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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 한국 ... - Korea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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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ived July 15, 2009<br />

Revised August 10, 2009<br />

Accepted August 17, 2009<br />

사회과학연구 2009; 35(2)<br />

The Social Science Researches<br />

Vol.35, No.2, 2009; 137-160<br />

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br />

한국 민주화 의제형성의 상황모델 1)<br />

심재철(Jae Chul Shim)<br />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br />

shim@korea.ac.kr<br />

요 약<br />

이 연구는 박종철 사건보도와 그 이후 6․29 선언까지 한국의 민주화에서 국내언론<br />

의 기여에 대한 서울시민의 평가와 집단적 기억을 분석했다. 이를 위해 윌리암스의<br />

감정구조와 반다이크의 상황모델이란 분석틀을 사용해 박종철 사건보도와 민주화 과<br />

정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를 설문조사했다. 서울시민은 박종철 이름을 포함<br />

해 당시 이러한 사건이 이루어진 배경에 대한 사회문화적 거대구조를 잘 기억해 냈<br />

다. 하지만 박종철 사건의 세부사항으로 갈수록 이를 기억해 내는 비율이 점차로 줄<br />

어들었다. 이러한 발견에 근거해 서울시민의 박종철 사건보도에 대한 집단적인 상황<br />

모델과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인 정서구조를 분석했다. 이어 한국의 민주화 의제형성<br />

에서 언론의 역할에 대해 조명해 보았다.<br />

핵심용어: 박종철 탐사보도, 집단적 기억, 상황모델, 감정구조, 민주화 의제형성<br />

1) 이 연구는 “탐사저널리즘과 민주화 의제 형성 그리고 국민생활의 품격”이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고려<br />

대학교 특별연구비에 의하여 수행(Supported by a <strong>Korea</strong> <strong>University</strong> Grant)됐다.


138 ❙사회과학연구 제35권 제2호<br />

Ⅰ. 문제제기<br />

지금부터 20여년 전인 1987년 1월 14일에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이던 박종철<br />

군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수사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br />

다. 당시 검찰을 출입하던 신성호 중앙일보 기자가 15일 이를 특종으로 보도한다<br />

(중앙일보사 데이타뱅크국 전략DB팀, 1995). 미국의 워터게이트와 비유되는 박종<br />

철 사망사건은 그 이후 22일 동안 국내 언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됐던 뉴스였<br />

다. 하지만 북한을 탈출해 공해상에 있던 김만철씨 일가족 11명이 일본을 거쳐 2<br />

월 8일 서울에 도착하면서 박종철 사망사건은 국내 신문과 방송이라는 공론장에<br />

서 사라진다. 박종철 사망보도는 이렇게 일단락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천주교<br />

정의구현 사제단이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제 7주기 미사’에서 박종철 사건의 진<br />

상이 조작됐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이어서 동아일보가 박군을 조사했던 경찰<br />

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라는 사실을 보도했으며, 22일에는 경찰의 범인축소 조작<br />

모의 사건을 특종으로 폭로한다 (김정남, 2007; 전국언론노련, 1994).<br />

박군 사망은 1월에 경찰 수사관의 가혹행위에 의한 고문치사 사건으로 다루어<br />

졌다. 박군의 사망 현장에 2명이 아니라 5명의 경찰관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br />

5월 21일 이후에는 경찰의 고문행위를 넘어 정부가 범죄를 축소하며 은폐조작에<br />

관여한 사건으로 프레임 됐다. 이러한 언론보도를 접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군<br />

사정부의 통치행위가 더 이상은 곤란하다”는 집단적인 감정구조를 형성했으며, 이<br />

에 따른 국민적 분노가 6․10항쟁으로 이어진다. 박군 추모로 조직된 국민운동 본<br />

부가 주도한 1987년 6월 10일의 국민대항쟁의 공식 명칭이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br />

폐규탄 및 호헌철폐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이었다. 박종철 사건은 이 대회 명<br />

칭이 보여주듯이 6월 항쟁의 기폭제였으며, 한국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에 대한<br />

국민적 요구를 수용한 6․29선언의 촉매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박군 사망으로부<br />

터 6․29선언까지 한국사회의 민주화 전개과정은 여러 학술논문과 시사주간지, 그<br />

리고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다룬 현대사 문헌에 비교적 자세히 기술돼 있다 (참<br />

조: 남시욱, 2004; 심재철․이경숙, 1999; 심재철․이효연․김수진․이진경, 2005;<br />

안상수, 1995).<br />

이러한 역사적 기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한국 언론이 박<br />

종철 탐사보도를 통해 민주화 의제형성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느냐에 대한 평


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 한국 민주화 의제형성의 상황모델 ❙139<br />

가이다. 다른 하나는 소위 시민세력이라 불리는 재야단체가 6․10항쟁에서 어떠한<br />

방식으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느냐에 대한 묘사이다. 한쪽에선 당시 신문이 국민<br />

의 기본권을 짓밟은 제 5공화국의 통치행위에 대해 적절히 감시하지 못했다면<br />

6․29선언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쪽에선 지상파 방송은 말할<br />

것도 없고, 동아일보를 포함한 신문마저도 기회주의적이었으며, 민주화 대세에 편<br />

승했다고 평가한다. 양쪽이 비슷한 논리로 자기 세력의 민주화 기여를 부풀리면서<br />

도 상대방의 기여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까지 보여 준다 (참조: 심재철, 1997;<br />

최장집, 2002).<br />

그렇다면 정치적으론 민주화를 원하면서도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기를 희망했던<br />

대다수 사회구성원은 권위주의 정부시절의 신문과 방송의 역할에 대해 어떠한 평<br />

가를 내리고 있을까. 구체적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탐사보도로 여겨지는 박종철 사<br />

건보도에 대해 국민들은 어떻게 평가를 해왔을까. 당시의 탐사보도의 세부사항에<br />

대해 얼마나 기억하며, 박종철 사망사건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한국에서<br />

과연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할까. 대다수 언론인을 포함해 보수적인<br />

한국의 지배엘리트들은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던 군사정권하에서 박군 사망의 진<br />

실을 폭로한 당시의 언론보도가 한국 민주화의 촉매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하지<br />

만 당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진보적 재야 세력은 박군 사망보도 등 몇몇 예<br />

외를 제외하곤 당시 언론이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당시의<br />

권위지였던 동아, 조선, 중앙, 한국일보의 경우에도 전두환 대통령으로 상징되는<br />

신군부의 등장과 이들 세력의 정권장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며 ‘권력의 시녀’<br />

