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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호 2024년 3월 22일 B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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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2 2024 • KOREA TOWN NEWS COLUMN | 53<br />

[ 문학에세이 ] 김미희 시인의 영혼을 위한 세탁소<br />

큰언니<br />

김미희<br />

시인 / 수필가<br />

다 저녁 때 작은언니가 큰언니를<br />

먼 친척의 중매로 성사된 혼사였<br />

이었다. 그 덕에 여자들도 많이 꼬였<br />

때였던 것 같다. 무슨 일이었는지 기<br />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br />

지만, 홀시어머니의 외아들에게 시<br />

다고 한다.<br />

억은 없지만, 용돈을 받을 목적으로<br />

한국에서 들어온 큰언니를 작은<br />

집 보내 놓고 엄마 아버지는 늘 걱<br />

온갖 시집살이를 다 견디며 이혼<br />

처음으로 큰언니네를 찾아간 적이<br />

언니가 어스틴에서 올라와 다음날<br />

정이었다. 거기다가 그는 말로만 듣<br />

하지 않고 산 것은 오직 동생들 때문<br />

있다. 언니가 지어준 밥을 맛있게 먹<br />

작은언니네로 데리고 가면서 통화한<br />

던 유복자였다.<br />

이었다고 큰언니는 말했지만, 내 생<br />

고 난 후였다. 언니가 설거지하는 동<br />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주가 지<br />

철부지였던 나도 느낄 수 있었으<br />

각은 좀 다르다. 물론 그때 당시 이혼<br />

안 형부가 사과를 깎았다.<br />

난 모양이다.<br />

니 우리 부모님의 심정은 오죽했을<br />

은 집안에 큰 흠이 되겠지만, 아마 잘<br />

다 같이 먹으려고 깎는 거로 생각<br />

이민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국<br />

까. 시집가서 얼마 되지 않아 다 죽어<br />

생긴 형부를 놔줄 수 없었던 게 제일<br />

했던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깎아 논<br />

으로 돌아간 큰언니는 일 년에 한 번<br />

가는 모습으로 큰언니가 실려 왔다.<br />

큰 이유였지 않았나 싶다.<br />

사과를 나한테 먹으라는 말 한마디<br />

씩 형부와 번갈아 들어왔다가 간다.<br />

복막염으로 쓰러져 다 죽게 되었<br />

큰언니의 시집살이는 드라마에서<br />

도 없이 형부 혼자서 다 먹어 치우<br />

살던 집을 그대로 놔두고 갔기에<br />

을 때 병원으로 데리고 간 게 아니라<br />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고 언젠<br />

는 것이었다.<br />

들어오면 남의 신세 지지 않고도 머<br />

병든 딸을 시집보냈다는 원망과 함<br />

가 엄마가 말씀하셨다.<br />

난 용돈은커녕 허한 가슴만 안고<br />

물다 가니 신경 쓸 일이 별로 없다.<br />

께 친정집으로 돌려보내 온 것이었<br />

큰언니는 앉아 있는 꼴을 못 보는<br />

집에 와 엄마 앞에서 펑펑 울고 말았<br />

하지만, 큰언니는 운전할 줄 모르기<br />

다고 한다. 그 길로 우리 부모님은 큰<br />

시어머니 덕에 할 줄도 모르는 농사<br />

다. 우는 나를 달래며 엄마가 그러셨<br />

때문에 항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br />

언니를 입원시키고 생사를 오가는<br />

일을 머슴처럼 혼자서 도맡아 해야<br />

다. 내가 미워서가 아니고 형부는 외<br />

하다. 그때마다 가까이 있는 나보다<br />

큰언니를 기어코 살려냈다.<br />

했다.<br />

동이어서 그런 거니까 너무 서운해<br />

멀리 있는 작은언니가 달려와 살펴<br />

엄마는 몇 달 동안 만사 다 제치<br />

퇴근해서 돌아온 아들을 당신 방<br />

하지 말라고. 그런 형부는 세상에 둘<br />

주곤 한다.<br />

고 큰언니 병시중에만 매달리다 집<br />

에서 재우는 날이 많았으며 둘이 같<br />

도 없는 효자였다.<br />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두 살 터울<br />

