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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向의《說苑》硏究 慶熙大學校 敎育大學院 中國語敎育專攻 이 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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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문인들은 노장사상에 심취해 있으면서도 유교를 완전히 배<br />

척<strong>한</strong> 것<strong>이</strong> 아니라 그것을 노장의 학설 안으로 들여와 둘의 사상적<br />

조화를 모색하였던 것을 알게 된다. 유학<strong>이</strong> 아무리 쇠퇴하였다 하여<br />

도 근간은 여전히 남아 당시 사회에 보일 듯 보<strong>이</strong>지 않게 상당<strong>한</strong><br />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br />

노장철학은 유학의 학술적인 부패와 정치적으로 가혹<strong>한</strong> 공포정치<br />

와 사회적으로는 大變亂으로 인해 생겨난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의<br />

경향에 부응하여 새로운 철학사상과 정신적 가치관을 제시해 주었<br />

다.<br />

秦始皇은 전국의 도량형을 통일하고 <strong>한</strong>자도 통일하여 정치․경<br />

제․문화면에 있어 지금의 중국<strong>이</strong>란 <strong>나</strong>라의 터전을 <strong>이</strong>룩하였지만<br />

暴政과 焚書坑儒를 감행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 하여도 문화라 얘<br />

기할 만<strong>한</strong> 것을 형성할 겨를<strong>이</strong> 없었다.<br />

漢<strong>나</strong>라는 秦<strong>나</strong>라 말기의 피폐를 계승하였으<strong>나</strong> 백성들<strong>이</strong> 편히 쉬며<br />

살 수 있도록 하였고 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儒學을 <strong>나</strong>라의 정<br />

치<strong>이</strong>념으로 받아들<strong>이</strong>게 되었다.<br />

그러<strong>나</strong> 전제 군주 밑에서의 학문<strong>이</strong>란 결국 예교를 내세워 당시의<br />

정치를 돋보<strong>이</strong>게 하는 역할에 지<strong>나</strong>지 않았다. 당시의 학자들은 황제<br />

<strong>나</strong> 귀족의 그늘 아래에서만 생활<strong>이</strong> 가능하였다. 그러니 학자들<strong>이</strong>란<br />

전제군주를 위해 학술로 봉사할 수밖에 없는 형편<strong>이</strong>었다.<br />

문학 역시 마찬가지여서 漢代를 대표하는 賦만 보더라도 漢 初에<br />

는 전국시대 楚<strong>나</strong>라에서 발생<strong>한</strong> 楚辭 또는 騷體의 賦가 유행하였으<br />

2) 阮修는 훌륭<strong>한</strong> 명성<strong>이</strong> 있었는데 王夷甫가 그를 만<strong>나</strong> 묻기를 : “老莊과 聖敎<br />

가 같은가?” 라고 하자 阮<strong>이</strong> 대답하길 : “거의 같<strong>이</strong> 않을런지요.” 라고 하였<br />

다.<br />

阮宣子有令聞. 太尉王夷甫見而問曰 : ‘老莊與聖敎同異?’ 對曰 : ‘將無同’<br />

《世說新語》〈文學〉18<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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