역할을 자임했었다고 평가한다. 이에 따라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에서는 진보적 세<br />

력에 의해 조선, 중앙, 동아일보를 표적으로 삼은 언론개혁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br />

다. 최근에는 이들 신문의 광고주에 대한 상품 불매 운동까지 전개되고 있다.<br />

한국의 엘리트 신문에 대한 평가는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이와 같이 상호 엇갈리<br />

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들 세력으로부터 다소 중립적이며 객관적인 입장을<br />

견지할 수 있는 일반 시민들은 한국사회의 전환기에 박종철 사건을 포함한 국내<br />

신문과 방송의 취재 보도활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 왔을까. 당시 언론자유가 억<br />

압받는 군사정부의 통제 속에서 시민의 기본권 보장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와<br />

주위환경에 대한 최선의 감시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에 순기능적이었다고 평가할<br />

까. 아니면 당시 언론의 취재보도 활동이 민주화 대세에 편승해 기회주의적이었고<br />

따라서 한국사회의 정상적인 민주화 발전에 오히려 역기능적이었다고 평가할까.


140 ❙사회과학연구 제35권 제2호<br />

이 연구는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우선 박종철군 사건보도를 한국사회의 변<br />

혁을 이끌어낸 대표적인 탐사보도로 선정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화 의제설정 과<br />

정에서 박군 보도를 포함해 한국 언론이 주위환경을 감시하는 본연의 업무를 얼<br />

마나 잘 수행해 왔는지에 대해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했다.<br />

한국이 민주사회로 진입하는 전환기에 ▲주위환경을 감시하며 ▲사회 제 세력<br />

을 연결해 ▲문화적 유산을 후대에 전승하는 언론의 역할에 대한 국민적 평가를<br />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를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이 필요하다.<br />

이러한 분석틀은 사회역사적인 시각에 기초해 거시적 차원에선 한국인의 집단 문<br />

화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인지 심리학에 기초해서 미시적으론 국민 개<br />

개인이 언론에 대해 어떻게 느꼈으며 생각해 왔는지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즉<br />

당시 언론의 취재보도 활동에 대한 국민정서가 시민의 개인적 평가에서 출발해<br />

어떤 사회문화적 과정을 거쳐 집단기억으로 형성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br />

거시적 관점에선 문화적이면서도 미시적으론 수용자의 정보처리 모형에 근거해,<br />

상호간의 차원을 연결하는 이론적 분석틀이 필요하다. 민주화 이전의 한국 언론에<br />

대한 평가를 위해 반다이크의 ‘상황모델(Situation Model)’과 자이언스의 ‘감정과<br />

사고(feeling and thinking)’, 그리고 윌리암스의 ‘감정구조(Structure of feeling)’란<br />

개념을 동원한 다차원적 분석틀을 제시한다.<br />

Ⅰ.서울시민의 집단기억과 국민적 정서구조에 대한 분석틀<br />

박종철 사건과 연계돼 노신영 국무총리와 장세동 중앙정보부장을 포함한 제 5<br />

공화국의 중심세력이 물러난다. 비슷하게 리차드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br />

대통령에서 사임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언론 시스템에 대한 미국<br />

민의 집단적인 기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워싱턴 포스트》<br />

의 봅 우드워드와 칼 버스타인 기자의 탐사보도 활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브랜<br />

넌(Brennen, 2003)에 따르면,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자술적 저서인 ‘대통령의 사<br />

람들’이란 책자는 1970년대 미국에서 시들어가던 언론인의 직업적 사명감에 대해<br />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대통령의 사람들은 1976년 영화화 돼 로버트 레드포드와<br />

더스틴 호프만이 주인공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을 받았고, 죠스만큼


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 한국 민주화 의제형성의 상황모델 ❙141<br />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Canby, 1976).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미국 저널리즘에<br />

대한 사회문화적 평가와 그 이후에 형성된 언론에 대한 미국인의 집단적 기억을<br />

분석하기 위해 브랜넌은 레이먼드 윌리암스의 ‘감정구조 (structure of feeling)'라<br />

는 개념을 소개한다. 2) 윌리암스(Williams, 1989)에 따르면, 인간의 감정구조란 일<br />

종의 상상력의 집합체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실제에 기초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br />

실제보다 더 크며, 사회집단원의 상호작용 속에서 창의적으로 형성될 수도 있다고<br />

한다.<br />

브랜넌은 윌리암스의 감정구조란 개념이 개인적인 몽상의 수준을 넘어선 일종<br />

의 사회구성원의 기억에 근거한 집단적 인식 및 평가라고 정의한다. 공동체 구성<br />

원이 상호 공유하는 상상력은 “개인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you feel your<br />

way into, feel informing you)" 미래사회로의 진입을 가능케 하는 동기나 지향성<br />

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윌리암스는 이러한 집단적 감정구조가 “잘 이해될 수<br />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지도 않았다(fully knowable but not<br />

yet known)"라고 표현한다 (Williams, 1983). 따라서 감정구조란 개념은 하나의<br />

역사적 사건이 공동체 구성원의 시대적 정서에 근거해 집단 기억으로 형성되는<br />

과정을 이해하는 문화적인 분석틀로 사용될 수 있다 (Williams, 1989).<br />

이같이 윌리암스의 감정구조라는 개념은 추상적이다. 어디까지가 개념이며 어디<br />

서부터가 이론적인 분석틀로 사용할 수 있는지 명확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좀 더<br />

쉽게 풀어본다면 어떤 사건이나 이벤트, 혹은 사회문화적 현상에 내재돼 있는, 따<br />

라서 대다수 사회구성원이 공유할 수 있는 일종의 시대정신과 같은 개념 혹은 분<br />

석틀로 간주할 수 있다. 브랜넌은 감정구조란 개념을 분석틀로 사용해 ‘대통령 사<br />

람들’이란 책자에 내재돼 있는 워터게이트 사건보도에 대한 미국민의 평가와 정서<br />

를 파헤쳤다. 미국에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리는 탐사보도를 통해, 사실의 정<br />

