동양적인 내러<br />

티브 기법은 얼마 안가 베짤렐 내의 젊은 반대세력과 새로 이주해온 미술가들의 도전에 직<br />

면하게 되었다. 이들 이주 화가들은 그들이 ‗유대‘ 미술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히브리‘ 미술<br />

이라 이름 붙인 것에 적합한 작풍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의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규정하<br />

고 이스라엘을 민족적 부흥의 원천으로 본 그들의 관점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br />

이곳 풍경의 밝은 빛과 생생한 색채에 중점을 둔 중동 환경의 일상적 현실을 묘사했고, 극<br />

히 원색적인 기법을 통해 단순한 아랍 식 생활양식과 같은 색다른 주제에 무게를 실었다.<br />

이러한 작풍은 이스라엘 팔디, 찌오나 타게르, 핀하스 리트비노프스키, 나훔 구트만, 레우벤


296<br />

루빈 등의 그림에 잘 나타나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자 대다수의 일류 화가들이 새롭고<br />

역동적인 도시 텔아비브(1909년 건립)에 자리를 잡았고, 그 후 이곳은 이스라엘 미술활동의<br />

중심지로 이어져오고 있다.<br />

1930년대 미술은 20세기 초반 서구사회의 혁신적 화풍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br />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것은 파리의 아틀리에에서 비롯된 표현주의였다. 모셰 카스텔, 메나<br />

헴 셰미, 아리에 아로크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은 왜곡을 이용함으로써 감정적으로 충만하고<br />

때로 신비주의적인 현실을 그리는 경향을 보였다. 주제는 여전히 국내의 풍광과 이미지를<br />

다루었으나 10년 전의 묘사적 요소들은 점차 사라지고 동양-이슬람 세계는 완전히 사라졌다.<br />

30년대 중반에는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나치주의의 공포로부터 도망쳐온 이주 화가들이 들<br />

어오면서 독일 표현주의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독일 태생 작가로 20여 년 앞서 예루살렘<br />

에 입성한 아나 티코, 레오폴트 크라카우어와 합세한 이 집단에는 헤르만 스트루크, 모르데<br />

카이 아르돈, 야코브 스타인하르트 등의 화가가 속해 있었으며, 이들은 예루살렘의 풍경과<br />

주변을 둘러싼 구릉지대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크게 주력했다. 이 미술가들은 국내 미술의<br />

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특히 베짤렐 미술 아카데미의 학장을 역임한 아르돈과 스타인<br />

하르트가 이 학교에서 발휘한 리더십이 주된 역할을 했고, 이들의 지도 하에 새로운 세대의<br />

미술가들이 성숙한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297<br />

제 2차 세계대전 중 파리와의 단절과 홀로코스트의 정신외상으로 인해 모셰 카스텔, 이츠하<br />

크 단찌거, 아하론 카하나 등 일부 화가들은 새로 부상한 ‗가나안‘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게<br />

되었다. 이 이념은 고대 신화와 이교도적 주제를 부활시켜 이스라엘 땅의 원 거주민들과의<br />

동질성을 구현하고 ‗새로운 히브리 민족‘을 창조하려 한 것이었다. 1948년 독립 전쟁은 나프<br />

탈리 베젬과 아브라함 오페크와 같은 미술가들이 뚜렷한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군사적 화풍<br />

을 채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형성된 가장 중요한 집단은 ‗새로운 지<br />

평선‘이었다. 이 화파는 이스라엘 회화를 지역적 특성과 문학적 연관성으로부터 자유롭게<br />

하고 현대 유럽 미술의 영역 안으로 들여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여기서부터 두 가지 주<br />

요 경향이 형성되었다. 첫째, 이 화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요세프 자리츠키는 확인 가능한<br />

지역 풍경적 요소와 한색 계열의 색조를 특징으로 하는 서정주의적 분위기를 추구했다. 이<br />

러한 화법은 다른 미술가들, 특히 아비그도르 스테마츠키와 예헤즈켈 스트레이크만 등으로<br />

이어졌다. 두 번째 경향은 주로 상징을 바탕으로 하여 기하학주의에서 형식주의까지 아우르<br />

는 양식화된 추상주의였다. 이러한 화풍은 루마니아 태생의 화가 마르셀 얀코의 작품에서<br />

뚜렷이 드러났는데, 파리에서 수학한 얀코는 다다이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새로운 지<br />

평선 화파는 이스라엘 추상 미술의 정통성을 확립시켰을 뿐 아니라 1960년대 초반까지 이<br />

조류의 중심세력으로 자리했다.<br />

1960년대 미술가들은 새로운 지평선 화파의 활동과 다음 10년간 나타난 개인성 추구 사이


298<br />

사페드의 석류나무, 나훔 구트만 그림 • 나훔 구트만 미술관과 메나헴 구트만 교수 제공<br />

의 연결 고리를 제공했다. 텔아비브의 아브니 미술학교 강사였던 스트라이크만과 스테마츠<br />

키는 라피 라비, 아비바 우리, 우리 리프쉬츠, 레아 니켈과 같은 제 2세대 미술가들에게 커<br />

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들 2세대 화가들은 개인적 심상을 찾는 과정에서 해외에서 들어온<br />

표현주의적이고 조형적인 다양한 추상 기법을 아우른 다원주의적 작품으로 서정적 추상주의<br />

의 정제된 화법에 도전했다.<br />

이들은 1950년대 후반에 형성된 ―10인의 모임‖에 속한 미술가들로, 미술계에 팽배한 보편주<br />

의적 경향에 반발하며 이스라엘의 풍경과 이스라엘인 개인을 중심으로 한 미술을 구축하기<br />

위해 애썼다. 새로운 지평선 화파를 둘러싸고 있던 유럽식 엘리트적 분위기와 달리 10인의<br />

모임은 이스라엘 토박이 ‗사브라‘와 팔마흐 세대와 동일시되었다. 60년대 후반에는 ―<strong>사실</strong>


299<br />

주의‖ 화가 오리 레이스만과 이츠하크 맘부시가 이 그룹에 합류했다.<br />

베짤렐에서 특히 주제와 기법과 관련한 아르돈의 영향력은 강렬한 영적 의미로 가득한 형식<br />

의 세계를 발전시킨 아비그도르 아리카의 작품과 홀로코스트와 유대의 전통적 주제를 연상<br />

시키는 상징적 주제로의 회귀를 보인 요슬 베르그너와 사무엘 바크의 초현실적 그림 등에서<br />

뚜렷이 나타났다. 급진적으로 다른 양식을 보여준 야코브 아감은 시각 및 동적 미술의 선구<br />

자이며, 그의 작품은 국내외에서 전시되어 명성을 떨치고 있다.<br />

1970년대 미술의 미니멀리즘적 특성에는 거의 항상 국내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무정형의 단<br />

순한 형식이 포함되지만 래리 아브람슨과 모셰 게르슈니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지배하는<br />

것은 미학이 아니라 관념의 진열이다. 개인주의적 실험이라는 환경 속에 작업하는 1980년대<br />

와 90년대 미술가들은 다양한 재료와 기법, 그리고 히브리 자모와 인간의 스트레스와 공포<br />

의 감정과 같이 다양한 지역적이고 보편적인 요소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를 통합하여 의식의<br />

내용과 이스라엘의 정신이라는 관념을 추구하고 있다. 핀하스 코헨-간, 데가니트 베레쉬트,<br />

가비 클라스메르, 치비 게바, 츠비 골드스타인, 다비드 레엡 등의 작품에 나타난 것과


300<br />

같은 현재의 경향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미술의 정의를 전통적 개념과 재료에서 더욱 확장하<br />

여 토착 문화의 고유한 표현으로, 또 동시대 서양 미술의 역동적인 요소로서 발전시키기 위<br />

해 힘쓰고 있다.<br />

조각<br />

조각 미술은 소수 조각가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노력 덕에 국내에서 크게 번창했다. 아브라<br />

함 멜니코프(텔 하이에 있는 거대한 사자 석상으로 유명함)와 제에브 벤-쯔비가 큐비즘을 도<br />

입했지만, 모셰 지페르, 아하론 프리베르, 바티야 리샨스키로 대표되는 보다 학구적인 조각<br />

유파가 건국 이전에 이 분야를 주도했다.<br />

메스킨(배우), 제브 벤-쯔비 조각 • 미슈칸 레오마누트 미술관 제공, 아인 하로드<br />

1940년대 말에 ‗가나안‘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주목할<br />

만한 작가로 이츠하크 단찌거가 있다. 적색 누비아 사암으로 조각한 이방인 대수렵가 니므<br />

롯의 형상은 중동의 조각과 인간의 육체에 대한 현대적 개념 사이의 통합을 창조하려는 시<br />

도인 반면, 그의 양( 羊 ) 조각을 구성하는 형태들은 사막의 돌과 수로, 베두윈족의 천막과 닮<br />

은 꼴이다. 1950년대의 조각은 점차 추상화되면서 새로운 재료와 큰 규모를 사용했는데, 이


301<br />

는 조각 재료로 철과 내후성 강판이 새롭게 도입된 데 일부 기인한 바도 있다.<br />

이스라엘의 여러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에게 유형의 기념물을 제공하고자 한 열망은 1960년<br />

대부터 조각에 새로운 박차를 가했고, 주로 비구상적 작품으로 이루어진 많은 기념물들이<br />

이스라엘의 풍경 속에 배치되었다. 이 장르는 아크집에 있는 예히엘 셰미의 용접된 강철로<br />

제작한 해군 기념비로 대표되는데, 이 작품은 자연의 무자비함과 인간의 폭력적, 파괴적 성<br />

향을 다루고 있다. 또 다른 대표작인 다니 카라반의 ―네게브 여단 기념비‖는 브에르셰바 외<br />

곽에 위치해 있으며 사막의 전쟁이 지닌 특별한 성격을 환기시킨다.<br />

전반적으로 프랑스 학파의 영향과 특히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광범위한 재료를 활용하<br />

는 동시대 개념미술 작가들은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 태도를 표현하기<br />

위해 설치물과 환경 조각을 창작하고 있다. 형태와 상징의 강력한 움직임을 통합한, 논쟁의<br />

중심에 있는 이스라엘상 수상 작가 이갈 투마르킨의 작품들은 기하학적이고 조형적인 추상<br />

형태를 통해 전쟁에 대한 항의를 표현하고 있으며, 기하학적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사조는<br />

