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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 한국 ... - Kore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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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사회과학연구 제35권 제2호<br />

Ⅰ. 문제제기<br />

지금부터 20여년 전인 1987년 1월 14일에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이던 박종철<br />

군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수사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br />

다. 당시 검찰을 출입하던 신성호 중앙일보 기자가 15일 이를 특종으로 보도한다<br />

(중앙일보사 데이타뱅크국 전략DB팀, 1995). 미국의 워터게이트와 비유되는 박종<br />

철 사망사건은 그 이후 22일 동안 국내 언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됐던 뉴스였<br />

다. 하지만 북한을 탈출해 공해상에 있던 김만철씨 일가족 11명이 일본을 거쳐 2<br />

월 8일 서울에 도착하면서 박종철 사망사건은 국내 신문과 방송이라는 공론장에<br />

서 사라진다. 박종철 사망보도는 이렇게 일단락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천주교<br />

정의구현 사제단이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제 7주기 미사’에서 박종철 사건의 진<br />

상이 조작됐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이어서 동아일보가 박군을 조사했던 경찰<br />

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라는 사실을 보도했으며, 22일에는 경찰의 범인축소 조작<br />

모의 사건을 특종으로 폭로한다 (김정남, 2007; 전국언론노련, 1994).<br />

박군 사망은 1월에 경찰 수사관의 가혹행위에 의한 고문치사 사건으로 다루어<br />

졌다. 박군의 사망 현장에 2명이 아니라 5명의 경찰관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br />

5월 21일 이후에는 경찰의 고문행위를 넘어 정부가 범죄를 축소하며 은폐조작에<br />

관여한 사건으로 프레임 됐다. 이러한 언론보도를 접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군<br />

사정부의 통치행위가 더 이상은 곤란하다”는 집단적인 감정구조를 형성했으며, 이<br />

에 따른 국민적 분노가 6․10항쟁으로 이어진다. 박군 추모로 조직된 국민운동 본<br />

부가 주도한 1987년 6월 10일의 국민대항쟁의 공식 명칭이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br />

폐규탄 및 호헌철폐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이었다. 박종철 사건은 이 대회 명<br />

칭이 보여주듯이 6월 항쟁의 기폭제였으며, 한국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에 대한<br />

국민적 요구를 수용한 6․29선언의 촉매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박군 사망으로부<br />

터 6․29선언까지 한국사회의 민주화 전개과정은 여러 학술논문과 시사주간지, 그<br />

리고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다룬 현대사 문헌에 비교적 자세히 기술돼 있다 (참<br />

조: 남시욱, 2004; 심재철․이경숙, 1999; 심재철․이효연․김수진․이진경, 2005;<br />

안상수, 1995).<br />

이러한 역사적 기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한국 언론이 박<br />

종철 탐사보도를 통해 민주화 의제형성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느냐에 대한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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