확한 보도를 위해서는 적어도 취재원을 세 사람 이상 확인하는 삼각확인이라는<br />

객관적인 취재보도 기법이 자리잡게 됐다고 한다. 워터게이트 탐사보도가 미국식<br />

저널리즘의 이데올로기로 신화화 되는 과정을 브랜넌은 ‘대통령 사람들’이란 책자<br />

에 대한 미국인의 감정구조를 분석해 추적한다.<br />

미국식 객관주의 보도의 신화화를 다른 사례를 들어 설명해 보자. 화재가 나서<br />

빌딩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어가는 가운데에도 이들 사상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밝<br />

2) feeling을 우리말로 ‘감정’이라고 번역한다. 한국 심리학회(www.koreanpsychology.or.kr)의 학술용어<br />

에 따르면 feeling은 ‘감정’이며 emotion은 ‘정서’로 통일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 집단적인 감정을<br />

나타낼 때 본문에서 특별히 ‘국민정서’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142 ❙사회과학연구 제35권 제2호<br />

혀내야 할 책무가 언론에게 있다. 그래서 언론보도는 첫째도 정확, 둘째도 정확,<br />

셋째도 정확해야 한다. 정확히 보도해야 하는 저널리즘의 책무는 대다수 경우에<br />

진실자체에 접근하기조차 힘들다. 그래서 주요 정보원을 만나기 위해서 소위 ‘삼<br />

일 밤낮을 뻗쳐가며’ 집 앞에서 대기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렇게 끈질<br />

기며 지루한 확인 작업 자체가 ‘대통령 사람들’에서 보듯이 취재대상자의 인권을<br />

침해할 소지가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보도에서 보듯이 ‘딥 쓰로트(Deep Throat)’와<br />

같은 신뢰할만한 정보원이 없다면 ‘나무는 보지만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br />

수가 있다. 더구나 ‘믿을 수 있는 소스’에 의존한 뉴스일지라도 정보원의 관점에<br />

의해 뉴스의 방향이 정해지며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위험마저 있다 (박영상,<br />

1999). 그럼에도 일반 시민들은 ‘대통령 사람들’이란 책자나 영화, 혹은 워터게이트<br />

사건보도가 종료된 이후의 언론계 자체 평가를 접하면서 미국인은 우드워드와 번<br />

스타인과 같은 탐사보도가를 민주사회의 첨병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브랜넌은 주<br />

장한다. 즉 브랜넌은 미국식 저널리즘 책무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평가가 '대통령<br />

사람들‘이란 책속에서 묘사된 워터게이트 사건의 취재과정에 대한 집단적이며 역<br />

사적인 사회문화적 평가를 통해 미국사회에서 언론인 전문집단의 이데올로기로<br />

자리 잡게 됐다고 분석한다.<br />

박종철 사건에 대한 국민적 감정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을 워터게이트 사건과 비<br />

교해 보자.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미국민의 평가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br />

체로 긍정적이다 (참조, Schudson, 1992). 박군 사망보도의 한국 민주화 기여에 대<br />

해서는 이를 미화해 가능한 부각시키려거나, 시대적 추세에 편승해 기회주의적이<br />

었다고 평가 절하하는 세력이 양립한다. 그럼에도 박종철 언론보도에 대한 체계적<br />

인 연구는 워터게이트 사건보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 더불어 박군 사망<br />

보도와 연계한 시민사회의 민주화 요구와 이에 따른 집단적이며 시대적인 감정구<br />

조의 변화, 즉 일반인이 언론보도를 접한 후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국민적 정서구<br />

조 변화에 관한 연구는 전무하다.<br />

언론보도가 국민적인 집단기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반다이크는 ‘상황모델’이<br />

란 개념을 제시한다. 이준웅(2009)은 반다이크의 상황모델이란 개념을 이용해 언<br />

론보도의 뉴스 프레임을 분석하는 동시에 이러한 뉴스 프레임이 가져오는 대 사<br />

회적 영향력을 함께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다이크의 상황모델이란 개개의<br />

사건을 묘사하는 ‘일대일의 인지적 표상’아니라 일련의 사건을 통합해서 보여주는<br />

‘종합적 표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특정한 사건에 대한 상황모델이란 뉴스이용


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 한국 민주화 의제형성의 상황모델 ❙143<br />

자의 머릿속에 존재하며, 그러한 사건과 관계된 상황을 묘사한 뉴스 텍스트에 대<br />

한 뉴스 이용자가 해석하는 결과물이다. 하지만 역으로 언론인은 일련의 사건에<br />

대한 그들 머리 속의 상황모델에 따라 텍스트의 이야기 구조를 생산해내기도 한<br />

다(van Dijk, 1995). 반다이크가 설명하듯이, 뉴스이용자가 가지고 있는 상황모델<br />

과 언론인이 작성한 ‘문맥(context) 모델’이 상호작용을 해 나가면서 뉴스이용자가<br />

박군의 사망과 같은 일련의 탐사보도에 대해 종합적인 상상력이나 감정구조를 가<br />

지게 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논쟁에서 중요한 사실은 독자나 시청자는 박<br />

군 사망에 대해 세밀한 사항까지 기억해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br />

고 미디어 이용자는 언론보도를 통해 박군 사건을 둘러싼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br />

한 그들 나름의 상황모델을 장기 기억장치 속에 저장해 둘 수 있다.<br />

뉴만(Newman, 1976)의 연구에 따르면, 시청자의 절반 정도가 저녁을 먹으면서<br />

본 뉴스 아이템을 전혀 기억해 내지 못한다. 평균적으로는 20건의 TV뉴스에서 단<br />

지 1건 정도를 기억해 낼 뿐이다. 하지만 세 가지 아이템의 뉴스를 네 번 연속적<br />

으로 보았을 때 시청자가 이들 뉴스를 기억하는 비율은 평균적으로 70%까지 늘<br />

어난다 (Gunter, 1983). 하지만 세 번째 뉴스 아이템까지 모두 기억하는 시청자는<br />

40∼50% 수준으로 떨어진다. 다만 이들 TV시청자의 기억에 관한 연구에서 한 가<br />

지 분명한 발견은 방송이 보도하는 뉴스가치를 제작자와 시청자가 공유하고 있다<br />

는 사실이다 (Katz, Adoni, & Parness 1977).<br />

이러한 기존연구의 발견을 박군 사건보도에 적용해 본다면, 국민이 박군 사건의<br />

세부상항까지 기억하기는 어렵다. 다만 언론을 통해 박군 사망에 대한 뉴스를 접<br />

하면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해석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을 것이다. 나아가 누가<br />

악역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추론할 수 있으며, 향후 정국에 대한 판단을 통해 자<br />

신의 의견을 형성하고 후속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박군 사망에 대한 뉴<br />