특히 메나셰 카디슈만의 지속적인 양( 羊 )의 이미지 사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카디슈만의<br />

시도는 성서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친 이야기와 무기력한 희생자를 상징하는 개인적 신화 속<br />

백색 광장, 다니 카라반 조각 • 알바트로스


302<br />

에 들어있는 양의 흔적을 일깨운다.<br />

몇몇 이스라엘 조각가들은 국제적인 인지를 얻기도 했는데, 투마르킨, 카라반, 코소 엘룰,<br />

이스라엘 하다니 등이 대표적 작가이다. 이들의 작품은 해외의 공공 및 민간 시설에서 만나<br />

볼 수 있다.<br />

사진<br />

오늘날 이스라엘의 예술 사진은 개인적 영역—삶과 죽음, 예술과 환상에 대한 질문을 탐구<br />

—과 국가적/정치적 영역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그 주된 특징은 친밀감, 억제, 자아에의 몰<br />

두이며, 이는 사진 예술의 초기 발전 단계에 지배적이었던 낭만적이고 정보 제공적 스타일<br />

에 대한 반발인 동시에 그로부터의 성장이다. 19세기 중반에 이스라엘의 국내 사진은 주로<br />

사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중심이 되었으며, 성지 순례자와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으로 팔<br />

기 위해 성지(주로 기독교 성지)를 담는데 집중했다.<br />

1880년부터 사진작가들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 내 유대인 사회의 발전을 기록하기 시작<br />

했다. 이들은 현대적, 비종교적 이념에 대한 지향으로, 또는 그들의 사진을 유대 민족 기금<br />

과 같은 특정 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사용한 의뢰인의 요청으로, 흙을 일구고 도시와 마을을<br />

건설하는 개척자들의 모습을 웅장한 렌즈로 카메라에 담았다.<br />

초창기 이스라엘의 발전 양상은 재능 있는 여러 보도 사진가들에 의해 충실히 기록되었다.


303<br />

이들 중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작가로는 팀 기달, 다비드 루빙게르, 베르너 브라운, 보<br />

리스 카르미, 제브 라도반, 다비드 해리스, 미카 바르 암 등이 있다. ‗자료로서의 사진‘과 ‗예<br />

술 사진‘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들로는 인물 사진에 집중하는 알리자 우<br />

르박과 자연을 집중적으로 담는 네일 폴베르그, 도론 호르비츠, 샤이 기노트, 전문 수중 사<br />

진가 다비드 다롬, 항공 사진 전문 팀인 두비 탈과 모니 하라마티 등이 있다.<br />

사진 작품을 전시하는 몇몇 주요 장소도 <strong>이스라엘에</strong>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br />

인 곳은 엔 하로드 키부츠에 있는 미슈칸 레오마누트의 사진 비엔날레와 북부 갈릴리의 텔<br />

하이에 위치한 사진 박물관이다.<br />

페시 기르쉬<br />

예루살렘 베짤렐 미술 디자인 아카데미 제공<br />

순수 예술 매체로서의 사진이 정통 예술 형식이 됨에 따라 최근 몇 년간 국내외 갤러리와<br />

미술관, 큐레이터, 수집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다수의 창의적인 사진 작가들이 등<br />

장했다. 이러한 창조적 작가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이는 아디 네스(1966년생)이다. 쿠르


304<br />

디스탄과 이란에서 온 이민 가정 출신으로 키리얏 갓에서 태어난 네스는 1990년대에 작품<br />

‗군인들‘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 연작 시리즈는 동성애적이고 양면적이며 통찰로 가득<br />

한 맥락 속에서 민족적 정체성, 특히 이스라엘 남성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탐색했다. 성<br />

서의 인물을 데려와 고통스러운 현대적 배경(노숙자, 극빈자)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재창<br />

조한 그의 작품 ‗성서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회가 사회주의적 가치에서 현대 자본주의적 삶<br />

의 방식으로 전환된 모습을 다루고 있다. 최근 그의 작품 무제(최후의 만찬)가 소더비의 연<br />

례 예술품 경매에서 26만 4천 달러에 판매된 일은 이스라엘 예술에 대한 세계적 인식의 전<br />

환점이 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br />

배리 프리들렌더의 사진 작품은 수십 장, 때로는 수백 장의 사진을 완벽하게 이어 붙여 놀<br />

라울 정도의 정확성과 명료함, 원경을 지닌 하나의 이미지로 탄생시킨 것이다. 그의 2007년<br />

사진전 ‗장소와 시간‘은 현대 이스라엘의 상황을 탐구한 최근작들, 즉 동 예루살렘의 한 카<br />

페 안에 모인 남성들의 모임, 연례 성지 순례에 나선 독실한 하레디 유대인들, 가자 지구에<br />

서 강제퇴거 당하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을 담은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이 작품전은 텔아비브<br />

미술관에서 처음 공개된 후 계속해서 뉴욕 현대 미술관으로 장소를 옮겨 전시되었으며, 이<br />

것은 이 미술관에서 열린 최초의 이스라엘 작가 개인전이었다.


305<br />

박물관<br />

국내 각지의 2백여 개 박물관은 매년 수백만 명의 방문객을 받고 있다. 대도시와 소도시,<br />

키부츠에 위치한 크고 작은 이 박물관들은 고고학과 민족학, 지역사, 고대와 현대 예술, 소<br />

박하거나 정교한 공예품들의 보물 창고이다.<br />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1965년 설립): 이스라엘의 국립 박물관으로 건립된 이곳은 몇<br />

개의 주요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 베짤렐 미술품 박물관의 소장품, 유대 문헌과 민족학,<br />

다양한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를 대표하는 전시품, 회화 진열관, 시대별 전시실, 아프리카,<br />

북남미, 오세아니아와 극동지역에서 온 포괄적으로 선별된 미술품, 2) 선사시대부터 15세기<br />

까지의 인공 유물을 전시한 고고학 부속건물, 3) 60점 이상의 작품이 있는 조각 정원, 4) 사<br />

해 두루마리 등 성서 희귀본을 보<strong>관한</strong> 성서의 전당, 5) 갤러리, 교실, 워크숍으로 구성되어<br />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제공


306<br />

있고 방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갖춘 청소년 건물, 6) 지역의 유물 컬렉션을 소장한 동 예루살<br />

렘 록펠러 박물관, 7) 아랍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동 예루살렘의 팔레이 아<br />

트 센터, 8) 예루살렘 중심부에 위치한 100년 된 대저택 내에 자리잡은 미술관이자 유명 카<br />

페인 티코 하우스 등으로 구성된다. 광범위하고 인상적인 컬렉션을 전시하는 임시 전시회가<br />

정기적으로 열리며, 강의, 워크숍, 영화부터 실내악 공연과 미술 교실에 이르는 다양한 활동<br />

이 개최된다.<br />

이스라엘 박물관은 향후 몇 년간 8천만 달러의 예산으로 보수공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여러<br />

해에 걸친 이 사업으로 8만 평방피트 규모의 새로운 건물이 추가되며, 20만 평방피트의 갤<br />

러리 공간은 재정비를 거쳐 새롭게 확장된다. 박물관 측은 사업 완공 시점을 창립 45주년에<br />

맞춘 2010년 5월로 예상하고 있다.<br />

텔아비브 미술관 (1932년 설립): 1971년에 현재 건물을 개장한 텔아비브 미술관은 특히 이<br />

스라엘 미술을 중심으로 한 고전과 현대 미술의 포괄적 컬렉션을 갖춘 중앙 갤러리, 청소년<br />

부속건물, 독주회와 실내악 공연, 예술 영화가 정기적으로 상연되는 오디토리움, 임시 전시<br />

를 여는 여러 홀로 이루어져 있다. 헬레나 루빈스타인 현대미술 파빌리온 역시 이곳의 후원<br />

하에 있다.


307<br />

미슈칸 레오마눗 (―예술의 전당‖ 1934년 설립): 북부의 엔 하로드 키부츠에 있는 국내 최초<br />

의 농촌 박물관이자 최초의 키부츠 운동 미술관인 이곳은 유대 미술, 조각, 전세계 민속 예<br />

술품의 방대한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특별 임시 전시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교육 사업과<br />

예술 연구를 실시하고 있다.<br />

하이파 박물관 (1949년 설립): 이스라엘과 지중해 유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을 전문적<br />

으로 전시하는 고대미술 박물관과 전세계의 미술품(18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을 소장하고<br />

있는 현대미술 박물관(1951년 설립)이 상주해 있다. 그 밖에도 선사 박물관, 국립 해상 박물<br />

관, 티코틴 일본미술 박물관도 하이파 박물관의 후원 하에 운영되고 있으며, 이곳은 작지만<br />

잘 구성된 공간에서 임시 전시와 영구 전시를 모두 열고 있다.<br />

에레츠 이스라엘 박물관 (1953년 설립): 라마트 아비브에 자리잡고 있으며, 지역의 고고학,<br />

인류학, 역사적 유물을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유리 공예품, 도자기, 주화, 동<br />

전 등을 전시한 여러 파빌리온과 천문관이 있다. '인간과 일'이라는 전시 구역에서는 고대의<br />

직물 제조나 보석 세공, 도기 제작과 곡물을 빻아 빵을 만드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br />

있다. 각기 다른 12개의 문명층이 발견된 텔 카실 발굴현장이 이곳에 있다. 또한 텔아비브-<br />

욥바 역사 박물관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 장소인 독립 기념관도 에레츠 이스라<br />

엘 박물관의 후원 하에 있으며, 두 곳 모두 텔아비브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308<br />

L.A. 마예르 이슬람 미술 연구소 (1974년 설립):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 미술 연구소는 스<br />