에 와서 보니 제대로 얻어 먹지도 못<br />

이 있는가 싶으면 문밖에서 서성이<br />

치매로 꼬박 일곱 해를 채우고 떠<br />

이다. 둘은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다.<br />

한 나는 군데군데 머리도 빠지고 말<br />

는 것은 예사였다고 한다.<br />

나신 당신의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br />

큰언니는 나보다 열네 살이 많고 작<br />

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마 그때 제대<br />

햇볕에 잘 익어 졸아드는 간장 된<br />

보살폈다. 차마 큰언니한테 시어머<br />

은언니는 열두 살, 그러니까 나와 띠<br />

로 못 먹어서 지금까지 삐쩍 마른 게<br />

장도 큰언니가 친정집으로 퍼 날라<br />

니 치매 수발은 들게 할 수 없었는지<br />

동갑이다. 나이 차이가 많은 것도 있<br />

아닌가 싶다. 퇴원한 큰언니는 한동<br />

서 줄어든다고 소문을 내 그 소문이<br />

손수 다했다고 했다.<br />

지만, 바로 위에 오빠 셋이 있다 보니<br />

안 우리 집에서 지내다가 시집으로<br />

엄마 귀까지 들어왔다고 하니 보통<br />

비록 그분은 치매였지만, 남편도<br />

나는 오빠들이랑 더 가깝게 지냈다.<br />

돌아갔다.<br />

시집살이는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br />

없이 아들 하나 낳아 키운 보람을 다<br />

엄마가 계실 때만 해도 가끔 얼굴<br />

다 커서 알게 된 일이지만, 큰언니<br />

그렇게 시집살이하는 딸을 그리<br />

느끼고 가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br />

도 보고 엄마 통해 소식도 자주 들었<br />

는 결혼하고 바로 생긴 아이가 유산<br />

워하는 엄마는 큰언니가 보고 싶으<br />

그때 그 기억이 여전히 어제 일처럼<br />

는데, 엄마 가시고 난 후로는 언니들<br />

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 큰언니의 시<br />

면 동네 아줌마들을 부추겨 구럭을<br />

떠오르니 어쩌면 좋을까.<br />

이 연락하지 않으면 거의 소식도 모<br />

어머니는 병원에 데리고 가서 깨끗<br />

메고 바다로 게 잡으러 갔다고 했다.<br />

한국에서 가져온 것과 작은언니가<br />

르고 산다.<br />

하게 뒤처리를 해준 것이 아니라 무<br />

새벽에 길을 나서 등성이 몇 개<br />

가지고 온 것들을 꺼내 놓으며 흐뭇<br />

큰언니는 스물두 살에 시집을 갔<br />

면허, 돌팔이한테 데리고 갔다고 한<br />

를 넘고 언덕에 오르면 멀리서 큰언<br />

해하는 큰언니를 보는데 옛날 생각<br />

다. 내가 겨우 여덟 살 때 일이다. 그<br />

다. 그 뒤 큰언니는 시름시름 앓게 되<br />

니네가 보였다고 했다. 어쩌다 언니<br />

이 났다.<br />

러니 큰언니랑은 별 추억도 없다. 어<br />

었고 결국 큰 병을 얻어 입원하게 된<br />

가 보이면 그렇게라도 보니까 좋아<br />

정말 버릴 데 하나 없이 곱고 알<br />

릴 때 내 기억 속에 큰언니는 아버<br />

것이었다.<br />

서 눈물을 훔치고, 못 보는 날은 보<br />

뜰했던 우리 큰언니가 어느새 백발<br />

지의 친구였다. 그리고 시집 가서는<br />

시집으로 돌아간 큰언니는 온갖<br />

지 못해 아쉬워서 눈물을 훔치며 돌<br />

이 되었다.<br />

엄마와 아버지의 슬픔이고 그리움<br />

시집살이를 했다. 전염병이라도 앓<br />

아섰다고 했다.<br />

그 험한 시집살이 다 견디며 군소<br />

이었다.<br />

다 온 것처럼 식기도 따로 쓰게 했다<br />

얼마 후 조카가 태어나면서 큰언<br />

리 한마디 없이 형부가 싫어하는 것<br />

는 것이었다.<br />

니는 분가했다. 형부가 출퇴근 하기<br />

은 전혀 할 줄 모르던 큰언니. 여전<br />

형부는 결혼할 당시 말단 공무원<br />

좀 먼 곳으로 영전되었기 때문이었<br />

히 큰언니는 언니 마음대로 하는 것<br />

이었다. 위로 누나 한 분 계시는데 시<br />

다. 난 평생 큰언니나 형부한테서 용<br />

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br />

집가셨고, 그는 유복자에 외아들이<br />

돈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다. 언니나<br />

물어본 적은 없지만, 시집가서부<br />

었으니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았다.<br />

형부가 있는 친구들이 자랑할 때 나<br />

터 쓰던 가계부도 여전히 쓸 것이고<br />

오십여 년 전 시골에서 말단 공무<br />

는 자랑할 일이 없었다. 특히 우리 집<br />

형부가 골라주는 옷도 여전히 입을<br />

원이 자가용을 몰고 다녔으면 알만<br />

앞에 살던 친구, 계화는 언니가 네 명<br />

것이다.<br />

하다. 키도 크고 정말 잘생겼었다.<br />

이라서 형부도 넷이었다.<br />

어찌 됐든 삼 남매 잘 키워 손주들<br />

그때 당시 최고의 영화배우였던<br />

생일이나 명절만 되면 자랑질이<br />

까지 놓고 어우렁더우렁 잘살고 있<br />

신성일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미남<br />

하늘을 찔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br />

으니, 노후는 평안한 거 같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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