스를 접하면서 제 5공화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br />

있었겠지만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기억해 낸다는 가설을 세워<br />

볼 수 있다. 경찰의 가혹행위에 의해 한 대학생이 사망하게 됐다는 제5공화국의<br />

국민기본권 침해에 관한 거대구조는 잘 기억하겠지만 사망보도 과정에서 어떠한<br />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미시적 사항에 대해서는 기억해 내는 비율이 낮아질 것<br />

이라 예측한다.<br />

그렇다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던 제 5공화국의 통치행위에 대한 시민의 종<br />

합적인 판단이 전체적인 정보를 받아들인 후에 엄정하게 분석해서 내려지는 것일


144 ❙사회과학연구 제35권 제2호<br />

까. 꼭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자이언스(Zajonc, 1980)가 밝혔듯이, 박종철 사망사건<br />

에 대해 개인이 갖게 되는 감정구조나 상황모형 형성이 모든 관련 정보를 장기적<br />

기억(long-term memory) 장치에 입력한 후에 종합적인 판단을 통해 이성적으로<br />

만 이루어진다고 간주하기 어렵다. 이러한 가정이 맞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서울<br />

시민이 박종철 사건보도에 나타난 세부사항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를 설문조<br />

사했다. 또 서울 시민이 당시 상황과 언론보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br />

조사했다. 이러한 평가가 당시의 언론보도 이용과 어떠한 역학 관계를 맺고 있는<br />

지를 살펴보겠다.<br />

종합하면, 박군 사망보도를 접한 서울시민이 느끼는 분노나 안타까움, 무관심과<br />

같은 개인적인 감정이 상호작용이나 경쟁을 통해 어떻게 국민적인 정서구조로 형<br />

성화됐는지를 분석해 보겠다. 이러한 집단적인 상황모형이 민주화에 대한 역사적<br />

지향성 혹은 시대정신과 어떻게 연계되고 있는지를 탐구해 보겠다.<br />

Ⅱ. 연구방법: 박종철 사망 뉴스에 대한 서울시민의 기억<br />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발생했던 박종철 사망사건 보도에 대해 서울시민이 20<br />

년이 지난 후 무엇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를 설문조사했다. 이를 위해 일단은<br />

구전 역사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2005년 가을에 서울시민 100명에게 그들이 박종<br />

철 사건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를 심층 인터뷰했다. 나아가 박군<br />

사망보도로부터 시작해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 선언까지 1987년도 한국의<br />

민주화과정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았다.<br />

이러한 구전역사학적 방법을 동원해 얻은 연구 결과물을 중심으로 체계적인 설<br />

문문항을 만들었다. 이어 서울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확률표본을 선택해서 체계적<br />

인 전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한국 갤럽사의 도움을 받아 모집단 틀인 서울시 전<br />

화번호부에서 2500가구의 전화를 무작위(random) 방식으로 추출했다. 이들 전화<br />

번호를 다시 다섯 개씩 500 묶음으로 만들었다. 이들 번호에 전화를 걸어 설문조<br />

사의 목적을 설명한 후 가구내 설문 대상자를 선정해 인터뷰를 실시했다. 해당 가<br />

구에서 ‘다음 생일자 선택 방법(next birthday method)’을 이용해 설문대상자를 선<br />

정했다. 이들 대상자를 인터뷰하기 위해 순차적으로 다섯 번까지 전화를 걸었다.


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 한국 민주화 의제형성의 상황모델 ❙145<br />

다섯 개의 전화번호로 구성된 묶음에서 한 설문대상자라도 인터뷰가 완성되면 다<br />

음 번 전화묶음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352명을 전화 인터뷰했다.<br />

설문 대상자는 박종철 사망사건이 발생했던 1987년에 20세 이상이었던 성인 남<br />

녀이다. 따라서 1967년 이전에 태어난 39세 이상의 서울시민을 인터뷰했다. 설문<br />

조사는 2006년 5월부터 세 달간에 걸쳐 실시했다. 설문 조사자는 매스컴 효과이론<br />

을 수강했던 대학 3, 4학년생과 대학원생이다. 총 50명의 학생이 전화인터뷰에 대<br />

한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이들이 5명에서 10명까지 전화인터뷰를 완성했다.<br />

인터뷰는 신문과 방송의 이용실태로부터 시작해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br />

이후 신군부의 등장과 80년대 정치 상황을 다룬 MBC의 《제 5공화국》을 시청했<br />

는지에 대한 여부를 물었다. 이 드라마는 2005년도에 사회적 이슈가 됐던 연속극<br />

으로 1985년 4월부터 9월까지 방송됐다. 이 드라마에 대한 시청여부를 물어본 이<br />

유는 그들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1980년대 상황으로 옮겨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br />

이후 본격적으로 1987년 박종철 사건 보도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를 물<br />

어 나갔다. 우선적으로 박종철이란 이름과 그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당시 언론보<br />

도에서 회자됐던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는 경찰고위층의 기자회견 내용<br />

과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버지는 할말이 없데이. 잘못이 있다면 네가 너무 똑똑<br />

하기 때문이야”라는 당시 박군 아버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br />

더불어 박군 사망 뉴스를 접했을 때 당시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개방형으로 물었<br />

다. 이어 박군 사망과 관련한 특종이 한국 민주화에 얼마나 기여했다고 인식하는<br />

지를 알아보았고, 당시 민주화과정에서 신문과 TV보도의 기여에 대해 1백점 척도<br />

로 평가하라고 요청했다. 이외에도 제 5공화국에서 언론자유에 대해 1백점 척도로<br />

몇 점을 줄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br />

인터뷰가 종료된 후에 설문인터뷰가 제대로 진행됐는지를 조사했다. 설문조사자<br />

의 평가에 따르면, 적극적인 응답자는 전체의 23%였으며, 보통이거나 특이한 사<br />

항이 없는 응답자가 59%였다. 나머지 18%는 “무성의하게 응답했다”고 평가했다.<br />

이들 무성의한 응답자도 절반 이상의 문항을 답했기에 설문분석에 포함했다. 응답<br />

태도를 조사한 이유는 박종철군 사건이 일어난 후 20년이란 세월이 흘렀기 때문<br />

이다. 서울시민의 기억을 1987년으로 되돌려서 얻어낸 데이터였지만 대다수 설문<br />

문항에 대해 과반수이상의 응답을 얻어냈다. 기초적인 통계빈도부터 일원변량분석<br />

을 거쳐 범주형 회귀분석(categorical data analysis)까지 실시했다.