페인에서 인도에 이르는 수 천년 간의 이슬람 예술을 아우르는 도기, 직물, 보석, 의례 용품<br />

등을 광범위하게 소장하고 있으며, 특별 주제로 임시 전시회를 개최한다.<br />

베이트 하트푸쫏 (디아스포라 박물관, 1978년 설립): 텔아비브 대학 캠퍼스에 자리잡고 있는<br />

이 박물관은 현대적 기술과 시청각 전시를 이용하여 전시대와 전세계를 아우르는 디아스포<br />

라 유대 공동체들의 역사를 추적한다. 소장 유물이 없는 이 박물관의 전시는 주제에 따라<br />

정해지며, 각층에는 연구 영역이 있다. 유대 주제에 대한 임시 전시회, 시청각으로 유대 역<br />

사를 조망해주는 크로노스피어, 광범위한 교육 및 문화 프로그램과 여행 전시 등이 정기적<br />

으로 전시되고 있다. 이곳의 웹사이트 www.bh.org.il에서도 유대인의 삶과 유산과 관련된 모<br />

든 사항들에 대해 조언과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br />

다윗 망대 예루살렘 역사 박물관 (1988년 설립): 이 박물관은 제1 성전시대(기원전<br />

960~586)의 유물과 하스모니아 시대(기원전 1세기)의 망대와 도시 성벽의 일부, 헤롯왕(기<br />

원전 37~4)이 건설한 거대한 탑의 토대가 있는 중요한 역사적, 고고학적 유적지인 시타델


309<br />

에 위치해 있다. 인공유물이 없는 이 박물관은 가나안의 도시로서의 시초부터 현대에 이르<br />

기까지 예루살렘의 4천년 역사를 총망라한다. 전시품은 시대별로 나누어져 있고 각 전시실<br />

에는 주요 사건을 나타내는 ‗타임 라인‘이 있으며, 지도, 비디오테이프, 홀로그램, 그림, 모<br />

형을 활용한 전시도 있다. 관련 없는 주제로도 열리는 임시 전시회는 아름다운 배경을 적극<br />

활용하여 조각, 설치미술 및 기타 작품들을 전시한다.<br />

야드 바솀: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영웅 기념관인 야드 바솀은 홀로코스트에<br />

서 희생된 6백만 유대인들의 기억을 영원히 존속시키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2005년에 보수<br />

확장된 이곳에는 신 홀로코스트 역사 박물관(이곳 안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이름의 전당<br />

이 있음), 홀로코스트 미술 박물관, 전시 파빌리온, 의로운 이방인의 거리, 기록 보관소, 바<br />

닥에 집단 수용소들의 이름이 적힌 기억의 전당, 어린이 기념 파빌리온, 몰살된 공동체의<br />

계곡 등이 있다. 모셰 사프디가 디자인한 이 박물관은 방문객들이 감각적, 정서적, 지적인<br />

모든 경험을 맛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br />

노암 나다브 그림


310<br />

고고학<br />

이스라엘 땅에서의 고고학적 조사는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으며, 이 무렵 성서 학자들은<br />

성서에 언급된 장소들의 유적을 찾아 그 지역을 조사했다. 19세기 말 무렵, 그러나 본격적으<br />

로 20세기 초부터, 고대 정착촌 유적으로 이루어진 다수의 언덕(히브리어로 ‗텔‘)이 발굴되<br />

었고, 그에 따라 과학적인 고고학 연구의 기틀이 마련되었다.<br />

고고학적 활동은 영국의 위임통치 기간(1917~1948)에 확대되었고, 이스라엘 건국 이후부터<br />

대대적으로 증가했다.<br />

발굴과정에서 얻은 경험은 지층 연구 기법을 구체화했고, 고고학적 지층과 유물의 발생 시<br />

기를 추정 가능케 하는 도기 그릇을 비롯한 여러 유물의 형태 발전(유형학)에 대한 세심한<br />

연구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최근 몇 년간 고고학적 연구는 더욱 확대되어 영양, 질병, 경제,<br />

상업 등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물질 문화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대적<br />

고고학 연구에서 얻은 성취는 매년 발굴되는 수십 개의 유적지에 적용되고 있다.


311<br />

이스라엘 고고학은 선사시대부터 오스만 제국 지배 말기에 이르는 과거의 모든 유적에 대한<br />

체계적인 조사를 수반한다. 많은 유물은 이 땅에 많은 문화가 남긴 흔적의 증거이다.<br />

독특한 지리적 특징은 고대 문화가 더욱 많이 탄생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즉, 수만 년 전<br />

이스라엘 땅은 사냥꾼들의 무리들이 아프리카에서 유럽에서 건너가는 육교의 역할을<br />

감당했다. 이들의 임시 막사와 거주지는 요르단 계곡 주변과 카르멜산(갈멜산)과 갈릴리의<br />

동굴 안에서 발견되었다.<br />

성서시대에 이스라엘 땅은 메소포타미아(오늘날의 이라크)와 이집트의 비옥한 초승달<br />

지대의 번성한 여러 문화를 잇는 가교역할을 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후에는 이 땅은<br />

동서를 잇는 지리적, 문화적 연결고리가 되었다.<br />

공중에서 본 베트 쉐안 (벳스안) 발굴현장 • 이스라엘 문화재청


312<br />

이스라엘 내 고고학적 연구는 이스라엘이 위대한 유일신 종교들의 정신 유산의 본거지라는<br />

<strong>사실</strong>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다. 무엇보다도 이는 유대인들의 고향에서 그들의 문화적<br />

유산인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유대민족과 성서, 이스라엘 땅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br />

명확히 드러내준다. 땅속에 묻혀있는 이런 유적지들의 가시적 존재는 이 유대 국가<br />

안에서의 유대 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유형의 연결 고리이다.<br />

이렇듯 이어지는 역사의 사슬은 나라 전역의 유적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쪼르(하솔),<br />

므깃도, 게제르(게셀), 쇼므론(사마리아), 브에르셰바, 단 등의 성서시대의 도시들, 제 2<br />

성전시대의 도시들—티베리아, 세포리스(치포리), 가믈라—과 유대인들이 자유를 위해<br />

싸웠던 마사다 요새와 헤로디온, 에세네파의 정신적 중심지가 발굴되었고 가장 오래된 구약<br />

사본을 포함한 사해 두루마리가 발견된 사해 근처의 유대 사막 등이 그 예이다. 같은<br />

시기부터, 예수의 삶과 관련된 가버나움, 타브가 등지의 유적지도 발굴되었으며, 또한<br />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유적지들도 발견되었다.<br />

텔 미크네 에크론 발굴현장 • I. 슈툴만<br />

케이사리아(가이사랴), 베이트 셰안, 바니아스(가이사랴 빌립보)와 같은 로마와 비잔틴 시대<br />

도시들의 유적지와 당시에 번성했던 아브다트, 할루짜, 맘시트와 같은 네게브 도시들도


313<br />

발굴되었다. 이슬람 시대의 유적으로는 고대 도시 라믈레 유적과 키르베트 알<br />

마리야르(히샴 궁전)가 여리고에 있다. 십자군 시대의 유적으로는 여러 요새와 아크레(악고),<br />

케이사리아(가이사랴), 벨보아, 칼라트 니므롯 등의 도시들이 있다.<br />

디오니소스 상 • 이스라엘 문화재청<br />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방대한 고고학적 활동의 중심지이며, 이곳에서 5 천년 역사의<br />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다윗 성 내에는 가나안의 도시 성벽과 정교한 지하 수로 시설을<br />

비롯한 이스라엘 왕국 수도의 여러 구조물 유적이 있다. 제 2 성전시대의 유적으로는<br />

성전산의 옹벽을 따라 위치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공공 건축물들의 유적과 예루살렘 구<br />

시가지 내의 유대인 지구에 있는 상부 도시의 화려한 거주지 유적이 있으며, 이 유적지의<br />

옛터는 서기 70 년에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원래 장소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br />

외에도 돌을 깎아 만든 수백 개의 무덤이 있는데, 이 중 일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br />

함락된 이 도시가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증명해준다. 비잔틴 시대의 유물로는 많은 교회와<br />

종교적 건축물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 성묘교회이다. 아랍지배 시대로부터는


314<br />

성전산의 이슬람교 사원들과 성전산 남쪽에서 발굴된 행정 중심지 유적 등이 있다. 십자군<br />

시대의 유적에는 도시 성벽과 교회, 폐쇄된 시장 유적지가 있다. 마믈루크와 오스만 제국<br />

지배 시대의 유물인 이슬람 사원의 첨탑은 예루살렘 구도시의 하늘을 장식하고 있다. 구<br />

시가지의 성벽과 욥바 성문 옆에 있는 요새는 술탄 술레이만 대제(1520~1566)의 통치<br />

기간에 건설되었다.<br />

<strong>이스라엘에</strong>는 2 만여 개에 이르는 중요 고대 유적지가 있고, 이들은 법으로 보호되고 있다.<br />

역사의 모든 시대와 전국 각지를 아우르는 수십 개의 유적지가 매년 발굴된다. 유적 발굴에<br />

대한 허가는 이스라엘 문화재청이 국내 또는 해외 탐사단에게 발급하는데, 문화재청은 국가<br />

유물을 보존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이스라엘의 문화재법은 모든 건축 예정지에<br />

대해 고고학적 유물의 존재 여부를 조사하고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구조 발굴 작업을<br />

실시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국가는 또한 공공에 이익이 되는 유물을 보호할 권리를 가진다.<br />

이러한 유물 중 중요도가 더 높은 일부 유물은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된다. 이<br />

박물관에는 사해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있는 성서의 전당이 있으며, 일부는 대중들의 관람이<br />

허용된다.<br />

고대 유적지를 보존하고 재건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과 자원이 투자되었으며, 이들 중<br />

역사의 모든 시기에 해당하는 수십 개의 유적지가 일반에 공개되었다.


