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 - 한국브레히트학회

136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한편 지극히 평범한 노동자 한나가 나치 범죄에 무비판적으로 연루되는 과정을 통
해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반인륜적 만행을 초래한 것은 그들이 악마같은 괴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미하엘은 말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죄질을 경미하게 보자는 것은 아
니다. 중요한 것은 한나의 경우처럼 엄중한 심판 아래 처단해야 할 나치시대의 ‘가해
자들’이 그들을 비난하는 후세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다는 사실이다. 19)
여기에서 역사가 전하는 경고의 메세지는 더욱 당황스럽고 복합적인 국면을 보인
다. 홀로코스트의 본질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거쳐 그 원인과 성격이 규명되지 않는
한 ‘가해자’인 그들을 비난하고 거리를 두는 것만으로 과거에 자행됐던 오류를 또다
시 반복하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하엘은 나치과거를 트라우
마처럼 경험한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가 아직도 일종의 ‘마취상태 Betäubtsein’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런 마취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과거에 갑작스럽게 떠난 여인에 대한 개인적인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미
하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하엘은 제 2세대 중에서도 전형적인 엘리트이다. 그는 정치적 노선을 분명히 하
는 적극적인 행동주의자와는 거리가 먼, 고민하고 주저하는 지식인세대를 상징한다.
비판적 의식은 견지하되 행동력이 부족한 이 시대의 햄릿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
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 최고의 지성인이 되었지만, 그의 사생활은 지극히 메말라
있다. 철학을 전공한 아버지를 만나려면 면담시간을 신청해야 할 정도로 가족의 따스
함이나 끈끈한 정이 결여되어 있다.
미하엘은 좁게 보면 제발트 Winfried Georg Sebald가 말한 “시대고향 Zeitheimat” 20)
19) 이와 유사한 관찰에 대해서는 한나 아렌트 저/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389-391쪽 참조. 여기서 아렌트는 나치전범 아이히만이 놀랍게도 악마같은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다는데 주목한다. 그가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자율적으로 판
단하고 직무를 수행할 사고능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그의 경
우를 진단한다.
20) Volker Hage: Zeitheimat. Ein Gesespräch mit Winfried G. Sebald. In: Akzente 50 (2003), S. 35-50.
1999년 제발트는 공중폭격전과 문학 Luftkrieg und Literatur이란 책에 흥미로운 주장을 펼쳐 한
동안 열띤 문학논쟁이 지속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의 지적은 그가 태었났던 제2차대전 말기에
연합군의 ‘공중폭격전’으로 온통 폐허더미가 되었던 독일의 참상과 그 시기의 삶을 다루고 있는
독일인들의 문학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독일과거에 대한 문학논쟁이 본격화되었는
데 그와 입장을 달리하는 뤼츨러 P. M. Lützeler, 폴커 하게 등이 반론을 폈고 하게는 제발트와의
논쟁을 거친 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두 권의 책을 펴내 화제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