146 ❙사회과학연구 제35권 제2호<br />

Ⅲ. 연구결과<br />

설문응답자의 평균나이는 53세이다. 연령분포는 40대가 41%, 50대가 37%, 60대<br />

가 14%로, 전체 응답자의 92%를 차지한다. 여성이 56%로 남자응답자보다 많다.<br />

이는 전화인터뷰의 특성으로 보인다. 학력은 대학졸업 이상이 48%이다. 중졸이하<br />

의 응답자도 19%에 달했다. 가구당 연평균소득은 4,250만원이다.<br />

서울시민의 2006년도 가구당 평균소득은 3,846만원이다. 2007년도 평균나이는<br />

36.7세, 여성과 남성의 비율은 100대 98.6로 여성이 많다 (참조: 서울시 통계연보,<br />

2008; 김종민, 2008). 이 연구의 표본을 전체 서울시민 모집단과 비교했을 때 가구<br />

당 평균소득에서 4백만원이 높다. 여성비율이 남성보다 6%정도 많고, 평균 나이<br />

가 16세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 연구의 설문 대상자가 39세 이상이란 점을 감<br />

안할 때, 이 연구의 표본이 서울 시민을 대표할 만하다고 여겨진다.<br />

설문 응답자의 51%가 에서 보듯이 MBC 드라마인 《제 5공화국》을 시<br />

청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또한 95%가 제 5공화국 시절에 어디에 살았으며, 어<br />

떤 직업에 종사했는지를 기억해 냈다. 응답자의 77%가 박종철 사건이 일어났던<br />

1987년도에 서울에 거주했으며, 8%가 수도권인 인천과 경기도에 거주했다. 즉 응<br />

답자의 85%가 1987년 서울 중심의 수도권에서 거주했다. 직업으로는 회사원 26%,<br />

자영업이 19%, 대학생이 12%, 전업주부가 28%였다. 응답자의 대다수인 97%가<br />

서울 올림픽이 1988년에 개최됐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br />

박종철 이름을 인지하는 비율은 에서 보듯 응답자의 90%이다. 그가 누<br />

가였느냐는 개방형 질문에 대해서는 ‘고문으로 사망’ 35%, ‘서울 대학생’ 33%, ‘운<br />

동권학생’ 12%로, 응답자의 80%가 비교적 정확하게 대답했다. 나머지는 ‘민주화를<br />

위해 투쟁’했거나 ‘데모하다가 사망했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들의 비율은 각각 4%<br />

이다. 이들 중에선 박군을 6월 거리 시위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이한열군으로 혼동<br />

한 응답자도 있다.<br />

박종철 사건에 대한 세부사항으로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강민창<br />

치안감의 기자회견 내용에 대해서는 에서 보듯이 전체 설문응답자의 70%<br />

인 242명이 기억하고 있다. 3) 이들은 이러한 내용을 주로 신문(49%)과 TV뉴스<br />

3) 전체 설문응답자 352명에서 박종철 사건에 대한 세부기억 비율은 “탁하고 쳤더니”의 첫째와 “철아 잘<br />

가그래이”의 둘째 항목에 대한 무응답자 7명과 13명을 각각 제외하고 계산했다.


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 한국 민주화 의제형성의 상황모델 ❙147<br />

(33%), 주위사람(17%)으로 처음 듣게 됐다고 응답했다. 박종철군 아버지의 “철아<br />

잘 가그래이 이 아버지는 할 말이 없데, 잘못이 있다면 네가 너무 똑똑하기 때문<br />

이야”라는 인터뷰 내용에 대해서는 전체 설문응답자의 62%인 209명이 들어보았다<br />

고 대답했다. 이런 말을 신문(47%)과 TV뉴스(33%) 그리고 주위사람(17%)으로부<br />

터 처음 듣게 됐다고 한다. 위의 내용을 라디오에서 들었다고 응답한 비율은 각각<br />

1%와 3%에 지나지 않았다.<br />

서울시민이 기억해 내는 비율은 에서 보듯이 위에서부터 점점 작아진다.<br />

이표는 박종철 사망사건이란 거대구조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박종철이라는 이름부<br />

터 시작해 그가 누구이며 어떻게 죽었다고 보도됐으며, 어떤 식으로 사망사건이<br />

전개됐는지에 대해 서울시민이 순차적으로 기억해 내는 비율을 보여준다. 서울시<br />

민이 박종철 사망사건과 관련해 집단적으로 기억하는 비율이 위에서부터 아래로<br />

순차적으로 내려가는 경향은 이 연구의 주요 예측과 일치한다.<br />

이외에도 당시 신문을 구독했다고 기억해낸 비율은 59%이며 드라마 ‘제 5공화<br />

국’을 TV에서 본적이 있다는 비율이 51%이다.<br />

서울시민의 기억에 따른 인지비율<br />

기억 항목<br />

비율<br />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97%<br />

1987년 본인 거주지와 직업 95%<br />

박종철 이름 90%<br />

박종철 소속 및 사망원인 80%<br />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 인지 70%<br />

‘철아 잘가그래이 …’ 인지 62%<br />

당시 신문구독 기억 59%<br />

드라마 ‘제 5공화국’ 시청 51%<br />

* 수치는 인지비율이며, 신문과 드라마는 이용비율<br />

설문응답자 중에서 당시 1987년 6월 10일에 민주화 항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br />

고 있는 비율은 에서 보듯 75%이다. 또 서울시민 중 당시 국민대항쟁을<br />

직접 목격하거나 시위 현장에 있었다고 응답한 비율이 12%이며, 국민대항쟁에 직<br />

접 참여한 적이 있었다고 대답한 비율은 7%에 지나지 않았다. 직접 참여했다고


148 ❙사회과학연구 제35권 제2호<br />

응답한 서울시민 21명의 신분을 살펴보니 학생이 37%, 민간인이 58%, 나머지는<br />

기타로 분류된다. 이중에는 공무원이거나 군인 신분이라는 응답도 있었다. 박종철<br />

사건에 대한 신문 특종이 한국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비율은<br />

에서 보듯이 82%이다. 민주화 운동의 산물인 6․29선언에 대해서 시대적<br />

대세이며 한국의 정치발전에 기여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비율이 전체 응답자<br />