315<br />

대중매체<br />

이스라엘, 중동, 그리고 세계 전반의 소식을 지속적으로 접하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에게 매<br />

우 중요한 일이다. 시시각각 라디오 속보를 청취하고 TV 뉴스 방송을 시청하고 최소한 하<br />

나의 일간지를 구독하는 것이 대다수 이스라엘인들의 일상의 한 부분이 되고 있다.<br />

이스라엘의 언론 자유에 대한 공약은 모든 통신 매체에 적용되며, 안보 관련 문제만 군의<br />

검열을 받는다. 히브리어로 된 여러 일간지가 발행되고 있으며, 이에 더해 러시아어와 불어<br />

신문 서너 개와 두 종류의 영자 신문—오랜 전통의 예루살렘 포스트(구 팔레스타인 포스트)<br />

와 인터내셔널 헤랄드 트리뷴과의 협력 하에 발행하는 이스라엘의 유력지 하레츠의 영문판<br />

—그리고 특정 이익 단체를 위한 잡지들을 포함하는 1천 종 이상의 정기 간행물이 있다. 주<br />

요 간행물 대부분은 인터넷 판을 보유하고 있다.<br />

라디오와 텔레비전<br />

콜 이스라엘(이스라엘의 소리)은 8개의 라디오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연예<br />

오락과 대중 음악부터 학문 강의, 토론회, 클래식 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17개<br />

언어로 제공한다. 이들 프로그램은 어린이에서 노년층, 새 이주민부터 이스라엘 토박이에<br />

이르는 다양한 청취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갈레이 짜할과 갈갈라츠(이스라엘 방위군


316<br />

방송국)는 군인들과 관련된 방송뿐 아니라 뉴스와 음악까지 24시간 방송하고 있다. 해외 청<br />

취자들을 위한 다중 언어로 된 단파 방송은 이스라엘, 중동 및 유대인 문제에 <strong>관한</strong> 지속적<br />

이고 믿을 수 있는 소식통을 제공해준다.<br />

이스라엘의 텔레비전 방송은 1967년에 시작되었다. 지금은 2개의 국영 채널에서 히브리어,<br />

아랍어, 영어로 된 교육, 정보, 오락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 1994년에 개국한 한 지방<br />

상업 채널은 3개의 민영 제작사로 분리되어 있으며 매일 특정 시간대는 교육 프로그램에<br />

할당되어 있다. 매달 시청료로 운영 재정을 충당하는 케이블 TV도 국내 대다수 지역에서<br />

이용 가능하여 수십 개의 미국, 유럽, 아시아, 중동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해준다. 이스라<br />

엘의 독자적 케이블 채널들은 스포츠, 어린이 프로그램, 영화, 광범위한 주제의 다큐멘터리<br />

를 제공한다.<br />

콜 이스라엘과 국영 텔레비전 채널은 이스라엘 방송협회(IBA)의 후원 하에 운영되고 있다.<br />

이 협회는 방송을 다양한 관점에 대한 표현을 제공할 책임이 있는 독립적인 정부 서비스로<br />

규정하는 IBA 법(1965)에 종속되어 있다. IBA의 운영 책임은 3년 임기로 정부가 지명하는<br />

집행 위원회와 5년 임기의 집행 위원장에게 있다. IBA 방송의 재정은 라디오 광고와 공공<br />

서비스 발표, 소비자가 지불하는 연간 회비로 충당된다.


317<br />

스포츠<br />

이스라엘 건국 이후 59년 동안 스포츠는 국내와 국제 무대에서 국가 발전에 갈수록 중요한<br />

역할을 해오고 있다.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테니스 스타 샤하르 페에르와 축구 선수 요시<br />

베나윤과 같은 이스라엘의 운동선수들은 꾸준하게 영향력을 끼치며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br />

있다. 이스라엘의 스포츠 팀들 역시 해외에서 성공을 거뒀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팀은 지<br />

난 10년에 걸쳐 유럽의 일류 팀으로 자리잡은 마카비 텔아비브 농구 클럽이다. 이스라엘 국<br />

가 대표팀도 축구와 농구팀이 인상적인 결과를 거두는 등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br />

이스라엘 올림픽 위원회 제공<br />

이스라엘 올림픽 위원회 제공<br />

프로의 장 밖에서도 스포츠는 늘 수십만 명의 이스라엘인들에게 중요한 여가활동이 되어왔<br />

다. 서쪽 국경에 아름다운 해안선이 길게 펼쳐져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인구의 절반 가량이<br />

정기적으로 수영을 한다는 <strong>사실</strong>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러 달 지속되는 온화한 날씨<br />

로 인해 이스라엘인들은 야외 스포츠를 즐기고, 경쟁적 성향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수십 가<br />

지 다양한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318<br />

농구와 축구<br />

축구는 농구와 아주 근소한 차이로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하고 있다.<br />

프로 축구 리그에서 프리미어 리그 상위 12개 팀은 언론에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경기가 있<br />

을 때는 최대 2만 명의 인파를 불러모은다. 5년간 정상의 자리를 지킨 후 대적할 상대가 없<br />

던 마카비 하이파의 기세는 점차 약화되는 추세이고 베이타르 예루살렘이 바톤을 이어받아<br />

2007년 5월에 9년만의 첫 리그 챔피언십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스라엘의 축구 클럽들은 유<br />

럽 대회에서 꾸준히 우수한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수년 동안 마카비 하이파와 하포엘 텔아<br />

비브가 가장 우수한 성적을 냈다. 하포엘은 2002년 UEFA 컵에서 영국의 강호 첼시를 꺾고<br />

8강에 진출했고, 마카비는 2003년 챔피언스 리그 그룹 예선에 올랐고 그 시즌에 맨체스터<br />

유나이티드를 격파했다.<br />

축구 국가 대표팀은 최근 들어 관심을 얻고 있는데, 특히 2007년 3월 라마트 간에서 유로<br />

2008 출전 자격을 놓고 열린 경기에서 영국과 0대 0 무승부를 기록한 후와 2006년 월드컵<br />

본선 진출 직전까지 간 후에 큰 주목을 받았다. 이스라엘 축구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미<br />

치는 영향력도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그 중 3명은 영국의 유력 클럽에서 뛰고 있다. 2007<br />

년 여름에 이스라엘 주장 요시 베나윤은 리버풀 FC로, 수비수 탈 벤 하임은 첼시로 이적했<br />

다.<br />

농구에서는 마카비 텔 아비브가 이스라엘 최강팀이다. 이 팀은 국내 프리미어 리그에서 지


319<br />

난 37년간 36번 우승을 거머쥐었다. 팀의 최대 라이벌 하포엘 예루살렘은 2006년과 2007년<br />

프리미어 리그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마카비에게 패배했다. 유럽에서 마카비는 2007년 유<br />

로리그 4강에서 4년 만에 처음으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 팀은 2006년에 결승전에 진<br />

출했고, 2004년과 2005년에는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하포엘 예루살렘 또한 ULEB 컵에 출<br />

전하며 유럽권에서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으며, 2005년에는 이 대회 우승을 거머쥐기<br />

도 했다. 농구 국가 대표팀 역시 주목할 만한 팀으로 기반을 다져왔다. 2007년 8월에 대표<br />

팀은 2년마다 개최되는 유로 바스켓 챔피언십의 본선 진출권을 또다시 따냈으며, 이 대회에<br />

는 1993년부터 꾸준히 참가해오고 있다.<br />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는 여자 농구가 인기를 끌고 있고, 엘리슈르 라믈레와 안다 라마트 하샤론 두<br />

팀이 리그 타이틀을 놓고 정기적으로 맞붙는다. 이 두 팀은 유럽 대회에도 참여하고 있다.<br />

여자 선수 샤이 도론은 2007년에 WNBA의 뉴욕 리버티에 진출하면서 미국 프로 농구팀에<br />

서 뛰는 최초의 이스라엘 선수가 되었다.<br />

테니스<br />

최근 몇 년간 이스라엘 테니스 선수들은 세계 최대의 토너먼트에 고정적으로 참가하고 있다.<br />

십대 선수 샤하르 페에르는 2006년 세계 톱 20에 진입했고, 전세계에서 열리는 WTA 랭킹


320<br />

토너먼트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복식조 안디 람과 요니 에를리크도 세계 정상급 팀으<br />

로 자리잡으며 지난 2년간 세계 10위권 안에 들고 마스터 컵의 마지막 시즌 본선에 진출했<br />

다. 람은 혼합 복식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2007년 프랑스 오픈에서는 프랑스 선수<br />

나탈리 데키를 상대로, 2006년 윔블던에서는 러시아의 베라 즈보네라바와 맞붙어 그랜드 슬<br />

램 대회를 두 차례 석권했다.<br />

예루살렘 총리실에서 테니스 선수 샤하르 페에르와 만남을 가진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 • 이<br />

스라엘 공보부/ A. 오하욘<br />

남자 단식 선수 중에는 세계 100위권에 드는 선수가 없지만 이스라엘의 국가대표 다비스<br />

컵 팀 또한 인상적인 성적을 거뒀다. 라마트 하샤론 테니스 센터에서 5천 명의 팬들이 지켜<br />

보는 가운데 칠레를 상대로 멋진 승리를 거둔데 이어 2007년 9월에는 13년 만에 처음으로<br />

월드 그룹에 진출했다.<br />

뷘게이트 연구소<br />

이스라엘 스포츠의 성공과 발전에 있어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뷘게이트 체육 연구소로, 이<br />

곳은 이스라엘 중부 네타냐시에 인접한 뷘게이트에 자리잡고 있는 국립 스포츠 센터이다.<br />

이 연구소에는 어린 스포츠 인재들을 위한 엘리트 학교와 분야 내 세계 최고를 달리는 스포<br />

츠 의학 부서가 있다. 풀타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학금 수령 대상자를 결정하는 스포츠.


