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2014 Views

모듈 1 협동조합의 생성과 발전

You also want an ePaper? Increase the reach of your titles

YUMPU automatically turns print PDFs into web optimized ePapers that Google loves.

등 전문 경영을 중시했다.<br />

슐체가 확립한 이러한 운영 시스템은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했다. 1905 년까지<br />

1 천개 이상의 신용협동조합이 설립되고, 약 60 만 명에 달하는 조합원을 보유하<br />

게 되었다. 나치 정권 하에서는 예금과 공채 인수를 주축으로 하는 제도금융을<br />

담당하였다. 제 2 차 세계대전 후에도 많은 <strong>발전</strong>을 하였으나, 점차 슐체의 이념이<br />

약화되고 신용조합보다는 중소기업협동조합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해졌다.<br />

나. 빌헬름 라이파이젠(1818∼1888)<br />

빌헬름 라이파이젠(Wilhelm Raiffeisen)은 독일 농촌 신용조합의 창설자이자,<br />

농업<strong>협동조합의</strong> 사실상 원조로 평가받고 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라이파이젠<br />

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성장했다. 그는 일선 행정기관의 서기를 거쳐 읍장을<br />

역임했다. 그는 읍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br />

이 심각한 빈곤 상태에 처해 있음을 목격하였다. 당시 농민들은 대부분 자금이<br />

없어 농사철에 비료·농약·종자를 외상으로 구입한 뒤 이를 수확 후에 고율의<br />

이자로 변제하는 악순환을 반복하였다. 악성 부채에 시달리다 못해 수확이 채 끝<br />

나기도 전에 농산물을 상인들에게 저가로 인도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특히‘배<br />

고픈 40 년대’라고 불릴 정도로 1840 년대는 극심한 기근이 전 유럽을 휩쓸고 있<br />

었다. 1845∼47 년 동안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는 감자가 말라 죽는 병이 퍼져 감<br />

자 수확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감자의 부족은 다른 식품의 가격상승을 가져왔다.<br />

결국 수백만 명이 굶어 죽고, 높은 실업률과 정치 불안이 야기되었다.<br />

라이파이젠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가난한 농업인들에게 감자와 빵을 배급<br />

하는 조직을 설립함과 동시에, 부유한 계층의 원조에 의지해 농민을 원조하기 위<br />

한 대부조합을 설립하였다. 1849 년에는 농촌고리채 해소 운동의 일환으로 푸람<br />

멜스펠드 구제조합을 만들어 자금 대부사업을 개시하였고, 1854 년 헷데스돌프로<br />

전임한 뒤에는 헷데스돌프 자선조합을 설립하여 농업인 구제에 많은 힘을 기울였<br />

다. 그런데 이러한 신용조합은 부자들의 기부에 의해 유지되어 다분히 자선적 성<br />

격이 강하였다. 부자들의 기부행위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으므로 조합<br />

은 당연히 지속 운영되기 어려웠다. 라이파이젠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br />

으며, 이 때 슐체가 조합원의 상호부조 원칙에 기초하여 대부조합을 설립했다는<br />

소식을 듣고 그와 의견을 교환하며 자립 가능한 협동조합 모델을 강구하기 시작

Hooray! Your file is uploaded and ready to be published.

Saved successfully!

Ooh no, something went w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