의 61%이다. 하지만 나머지 39%는 6․29선언에 대해 국민적 기만이며, 정략적이<br />

거나 관심 없다고 평가했다.<br />

서울시민의 6월 항쟁과 언론보도에 대한 평가<br />

설문 항목 비율 평가점수<br />

6․10 국민대항쟁 인지 (n=349) 75%<br />

6․29선언 긍정적 평가 (n=215) 61%<br />

국민대항쟁 지지 (n=338) 40%<br />

국민대항쟁 시위현장 목격 (n=343) 12%<br />

국민대항쟁 직접참여 (n=340) 7%<br />

신문특종의 민주화 기여 (n=284) 82%<br />

민주화과정에서 신문보도 기여 (n=246)<br />

민주화과정에서 방송보도 기여 (n=246)<br />

제5공화국 언론자유 (n=296)<br />

53점<br />

47점<br />

36점<br />

길거리 시위로 나타난 6월 항쟁 지지자는 전체 응답자의 40%인 135명이며, 반<br />

대자가 22%(73명), ‘모르겠다’는 유보자가 38%(130명)이다. 이들 중에서 53%인<br />

180명이 다시 6월 항쟁을 지지하거나 반대 혹은 유보한 이유를 과 같이<br />

제시했다. 지지하는 이유로는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 ‘민주화 지지’ ‘옳다는 신념’<br />

혹은 ‘주변사람의 영향’ 순이다. 반면에 반대 이유는 ‘관심 없음’ ‘사회적으로 불필<br />

요’ ‘잘 모르겠음’ 순이다. 즉 지지자에 비해 반대자가 잘 모르겠음, 관심 없음, 기<br />

타에 해당하는 이유를 더 많이 들었다. 이러한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br />

한 가지 재미있는 발견으론 국민대항쟁을 지지한 이유 중에서 ‘독재정권에 대한<br />

반감’이 37%로 가장 높았다. 반대이유도 ‘관심 없음’이 비슷한 비율인 36%로 가장<br />

높게 나타났다. 즉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이유를 반감이나 무관심과 같은 감정적인<br />

표현으로 제시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특별히 전체 응답자의 6%가 ‘사회적으로


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 한국 민주화 의제형성의 상황모델 ❙149<br />

불필요’해서 국민항쟁에 반대하거나 평가를 유보한다고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표<br />

현했다.<br />

국민항쟁 지지여부에 대한 이유제시<br />

지지여부 이유<br />

지지 반대 평가유보 전체<br />

(n=126) (n=42) (n=18) (n=186)<br />

독재정권 반감 37 0 6 26<br />

민주화 지지 21 0 11 16<br />

옳다는 신념 18 2 0 12<br />

주변사람 영향 6 2 0 5<br />

사회적 불필요 0 24 6 6<br />

잘 모르겠음 2 10 50 8<br />

관심 없음 2 36 17 11<br />

기타 14 26 11 17<br />

합계 100% 100% 100% 100%<br />

* 표안의 숫자는 비율이며 소수점이하는 반올림<br />

X 2 =154, df=14, p


150 ❙사회과학연구 제35권 제2호<br />

문과 TV보도가 서울시민이 박종철 사건을 기억하게 된 주요 출처임이 확인됐다.<br />

동시에 세부기억의 출처로 주위사람을 통한 인지가 각각 17%로 무시할 수 없는<br />

수치이다.<br />

박종철 사건에 대한 세부기억과 주요 정보원<br />

주요 정보출처<br />

‘탁하고 쳤더니' 인지 ‘종철아 잘 가그래이’ 인지<br />

(n=242)<br />

(n=209)<br />

신문 49% 47%<br />

TV 33% 33%<br />

라디오 1% 3%<br />

주위사람 17% 17%<br />

합계 100% 100%<br />

설문응답자가 기억하는 당시 신문구독 유형에 따라 6월 항쟁에 대한 평가와 한<br />

국의 민주화에 대한 신문과 방송보도 평가점수에 어떤 차이가 나타나는지를 일원<br />

별량 분석(One-way ANOVA)으로 살펴보았다. 신문구독자와 비구독자 유형 사이<br />

에 에서 보듯이 여덟 가지 종속변인 중에서 6월 항쟁 인지와 지지 및 민<br />

주화에 대한 신문보도 기여라는 세 변인에서만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br />

났다. 즉 1987년도에 신문을 구독한 서울시민이 구독하지 않은 집단보다 6월 국민<br />

항쟁을 더 높은 비율로 인지했으며 지지하는 비율도 높았다. 또 당시 신문의 민주<br />

화 기여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6․29선언이나 국민항쟁 직접참여, 신<br />

문특종과 방송보도의 민주화 기여, 언론자유 평가와 관련해서는 통계적으로 유의<br />

미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 한국 민주화 의제형성의 상황모델 ❙151<br />

신문구독 기억유형에 따른 민주화와 언론기여 평가<br />

변인<br />

신문구독<br />

(n=187)<br />

비구독<br />

(n=57)<br />

기억못함<br />

(n=75)<br />

유의도<br />

6․10 항쟁 인지 .81 .61 .75 p


152 ❙사회과학연구 제35권 제2호<br />

박종철 사건 보도를 접한 후 국민정서 유발<br />

변인<br />

국민항쟁 지지<br />

(n=126)<br />

국민항쟁 반대<br />

(n=42)<br />

평가유보<br />

(n=18)<br />

유의도<br />

독재정권 반감표시 .37 .00 .06 p


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 한국 민주화 의제형성의 상황모델 ❙153<br />

학적 변인과 당시 신문구독 유형을 통제한 상황에서 6월 항쟁에 대한 지지와 참<br />

여 변인과 각각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로지스틱 회귀분석으로 살펴보았다.<br />

또 언론자유 평가에 대해서도 같은 독립변인으로 위계적 회귀분석을 실시했다.<br />

에서 보듯이 인구학적 통제변인은 어떤 종속변인과도 유의미한 상관관계<br />

를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표시와 언론보도를 접한 후의<br />

분노격발은 국민대항쟁 지지와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즉 군사정권에 반<br />

감을 표시한 시민은 그렇지 않은 시민보다 76배나 국민대항쟁을 지지하는 경향을<br />

나타냈다. 동시에 언론보도를 접하고 분노를 표시한 시민은 그렇지 않은 시민보다<br />

2배정도 더 국민항쟁을 지지하는 비율을 보였다. 또 신문이나 방송보도를 접하고<br />

분노를 격발하는 시민일수록 그렇지 않은 시민보다 제 5공화국에서 언론자유가<br />

일백점 만점에 6점 정도 낮게 평가했다. 이외에도 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6<br />