321<br />

발전 협의회 역시 뷘게이트에 기반을 두고 있다. 페에르, 람, 에를리크 등 후에 성공을 거둔<br />

이스라엘의 수많은 남녀 스포츠인들이 뷘게이트에서 그들의 커리어를 시작했다<br />

과학 문화 스포츠부의 스포츠 부서는 뷘게이트의 교사와 코치들의 훈련을 지원하고, 이스라<br />

엘 내 모든 스포츠 활동을 관리 감독한다. 다양한 스포츠 연맹과 단체들의 활동을 조율하고<br />

프로그램 발전을 지원하기도 한다.<br />

스포츠를 즐기는 젊은이들<br />

스포츠는 당연히 재능 있는 뛰어난 선수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스포츠 문화는 건국 초기<br />

부터 발전해 왔으며 청소년들은 어릴 때부터 스포츠에 참여하여 체력과 건전한 경쟁심을 고<br />

취시키도록 교육받았다. 매주 수만 명의 이스라엘 청년들이 축구와 농구에서 카약, 요트 경<br />

기, 산악 등반에 이르는 다양한 스포츠에 참여하고 있다.<br />

다수의 주요 스포츠 단체들이 전국적인 클럽망을 운영하는 동시에 주류 스포츠팀과 제휴를<br />

맺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단체로는 마카비(1912년 설립), 하포엘(1923), 베이타르(1924),<br />

엘리쭈르(1939), 대학 스포츠 협회-ASA(1953) 등이 있다. 학교와 지역사회 센터들도 지역


322<br />

리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국 학교 농구 대회와 축구 결승전은 전국에 중계된다.<br />

취미로서의 스포츠<br />

이스라엘은 스포츠 국가이다. 주말이면 전국 각지의 공원에 있는 야외 코트에서 농구를 하<br />

거나 거리에서 달리기를 하거나 공원에서 축구 경기를 하는 이들을 어김없이 볼 수 있다.<br />

해변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제공한다. <strong>이스라엘에</strong>는 스쿠버 다이빙 자격<br />

증을 가진 인구가 5만에 이르며, 이는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이다. 홍해의 독특한 해양<br />

생물들은 많은 스쿠버 다이버들을 유혹하고 있다. 윈드서핑과 수상 스키 역시 대중적인 스<br />

포츠이며, 국내에서 개발된 해변 스포츠인 ―패들볼(paddleball)‖도 인기가 높다. 패들볼의 경<br />

기 방식은 카누의 패들을 이용해 공을 쳐서 계속 공중에 띄우는 것이다.<br />

해변을 벗어나면, 장거리 달리기 또한 매우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이며, 매해 열리는 마라<br />

톤 대회에 수천 명이 참가하고 있다. 코스의 시작과 끝은 티베리아이고 북부의 킨네렛 호수<br />

주변을 달리도록 되어 있으며 철인 3종 경기 이벤트도 마련되어 있다. 사이클 역시 인기가<br />

높고, 케이사리아(가이사랴)에 있는 골프 코스는 현재 재개발 사업에 착수 중이다. 겨울에는<br />

북부의 헤르몬 산에 국내 스키 인구들이 몰려든다. 그 밖에 인기 있는 스포츠에는 탁구, 권<br />

투, 레슬링, 역도, 유도, 가라데, 그리고 IDF가 개발한 호신술의 일종인 크라브 마가가 있다.<br />

대중적인 팀 스포츠에는 배구와 핸드볼이 있으며, 두 종목 모두 프로 리그가 갖춰져 있다.


323<br />

올림픽과 마카비아<br />

이스라엘은 올림픽에서 거둔 성과에 늘 자부심을 가져왔으나 2004년 전까지는 단 한 번도<br />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그러나 윈드서핑 선수 갈 프리드만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1<br />

위를 차지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아리크 제에비도 아테네 유도 경기에서 동메달을 획득했<br />

다. 앞서 메달을 차지한 선수로는 야엘 아라드와 오렌 스마자(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유도<br />

부문 은메달과 동메달), 미카엘 칼가노프(2000년 시드니에서 카약 부문 동메달)가 있다. 장<br />

대 높이뛰기 선수 알렉스 아베르부크는 올림픽에서는 아직 메달이 없으나 1999년과 2001년<br />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과 은메달을, 2002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br />

을 목에 걸었다. 요트 선수 우디 갈과 기디 클리거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메달을 목<br />

표로 470급에 출전할 예정이며, 2007년 세계 요트 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했다.<br />

이스라엘 올림픽 위원회 제공<br />

이스라엘 올림픽 위원회 제공


324<br />

이스라엘 올림픽 위원회 제공<br />

이스라엘은 4년마다 자체 올림픽에 해당하는 마카비아 경기대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는<br />

1932년에 시작된 이래 전세계 수천 명의 유대인 운동선수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마카<br />

비아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7개 세계 대회 중 하나이다. 참가자들은 축구,<br />

농구, 탁구, 네트볼 등의 경기에서 함께 겨루고, 라마트 간의 국립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장<br />

엄한 개막식에 참석한다. 다수의 우수한 유대인 선수들이 마카비아에서 명성을 얻었는데,<br />

대표적 인물로 1972년 올림픽에서 금메달 7개라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운 미국 수영선수 마<br />

크 스피츠와 2004 아테네 올림픽 수영 종목에 참가한 레니 크레이젤버그가 있다.<br />

신종 스포츠<br />

야구는 <strong>이스라엘에</strong> 새로 도입된 프로 스포츠이다. 이스라엘 베이스볼 리그는 2007년 6월에<br />

창단했으며 6개 팀과 3개 경기장을 갖추고 있다. 이스라엘인도 일부 포함되었지만 대부분이<br />

외국인으로 구성된 120여명의 선수들은 2달 간의 시즌에 참가하며 수백 명의 관중을 게제<br />

르 키부츠, 페타크 티크바의 야르콘 공원, 텔아비브의 스포르테크로 불러모았다. 모딘 미라<br />

클과 페타크 티크바 파이오니어즈가 맞붙은 오프닝 경기는 3천 명 이상이 관람하고 지역<br />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다. 또한 2007년 8월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는 전 메이저 리그 선수<br />

론 블롬버그가 이끄는 벳 쉐메쉬(벳세메스) 블루 삭스가 모디인을 꺾고 IBL 초대 챔피언에<br />

오르는 모습을 2천 명 이상이 지켜보았다.<br />

영어권 이민자들은 소프트볼, 크리켓, 미식 축구 등 여러 다른 신종 스포츠들을 <strong>이스라엘에</strong><br />

도입했다. 이스라엘은 인도 이민자들에 힘입어 국제 크리켓 협회(ICA) 회원국이 되었고, 남


325<br />

아프리카 이민자들은 럭비와 론볼링(lawn bowls)을 국내에 들여왔으며, 국내 남자 볼링 팀은<br />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아메리칸 플래그 풋볼(American flag football) 리그에서는 매 시<br />

즌마다 홀리랜드 볼(Holy Land Bowl)을 두고 수십 개 팀이 경쟁한다.<br />

장애인 스포츠<br />

이스라엘은 국제 장애인 올림픽 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하고 장애인 선수들에게 기량을 발휘<br />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장애인 스포츠 분야에서 성공을 거둬왔다. 이스라엘은<br />

2004년 아테네 장애인 올림픽에 24명의 선수를 출전시켜 사이클, 승마, 수영, 사격, 요트,<br />

양궁, 육상, 탁구, 휠체어 테니스 부문에서 경기를 치렀다. 요트 선수 3명으로 이루어진 단<br />

체가 혼합 잠수 경기에서 금메달을 땄고 이스라엘 수영선수들은 금메달 1개, 은메달 4개,<br />

동메달 3개를 획득했다. 케렌 레이보비츠는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가장 유명한 장애인 선수로, 2000<br />

년 시드니 수영 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획득했고, 세계 선수권 대회 3회 우승, 유럽 선수<br />

권 대회 5회 우승을 거머쥐었다.<br />

M. 프레이딘<br />

이스라엘 장애인 스포츠 협회(ISAD)는 농구, 테니스, 배구, 배드민턴, 탁구, 사격, 승마, 양궁,<br />

수영, 요트 등 여러 분야에서 광범위한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상이군인들을 위한 스포


326<br />

츠 베이트 할로헴 클럽과 부상 및 질병으로 장애를 얻은 이들을 위한 일란 협회도 많은 활<br />

동을 하고 있다.


327<br />

이스라엘과 국제사회의 문화적 유대<br />

세계적인 문화적 유대는 언어, 문학, 미술, 언론, 스포츠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의 협력에 초<br />

점을 둔다. 70개국 이상 국가들과의 문화적 협의와 기타 여러 국가들과의 유대 관계를 기반<br />

으로 교환 학생 프로그램, 무용단, 극단, 미술 전시회, 뮤지션 및 오케스트라의 상호 교류<br />

공연부터 도서 전시회, 영화제, 스포츠 대회 참가, 양국의 언어와 문화 강의 등이 이루어지<br />

고 있다.


328


329<br />

세계 속의 이스라엘<br />

북미 326<br />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 331<br />

서유럽 333<br />

중부 유럽과 유로-아시아 335<br />

아프리카 337<br />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339<br />

중동과 북아프리카 341<br />

교황청 348<br />

국제 연합(UN) 350<br />

전세계 유대인 352


330


331<br />

뉴욕 유엔 빌딩에 걸린 국기 • S. 아즈란<br />

세계 속의 이스라엘<br />

이스라엘은 1949년부터 국제 연합(UN)의 회원국으로서 세계 대다수 국가들과 국교를 유지<br />

하고 있다. 수세기 동안 겪은 박해의 기억과 삶을 산산조각 낸 홀로코스트 경험, 수십 년간<br />

계속된 아랍-이스라엘 간의 갈등을 배경으로 한 이스라엘의 외교 정책은 자국의 안보를 확<br />

고히 하고 모든 국가와의 협력을 증진하는 동시에 이 지역의 평화를 앞당길 수 있는 방향으<br />

로 추진되어 왔다.<br />

אדיר חפצה של ישראל לקיים יחסים תקינים עם כל המדינות עם ממשלותיהן ועם עמיהן ...<br />

‏)דוד בן גוריון,‏ תשי"ג )<br />

...<br />

모든 국가와 그들의 정부 및 국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열망이<br />

다...... (다비드 벤 구리온, 1952년)


332<br />

북미<br />

미국<br />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포되고 11분이 지났을 때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br />

령은 이 새로운 국가를 승인했다. 이 행위는 공동의 가치를 기반으로 한 국교의 시작을 알<br />

렸고 깊은 우정과 상호간의 존중을 특징으로 했다. 양국은 모두 그 정치적, 법적 체계가 자<br />

유주의적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활발한 민주주의 국가이고, 모두 개척자 사회로 출발한 국<br />

가이며, 아직까지도 새로운 이민자들을 흡수하고 통합하고 있는 국가이다. 때로 양국은 ‗이<br />

견을 인정‘하면서 서로 간의 차이를 우정과 동맹으로 해결하고 있다.<br />

미국은 이스라엘과 외교 및 정치적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할 무렵 그와 동시에 서구 국가들<br />

과 연합하여 중동에 대해 무기수출 금지 조치를 내렸다. 미국은 이 같은 조치를 취함으로써<br />

지역적 긴장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1952년 이후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중동<br />

안보 조약을 위해 아랍 지원에 힘을 쏟으면서 트루만 행정부가 급진적으로 시작한 이스라엘<br />

에 대한 편애 정책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워싱턴과 예루살렘의 관계는 미국이 가말 아브델<br />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정책에 환멸을 느낀 후 1950년대 후반에 가서야 다시금 긴밀해질<br />

수 있었다. 케네디 행정부 집권 기간에 무기 공급에 대한 미국의 이전 조치는 수출 금지가


333<br />

해제되면서 다시 역전되었다.<br />

1960년대 말 존슨 행정부의 취임 후반기부터 미국의 외교는 이스라엘이 안전하고 승인된<br />

국경 안에서 존재할 권리를 인접한 아랍 국가들과의 직접 협상으로 달성하는데 주력할 것을<br />

바탕으로 했다.<br />

강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의 평화를 달성하는데 반드시 요구되는 필수조건이라고 여긴 미국<br />

은 아랍 군에 비해 이스라엘 군의 질적 우위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닉슨과 카터 행정부 동<br />

안에는 이스라엘-이집트와 이스라엘-시리아 간의 휴전 협정(1973~74), 캠프 데이비드 협정<br />

(1978),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1979)을 체결하는 과정을 지원했다.<br />

레이건 행정부 집권 동안 양국 관계는 크게 발전했을 뿐 아니라 보다 공식적이고 구체적인<br />

내용이 추가되었다. 앞서 있었던 공약에 더해 양해 각서가 조인됨에 따라(1981, 1988) 다수<br />

의 공동 계획 및 자문 기관들이 생겨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고, 이는 다시 군과 민간<br />

부문 양쪽에서 실질적인 제도 장치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상호 협력의 틀은 향후 더욱 광범<br />

위한 양해각서로 체계화되었다(1988).<br />

첫 번째 부시 행정부는 이스라엘의 평화 주도(1989)를 지지했고, 마드리드 평화회의(1991)


334<br />

을 공동 후원하여 워싱턴에서 평화 회담이 소집되었다.<br />

클린턴 행정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협약과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 협정, 시리<br />

아와의 협상, 아랍세계의 불매 동맹을 중단하는 것을 포함한 지역적 협력을 증진하기 위한<br />

노력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중동 평화 협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br />

스라엘의 질적 우위를 유지할 것을 약속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이 평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br />

겪게 될지 모르는 안보 위험을 최소화하는데도 힘을 쏟았다.<br />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br />

조치를 취했으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 달성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br />

비전을 지지하고 있다.<br />

이스라엘과 미국 간의 지속적이고 심화되는 우호 관계는 양국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며<br />

이스라엘을 미국 외교 정책의 ‗기본 교의‘로 유지하는 것부터 <strong>이스라엘에</strong> 대한 ‗미국의 헌<br />

신‘을 선언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여러 행정부들에 의해 뚜렷이 정의되어 왔다. 1980<br />

년대 초반에 이스라엘은 미국에 의해 ‗전략적 자산‘으로 간주되었고, 한 해 앞서 통과된 법<br />

안에 따라 ‗비-나토 주요 동맹국‘으로 명시되었다(1987).


335<br />

<strong>이스라엘에</strong> 대한 의회의 지지도 초당파적이다. 연간 군사 원조, 평화 협상, 이스라엘의 테러<br />

와의 투쟁에 대한 지지는 미국-이스라엘의 우호관계에 대한 의회 차원의 헌신의 특징이 되<br />

어왔으며,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통합 수도로 인정하고 예루살렘 주재 미국 대사관의 설립<br />

을 촉구하는 법안이 통과된(1995) 것도 또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특별한 관계‘란 상호<br />

경제적, 정치적, 전략적, 외교적 문제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안보 및 경<br />

제 원조로 연간 약 26억 달러를 지원 받고 있으며(2008년까지 경제 원조는 매년 1억 2천만<br />

달러씩 줄이고 있고 군사 원조는 매년 6천만 달러씩 줄이고 있다. 2008년 이후부터는 총 24<br />

억 달러의 군사 지원을 받게 된다), 이스라엘-미국 자유 무역 협정(1985)으로 인해 양국간<br />

교역이 더욱 활발해졌다.<br />

이스라엘과 미국의 산업 기업들이 후원하는 합작 회사의 수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으며, 미<br />

국의 일부 주는 이스라엘과 ‗주 대 주‘ 협약을 맺으며 문화에서 농업에 이르는 다양한 활동<br />

에 참여하고 있다.<br />

미국은 여러 국제 포럼에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며 반( 反 ) 이스라엘 결의안


336<br />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찌피 리브니 외무장관 • 이스라엘 주재 미 대사관/ 매티 스<br />

턴<br />

을 밀어붙이려는 국제 연합과 그 관련 기구들의 시도를 저지한다. 양국은 첩보와 군사 정보<br />

를 교류하며 상호 이득을 위해 협력하는 동시에 국제적 테러와의 전쟁이나 마약 퇴치 운동<br />

에도 힘을 합쳐왔다. 미국-이스라엘의 우호관계는 유대계 미국인 공동체와 미국사회의 다양<br />

한 영역으로부터의 지원으로 더욱 강화되고 있다.<br />

캐나다<br />

캐나다는 1949년에 이스라엘을 법적으로 승인했으며, 이스라엘과 캐나다는 공동의 민주주의<br />

적 가치를 바탕으로 수년 동안 완전한 외교 관계를 맺어왔고, 문화적, 과학적 교류로 강화<br />

된 상호 유대를 형성하고 있다.<br />

캐나다-이스라엘의 경제 관계는 캐나다-이스라엘 자유 무역 협정(CIFTA)의 이행을 통해 더<br />

욱 긴밀해졌다.<br />

국제 무대에서 <strong>이스라엘에</strong> 대한 캐나다의 지지는 여러 UN 포럼에서 캐나다가 대체로 친 이<br />

스라엘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337<br />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br />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에 속한 지역에 유대와 아<br />

랍이라는 2개의 국가를 건립한다는 안건을 표결에 부쳤다. 당시 20개의 남미 회원국 중 13<br />

개 국가가 찬성표를 던졌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공동 프로그램이 상당한 도움이 되어 이<br />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가 강화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이스라엘은 농업, 의학, 협동조합<br />

의 조직과 농촌, 지역, 공동체 발전에 대한 자국의 경험을 공유했다. 수천 명의 교육생들이<br />

이스라엘 내 학습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동안 국제 무대의 전개상황으로<br />

인해 <strong>이스라엘에</strong> 대한 이들 국가의 지원이 약화되었는데, 특히 유엔과 그 관련 기구에서 그<br />

영향이 두드러졌다.<br />

오늘날 이스라엘은 쿠바를 제외하고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의 모든 국가와 완전한 외교적<br />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외교관계는 정치, 경제, 문화 영역에서의 생산적인 협력과 여<br />

러 분야에서 다수의 양자간 협정을 맺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br />

교역은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2000년에 체결된 멕시코와 이스라엘의 자유 무역 협정은 이


338<br />

분야에 대한 새로운 중요성을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출 품목은 화학제품, 최첨단 소프트<br />

웨어, 농산품, 기계 및 전자제품 등이고, 수입 품목은 육류, 곡물, 옥수수, 설탕, 코코아, 커<br />

피, 금속이 주가 되며 양쪽 모두 증가 추세에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여러 은행, 건설회사,<br />

농업 계획개발 회사들이 중남미와 카리브해 국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br />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중남미 지역을 방문하고 있는데, 특히 젊은 층들에게는 이 지역 방문<br />

이 군 제대 후 통과의례의 일부가 되고 있다.


339<br />

서유럽<br />

서유럽은 이스라엘의 가장 자연스러운 교역 파트너이다. 유럽 공동체(EC)와의 자유무역지대<br />

체결(1975)로 대 유럽 수출이 상당 규모로 늘었고, EC의 대 이스라엘 수출은 그보다도 더욱<br />

증가했다. 이러한 교역 증가는 창업주와 투자자, 합작회사 설립 간의 긴밀한 사업적 관계의<br />

발전과 유럽 자유무역 연합(EFTA)의 회원국들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에 힘<br />

입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1995년에 조인된 이스라엘-유럽 연합(EU) 간의 연합 협정은 2000<br />

년 6월에 효력이 발생하여 더욱 긴밀한 경제적 관계뿐 아니라 심화된 정치적 대화를 가능<br />

케 했다. 1990년대 중반, 이스라엘은 EU의 연구개발 기본계획에 합류했다. 2007년 11월에<br />

EU-이스라엘의 재계 포럼이 당사국들의 민간 부문 간의 이해와 협력 증진을 목표로 창립되<br />

었다. 2004년 12월에 유럽 인근 정책에 따른 실천 계획이 이스라엘과 EU 간에 합의되었다.<br />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 • GPO/ 아모스 벤 게르숌


340<br />

유럽 연합은 미국, 러시아, 유엔과 함께 평화 협상을 통해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해결하고자<br />

하는 ―4자 대표‖의 일원이다.


341<br />

중부 유럽과 유로-아시아<br />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민주주의가 되살아나자마자 다시 시작된 이들 지역과 이스라엘의 관<br />

계는 점차 밀접해지고 있으며 특히 경제, 문화, 관광, 국제 협력 활동 등에서 더욱 그러하다.<br />

이들 중 많은 국가가 유럽연합에 이미 가입되어 있거나 앞으로 유럽연합에 가입할 예정이라<br />

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들 국가와의 경제 협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br />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들 국가는 유대 세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홀로코스<br />

트의 기억은 이들 국가와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현재 다루어지고 있<br />

는 문제들에는 국유화되었던 유대인 소유의 공적, 사적 재산을 원 소유주나 법적 상속인에<br />

게 돌려주는 문제, 나치 정권 하에서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구한 사람들을 ‗열방의 의인<br />

(Righteous among the Nations)‘으로 인정하는 문제, 반유대주의의 발현을 막기 위해 지역 각<br />

국 정부와 협력하는 문제 등이 있다.<br />

이스라엘과 유라시아 국가(구 소련 연방)의 관계는 특히 정치, 경제, 문화 면에서 그 중요성<br />

이 부각되고 있다. 공식 방문과 새로운 협정으로 이러한 관계 확장의 튼튼한 기초가 마련되


342<br />

었다. 무역과 투자도 크게 늘고 있다. 과거 소련의 국민이었다가 현재 <strong>이스라엘에</strong> 거주하는<br />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자신들의 출신국 사이의 인간 가교 역할을 하며 이들<br />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더하고 있다.<br />

러시아 연방은 (4자 대표의 일원으로) 중동의 외교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핵 프<br />

로그램과 관련하여 이란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 연방과 이스라엘의 관계는<br />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br />

이스라엘은 공공보건과 첨단 농법, 수자원 관리, 사막화 방지 대책 분야에서 이스라엘 외무<br />

부 센터(MASHAV)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중앙 아시아의 카프카스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br />

도 계속 강화시켜 나가고 있다. 그 밖에 중요한 문제로는 유라시아 국가에서의 유대 문화유<br />

산 보존, 홀로코스트 정신 보존, 반유대주의 억제 조치 등이 있다.