월 항쟁 인지나 6․29선언 지지, 신문특종의 기여 인식, 그리고 민주화에 대한 신<br />

문이나 방송보도의 기여 평가와 관련해서는 박군 사망보도를 접한 후의 분노표시<br />

여부와 어떠한 상관관계도 맺지 못하고 있다.<br />

국민적 정서가 한국사회 전환기에 미친 영향력 회귀분석<br />

변인<br />

국민대항쟁 지지<br />

B<br />

Exp(B)<br />

국민대항쟁 참여<br />

B<br />

Exp(B)<br />

언론자유 평가<br />

B<br />

Beta<br />

연령 .00 1.00 -.04 .96 -.06 -.03<br />

학력 .13 1.14 .23 1.26 -.81 -.07<br />

성별 .75 2.11 1.11 3.04 2.84 .07<br />

당시 신문구독 .50 1.65 1.20 3.22 .61 .01<br />

군사정권 반감표시 4.34*** 76.43*** 1.50** 4.48** -5.00 -.08<br />

언론보도 분노격발 .73** 2.02** .42 1.53 -6.01* -.15*<br />

* p


154 ❙사회과학연구 제35권 제2호<br />

Ⅳ. 결론 및 제언<br />

서울시민의 대다수는 중앙일보의 특종으로 시작한 박종철군 사망사건에 대해<br />

20년 세월이 지났음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의 주요 출처로는 신문과<br />

방송을 꼽고 있다. 또한 구체적이며 세부적인 사항보다는 민주화라는 거대구조의<br />

담론 속에서 박종철이란 희생자 이름과 사망원인을 포함해 신문과 방송보도에 나<br />

타난 전체적인 윤곽을 비교적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보도를 접하<br />

고 본인의 6월 항쟁 지지여부에 따라 분노나 안타까움, 무관심, 혹은 평가를 유보<br />

하는 모르겠음과 같은 개인적인 감정을 표시했다. 6월 항쟁의 지지 세력은 당시<br />

정권에 대한 반감이나 민주화 지지, 옳다는 신념, 주위사람의 영향과 같은 지지<br />

이유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에 반대세력이나 평가를 유보한<br />

집단은 관심이 없거나 모르겠으며, 사회적으로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비교적 조심<br />

스럽게 개진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서울시민의 6월 항쟁 지지, 반대, 유보 세력은<br />

이 설문조사에서 각각 40%, 22%, 38%로 나타났다. 이러한 비율은 소위 진보와<br />

보수 및 이 사이를 왔다갔다는 투표자 성향비율과 비슷한 소위 ‘황금 분활’을 나<br />

타내고 있다.<br />

이 연구의 설문대상자인 서울시민의 나이가 인터뷰 당시 39세 이상이었으며 이<br />

들은 19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 당시 대통령 선거권을 가질 수 있<br />

는 만 19세 이상이었다. 그런데 6월 항쟁 지지 세력은 공개적인 의견표명이라고<br />

간주할 수 있는 설문조사에서 민주화 지지 이유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경향을<br />

보였다. 반면에 6월 항쟁에 반대하거나 이에 대한 평가를 유보한 세력은 가능한<br />

의견 표명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한국의 민주화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br />

침묵의 나선 현상이 나타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서 국민항쟁을 지지한 집<br />

단은 당시 정부에 대한 반감과 함께 언론보도를 접했을 때 분노와 안타까운 심정<br />

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당시 정부를 독재정부로 성토하는<br />

비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높았다. 하지만 6월 항쟁에 대한 반대나 평가 유보<br />

세력은 당시 정부에 대한 반감은 별로 없어 보였으며, 다만 박군 사망에 대해서만<br />

안타까운 심정을 피력했다.<br />

박군 사망사건에 대한 언론보도를 접한 후 표출된 분노는 6월 항쟁에 대한 지<br />

지나 참여에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


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 한국 민주화 의제형성의 상황모델 ❙155<br />

만 6월 항쟁에 대한 인지나 6․29선언에 대한 지지여부, 민주화에 대한 신문과 방<br />

송보도의 기여에 대한 평가에서는 이러한 분노 감정이 별다른 영향력을 나타내지<br />

않고 있다. 더불어 당시의 신문구독 여부나 이 연구에서 보여주지 않은 현재 미디<br />

어 이용형태 마저도 서울시민이 인식하는 언론보도의 민주화 기여 변인과 별다른<br />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br />

그렇다면 이러한 서로 상반된 발견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적으로 박군에 대한<br />

1월의 고문치사와 5월의 은폐조작이라는 사건의 실상은 같지만 서로 다르게 보도<br />

된 뉴스 프레임을 통해 서울시민에게 당시의 정치 상황을 표상할 수 있는 상황모<br />

델을 충분하게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정부가 범인을 축소하고 진상을 은폐<br />

하고 조작하려 했다는 뉴스 프레임에 의한 박군 보도를 통해 서울시민 사이에서<br />

한국에서 민주화가 시급하다는 정치의제가 형성됐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서울시민<br />

이 정치적인 평가에서 단일한 세력이 아니었기에 박군 보도를 보고 느끼는 감정<br />

은 이 연구가 보여주듯 각 세력의 정치적 지향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6월 항<br />

쟁의 지지 세력은 안타까움과 분노를 동시에 표출했다. 하지만 6월 항쟁을 지지하<br />

지 않는 집단은 당시 정부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 보다는 그런 불행한 사태가 발<br />

생한 것에 대해 안타깝다는 감정을 주로 표출했다. 이런 가운데 민주화 지지 세력<br />

은 공론장에서 공세를 펴며 자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해 나갔다. 반면에 국<br />

가의 법질서를 강조한 보수적 집단은 당시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가<br />

점점 궁색해 지는 형세를 이 연구가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무관심한 척하거나 모<br />

르겠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리라 여겨진다. 침묵의 나선현상에서 하드코어가 어떠한<br />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듯이, 6월 항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했<br />

던 일부 소수 세력만이 ‘사회적으로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는<br />

모양세를 이 연구는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하드코어가 설문대상자의 6%로 나타<br />

났다.<br />

당시에 신문을 구독한 집단이나 구독하지 않은 집단 사이에 인구학적 변인을<br />

통제했을 때 이와 같은 민주화 의제 형성에서 별다른 차이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br />