343<br />

아프리카<br />

이스라엘과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 간의 관계는 195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br />

라가며 그 중에는 독립을 쟁취하기도 전에 처음 접촉이 시작된 국가들도 있다. 1956년 가나<br />

와의 수교를 시작으로 사하라 남부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게 되어 1970년대 초반에는<br />

33개국과 완전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1948년 독립을 이룩했고, 새<br />

롭게 독립하게 된 아프리카 국가들과 자신들의 경험과 전문지식을 공유하기를 원했던 신생<br />

국가 <strong>이스라엘에</strong>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친밀감의 표현이였다. 많은 합동 벤처 등 상호간에<br />

이익이 되는 경제협력도 발전했다.<br />

전세계적인 오일쇼크 이후 발발한 1973년 제 4차 중동전쟁이 끝나자 대부분의 사하라 이남<br />

국가들은 아랍 국가로부터 값싼 석유와 경제적 원조를 얻고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끊기로 한<br />

이집트 주창의 아프리카통일기구(OAU) 결의를 이행하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단절했<br />

다. 말라위와 레소토, 스와질랜드만이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했고, 몇몇 소수<br />

국가들은 해외 대사관의 연락사무소를 통해 접촉을 유지했다.<br />

그러나 아프리카 출신 학생들이 이스라엘의 직업훈련 코스에 참여하고 이스라엘의 많은 전


344<br />

이스라엘 주재 아프리카 대사들과 함께 한 찌피 리브니 외무장관 • 플래시 90<br />

문가들이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등 상호간의 협력은 지속되었다고<br />

할 수 있다.<br />

1980년대부터 사하라 이남 국가들과의 외교관계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과 아<br />

랍 이웃 국가 간의 평화협상이 진전을 보임에 따라 이러한 회복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br />

1990년대 말 경에는 사하라 남부 39개국과의 공식수교가 회복되었다.<br />

현재 이스라엘과 사하라 이남 국가들은 정치적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으며 이는 국가<br />

원수 및 정부 부처 장관의 상호간 방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더해 경제적, 사업<br />

적 교류와 문화적, 학문적 접촉, 다양한 합동 농업 프로젝트 및 의료 지원, 전문 직업훈련<br />

프로그램, 필요 시 인도주의적 차원의 원조 등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br />

이스라엘은 아프리카의 정치, 경제적 통합 과정과 아프리카 연합의 탄생에 큰 관심을 보여<br />

왔다. 이스라엘은 우정과 단결의 표시로 아프리카에 생겨나고 있는 각종 협회 및 기구와 협<br />

력하여 아프리카 대륙과의 각별한 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고자 한다는 뜻을 거듭 밝혀왔다.


345<br />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br />

이스라엘은 아시아 국가 대부분과 국교를 맺고 있다. 아시아 국가의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br />

력이 증가함에 따라 정치,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경제 면에서 이들 국가와의 관계가 더욱<br />

강화되어 왔다. 연구 개발, 농촌지역 개발, 농업, 교육 부문에서 나타난 이스라엘과의 기술<br />

적 협력은 아시아 지역 개발도상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br />

이스라엘과 중국은 1992년에 국교를 수립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과 중국은 관계를 꾸준히<br />

발전시켜 2000년에는 중국 국가주석이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고 이스라<br />

엘에서는 대통령이 세 번이나 베이징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br />

1980년대 중반 이후로 이스라엘과 일본은 상호 관계를 확장시켜왔고 이는 몇몇 협정의 조<br />

인 및 각국 총리의 상호 방문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다자간 평화 협상에 중요한 역할을 해<br />

오기도 했다.<br />

1992년에 시작된 인도와의 외교관계 역시 90년대 후반부터 모든 면에서 강화되어 왔다고<br />

할 수 있다. 2003년 이스라엘의 총리가 처음으로 뉴델리를 방문했다. 이스라엘은 2000년에<br />

스리랑카와의 수교를 재개했다.


346<br />

한국과의 외교관계는 1962년에 수립되었다. 지난 몇 년간 한국과의 관계는 모든 분야에서<br />

크게 확장되었다. 2007년에는 양국의 외교부 장관이 서로 방문을 하기도 했다.<br />

이스라엘은 많은 아세안 회원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중에는 미얀마, 태국,<br />

필리핀의 경우처럼 50년 이상 된 관계도 있다. 캄보디아, 라오스처럼 관계가 시작된 지 오<br />

래되지 않은 국가도 있다. 베트남과의 관계는 특히 경제, 무역, 농업 협력 분야에서 1993년<br />

이후로 급속하게 발전되어왔다. 2005년에는 양국 외교부 간에 연례 정치회담이 생겨났다.<br />

네팔과 이스라엘은 1960년대 초부터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네팔의 외교부 장관은<br />

2007년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방문하여 텔아비브의 대사관 개설을 발표했다.<br />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도 완전한 수교관계를 맺고 있다. 최근<br />

몇 년 사이 태평양 지역의 12개 독립 섬국가와도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스라엘은 이들 국가<br />

와 여러 분야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있다.


347<br />

중동과 북아프리카<br />

이집트<br />

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30년간 이어온 적대관계와 많은 희<br />

생을 가져 온 다섯 차례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이스라<br />

엘 총리 메나헴 베긴의 초대를 받아 이스라엘을 방문한 일(1977)과 이집트와 이스라엘, 이<br />

스라엘과 이웃 국가들 간의 평화에 기반이 된 캠프 데이비드 협정(1978)에 뒤이어 이러한<br />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유대와 사마리아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가<br />

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아랍 거주민에게 5년간 임시 자치기간을 주는 등 팔레스타인<br />

문제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는 이러한 성과를 인정 받아 노벨 평<br />

화상을 공동수상 했다.<br />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과 함께 한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br />

이스라엘 공보부/ 모쉬 밀너<br />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에 시작된 평화는 일체의 교전, 적대관계, 폭력 행위나 위협뿐만 아니<br />

라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외교, 경제, 문화적 교류를 맺으며, 무역장벽을 철폐하고 이동의<br />

자유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상호 동의한 보안협정에 의거하여 군사지역을 일정한 지역으로


348<br />

제한하고 시나이 반도로부터 이스라엘이 완전히 철군하는 몇 가지 주요한 요소로 이루어졌<br />

다. 이스라엘은 협정 조항에 따라 평화의 대가로 전략적 군사기지를 비롯한 여러 자산을 포<br />

기하며 시나이 반도로부터 완전 철군했다(1982).<br />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협정을 맺은 뒤 다른 아랍 국가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기도 했지만 이후<br />

이들 국가는 모두 이집트와의 수교를 재개하고 카이로에 대사관을 다시 개설했다. 튀니지로<br />

이전되었던 아랍연맹의 본부도 1980년대 초 다시 카이로로 돌아왔다.<br />

30년 간의 불신과 적대관계를 극복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국교<br />

정상화는 길고도 힘든 과정이다. 그러나 양국에 대사관과 영사관이 세워지고 정부 장관 및<br />

고위급 회담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br />

팔레스타인의 테러가 다시 시작되면서(2000년 9월) 양국 관계는 상당히 냉각되었고 이집트<br />

는 대사를 소환하기도 했으나 결국 2005년 초 다시 대사를 파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br />

역과 협력은 계속되고 있으며 합동 군사위원회도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이집트의 기여로<br />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서 철수했다는 면에서 보면 양국 관계는 개선되고 있다고 할 수 있<br />

다.


349<br />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와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 • GPO/ 아모스 벤 게르숌<br />

요르단<br />

후세인 왕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워싱턴에서 만나 양국 간의 전쟁상태 종식을 선언하고<br />

3개월 후 요르단과 이스라엘 간 평화협정이 아카바, 에일랏 국경지대에서 체결되었다(1994<br />

년 10월).<br />

<strong>사실</strong>상 46년간 전쟁상태였지만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비밀리에 접촉을 유지하며 이 기간 동<br />

안 상호간에 이익이 되는 여러 협정을 체결했다.<br />

1991년 마드리드 회담으로 공식 양자회담이 시작된 후 양국이 교전행위를 멈추고 양국 영<br />

토 내에서 서로에 대한 어떠한 폭력적 위협도 가하지 않으며 테러를 막기 위해 노력을 아끼<br />

지 않고 전시 체제를 신뢰구축 조치로 변화시킴으로써 함께 중동의 안전과 협력을 달성하기<br />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의 공식협정이 체결되었다(1994). 그 밖의 조항으로는 현존하는 수<br />

자원의 배분 관련 합의, 양국 국민의 자유로운 상호 방문 허용, 난민 문제 완화 노력과 요<br />

르단 리프트 밸리 개발 협력 등이 있다. 이 조약으로 1949년 합의한 휴전선 대신 새로운 국<br />

경이 정해졌고 이 국경은 영국령 국경(1922-48)을 토대로 범위가 정해졌다.


350<br />

평화조약이 비준되면서 완전한 외교관계가 수립되었고 그 이후로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의<br />

관계는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br />

경제, 과학, 문화 방면의 12가지 상호 협정이 조인, 비준되면서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 평화<br />

조약의 실행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들 협정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하쉼 왕국 간 평화관계의<br />

기초가 될 것이다. 평화관계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일로는 특화산업단지(QIZs)가 만들어<br />

짐으로써 요르단이 이스라엘과의 협력을 통해 10억 달러 이상의 상품을 미국에 무관세, 비<br />

쿼터 조건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이스라엘은 두 개의 농업 프로젝트와<br />

공공보건 부문에서도 요르단과 협력하고 있다.<br />

1999년 3월에 아버지 후세인 국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압둘라 2세는 2000년 4월에<br />

이스라엘을 방문했다.<br />

팔레스타인 테러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후(2000년 9월) 요르단과의 관계가 냉각되었고 요<br />

르단은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이후 양국관계가 조금씩 개선된 끝에 요르단은 2005년에<br />

다시 대사를 파견했다.


351<br />

2003년 6월 국왕 압둘라 2세는 아카바에서 부시 대통령과 샤론 총리, 마흐무드 압바스 팔<br />

라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참석한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2004년 4월 국왕 압둘라 2세는 당<br />

시 총리였던 샤론의 네게브 관저에 방문했다.<br />

걸프 국가<br />

중동의 오슬로 평화협정의 결과로 걸프 국가들은 1948년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과의 관계<br />

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초 접촉 이후 연이어 고위급 공직자들의 상호방문이 이루어<br />

졌다. 1996년 5월 이스라엘은 수자원 이용, 관광, 농업, 화학, 첨단기술을 중심으로 한 경제,<br />

과학, 상업적 관계 발전을 위해 오만과 카타르에 무역대표부를 열었다.<br />

2000년 팔레스타인 테러가 다시 시작된 후 걸프 국가와의 관계가 냉각되었다. 이후 오만의<br />

이스라엘 무역대표사무소는 문을 닫았다.<br />

마그리브 국가<br />

1994년 모로코, 모리타니아, 튀니지 등 북아프리카의 아랍 3국은 다른 아랍국가들과 함께<br />

이스라엘과 수교를 맺음으로써 평화와 화해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352<br />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작된 모로코와 이스라엘 간의 관계는 이스라엘이 모로<br />

코의 수도 라바트에 연락 사무소를 개설(1994년 11월)함으로써 정상화되었다. 4개월 후 모<br />

로코도 <strong>이스라엘에</strong>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면서 공식적으로 양국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br />

모리타니아 이슬람 공화국과 이스라엘은 바르셀로나 회담(1995년 11월)에서 스페인 외교부<br />

장관의 입회 하에 각각 텔아비브와 누악쇼트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에 사무부처를 만들기로<br />

합의했다. 모리타니아는 텔아비브에 외교 공관을 열고(1996년 5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완<br />

전히 정상화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br />

1999년 10월 모리타니아는 (이집트와 요르단의 뒤를 이어) 아랍 국가 중 세 번째로 이스라<br />

엘과 완전한 외교관계를 수립한 국가가 되었다.<br />

이스라엘, 튀니지, 미국 간에 협의(1996년 1월)된 일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튀니지에 사무국<br />

을 개설했고(1996년 4월), 튀니지도 6주 후 <strong>이스라엘에</strong> 사무국을 열었다 (1996년 5월).<br />

온건한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는 이러한 국가들이 아랍세계에서 맡고 있는<br />

역할과 수 세기 동안 가족이 살아 온 본국에 정서적 애착을 지닌 채 <strong>이스라엘에</strong> 살고 있는


353<br />

많은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 때문에라도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애착은 이들 국가와의<br />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평화진전에 실제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큰 자산이다.<br />

2000년 팔레스타인 테러가 다시 시작된 후 모로코와 튀니지는 이스라엘과의 국교를 단절했<br />

다. 그렇다고 해도 일부 상업적 관계와 관광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분야의 접촉은 계속되고<br />

있다.


354<br />

교황청<br />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GPO/ 아모스 벤 게르숌<br />

이스라엘과 교황청 간의 완전한 외교관계 수립(1993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조인된 기본협약<br />

조항에 따라)은 1965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발표된 우리들 시대(Nostra Aetate)라 알<br />

려진 선언에 의해 공식적으로 시작된 가톨릭교의 유대교 및 유대인에 대한 태도 변화의 역<br />

사적인 사건으로 비쳐졌다.<br />

이스라엘과 교황청은 기본협약에서 ―가톨릭 교회와 유대인 간 관계만의 특별한 속성‖에 대<br />

해 언급하고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와 모든 종류의 인종 차별주의, 종교적 비관용을 척결<br />

하고 국가 간의 상호이해와 공동체 간의 관용, 인간 생명과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증진시키<br />

기 위한 적절한 협력‖과 ―전세계에서 폭력과 테러를 몰아내고 국가 간 갈등의 평화로운 해<br />

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 밖에 조항으로는 기독교 성지와 관련된 현 정권, 종교<br />

의 자유 관련 문제, 성지순례 등의 문제 등을 다룬 조항들이 있다.<br />

1997년 11월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의 가톨릭 교회의 지위와 이스라엘 법에 따른 가톨릭 교회의 위


355<br />

상을 규정한 협약이 예루살렘에서 조인되었다. 이는 성지에 위치한 국가 정부가 법적으로<br />

가톨릭 교회를 인정한 최초의 협약이었다.<br />

2000년 3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개인적으로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하<br />

여 에제르 와이츠만 대통령과 에후드 바락 총리와 만남을 가졌다. 그 외에 교황은 랍비 지<br />

도자들과 회담도 하고 야드 바솀과 통곡의 벽도 방문했다. 교황의 이러한 방문은 유대교와<br />

가톨릭 교회간의 이해가 증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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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연합(UN)<br />

이스라엘은 1949년 5월 11일 국제연합(UN)의 59번째 회원국 승인을 받았다. 이후 이스라엘<br />

은 다양한 UN 활동에 참여하며 보건, 노동, 식품 및 농업, 교육, 과학 문제를 다루는 여러<br />

UN 기구 활동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UN의 보호 아래 항공에서 이민, 의사소<br />

통에서부터 기상, 무역에서 여성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br />

는 민간기구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br />

50년 동안 이스라엘은 UN의 지역별 그룹에서 제외되었다가 2000년 4월 임시로 서구지역<br />

그룹(WEOG)에 포함되었고 이후 아시아 그룹에 들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UN의<br />

주요기구 선출권을 갖게 되고 주요기구에 선출자격도 갖추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WEOG를<br />

통해) 제 60차 UN 총회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br />

UN 결의안 중에는 <strong>이스라엘에</strong>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결의안도 있다. 그 중에는 아랍과 이<br />

유대인들이 고국인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고 <strong>이스라엘에</strong>서 유대전통을 부활<br />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제 1차 시온주의 총회(1897)에서 세계 시온주의 기구(WZO)가 창설되<br />

었다. 1948년 법적으로 보장 받고 국제적으로 인정 받은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이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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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서 WZO의 주된 목표가 달성되었다. 그 이후로 WZO는 유대인의 화합과 유대인의 삶에<br />

서 이스라엘이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춘 활동을 장려하고, 이민을<br />

도우며, 전세계 유대 공동체의 유대 교육을 진작하고, 유대인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는 등<br />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접촉의 중심점 역할을 해왔다. WZO의 최고 기구이<br />

자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세계 시온주의 의회는 4~5년마다 예루살렘에서 열린다.<br />

스라엘 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합의된 토대를 마련한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호<br />

(1967년 11월 22일)와 338호(1973년 10월 22일)가 있다.<br />

그 간 UN은 중재국을 임명하고, 휴전 협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며, 적대국 간에<br />

UN군을 주둔시킴으로써 이스라엘과 아랍 이웃 국가간의 적대관계를 중단시키려는 노력을<br />

활발히 벌여왔다.<br />

UN은 수년간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정치적 전쟁의 싸움터로 이용되어 왔다. 이슬람 국가들<br />

과 그들의 우방인 비동맹국 진영의 지원을 받는 21개 아랍국은 ‗자동적 다수‘를 구성하여<br />

총회에서 반 이스라엘 결의안을 확실히 채택하도록 했다.<br />

UN 총회에 유대인 문제를 안건으로 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스라엘은 2005년 유럽의<br />

나치 수용소 해방 60주년을 기념하는 UN 특별 총회를 개최하는 데 성공하였고 연례 홀로<br />

코스트 기념일에 새로운 UN 총회 결의안을 채택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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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유대인<br />

최초의 유배(기원전 586) 이후 유대인들이 전세계로 흩어져 살게 되면서 이스라엘 땅에 사<br />

는 유대인과 국외에 거주하는 유대인 간에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인 관계가 만들어졌다. 수<br />

세기 동안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나의 국가를 유지하고 공통<br />

의 역사, 종교, 고국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육체적, 정신적 생존을 위한 하나된 노력으로 결<br />

속되어있다. 이스라엘의 건국(1948)은 고대의 조국으로 돌아가 유대인 국가를 다시 세우고<br />

주권을 회복하겠다는 이들의 2000년 된 꿈에서 비롯된 것이다.<br />

현재 전세계적으로 유대인의 수는 1,3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며 이중 41%가 이스라<br />

엘에 거주하고 있다. 전세계의 유대인들은 역사와 이상, 이익을 함께하며 여러 다양한 문제<br />

에 대한 대화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br />

이스라엘이 유대인의 삶에 중심임을 인정하며 전세계 유대인들은 사회, 정치, 재정적 지원<br />

을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만의 기술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채 이스라엘로 거주지를 옮겨 이<br />

스라엘의 문화적 다양성을 더함으로써 이스라엘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유대인끼리 서로 돕<br />

는 오랜 전통은 수백 개의 유대 이스라엘 이익집단을 위해 만들어진 다방면의 조직적인 네<br />

트워크에 잘 나타나 있다.<br />

오늘날 이스라엘을 위한 유대인 기구(JAFI)는 이스라엘과 전세계 유대인 간의 관계를 발전<br />

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JAFI는 영국신탁통치정부, 외국 정부, 그리고 국제 기구에<br />

맞서서 이스라엘 유대인 공동체를 대표하기 위해 WZO에 의해 설립되었다(1929).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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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립한 후 법에 의해 이민, 수용, 농촌 지역 정착, 이민자 주택 마련, 교육 및 청소년 활<br />

동, 도시 재정비 등 국정의 일부를 JAFI와 WZO에서 맡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이러한 일<br />

중 상당수를 다시 정부가 담당하게 되었다.<br />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어려움에 처한 유대인들을 돕고 이스라엘 중심의 활동과 히브리어<br />

연구, 경제적 기회 제공, 단체 및 개인의 이스라엘 방문을 장려함으로써 유대 공동체 및 이<br />

들과의 유대를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br />

이스라엘은 전세계 유대 공동체의 안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최근 반유대주의가<br />

다시 고개를 들면서 이스라엘은 유대인 기구, 유럽 각국 정부 및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정<br />

부와 함께 협력하여 전체적으로는 인종 차별주의 보다 구체적으로는 반유대주의와 맞서 싸<br />

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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