다만 신문구독 집단이 구독하지 않은 집단과 비교했을 때 6월 항쟁을 지지하는<br />

비율이 좀 더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다른 가외 변인을 통제하면 이러한 차이는<br />

통계적으로 경계적인 유의미성만을 보였을 뿐이다.<br />

종합하면 박군사건에 대한 1987년 1월부터 6월까지 두차례 기간에 걸쳐 같은<br />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뉴스 프레임 보도는 박군 사망사건과 관련해 당시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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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에 대한 상황모델을 서울시민의 장기기억장치에 입력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br />

또한 이들 보도를 접하고 느낀 서울시민의 분노와 안타까움의 표시는 6월 항쟁을<br />

지지하는 사회심리학적인 기제로 작용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서울시민의 상황모<br />

델은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민의 워터게이트 사건보도 이후 언론에 대한 감정구조<br />

형성과 같이 6개월간 집중적인 박군 사망보도를 통해 군사정부에 대한 분노표출<br />

을 유도했으며, 서울시민의 민주화에 대한 정서구조를 형성하게 됐다고 유추할 수<br />

있다. 나아가 박군 사망에 따른 서울시민의 안타까움과 분노, 군사정부에 대한 감<br />

정구조는 국민적인 집단기억을 통해 1987년 6월 항쟁이후 지금까지 민주화 시대<br />

정신으로 자리 잡게 됐다고 해석된다. 이 연구가 보여주듯 서울 시민의 분노와 안<br />

타까움 표시의 상호작용을 통해 공론장에서 침묵의 나선과 같은 사회심리적 기제<br />

가 작동했다고 여겨진다.<br />

이 연구에서 언론보도와 연관해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항은 서울시민의 대다<br />

수가 박군의 사망의 진실을 밝혀낸 신문의 특종이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고<br />

그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서울시민의 신문과 방송보도에 대한<br />

평가점수는 신문이 53점, 방송이 47점에 지나지 않았다. 즉 세부적으로 박군의 특<br />

종보도에 대해서 서울시민이 그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큰 평가범주<br />

인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국내 신문과 방송의 기여는<br />

60점미만의 낙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서 언론의 평가와 관련해 더 고려할<br />

사항 있다면, 당시 언론자유에 대한 서울 시민의 평가가 평균 36점이었다는 사실<br />

이다. 즉 한국 언론은 군사정부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최<br />

소한의 노력을 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제 5공화국에서 언론의 직업적<br />

업무에 대한 평가는 서울시민의 기억 속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저장돼 있다. 이렇<br />

게 언론평가에 대한 서울시민의 서로 다른 상황모델 때문에 보다 진보적인 김대<br />

중과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가 언론의 과거업무에 대한 평가를 가지<br />

고 진통을 겪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br />

서울 시민의 10명 중 4명꼴로 6월 항쟁을 지지했으며, 2명이 반대했고, 아직도<br />

4명의 비율로 이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br />

제 한국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중심세력은 진보나 보수 세력이 사회이슈의 한쪽<br />

면만을 부각하는 이데올로기 논쟁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겠다. 여전히 서울시민의<br />

40% 정도가 6월 항쟁과 같이 민주적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사건에 대해서도<br />

그 평가를 유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연구는 한국 사회가 정상적으로 나


박종철 사건보도 이후의 국민적 정서구조와 한국 민주화 의제형성의 상황모델 ❙157<br />

아갈 수 있도록 신문과 방송이 주위환경에 대한 감시기능을 더욱 철저히 하며, 진<br />

실추구를 위한 언론보도의 설명력을 시급히 높여야 할 때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br />

제는 정부뿐만 아니라 소위 시민세력의 잘못 형성된 정서구조에 대해서도 언론이<br />

시시비비를 가려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때이다. 지금까지 우리 언론보도는 민<br />

주화 의제형성에서 국민정서를 뒤쫓는 경향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br />

사건 중심의 뒷북을 치는 식의 보도를 탈피해 나갈 때이다. 이 연구는 반다이크의<br />

‘상황모델’과 윌리암스의 ‘감정구조’ 그리고 자이언스의 ‘감정과 사고’라는 개념과<br />

분석틀이 박군 사망보도 이후 전개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대한 서울시민의 집<br />

단적 기억과 국민적 정서구조를 분석하는데 유용한 개념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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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Citizens’ Collective Memory of the Investigative Coverage<br />

of the Park Jong Chul Case and Their Situational Model<br />

of South <strong>Korea</strong>’s Democratization in 1987<br />

Jae Chul Shim<br />

Professor at <strong>Korea</strong> <strong>University</strong> School of Journalism and Mass Communication<br />

Abstract<br />

Twenty years after the <strong>Korea</strong>n people’s uprising against the authoritarian government in<br />

June 1987, investigative reporting of the Park Jong Chul case holds a mystic status whether<br />

it played a catalystic role in the process of South <strong>Korea</strong>’s democratic movement. One sector<br />

of a so-called progressive civilian power group has criticized that <strong>Korea</strong>n mass media in<br />

general was opportunistic when they covered people’s democratic movement, even including<br />

Park’s death, in 1980s. Nevertheless, the leading elites in the field of journalism and conservatives<br />

who support press freedom have claimed that without investigative reporting of<br />

the Park case and their contributing scoops, <strong>Korea</strong>n democratic movement could not have<br />

been achieved. They argue that people were able to acknowledge the military government’s<br />

violation of human rights and wrongdoing through media coverage. This research examines<br />

how the <strong>Korea</strong>n citizens in Seoul have evaluated the press’s role in its coverage of the Park<br />

case and the mass media’s influence on people’s perception, feeling and situation model of<br />

the South <strong>Korea</strong>’s democratic movement. Quite far from actual performance of <strong>Korea</strong>n media’s<br />

coverage of the Park case, citizens of Seoul recognize that press performed poorly in<br />

the coverage of democratic movement in 1987. Nevertheless, people acknowledge that <strong>Korea</strong>n<br />

press played a pivotal role in making people informed about the government’s wrongdoing in<br />

its handling of the Park case and provided the people with a situation model of <strong>Korea</strong>’s<br />

democratization. This study discusses the theoretical implication of seemingly contradictory<br />

findings of this research and suggests possible practical ways to improve media’s performance<br />

during the societal transformation to political democracy.<br />

Key Words: Investigative Reporting of the Park Jong Chul Case, Collective Memory, Situational<br />

Model, Structure of Feeling, Democratic Agenda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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